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7 10:45
(5) 영장공파 (營將公派)
계보 : 자량(自良)─종복(宗復)─유정(由貞)─원충(元忠)─억장(億章)
대경(大經)─효징(孝徵)─진익(震翼)─인주(仁周)─사만(師萬)─경진(慶晋)
동만(東萬)─경상(慶相)
한주(翰周)─창만(昌萬)─경량(慶梁)
혜만(惠萬)─경하(慶夏)
복만(福萬)─경언(慶彦)
찬주(贊周)─경만(景萬)─시주(時周)
시희(時希)
제만(悌萬)─시술(時述)
시철(時喆)
●세거지 : 여수시 율촌면 봉두(鳳頭) (대동보p.760∼989)
영장공 대경(大經·1555∼1623)은 괴봉공과 재종간이다. 선조(宣祖) 1575년(乙亥)에 무과에 급제, 원주(原州) 판관을 지내다 고향에 돌아와 지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괴봉공의 격문에 따라 대기·대택 등 형제들과 함께 이순신장군의 휘하로 들어가 참전했다. 그는 옥포(玉浦)·적진(赤珍)·당항포(唐項浦)전투에 참전, 승리를 거두었다.
이어 병사 황진이 지휘하는 웅치(雄峙)·이현(梨峴)전투에 참전했다. 그러나 왜적의 화살에 어깨를 맞아 큰 부상을 입고 귀향했다. 이 사실을 병조판서 박충간(朴忠侃)이 행재소의 선조에게 알려 상주영장(尙州營將)에 제수 됐다는 것이 대동보 면주기록이다. 그러나 부상에 대해 율촌면지(1998년간)는 전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공의 부인 전주 최씨(崔氏)가 외아들 효징(孝徵)을 데리고 피난 가던 길에 봉두에 들였는데 김명운(金命韻)의 도움을 받아 정착하고, 효징이 그의 딸과 혼인하면서 후손이 번성했으며, 종가는 무려 16대가 혈손(血孫)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봉두의 위씨들은 한 때 70가구에 이르도록 세를 이뤘다. 이농현상이 극심한 현재도 무려 52가구가 살고 있으니 가히 그 규모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물론 흩어져 사는 일가가 없는 것은 아니다. 26세 경보(慶普)의 4아들 중 둘째 정규(禎奎)는 순천시 해룡(海龍)·황전면(黃田) 죽내(竹內)·광양(光陽)·경남 하동(河東) 등지에서 살고 있다. 또한 26세 시철(時喆)의 후손 중 30세 상오(相五)는 전북 김제시 월촌면 연전리에 거주하기도 하나 극히 적다.
종손 상복(尙復 1932년 壬申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