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인보는 1824년에 발행된 관북의 갑신보(甲申譜)가 나온지 18년 후에 나왔다. 이 족보에는 관북보를 따랐음인지 신라의 귀족인 위흔(魏昕), 위영(魏英)이 방조로 등장하고, 14세 지후공(祗侯公)의 유시(遺詩)라는 ‘우유진도청묘산시음(寓遊珍島靑猫山詩吟)’이 등장한 것이 특징이다.
장흥계미보(1883년)
서문의 저자는 다암공(茶巖公) 영복(榮馥)의 의뢰에 따라 청풍(淸風) 김평묵(金平默)이 썼다고 적고 있다. 서문에는 “후손이 많이 불어난 데다 흩어져 살고 있어 서로 알지 못할까 두려워 신보(新譜)를 만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족보의 특징은 적서(嫡庶)의 구별이 너무 지나치다 는 비판을 받고 있고, 나머지는 임인보와 많이 다르지 않다.
장흥병진보(1916년)
병진보에는 서문이 없다. 계반(啓泮, 1848~1939), 계충(啓忠, 1861~1936) 두 분이 공동 도유사를 맡아 발행한 족보로써 권수는 14권에 이른다. 나머지는 임인보, 계미보와 같으며, 지후공 유시는 행장편(行狀篇)으로 돌리고, 범례와 상계편에 ‘충조장백진도유배(?祖杖百珍島流配’라고 적고 있다. 이 족보에서부터 판사공의 진도유배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장흥정유보(1957년)
정유보 또한 서문이 없다. 홍량(洪良, 1881~1961) 도유사의 지휘로 발행됐으나 이유도 없이 서문이 빠져있다. 지후공(14세조)의 기록도 ‘묘재진도(墓在珍島)’가 빠졌으나 ‘피장백진도원유(被杖百珍島遠流’와 유시를 싣고 있다.
장흥임자보(1972년)
서문은 장흥향교의 전교를 역임한 의재(毅齋) 석한(錫漢)의 요청에 따라 월성(月城) 김종가(金鍾嘉)가 지은 글이다. 여기에는 “남북이 멀리 떨어져 합보 하지 못하다가 이번에 남으로 넘어와서 서울에 살고있는 300여호가 합보하니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임자보를 만든 주역은 도유사 이외에 부유사 3명, 총무 2명, 교정 3명, 정서 4명, 감인 5명, 섭외 11명, 지역별 수단유사 83명 등 118명이 참여했다. 지후공에 관한 기록은 이전의 족보내용을 고스란히 싣고 있다.
관북기사보(1689년)
관북 최초의 족보는 빛을 보지 못했다. 기사보는 관북 28세 정상(定相, 1635~1689)이 쓴 서문이란 점으로 보면 689년에 발행하려 했다. 그분의 졸년이 바로 발행하려다 재정이 없어 그만둔 기사년이란 사실은 이를 반증한다.
서문에는 “계통을 밝힐 문서가 병화에 없어져 선대의 벼슬과 품계, 그리고 배위(配位)의 성씨가 자상하지 못하니 후손으로서 애석함을 어찌하리. 불초 손 정상이 제종제 산하(山河)와 같이 남은 문권을 채집하여 족보를 닦으려 한지 1년이 된다. 기묘년 4월 통천(通川)군수로 있으면서 발간하려 하였으나 물력이 미약하고, 신병이 있어 일건을 기록하여 제종이 열람토록 한다”고 적고 있다.
결국 족보를 발행하기 위해 1년여 동안 준비했으나 인쇄할 돈이 없어 간행하지 못했다는 얘기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만일 이 족보가 예정대로 나왔으면 남북 위씨의 족보 중 맨처음 족보가 됐을 것이다.
관북정해보(1767년)
사실상 관북 최초 족보랄 수 있다. 기사년에 만들려다 중단한 이후 78년만에 발행한 것이다. 관북 31세 문조(文祖, 1712~1776)의 추서(追序)에는 “갑신년 겨울에 정진(挺振)어른께서 장흥에 가시어 그 보첩을 얻어오므로 비로소 그 근원(根源)과 갈래를 알게 되었다”(중략)고 술회하고 있다.
그는 이어 “정해년 여름 수보(修譜)를 위해 창빈(昌彬)을 장흥에 보내 백규(伯珪)어른으로부터 함주(咸州)의 세대와 근본을 찾고 추모하는 뜻을 고열(考閱)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렇다면 두 분의 장흥 왕래시기는 1764년 갑신(甲申)과 1767(丁亥)이라고 추정되며, 그 때 장흥에서 얻어온 보첩은 1759년에 발행한 기묘보(己卯譜)가 분명하다.
그런데 문제는 1999년에 발행된 기묘대동보의 서문배열에 이 보다 57년 후에 발행된 갑신보(1824년)의 서문을 정해보(1767) 앞에 배열한 사실이다. 아마도 착오를 일으켜 비롯된 결과가 아닌가 여겨진다.
관북갑신보(1824년)
갑신보는 관북보첩의 완성본으로 평가받고 있다. 왜냐하면 이 때부터 회주군(懷州君) 휘 경(鏡)께서 시조위(位)에 오르고, 대각관공 휘 창주(菖珠)를 중조로 모셔 세계(世系)의 골격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장흥초보를 인용한 결과가 아닌가 사료된다.
또 방조로 위흔(魏昕), 위영(魏英)을 싣고, 고려 방조로 위덕유, 위종, 위숭, 위통원, 위돈겸, 위소, 위순, 위공취, 위문경, 위문개 등 11공을 싣고있다. 갑신보의 서문은 관북 33세이신 간와(艮窩) 적철(迪喆, 1766~1838) 문과현감이 썼다.
관북을해보(1875년)
을해보는 갑신보가 나온지 51년만에 발행됐다. 서문은 관북 34세 종오(鍾晤) 직장(直長, 종7품)이 썼다. 그는 “남북 위씨가 한 뿌리이니 의리상 합보가 당연함으로 갑신년(1824)에 서울에 모여 족보를 인쇄할 때 남쪽 종씨가 힘이 모자라 따르지 못하고 다만 인쇄된 북보(갑신보) 한 질을 보내주었다”고 적고 있다.
그는 이어“이제 갑술(1874년)의 계보(1875년을 말함) 또한 남북이 합보할 생각으로 여러번 서신왕복이 있었으나 할 일은 많고 힘이 약해 함주파(咸州派)의 족보만 간행하니 마음이 아프구나”하며 탄식했다. 그는 휘 정상(定相)의7세손이며, 북도능전지(北道陵殿誌)를 저술한 휘 창조(昌祖,1703~1759)의 증손이자 만암(萬庵)의 아버지가 된다.
관북을묘보(1915년)
을해보가 나온지 40년만에 그것도 일제 강점기에 간행한 족보다. 물론 당시에 발행된 족보는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서문은 남정철(南廷喆)이 썼다. 그는 서문에서 “명원(明源)·대원(大源) 두 사람이 함주에서 서울까지 찾아와 부탁하기로 사양하였으나 수순동안 여숙하며 불환(不還)인지라 지성에 감동하여 써준다”고 적고 있다.
하산(霞山) 남정철은 고종·순종 때 중요한 벼슬을 거친 인물이라고 한다. 그는 숭정대부원임 예조판서(崇政大夫原任 禮曹判書) 겸 홍문관 학사를 지내고, 합방 후에는 남작(男爵)까지 받았다. 그런 인물에게 서문을 받은 이유는 알 수 없다. 아마 출판을 엄격히 검열하던 때라 족보의 발행을 여의롭게 하기 위한 방편이 아닌가 사료된다.
관북경진보(1940년)
을묘보가 나온지 고작 25년만에 다시 발행했다. 보통 30년 이상 지나야 발행하는 관행을 벗어난 이유는 알 길이 없다. 경진보는 을묘보제작의 주역인 대원(大源)이 서문을 썼다. 그는 고종 24년(1887)부터 성균관(成均館)에서 이름이 바뀐 경학원(經學院)의 강사(講師)로 있으면서 족보발행을 주도했다.
경진보는 일제시대와 6·25 이전 고향에서 발행한 마지막 족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월한 관북종인들은 어느 보첩보다 친숙하게 여겨왔다. 그리고 1981년에 발행한 신유보는 물론 1999년에 발행된 ‘장흥위씨대동보’의 저본(底本)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관북신유보(1981년)
자유를 찾아 월남한 관북종인들이 남쪽에서 만든 족보이다. 종인들은 뿌리의 단절을 막기 위해 1940년 경진보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당시 미단(未單)한 종인들을 게재하는 수준의 족보가 신유보다. 경진보와 다른 점은 4권 3책을 양장(洋裝) 1204쪽의 단권(單券)으로 발행한 점이다.
신유보의 서문은 대선(大善)이 썼다. 그는 “8·15 해방 후 불행하게도 국토가 남북으로 양단되고 더욱 6·25 전란(戰亂)으로 인하여 1천만의 이산가족이 생겨서 종문의 거처를 다 알 길이 없어 이번 족보에 수록한 수는 극소수에 불과하나 후일 국토통일이 이루어져서 미수록된 종원 전원이 수록된 다음 속간시(續刊時)까지 가교적 역할을 하여 이 보전이 자손만대에 길이 보전되어 이어지게 될 것이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남북대동보(1999년)
그리고 그리던 남북합보인 대동보가 드디어 발행됐다. 합보를 만들기 위해 북쪽의 종인들이 함흥에서 장흥까지, 반대로 장흥에서 함흥까지 오가고, 중간지점인 서울에서 만났으나 끝내 합보는 발행되지 못했다. 그만큼 주변의 여건이 합보발행을 가로막았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남북의 종인들은 숙원사업의 하나인 대동보를 마침내 마련했다. 남북에서 족보를 만들었거나 만드려고 시도한지 무려 4갑년이 되고서야 이룬 결과물이다. 이 족보의 서문은 이가원(李家源)박사의 글과 용철(容喆)도유사의 글이 차서로 들어가 있다. 두 서문에는 우리 보사와 문제점에 대해 후생들이 고증해서 바로잡으라는 당부가 있다.
그럼에도 기묘대동보는 긍정적인 부분이 많다. 가령 한글 토를 달아주고, 사위 대신 여자를 당당하게 기록해 주고, 학력과 직업을 기록하고, 모든 유적을 칼라 사진으로 처리하고, 선조들의 행장과 충의록 등을 한 권의 책으로 발행하고, 한글로 번역해서 한글세대가 알아볼 수 있게 만든 점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학력과 직업의 계급을 일정한 선 이상으로 한정한 점은 매우 어설픈 결정이라 할 수 있다. 세상에 어느 누가 높은 학력을 싫어하고, 높은 벼슬을 싫어하겠는가. 모두 여의치 못해 나온 결과 아닌가. 그렇다면 본인이 원하면 초등학교 학력도, 서기벼슬도 실어줘야 마땅하다. 앞으로는 이런 차별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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