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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관북파 (關北派)
함경남도 신흥군 원평면 우상동에 장흥 위씨들이 살고 있다. 이른바 관북 위씨 집성촌인 것이다. 그곳에 남쪽의 위씨들이 명문거족으로 발전하게 만든 주인공은 바로 성균생원공이다. 공이 언제 왜 그곳에 정착했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이주 1세대’에서 계사(桂沙)와 송당(松堂)의 소견을 그대로 원용해서 밝힌 바 있으니 여기서는 재론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관북 위씨들의 파별(派別) 세거지를 알아볼 차례다. 그러나 남쪽에 있는 세거지도 일일이 가보지 못한데 분단(分斷)된지 반세기가 넘은 오늘의 그곳을 가서 살필 길은 없다. 그래서 송당께서 1995년 9월에 발행한 관북 위씨종친회 회보 ‘월명송(月明頌)’에 게재한 족보연구 ‘민들레, 바람에 날린다 해도…’를 전재(轉載)한다.(편집자 註)

① 극명파 (克明派)

계보 : 자공(自恭)─종립(宗立)─돈(頓)─세충(世忠)─극명(克明)─석환(錫拮)

●세거지 : 평안북도 구성군(龜城郡) (대동보 6권p.103∼817)
계보를 보면 21세 석환란에 ‘이거구성(移居龜城)이라 기록돼 있다. 시대적으로 연산군 시대인 1500년 초엽으로 추정되는데 관북 위씨 이주사의 시초이다. 후대에 와서 구성파는 누보(漏譜)된 관계로 소상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이 파에서 임진왜란 때 충신 25세 한량(漢良)을 배출한 것은 위문의 자랑이 아닐 수 없다.


공은 일찍이 무과에 급제하여 황해도병사·의주부윤을 지내고 동지중추부사(종2품), 자헌대부(정2품)에 이르렀다. 특히 선조 임금께서 의주(義州)로 몽진할 때 호종한 공으로 호종공신(扈從功臣) 1등에 책훈되기도 했다.


후손(光道)에 따르면 족인이 번창하여 군내에서 가장 귀한 집안으로 숭앙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만큼 한량의 후광이 크다 할 것이다. 선대의 묘는 구성군 방현동(方峴洞) 청송동(靑松洞)에 있다.

② 봉추파 (鳳秋派)

계보 : 석규(錫珪)─진정(振鄭)─희란(希蘭)─인국(仁國)─근(謹)─봉추(鳳秋)
                                                                                                                                 봉문(鳳汶)
                                                                                                                                         성립(成立)─양걸(良烋)
                                        진한(振漢)─희평(希平)─인홍(仁弘)─대수(大守)─명덕(明德)─준덕(俊德)

●세거지 : 충북 단양군 영춘면

위의 계보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석규파의 분파과정은 두 줄기로 잡을 수 있다. 그 하나는 근(謹)을 입향조로 하는 단얀파(丹陽派)이고, 다른 하나는 희평(希平)을 입향조로 하는 운전파(雲田派)이다.


21세 석규(贈左副承旨·정3품)는 신흥군을 뜨지 않았으나 26세 근(御侮將軍·정3품)이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으로 이거하여 단양에 위씨의 세거지를 이루었다. 그 후 아들 봉추(鳳秋·軍資監主簿·종6품)·봉문(鳳汶)대에 크게 번창했다. 봉추파는 지금도 영춘면 만종리·사지원리·동대리 등지에 모여 살고 있다.


③ 봉문파 (鳳汶派)

●세거지 : 강원도 정선군
27세 봉문의 아들 성립은 충주영장(忠州營將)으로 있었다. 병자호란(1636∼1637)이 일어나자 아들 양휴(良烋·通政大夫·정3품)는 란을 피하여 단양에서 강원도 정성군 석항리로 피란 갔는데 그대로 주저앉아 살면서 정선의 입향조가 된 것이다.
후손들이 크게 번창하여 당당한 거문세족(巨門世族)으로 성장하였다. 다른 파에 비해 영달한 사람도 많았다.

④ 명덕파 (明德派)

●세거지 : 함주군 운전면
23세 진한(振漢·御侮將軍·정3품)의 아들 희평(希平)은 비로소 신흥군에서 함주군 천서면으로 이거한다. 천서면에서 아들 인홍(仁弘) 때까지 살았으니 부자의 묘가 천서면 용강리 비석동(碑石洞)에 있다.


그런데 인홍의 아들 대수(大守·26세)는 천서면에서 다시 운전면으로 이거하여 운전(雲田)의 입향조가 된다. 명덕이 광해군 6년생(1614)이므로 운전으로 옮긴 시기를 대충 짐작할 수 있겠다.


명덕파는 후손이 크게 늘어나 거문으로 성장했는데 월남한 관북파 중에서도 숫적으로 강세를 보이고 있다. 대수 이하 선대의 묘는 서호면 능서리 탄동(炭洞)에 있다.

⑤ 석진파 (錫珍派)

계보 : 석진─세언(世彦)─승립(承立)
                                      승익(承益)─후징(後徵)
                                      순익(順益)
                                      기익(己益)─거원(巨源·양구군)

●세거지: 함주군 하기천면 하대(河大)
21세 석진(進士)계의 후손인 26세 세언(世彦·通德郞·정5품)은 1600년대 초엽에 신흥군에서 함주군 하기천면으로 이거하여 정착하니 하기천의 입향조가 된다. 후손이 크게 번성하여 당당한 일파를 이루게 된다. 입향조 이하 묘는 하기천면 하대리 대가슬(大佳瑟)에 있다.


석진파에서 다시 타지방으로 나간 경우는 다음과 같다. 즉 승익(承益)의 후손 후징(後徵)은 덕원(德源)으로 이사했는데 그 후손 두 세집이 안변군에 살고 있다. 또 훨씬 후대에 와서 기익(己益)의 후손 거원(巨源)은 강원도 양구군으로 이거하여 두 아들 정관(禎觀·1910년생)·정주(禎周·1917년생)의 후예들이 살고 있다.

⑥ 석중파 (錫重派)

계보 : 석중─철명─춘질(春秩)─자흥(自興)  
                              춘의(春宜)─연철·종림
                                                  응철·종겸
                                                  사철·종적

●세거지 : 함주군 주북면
21세 석중(折衝將軍·정3품)의 후손들 분화(分化)·정착(定着)과정은 타파에 비해 대단히 복잡하다. 28세 철명(哲明·贈左副承旨·정3품)은 신흥군을 떠나 정평군(定平郡) 주이면(朱伊面)으로 이사한 것이 그 복잡한 편역의 시초가 된다. 즉 2자 춘의(春宜·掌樂院正·정3품)은 정평에서 함주군 북주동면(歸州寺쪽)으로, 장손 자흥(自興)은 남주동면(雲南)으로 이거한다.


또 춘의(春宜)의 후손 응철(應喆·朝散大夫·종4품·1823∼1872)은 북주동면에서 주북면으로 이거하여 생을 마치니 그의 묘는 주북면 홍경리 재궁동에 있다. 그의 형 연철(連喆·1819∼1837)이 요절하자 종림(鍾臨)이 계를 있게 되는데 묘는 주북면 장동에 있으며 후손들은 주북에 정착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응철의 아들 종겸(鍾謙·1853년생)은 정언(正言·정6품)을 지냈는데 주북에서 다시 천서면으로 가서 생을 마치나 부인 서씨(徐氏)의 묘는 주북면 기양리에 있다. 종적(鍾迪)의 아들 갑연(甲淵)은 다시 천서면에서 기곡면(岐谷面)으로 이사, 정착하게 된다. 그러니까 석중파의 종착지는 주북면이다. 이밖에 세거지는 장진군(長津郡)과 함주군 동천면·덕산면·운남면·하조양면 등이다.

⑦ 석공파 (錫恭派)

●세거지 : 홍원군 보청면
계보 : 석공─응수(應洙)─승남(承男)─여걸(汝傑)

21세 석공의 손자 응수는 신흥군을 떠나 홍원군 보청면으로 이거하게 된다. 그 시기는 대체로 1500년대 초엽의 일이라 추정된다. 응수의 손자 여걸은 통정대부(정3품)를 지낸 분이다. 말하자면 그가(응수) 보청의 입향조인데 후손이 크게 늘어 거문으로 성장했다. 입향조 이하 3대의 묘는 홍원군 보청면 송산리에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석공파에서 월남한 종인을 아직 접하지 못하고 있다.

⑧ 청송파 (靑松派)
                                                                     
계보 : 세충(世忠)─극무(克武)─국필(國弼)─징(徵)─대업(大業)─이환(以煥)
                                                                                                          진남(晋男)
세거지:경북 청송군 현서면 천천
26세 대업은 이항, 이관, 이점, 이환 등 네 아들을 두었다. 이중 이환은 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난을 피하여 둘째아들 인천과 같이 신흥군을 떠난다. 이렇게 해서 정착한 곳이 경북 의성군 사곡면 노매촌이라는 곳이다.
세월이 흐른 후 인천의 증손인 31세 대수는 의성에서 다시 청송군 현서면 천천동으로 입향하여 터전을 잡으니 이분이 바로 청송입향조이다.


후손이 41세까지 늘어났으며 한때 가구수만 해도 170여가구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농현상의 여파로 현재는 고작 20여가구의 일가들이 고향을 지키고 있다.


이환이 신흥을 떠난 이후 관북보에는 정남의 계열만 남아있어 옛날을 말해주고 있다.


⑨ 상성파 (尙誠派)
계보:국필(國弼)-연(淵)-승신(承信)-해남(海男)-상성-온철(溫喆)-태원(泰源)
세거지:함주군 선덕면
24세 연은 앞에서 말한 대로 관북보에서 생년과 졸년이 명기되어 있는 최초의 인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정3품)를 지냈다. 승신(1544~1606)은 보공장군(保功將軍·종3품)을 지냈고 해남(1580~1666)은 승사랑(承仕郞·종8품)으로 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를 지냈다.


해남은 슬하에 상성, 상효(尙孝), 상충(尙忠), 상선(尙善_의 네 아들을 두었는데 자손이 번창하여 각각 1파를 이룰만큼 성장했다.


이들 4파는 후대에 와서도 신흥군을 떠나지 않았으나 상성(27세)계인 온철(1728~1789)이 함주군 동천면으로 내려와서 생을 마치고 묘가 그 곳에 있다. 그러다 그 아들은 다시 신흥군으로 돌아간다.


상성파가 정평군 선덕면(지금의 함주군 선덕면)에 정착한 것은 온철의 손자 태원(1849~1914), 이원(利源), 해원(海源)때이니 일천하다 할 것이고 후손도 많지 않다.


⑩ 상충파 (尙忠派)

계보 :  상충─국빈(國彬)─간철(侃喆)─종일(鍾日)─선원(善源)
                   국진(國珍)(운남)
                    국주(國柱)─상철(相喆)─종이(鍾利)
                    국흥(國興)─경수(景洙)─종극(鍾克)

●세거지 : 함주군 남주동면(현 운남면)
29세 국진이 1600년대 후반에 비로소 신흥군을 떠나 함주군 남주동면(현재 운남면)으로 이거한다. 아들 계원(啓元)·계홍(啓弘·折衝將軍·정3품·1719년생)의 후손들이 번창하여 상충파 운남의 1파를 이루게 된다.


국빈계인 33세 간철(1755년생)의 아들 종일(1784∼1814)이 강원도 원주군으로 이거하나 아들 선원 때에 다시 양구군(楊口郡)으로 가서 정착한다. 또 국주의 후손인 종이(1854년생)가 강원도 인제군(麟蹄郡)에 정착하지만 손이 귀하고 국흥의 후손인 종극이 역시 인제군에 정착하지만 후손이 귀하다.

⑪ 원상파 (元相派)
                           
계보 : 대업(大業)─이환(以恒)─원상(元相)─격조(格祖)─제철(悌喆)─종훈(鍾薰)
                                                                                                                   장원(璋源)
                                                                                                                   준원(埈源)
                                                    승조(承祖)─병철(丙喆)─종흥(鍾興)─종현(鍾賢)  

●세거지 : ① 함주군 동천·풍산군
                 ② 강원도 인제군
격조(贈嘉善大夫·정2품)계인 35세 장원(1827∼1886)·준원(1829∼?) 형제가 신흥군을 떠나 함주군 동천면으로 내려와서 정착한다. 장원은 아들 여섯을 두었는데 정필(禎弼·1845∼1913)·정섭(禎燮·1848∼?)·정실(禎實·1854∼1871)·정직(禎稷·1856∼?)·정목(禎穆·1860∼?)의 후손이 크게 늘었으나 셋째아들 정학(禎學·1851∼?)은 혼자 풍산군으로 들어가 다섯 아들을 두니 역시 후손이 많다.


승조계인 33세 병철(1746∼1814)이 강원도 인제군으로 이거하여 그곳에서 생을 마친다. 그러나 통정대부(정3품)를 지낸 맏아들 종흥(1780년생)은 신흥군에서 생애를 마치고, 둘째 종현(1795년생)이 인제군에 정착하여 그 후손들이 지금도 살고 있다.

⑫ 정상파 (定相派)

계보 : 정상─태시(泰始)─홍조(洪祖) ·낙조(樂祖)

●세거지 : ① 함주군 동천면
정상(1635∼1689)은 현종(顯宗) 5년(1664)에 문과에 급제하여 강동(江東)·태천(泰川)·신천(信川)·비인(庇仁) 등 여러 고을의 원님을 역임하고 기사보(己巳譜·1689)를 수보하는 주역으로 활동할 무렵에는 통천(通川) 군수(郡守·종4품)로 재직하고 있었다. 기사보 서문은 그가 세상을 떠난 9월보다 다섯 달 앞선 기사년 4월에 쓴 것이다. 그는 후에 도승지(都承旨·정3품·堂上官)로 추증됐다.


음사(蔭仕)로 사능령(思陵令·종5품)을 지내고 좌승지(左承旨·정3품 당하관)에 추증된 30세 태시(1702∼1777)는 신흥군에서 함주군 동천면으로 이거하여 정착한다. 이로써 그는 정상파의 동천 입향조가 된다.


슬하에 홍조(1722∼1742)와 낙조(1732∼1805) 두 아들을 두었는데 후손이 크게 번성하여 정상파 제일의 거족으로 성장했다. 입향조 이하 선대의 묘는 동천면 청송리 구사동(舊寺洞)에 있다.

⑬ 정상파 (定相派)

계보 : 정상─태래(泰來)─영조(榮祖)─명철(明喆)
                                        창조(昌祖)─노철(魯喆)
                                        홍조(弘祖)─적철(迪喆)─종곤(鍾崑)
●세거지 : ② 함주군 운남면 ·덕산면
사촌(沙村)의 정상파는 위문에서 널리 알려진 명문 집안이다. 후손이 많아서가 아니라 특출한 인재를 많이 배출했기 때문이다. 신흥군을 떠난 후 이 파의 기착지는 두 곳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운남면이고, 다른 하나는 덕산면이다.


전자에 속하는 계는 경(璟·1658∼1724)·태래(1679∼1772)·영조(1697∼1719)의 3대이다. 이들은 정상파 중에서도 일찌감치 신흥군을 떠났는데 경이 운남의 입향조이다. 묘는 운남면 축전에 있다. 영조는 숙종 43년(1717)때 문과에 급제하여 관이 주서(注書·정7품)에 이르렀다.


후자의 계열은 창조(1703∼1759)와 홍조(1719∼1797) 형제이다. 창조는 영조 7년(1731)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이 좌부승지(정3품 당하관)에 이르고, 북도능전지(北道陵殿誌)의 저술로 유명하다. 홍조는 영조 22년(1746)에 역시 문과에 급제하여 군수(종4품)를 지냈다. 형제의 묘가 덕산면 대동리에 있으니 창조는 정상파 덕산의 입향조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처음에는 운남과 덕산으로 갈라지나 후대에 와서는 사람들이 운남쪽으로 많이 유입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다만 후손은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사촌 정상파의 주류는 홍조계이며 후손도 많다. 이들의 원자항(源字行)부터의 묘는 운남면 구탄리(舊灘里)에 집중돼 있다.


갑신보(甲申譜·1824)에 서문을 붙인 33세 적철(1766∼1824)은 바로 홍조의 손자인데 순조 7년(1807)에 진보현감(眞寶縣監)에 제수됐다. 또 보의설로 유명한 만암공(萬庵公·1747∼1838)은 창조의 아들이다. 그는 정조 19년(1795)에 문과에 급제, 관이 형조좌랑(정6품)에 이르렀다.

⑭ 정상파 (定相派)

계보 : 정상─경(璟)─태래(泰來)─영조(榮祖)─명철(明喆)─종눌(鍾訥)·관원(觀源)  
                                                                                                   종화(鍾華)·주원(周源)
                                                        창조(昌祖)─노철(魯喆)─종오(鍾晤)
                                                        홍조(弘祖)─건철(建喆)─종민(鍾敏)
                      류(琉)─태주(泰周)─연조(衍祖)─만철(晩喆)─종길(鍾吉)·종락(鍾洛)
                      원(瑗)─수량(遂良)─성조(盛祖)─국철(國喆)─종년(鍾年)·수원(秀源)
                                                        극조(克祖)─근철(近喆)·응철(應喆)·영철(永喆)
                                                                                                                       성철(成喆)
●세거지 : ③ 강원도 천서(川西)·삼평(三平)·하기천(下岐川)
이미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정상파의 연고지인 운남과 덕산을 기점으로 그후 이주 과정을 보자. 원의 계인 33세 국철(1715∼?)이 강원도 회양군(淮陽郡)으로 이거하는데 손자 수원(1787∼1815)과 이원(利源)은 다시 고성군(高城郡)으로 이거한다.


영조계인 33세 명철(1721∼1764)은 함주군 주북면에 이거하여 살았다. 그의 묘는 주북면 장동(壯洞)에 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종화(1800∼1859)는 주북을 떠나 운남면으로 이주한다. 묘는 운남면에 있다. 그런데 종화의 아들 주원(1822∼?)은 운남에서 다시 하조양면으로 가서 생애를 마친다. 묘는 하조양면 홍덕리에 있다.


주원의 아들 정선(禎璿·1858∼1915)은 하조양면에서 북주동면으로 이거하여 거기서 생애를 마감한다. 정선의 아들 준혁(1880∼1908)은 북주동면에서 천서면으로 이거하여 짧은 생애를 마감하고 천서 땅에 묻힌다. 그는 요절했으나 후손을 남겼다. 이와 대조되지만 명철의 손자 관원(司憲府監察·정6품·1828∼1893)은 강원도 인제군으로 이거하는데 아들 4형제를 두어 후손이 그런 대로 늘고 있다.


창조계인 34세 종오(1817∼?)는 덕산에서 운남으로 이거하지만 후손은 많지 않다. 그는 덕능직장(德陵直長·정6품)을 지내고, 을해보(乙亥譜·1875)에 서문을 붙인 분이다. 태주(通德郞·정5품)계인 34세 종길은 함주군 삼평면에 이거하여 생을 마치니 묘도 그곳에 있다. 그러나 그의 세 아들 정요(禎堯·1852∼?)·정순(禎舜·1854∼1914)·정우(禎禹·1856∼?)는 삼평에서 다시 하기천면으로 돌아가지만 후손은 많지 않다.


그리고 종길의 동생 종락(1781∼?)은 신흥군에서 생애를 마치었다. 그 아들 가원(珂源·1836∼?)과 보원(寶源·1848∼1921)형제는 삼평면에 정착하나 역시 후손이 많지 않다. 또 홍조계인 34세 종민(·孟山縣監·1851∼1866)이 하기천면으로 이거하지만 후손은 번성하지 않았다. 수량계인 33세 응철의 아들 종국(1864∼1914)은 함주군 주지면으로, 영철의 아들 종렬(1871∼1921)등은 정평군 고산면으로, 성철의 아들 종혁(1880∼1931)도 고산군으로 이거하지만 후손은 많지 않다.

⑮ 정삼파 (鼎三派)

계보 : 정삼─열(悅)─만유(萬瑜)─종철(鍾喆)·정철(廷喆)
                   제(悌)─만리(萬理)─상빈(相彬)·상진(相進)
                   변(淺)─만림(萬琳)─봉래(鳳來)
                                                    봉지(鳳至)
                                                    봉진(鳳適)

●세거지 : 함주군 주북면
주북면에는 여러 계파의 위씨들이 많이 살았으나 주종은 정삼파 만림(1696∼?)계다. 그는 영조년간(1725∼1776) 초엽에 신흥군에서 내려와 주북면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세 아들 봉래(1717∼?)·봉지(1723∼?)·봉진(1727∼?)을 두었는데 후손이 번창하여 탄탄한 1파를 이루고 있다. 선대의 묘는 주로 주북면 기양리 후주동(厚柱洞)에 있다.
만유계인 33세 종철(1805∼?)의 아들 종욱(鍾旭·1826∼?)·종황(鍾黃·1833∼?)·종일(鍾逸·1838∼?)은 주북면에 정착하면서 그런 대로 후손이 늘어나고 있다. 만리계인 33세 상진(1828∼?)이 주북면으로 들어오지만 후대들은 주북과 신흥을 왔다 갔다 하면서 살았던 것 같다. 상진과 그의 형 상빈의 자부묘가 주북면 흥덕리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 영흥(永興)에 살았던 위씨에 대하여 특기해 둔다. 족보를 보면 봉진의 손자인 33세 석철(錫喆)란에 「移居永興」이란 기록이 있다. 그리고 후대들은 누보(漏譜)된 상태이다. 이것으로 영흥군에 살았던 위씨는 「정삼파 주북」의 가지로 봐도 될 것 같다.


정노파(鼎老派) 이야기도 덧붙여 둔다. 통정대부(通政大夫)·절충장군(折衝將軍·정3품)을 지낸 종진(鍾震·1796∼1882)의 아들 34세 봉원(鳳源·1833∼1903)은 신흥군에서 함주군 주북면으로 이거하여 정착하는데 이들 3대의 묘는 주북면 중흥리(中興里)에 있다.


이야기가 다소 비약하지만 정해보(丁亥譜·1767)에 서문을 붙인 31세 문조(文祖·1712∼1776)와 경진보(庚辰譜·1940)에 서문을 붙인 34세 대원(大源·1865∼?)도 정노파(鼎老派)임을 밝혀둔다.

? 홍업파 (弘業派)

계보 : 홍업─술한(述韓)─천주(天柱)─덕래(德來)─창록(昌祿)─상원(尙源)
                                                               덕삼(德三)─계철(啓喆)·진철(鎭喆)
●세거지 : 안변군(安邊郡) 원산(元山)
32세 창록의 손자 상원(1726∼1780)은 덕원군(德原郡)으로 이거하고, 또 33세 계철의 아들 종호(鍾琥)와 종철의 아들 종육(1779∼1858)이 다시 안변군으로 이거하는데 이들을 홍업파 원산이라 한다. 후손이 30가구 정도 된다.

? 홍파 (饉派)
계보 : 홍─승계(承繼)─영업(永業)─준달(俊達)─희상(希相)
                                   이업(以業)─무달(武達)─태억(泰億)
●세거지 : 함주군 퇴조면
통정대부(정3품)를 지낸 24세 홍은 동명사(東溟社·후의 退潮面) 로 이거하는데 아들 승계와 장손 영업으로 이어지는 계는 그대로 퇴조에 정착하나 후손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데 차손 이업은 함주군 주북면으로 나와 정착한다. 이업의 묘는 주북면 수변리(후에 봉하리)에 있다. 슬하에 홍달·무달·수달 등 3자를 두지만 무달의 후예가 계속 주북면에 살았다.

? 시민(時敏)·시헌(時憲)·시망(時望)·시언(時彦派)

계보 : 희필(希弼)─경(卿)─홍도(弘道)─시민(時敏)
                                            임도(任道)─시헌·시망·시언(득룡·득명·경운)

●세거지 : 함주군 동천면
조산대부(종4품)를 지낸 23세 희필은 신흥군에서 함주군 동천면으로 이거하여 정착하니 그가 동천의 입향조이다. 이 때를 1500년대 초라고 추정해 본다. 아들 경은 통정대부(정3품), 손자 홍도(1564∼?)는 진사, 임도는 종사랑(從仕郞·정9품)이었다.


그리고 홍도의 아들 시민은 참봉, 임도의 아들 시헌은 종사랑(종9품), 시망은 가선대부(종2품)이다. 후손이 매우 번창하여 관북의 거문대족(巨門大族)으로 성장하였다.


관북보 4권 지부(智部)를 보면 이들 4파가 차지하는 지면이 3분의 1을 넘고 있다. 이중에서도 시헌파가 수적으로 단연 우세하다. 관북 경진보(庚辰譜)의 편집 겸 발행자인 수룡(秀龍·38세·1888년생)도 시헌파인데 면장을 역임했다.
이들 4파는 공통적으로 생활터전을 동천면으로 잡았으며 따라서 묘도 동천면 송흥리에 집중돼 있다. 또한 이들 4파에서 월남한 종인이 많다.

※익중 (益中)
●세거지 : 걍남 진주시 평거면 평거리(平居)
35세 익중은 원래 함경남도 숙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러다 조선조 말엽 관직에 투신했는데 경상남도 사천(泗川)으로 전근 와서 진주도청 등에 근무하다 정착하게 됐다고 한다.


어른들의 말에 따르면 그는 고향에 본처와 딸을 두었으나 현지에서 재혼, 자녀들을 출산해 그대로 정착하게된 것이라고 후손 성규(聖奎·73세)는 전하고 있다.


현재 진양호 제방 밑 일대를 중심으로 세거지를 이루어 왔는데 일제시대에는 약 20 여 가구가 살았으며, 현재는 진주시내와 사천지방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이곳에 살고 있는 위씨들은 한 때 족보에 실리지 않아 스스로 가승을 만들어 보관하기도 했다고 한다.
성규씨 연락전화: 055-741-9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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