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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원(淵源)

 

 위씨(魏氏)는 중국(中國)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아들인 필고(畢高)의 후예(後裔) 필만(畢萬)이 진(晋)나라 獻公의 參乘으로 곽, 적, 위 세나라를 멸(滅)한 공(功)으로 대부(大夫)의 반열에 오르고 위지(魏地)를 봉토(封土) 받으면서 지명(地名)에 따라 위씨(魏氏)로 성(姓)을 바꾸니 그가 시조(始祖)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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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위씨 시조 위필만 한백옥 조각상 -

   

 

 한국의 위씨(魏氏) 시조(始祖) 회주군(懷州君)은 대당관서(大唐關西) 홍농인(弘農人)으로 이름이 경(鏡)이시니 신라(新羅) 27대 선덕여왕 7년 무술(戊戌) 서기(西紀) 638년 신라왕(新羅王)의 요청에 의하여 당(唐) 태종(太宗)이 8인의 도예사(道藝士)를 파견(派遣)함으로써 동래(東來)하였다.

 시조공(始祖公)께서는 방(房)·위(魏)·홍(洪)·목(睦)·기(奇)·은(殷)·길(吉)·봉(奉)씨와 더불어 지금의 경기도(京畿道) 화성군(華城郡) 서신면(西新面) 상안리(尙安里) 고당성(古唐城)·익주(益州)·남양(南陽)에 입국(入國)하시게 되니 세상에서는 이분들을 팔학사(八學士)라고 한다.   

 

 시조공께서는 신라 조정으로부터 아찬(阿飡) 벼슬까지 오르시며 문화사절(文化使節)의 임무를 수행하셨다. 고려 충선왕(忠宣王) 때 시조공을 회주군(懷州君)으로 봉(封)하였으며 회주(懷州)는 지금의 장흥(長興)을 일컫는다.

 

 광복 후 서기(西紀) 1972년에 팔학사의 입국(入國) 상륙지(上陸地)인 당성(唐城)이 지방문화사적(史蹟) 217호로 지정(指定)됨에 따라 팔면시비(八面詩碑)를 세우고 팔학사 사우(祠宇)를 건립(建立)하여 매년(每年) 제향(祭享) 하기로 한  바 있다.

 

  한편 시조공의 동래에 대한 이설(異說)도 있다. 즉 당나라의 대광공주(大光公主)를 수행하는 배신(陪臣)의 자격으로 신라에 왔다는 설이다.


 장흥위씨(長興魏氏) 도문중(都門中)은 1985년 회주군사적비건립위원회(懷州君史蹟碑建立委員會)를 발족(發足)하고 문중(門中)의 협조(協助)를 얻어 1987년 정묘년(丁卯) 5월 3일 시조공사적비(始祖公史蹟碑)를 장흥읍 평화리(平化里) 시조공의 사우(祠宇) 회주사(懷州祠) 경내(境內)에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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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조공 사적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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