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삼국시대 왕실의 계보 우리나라에서 제왕의 계보는, 삼국시대 각기 국사를 편찬할 때 작성되었다고 짐작되며, 신라 말기 최치원에 의하여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으로도 나타났다. 그것은 다시 ‘삼국사기’ 본기와 연표 및 ‘삼국유사’의 왕력조(王曆條)에서 삼국 내지 가락국의 왕실계보로 체계화되었다.
2. 고려시대의 정안(政案)과 이안(吏案) 1152년에 작성된 김의원(金義元)의 묘지에 “옛날에는 족보가 없어 조상의 이름을 모두 잃었다.”고 한 바와 같이 고려 초기만 하더라도 보첩과 같은 것은 없었다. 문종조 이래 고려의 문벌 귀족사회가 발전함에 따라 씨족 · 가보 · 가첩 · 세보 · 족보 등의 용어는 있어 왔지만, 이들 보첩류는 15세기에 비로소 나타나는 조선시대의 족보와는 성격이 달랐다.
중국에서 구품중정법 실시와 군현성의 성립에 따라 벼슬과 혼인에 인물과 가격을 결정하는 보첩류가 쏟아져 나왔듯이, 고려에서도 문음(門蔭)을 받기 위한 조상의 내외세계가 기재된 씨족 · 족도(族圖) · 정안(政案) 등이 작성되었다.
지방의 각 읍사에는 향리의 명부인 이안(吏案, 壇案)이 비치되어 향리의 선임과 승진, 향공(鄕貢)과 기인(其人)의 선임 등에 활용했다. 그것은 각 읍 향리의 족파(族派)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문서로서 그들의 내외세계와 가문의 품격의 고하 및 개별적인 인적 사항을 기재하였다. 이는 조선시대 각 읍별로 향내 사족을 망라한 향안(鄕案)이 유향소나 향교에 비치되었던 사실과 비교된다.
3. 조선전기 왕실의 보첩 편찬 성씨에 관한 최초의 구체적인 자료는 ‘세종실록’ 지리지를 비롯하여 ‘경상도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성씨조이다. 최초의 성씨관계 단행본이라고 생각되는 ‘해동성씨록(海東姓氏錄)’은 1467년(세조 13) 왕명을 받은 양성지(梁誠之)에 의하여 찬진되었으나 현존하지 않아 그 내용은 알 수 없지만, 당의 씨족지?성씨록을 모방하여 우리의 성씨를 각 군현별로 정리하였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일반 백성들의 족보 편찬에 앞서 조선 왕실에서는 1412년(태종 12)에 ‘선원록(璿源錄)’ · ‘종친록(宗親錄)’ · ‘유부록(類附錄)’이 작성됐다. 이는 태종이 서얼차대법을 제정하고 난 다음 종실에서도 적서(嫡庶)를 명확히 구분하여 명분을 바로잡겠다는 의도에서 나왔다.
이로부터 왕실에서는 ‘국조보첩(國朝譜牒)’ · ‘당대선원록(當代璿源錄)’ · ‘열성팔고조도(列聖八高祖圖)’ 등을 종부시(宗簿寺)에서 편찬, 비치하고, 돈녕부(敦寧府)에서는 외척과 부마를 대상으로 한 ‘돈녕보첩(敦寧譜牒)’을 편찬하였다. 또한 충훈부(忠勳府)와 충익부(忠翊府)에서는 각기 역대공신과 원종공신들의 족보를 작성, 비치하였다.
4. 조선전기 명문의 족보 편찬 왕실과 관부의 이러한 보첩 편찬은 사가의 족보편찬에 하나의 촉진제가 되었다. 우리의 족보사상 판각, 성책해서 반포한 것은 1476년(성종 7)에 발행된 안동권씨의 성화보다. 다른 명문들의 족보는 주로 구보(舊譜)의 서문에서 나타나는 사실로서 초고 또는 족도·세계도·가첩 형식으로 전해오다가 16세기 또는 17세기에 와서 족보를 정식 간행할 때 전재되었다.
안동권씨성화보가 발간된 뒤로도 족보편찬은 오랫동안 활발하지 않다가, 1565년(명종 20) ‘문화유씨가정보(文化柳氏嘉靖譜)’가 간행되면서부터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권씨·유씨의 족보는 조선 전기 여러 성씨의 족보 편찬에 중요한 전기가 되었는데, 이들 족보는 자녀의 기재를 출생 순으로 하되 부→자로 이어지는 친손계는 물론, 부→여로 이어진 외손계까지 대수에 관계없이 등재하였으니, 이는 바로 당대 만성보(萬姓譜)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따라서 전기의 족보편찬은 18세기 이후처럼 친손들이 주관하지 않고 친손과 외손들이 합작하였다.
5. 17세기 이후의 족보 편찬 조선 전기의 족보는 17세기 후반부터 가족제도 · 상속제도의 변화와 함께 서서히 변모해 갔다. 16세기이래 민중의 성장에 따른 천민층의 양민화와 왜란과 호란을 겪고 신분질서가 크게 해이해지자 전통적인 양반과 신흥세력을 막론하고 모두 세계 · 족계를 새로 정리해야 하겠다는 의도에서 17세기 후반부터 족보가 속간되었다.
조선 후기는 족보가 없으면 상민으로 전락되어 군역을 지는 등 사회적인 차별이 심하였다. 그래서 양민이 양반이 되려고 관직을 사기도 하고, 호적이나 족보를 위조하기도 하며, 뇌물을 써 가면서 족보에 끼려고 하는 등 갖가지 수단과 방법이 동원되었다.
18, 19세기 이후에 처음 나온 족보들은 대체로 가문과 시조의 유래가 오래되었음을 강조하기 위하여 가문의 세계가 실제보다 훨씬 소급되었는가 하면, 족보에 기록된 선조의 관직도 과장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 동성은 당초에는 동조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후대에 내려올수록 대동보적 성격을 띤 족보가 많이 나오게 되었다.
그래서 실제 혈연적으로 관계없는 타성이 동성으로 오인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본디 같은 조상에서 나온 파계가 사족과 이족 또는 성장과 진출의 선후에 따라 서로 타성으로 오인하는 예도 많았다. 그 결과 희성 · 벽관들은 비교적 순수성을 지녔으나 대성 · 명문일수록 투탁자가 급증하였고 한말?일제시대로 내려오면서 모든 성씨가 양반성화하면서 족보편찬도 일반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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