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7 10:50
7) 성균생원공파 (成均生員公派)
성균생원공파는 장흥 위씨 대동보에는 없는 이름이다. 그러나 다른 파(派)와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불가피해서 일단 붙인 이름이다. 우리 위씨는 15세 통선랑공(휘 悳龍)이 네 아들을 낳음으로써 처음으로 분파(分派)하게 된다. 알다시피 큰아들 자온(自溫)은 능주파, 둘째아들 자량(自良)은 관산파가 되고 넷째 아들 자검(自儉)은 후사가 없다.
그런데 유독 셋째 아들 자공(自恭)의 후손은 전체를 아우르는 이름이 없다. 즉 그의 아들 종립(宗立)의 두 아들 서(瑞)의 후손은 사월파(沙月派)라 부르고, 둘째 아들 돈(頓)의 후손은 관북파(關北派)라 부른다. 하지만 이런 명칭은 자공을 중심으로 붙여진 이름이 아니고 손자를 중심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므로 자온·자량 등 두 형과는 형평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상계분파와 명칭에 모순이 있다. 자온의 능주나 자량의 관산은 후손들이 그곳에서 살았다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렇다면 자공의 후손도 사월방(沙月坊)에서 살았으니 사월파 또는 용산파(蓉山派)로 총칭(總稱)하는 게 어떨지 모른다. 그런 연후에 경천파(擎天派)·중준파(重俊派)·관북파(關北派)로 나눈 것을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사료된다.
사실 성균생원공은 관북입조이기 전에 사월방의 입조이다. 그는 장원봉 밑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그러다 평화로 이거해 살다 산을 넘어 지금 용산면 계산리 옛 사월방으로 이사, 보금자리를 잡았다. 그 사월방에서 두 손자가 상당히 성장하도록 살았으면 족히 30년은 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다 조정의 북진정책에 따라 작은손자를 데리고 주북에 정착, 관북파를 있게 했기 때문이다.
(1) 경천파 (擎天派)
계보 : 자공(自恭)─종립(宗立)─서(瑞)─석정(碩貞)─충(忠)
경천(擎天)─홍명(弘明)─억돈(億頓)─춘문(春文)─영발(榮發─상명(尙鳴)
춘량(春良)─계성(繼成)─대표(大瓢)
●세거지 : ① 장흥군 장평면 어곡(漁谷) (대동보 6권p.1∼56)
경천파는 사월파의 종파다. 그러나 세거지의 부침이 심하다. 파조 이하 후손들은 25세까지 고향 사월방에서 살았다. 그러다 26세 상명(尙鳴)은 고향을 떠나 북쪽인 장평면 어곡으로 옮겨 보금자리를 잡는 듯 하다. 삶의 주무대가 어곡이지만 일부 후손은 유치 단산 등 이곳저곳에서 살았던 흔적이 대동보 면주에서 확인되고 있다.
●세거지 : ② 곡성군 석곡면 상송(上松)
특히 후손 가운데 27세 보만(寶萬)의 아들 형징(亨徵)은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곡성군 석곡면 상송리에 자리를 잡았다. 후손들은 크게 번성, 사실상 사월파의 중심을 이루고 있으나 본향과는 왕래가 많지 않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여기다 26세 대표(大瓢)의 직계후손들은 손이 끊긴 데다 대동보에 참여하지 않아 상황을 알 수 없다.
상송의 사월파는 한 때 30여가구 이상 살았다. 그러나 산업사회로 변화되는 과정에서 후손들이 서울, 부산, 광주 등지로 떠나 지금은 불과 3가구만 살고 있다. 한편 조상의 고향 장평면 어곡리에 묻혀있던 선조들의 묘소도 이곳으로 이장, 사실상 본향과의 거래가 끊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