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7 10:40
(4) 오덕파 (五德派)
위씨와 관산과의 인연은 혼인에 의해 이루어진다. 습독공(由亨)의 셋째 아들 강능참봉공(康陵參奉公)진현(晉賢)은 당동(堂洞)의 탐진(耽津) 최씨(崔氏)에게 장가를 간다. 그는 평화에서 태어나 살다가 용산(蓉山)에서도 얼마동안 지낸다. 그러므로 어쩌면 평화에서보다는 용산에서 살 때 혼인이 이루어졌을 개연성이 더 크다. 그는 결혼 한 후 요족(饒足)한 처가에서 췌거(贅居)했다고 한다. (家狀) 그러므로 참봉공을 관산입조로 봐야한다.
그러면 그 시기는 언제쯤일까. 참봉공은 성종(成宗·13년) 1482년(壬寅)에 나서 명조(明宗·19년) 1564년(甲子)에 82세에 타계하였음으로 20세에서 30세 전후인 1510년대쯤으로 추측된다. 기록은 없으나 공은 평화에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와 용산의 어산(語山)을 거쳐 처가동네로 이사와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징후는 아버지와 어머니 산소가 평화와 장천에 따로 있는 점에서 확인되고 있다.
그는 당동에 살면서 비교적 여유 있게 살았다. 그러나 슬하에 아들이 없어 형(晉秀)의 차남 곤(鯤·1515∼1582)을 계자로 삼았다. 양아들은 입양 후 광주(廣州) 이씨를 아내로 맞아 슬하에 덕홍·덕의·덕관·덕화·덕후 등 다섯 아들을 낳았다. 이들이 곧 오덕파(五德派)의 파조가 되고 장흥 위씨의 큰 산맥을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관산과 위씨와의 인연은 500년에 이른다.
① 판사공파 (判司公派)
●세거지 : 장흥군 관산읍 와룡리(臥龍里)
계보 : 자량(自良)─종복(宗復)─유형(由亨)─진현(晉賢)─곤(鯤)
덕홍(德弘)─정망(廷望)─시현(時鉉)─진기(振起)─후황(后璜)─훈주(焄周)
정첨(廷瞻)─동면(東低)─익화(翊華)─명천(命天)─사혁(師赫)
명창(命昌)─사철(師哲)
판사공(判司公) 덕홍(德弘·1537∼?)은 오덕의 맏이를 일컫는다. 공은 약관 17세에 지방에서 실시하는 향시(鄕試)에 세 번이나 합격했으나 회시(會試)에는 실패함으로 출사를 포기하고, 진리를 깨우치기 위한 학문에만 정진했다. 음직으로 군자감정(軍資監正)에 제수 됐다. 오로지 자질(子姪)들을 가르치고 후진을 양성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판사공은 태생지 당동에서 이른바 ‘새터’또는 ‘판사터‘에 새로 집을 지어 이사했다고 한다. 당시 집이 너무 화려해서 원님이 시비(是非)를 걸었으며, 장천재로 이축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장남이 분가하고 차남인 청계공이 어머니를 모시고 동생(덕관·덕화·덕후)들의 뒤치다 거리를 하게 된다. 아마 그만한 도량이 있어서 맡겨진 책임으로 보인다.
분가한 덕홍은 새 집에서 장남 정망(廷望)대까지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 이유는 아버지와 아들 내외분의 유택이 당동 고묘하(考墓下)에 있다는 족보의 기록에서 짐작할 수 있다. 다만 판사파가 외룡에 정착한 것은 1620년대쯤 차남 정첨(廷瞻)으로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도 물론 그의 유택이 화운동(畵雲洞)에 있기 때문이다.
공의 아들 22세 정망(廷望·1558∼?), 정첨(廷瞻·1590?∼?), 정민(廷敏) 등 3형제 계열로 나뉘어 있으나 후손은 크게 불어나지 않았다. 거의가 관산에 정착하고 있다. 오덕의 큰집이라서 고향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후손 중 일부가 장흥 부산면 기동과 안양면 경기도 고양 등지에 살고 있으나 많지 않다. 종손= 영복(永復·1957년 丁酉生). (대동보 1권p.325∼380)
② 청계공파 (聽溪公派)
계보 : 자량(自良)─종복(宗復)─유형(由亨)─진현(晉賢)─곤(鯤)
덕의(德毅)─정헌(廷獻)─동명(東蓂)─익한(翊漢)─방일(邦一)
익무(翊武)─명성(命成)─상문(相文)
상우(相禹)
상이(相履)
상승(相鼎)
익신(翊信)─명좌(命左)─상관(相觀)
상민(相珉)
상직(相稷)
상설(相卨)
동규(東葵)─익중(翊中)─명삼(命三)─상언(相彦)
상경(相慶)
상욱(相旭)
상겸(相謙)
● 세거지 : ① 장흥군 관산읍 옥산(玉山)·옥동(玉洞)
청계공 덕의(德毅·1540∼1613)는 진사공의 차남이자 판사공의 동생이다. 호는 청계 또는 동호(桐湖)다. 선조 1573년(癸酉)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임란이 일어나 동생이 왕을 호종하고 의주로 피란 갔다는 소식을 듣고 90일을 걸어 행재소에서 왕을 알현했다. 왕과 수행신하들이 공의 충의에 크게 감동했다. 조정은 영남운향관, 진원현감을 제수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사후 호종원종 일등훈에 록하고 병조참의에 추증 됐다.1694년(甲戌) 죽천사 건립과 함께 주벽으로 배향됐다.
청계공은 태어난 집에서 어머니(廣州李氏)를 모시고 살았다. 그 집에서 3동생을 결혼시켜 재산을 쪼개 분가시킨다. 지금도 당시의 분재기(分財記)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공이 타계한 후 오덕의 생가는 청계공의 아들 정헌(廷獻)이 지켜오다 57세 때 이웃 옥산(玉山)으로 옮겨 정착하게 된다.
청계공 후손은 25세 명성(命成)의 상문(相文)·상이(相履)·상정(相鼎), 명좌(命左)의 상관(相觀)·상민(相民)·상직(相稷)·상설(相卨), 명삼(命三)의 상언(相彦)·상경(相慶)·상욱(相旭)·상겸(相謙) 등 26세 11명의 아들이 태어나면서 크게 번성한다. 자손이 번성하자 삶의 무대 또한 넓어져야 하기에 거소지가 확대되기 마련이다.
청계공파 후손의 세거지는 대략 13개 지역이다. 종가인 상문(相文)의 후손은 월평(月坪)과 광주(光州), 상이(相履)의 후손은 방촌(傍村)서울, 미국등지에서 살고 있다. 상정(相鼎)의 후손은 옥동(玉洞)·방촌(傍村)·당동(堂洞)·광주·목포, 상관(相觀)·상민(相民)·상직(相稷·상설(相卨)의 후손은 옥산(玉山)을 주무대로 일부가 와룡(臥龍)과 광주에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명삼(命三)의 넷째아들 상겸(相謙)은 경북 예천(醴泉)·용산(蓉山)에서 살고 있다.
종손 성기(聖基·1924년 甲子生). (족보 1권p.381∼878)
●세거지 : ② 장흥군 장흥읍 월평(月坪)
월평에는 청계공파의 종가가 자리잡고 있다. 종가는 원래 관산읍 옥동(玉洞)에서 세거를 이루며 살았다. 그러나 가세가 기울면서 30세 석인(錫仁)대에 읍내 연동(蓮洞)으로 이거했다. 여기서도 가난을 물리칠 수 없어 31세 계환(啓桓)은 강진 호동으로 옮겨 죽물기술로 간신히 생계를 이어갔다. 그러다 경주 이씨와 혼인해 가정을 꾸리며 2대를 이어갔다.
그럼에도 영세한 가세는 좀처럼 늘지 않았다. 그래서 33세 일경(一炅)은 해방직후 월평으로 옮겼다. 부지런히 일해 가세를 어느 정도 일으켜 세웠다. 가난에서 벗어난 그는 그 때부터 5세조 충렬공(忠烈公) 묘소에 지극정성을 바쳤다. 묘소의 미화를 위해 전력을 쏟고, 재각에 비가 새면 전대에 기와를 담아 와서 비를 흠뻑 맞고 지붕에 올라가 갈아 끼우는 등 모선사업에 애썼다. 아들 또한 대물려 위선에 나섰다.
지금 월평에는 고작 4호의 일가들이 살고 있다. 물론 한 집은 종손 댁이고 같은 청계파가 한집 더 산다. 그리고 나머지 2호는 행원 후손이 살고 있다. 비록 4집뿐인 세거지이나 월평의 일가들은 콩 쪼각도 나눠먹은 미덕으로 서로를 의지하고 살고 있다. 언젠가는 100호에 이르는 번성이 어찌 불가능하겠는가. 그 것이 위선의 응보이기 때문이다.
●세거지 : ③ 장흥군 관산읍 옥동·당동(堂洞)
청계공 후손의 집단 세거지는 관산읍의 옥산·옥동·당동 등 진사공과 청계공의 생활무대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자손이 불고 시대가 변하면서 후손들의 활동무대는 자연스럽게 외연(外延)이 넓어지고 있다. 물론 산업의 발전에 따라 농경시대는 주로 이웃인 용산(蓉山)·안량(安良)·목포(木浦) 등지가 그 대상지역이 됐다.
여기다 일제와 해방, 6, 25전쟁 등 사회적 격변과 산업의 발전으로 인해 인구의 도시집중이 가속화되면서 씨족사회는 대변혁을 맞게 된다. 거의 모든 집성촌은 붕괴되고 후손들은 도시로 나가 예전의 세거지는 원형을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우리라고 예외일 수 있겠는가. 큰 변화는 상이(相履) 후손의 경우 일부가 서울과 멀리 미국(美國)에 살고 있다.
●세거지 : ④ 장흥군 안양면 비동(飛東)
청계공 후손 가운데 안양면 비동에 보금자리를 잡은 후손이 있다. 26세 상정(相鼎)의 고손인 30세 석채(錫采·1827∼1869)가 주인공이다. 아버지 29세 양조(梁祚) 때부터 고향을 떠나 한때 보성군 삼산에서 살다 안양 비동에 삶의 보금자리를 잡았다. 정착은 비교적 순조로와 후손이 적지 않게 번성해 상당한 세를 이루며 살고 있다. 기타 후손은 옥동·방촌과 목포로 진출해서 살고 있다.
●세거지 : ⑤ 경북 예천군 상리면 명봉(鳴鳳)
청계파의 일부가 멀리 경상북도 예천군 상리면 명봉리에 살고 있다. 이곳의 입향조는 28세 영규(榮奎·1782∼1840)이다. 그의 계통은 25세 명삼(命三) 26세 상욱(相旭) 27세 도술(道述)으로 이어진다.
그는 처음에 경북 문경군 동로면(東魯) 구락동(九落洞)에서 살았다. 지명이 말해주듯 얼마나 험한 산골이었겠는가. 그래서 예천으로 옮겨 새로운 보금자리를 잡았다.
예천에서의 생활이라고 얼마나 여유가 있었는가. 사고무친의 낯선 타향에 삶의 터를 잡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버겁고 어려운 일이다. 그 먼 옛날 산골로 찾아간 가장의 짐이 얼마나 무겁고 지쳤을까. 상상하기 조차 힘든다.
③ 운암공파 (雲巖公派)
계보: 자량(自良)─종복(宗復)─유형(由亨)─진현(晉賢)─곤(鯤)
덕관(德寬)─정호(廷灝)─동만(東晩)─세경(世卿)─문석(文碩)─진갑(震甲)
세빈(世彬)─문백(文伯)─진덕(震德)
진복(震復)
진득(震得)
진형(震衡)
세화(世和)─문혁(文赫)─진익(震翊)
동제(東堤)─세규(世規)─명은(命殷)─계주(繼周)
세복(世復)─명원(命元)─진영(震英)
정봉(廷鳳)─동흔(東昕)─세림(世霖)─명준(命俊)─진규(震奎)
세대(世大)─명언(命彦)─진성(震成)
세한(世翰)─명철(命喆)─백승(伯昇)
●세거지 : 장흥군 부산면 기동리(基洞)
운암공 덕관(德寬·1547∼1628)은 진사공의 셋째 아들이다. 당동에서 태어나서 자랐다. 공은 부산면 내안리 광산 김씨와 혼인하면서 부산과 인연을 맺는다. 혼인시기를 20세 전후라고 보면 1567년쯤이다. 결혼과 함께 분가해 새 터에서 잠시 살다 방촌에서도 한 때 살았다. 그 곳에서 장남 정호(廷灝·1582∼1647)와 차남 정봉(廷鳳·1590∼1651)을 낳았다. 차남이 세 살 되던 해에 기동으로 세거를 옮겼다고 한다.
공이 기동으로 이사할 때는 세상이 몹시 어지러운 시기다. 한 해전에 임진왜란이 발발해 전 국토가 쑥밭으로 변한 상황이었다. 또한 공의 연치가 당시 47세라면 적은 나이가 아니다. 그런데 무슨 연유로 고향을 떠나 이곳에 정착했을까. 아무래도 처가 쪽과의 인연으로 이뤄졌을 가능성 이외에는 짐작할 다른 가능성을 상상할 수 없다.
운암공파의 특징은 한마디로 단촐하지만 응집력이 강하다는데 있다. 우선 다른 파에 비해 후손이 많지 않다. 기묘 대동보에 고작 380쪽(대동보 2권p 1∼380)을 차지하고 있는데서 이를 반영하고 있다. 26세 11명의 진자(震字) 항렬에서 여러 갈래로 나누어지고 있다. 그리고 기동을 중심으로 한 시간권의 반경인 위아래 건너와 유치 장동(長東)에서 살고 있다.
응집력은 전체 조상의 사우인 저존각(著存閣)에서 나타난다. 400년 이상 전통을 가진 집안이 파조를 비롯해서 돌아가신 조상 모두의 위패를 모시는 제각을 짓는 것은 매우 어렵다. 한 조상의 후손이라지만 서로 현격한 의견차가 있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운암파는 우리나라에서 아마 최초라 할 합동제사를 올릴 공간을 마련해서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고 전통도 살리고 있다.
종손 성대(聖大·1948년 戊子生)
쭦 서울시 서초구 우면동 성촌 (대동보2권p.30)
26세 휘 진일(震日)이 고향에서 살 때 전염병이 창궐하자 동생과 함께 지금 사당동에 거처를 마련하면서 세거지가 됐다. 그 후 자손이 불어나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 현재 우면동 성촌에는 한 때 8가구가 살았으며, 원지동 4가구, 방배동 4가구, 답십리동 4가구, 수원시 관양동에 2가구가 살고 있다고 한다.
④판서공파 (判書公派)
계보 : 자량(自良)─종복(宗復)─유형(由亨)─진현(晉賢)─곤(鯤)
덕화(德和)─정철(廷喆)─동전(東筌)─세황(世璜)─명관(命觀)─백침(伯琛)
백림(伯琳)
명조(命肇)─백록(伯穩)
명환(命桓)─백희(伯禧)
세기(世琦)─명택(命宅)─백찬(伯璨)
세옥(世鈺)─문좌(文座)─백화(伯華)
백의(伯毅)
문량(文良)─백환(伯煥)
백진(伯珍)
세인(世仁)─명일(命日)─백현(伯賢)
백길(伯吉)
세봉(世逢)─명장(命章)─사전(師田)
사형(師衡)
세언(世彦)─명룡(命龍)─사득(師得)
정혁(廷赫)─동익(東翼)─세직(世稷)─명희(命禧)─사극(師克)
명래(命來)─사봉(師鳳)
사기(師麒)
세설(世卨)─명덕(命德)─사갑(師甲)
사첨(師瞻)
사급(師汲)
사종(師宗)
사중(師中)
명항(命恒)─사정(師貞)
세붕(世鵬)─명승(命昇)─사적(師迪)
명응(命膺)─사윤(師允)
명수(命需)─사우(師禹)
세구(世龜)─명악(命岳)─사진(師辰)
사간(師侃)
사국(師國)
●세거지 : ①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傍村)
판서공 덕화(德和·1551∼1598)는 진사공의 넷째 아들이다. 공은 당동에서 태어나 1583년 무과에 합격, 원(院)과 부(府)에서 근무했다. 공은 결혼 후 셋째형 집근처로 분가했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공의 둘째 아들 정양재(靜養齋)의 행장에는 아버지 판서공이 당동(堂洞)에서 돌아가신 것으로 기록돼 있다.
방촌과의 인연은 공의 큰아들 방어사 정철(廷喆·1583∼1657)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는 병자호란 때(1636) 청나라 군과 싸우다 인조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을 결심한다. 조정에서 숙산(肅山)·갑산(甲山)·만포진(滿浦鎭) 책임자로 임명(1644)했으나 관산으로 돌아왔다. 집에 온 그는 당대의 국풍(國風) 이의신(李懿信)을 초대, 방촌에 집터를 잡았는데 그 집이 지방유형문화재로 지정돼 2004년 12월 보수했다.
그러니 방촌의 입촌시기는 만회재공(방어사)이 귀가한 이후라고 볼 수 있다. 1644년 이후가 아닐까 여겨진다. 더구나 이 집은 신라와 고려시대 오아현(烏兒縣)과 정안현(定安縣) 및 회주목(懷州牧)의 치소라는 점에서 보통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나 조선건국과 함께 수령현(遂寧縣)의 동헌 터 자리와 맞교환했다는 이야기는 근거 없는 낭설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방촌의 입촌 시기와 수령현에 장흥부의 치소가 들어간 시기와의 차이가 맞지 않다. 즉 조선이 건국되면서 철야현에 있던 치소가 1392년에 장흡읍 중령산쪽에 있다가 1414년에 장원봉 밑 동동리 지금 법원자리로 옮겼다. 그리고 위씨의 방촌 입촌은 그로부터 230년 후인 1650년 전후이기 때문이다.
판서공파는 방촌에 세거를 잡은 이후 비교적 순탄하게 발전한다. 주로 종손과 그 대소가를 중심으로 살았다. 자손의 번창은 5덕파의 두 번째(대동보 2권p 381∼1024)에 이를 만큼 불었다. 특히 종손이 15대째 혈손(血孫)으로 한 집터에서 내려온 것은 희귀한 경우에 해당된다. 재물과 권세는 만족할 수 없지만 그런 데로 괜찮은 편이다.
종손 성렬(聖烈·1928년 戊辰生)
●세거지 : ② 장흥군 대덕읍 초당(草堂)
대덕 초당의 입향조는 간암공(艮庵公) 세옥(世鈺·1689∼1766)이다. 공은 영유와 남해군수를 역임한 23세 동전(東筌)의 셋째 아들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대단히 총명하고 살결이 너무 하얀 나머지 푸르게 보일 정도여서 청학(靑鶴)에 비유되기도 했다. 우의정을 지낸 민응수(閔應洙)와는 둘도 없는 친구간이고, 당대의 석학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와는 죽마고우였다.
그러나 33세 때인 1721년(辛丑) 서울을 등지고 관산으로 내려왔다. 하향한후 한 때 큰집 밑에서 지냈다고 한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으나 그는 천관산의 서남쪽인 대덕에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 간암정자를 짓고 후학 지도와 개간한 땅에 약초를 재배하며 지냈다. 그러다 1734년(甲寅) 호남지방에 가뭄과 전염병이 창궐하자 영조(英祖)에게 6조7실(六條七實)의 상소문을 올려 비답을 받았다.
공은 비록 벼슬을 못했지만 장흥 위씨를 중앙무대에 알린 주인공이다. 국토의 끝자락 해변에 살고 있는 위씨는 병자호란 이후 변변한 벼슬아치를 배출하지 못해 아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 3벽의 한계를 중앙무대에 알린 것은 공의 풍부한 교우관계로 이루어진 결과이다. 친구 우의정 민응수(閔應洙), 공조판서를 지낸 화전(花田) 이재(李縡) 등이 동문수학한 선후배간이기 때문이다.
감암공이 스스로 개척한 대덕의 세거지에는 직계후손 4가구와 신월 2구인 내도에도 2가구가 살고 있다. 지금도 공이 인재양성을 위해 세웠다는 서원자리에는 약수터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간암공의 졸년에 대해서는 설이 엇갈려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
●세거지 : ③ 전북 김제시 청하면 월현(月弦) (대동보 2권p.430∼651)
간암공의 후손인 30세 병권(柄權·1903∼1974)이 고향을 떠나 김제에 보금자리를 잡았다. 감암의 6대손인 그는 문좌(文座)의 둘째 아들인 백의(伯毅)의 고손이다. 그의 가족은 29세 만기(萬基)대까지 대덕에서 살았다. 이주의 동기는 알 수 없으나 먹고살기 위해 고향을 떠났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사간 시점은 1920년 전후라고 보면 아직 100년도 넘지 않았다.
●세거지 : ④ 장흥군 안양면 기산(岐山) (대동보 2권p.439∼660)
판서공파의 기산입향조는 26세 백진(伯珍·1790∼1866)이다. 간암공의 손자인 그가 할아버지 슬하에서 떠난 것은 호구지책을 해결하기 위한 활로개척이라고 볼 수 있다. 아버지 25세(文良)대에 많이 어려웠다는 대동보 면주(p386)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추측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주(移住)의 보람은 있어서 후손들의 생활은 상당히 호전됐으나 일부 후손(28세 榮偵)은 다시 유치(有治) 송정(松亭)으로 옮기도 했다.
●세거지 : ⑤ 여수시 화정면 개도(蓋島) (대동보2권p.387∼670)
여수의 외딴섬 개도와 위씨와의 인연은 태풍이 원인을 제공했다. 당시 경상도 남해군수였던 동전(東筌)은 임무를 마치고 해로를 통해 관산으로 항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심한 바람으로 풍랑이 거세 더 이상 항해를 할 수 없게 되자 인근에 있는 개도에 상육하면서 인연을 맺게 됐다.
며칠 후 풍랑은 잠잠해 졌다. 그러나 군수공은 안심할 수 없자 가족을 남겨둔 체 고향으로 떠났다. 이후 가족들은 아버지의 보살핌을 받지 않고 섬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와 아들 24세 세인(世仁·1692∼?)은 섬 생활에 적응하며 생활을 꾸려 오늘에 이른다.
●세거지 : ⑥ 장흥군 장동면 율곡(栗谷) (대동보 2권p.393∼750)
장흥군 장동면은 관산에서는 북쪽에 있는 지역이다. 이 곳에 둥지를 튼 주인공은 판서공의 둘째 아들 정양재공(靜養齋公)의 고손자인 사극(師克·1719∼1793)이다. 그는 아버지(命禧)대까지 관산 와룡(臥龍)을 무대로 살았으나 밤실로 이사, 지금까지 세거를 이루고 있다.
장흥군이 펴낸 마을 유래지에 따르면 장동에는 밤실(栗忖) 마을에 3가구, 우동(牛峰)마을에 3가구, 삼정(三亭)마을에 2가구, 산동(山東)마을에 2가구 등 모두 10가구의 위씨들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밤실 마을 일가들은 인근인 장평(長平)과 보성군 웅치(熊峙) 등지를 넘나들며 살고 있다.
●세거지 : ⑦ 장흥군 유치면 단산(丹山) (대동보 2권p.395∼1024)
단산의 입향조는 26세 계은(溪隱) 또는 부계(富溪) 사갑(師甲·1704∼1756)이다. 공의 가계는 고조 22세 정양재(廷赫)·증조 청우당(淸友堂)·할아버지 운곡(雲谷)·아버지 잉여옹(剩餘翁) 명덕(命德)으로 이어진다. 공의 집은 몹시 가난해서 그곳 문씨(文氏)와 혼인하면서 처가로 들어가 살았던 것이다. 입촌 시기는 장남(守玉)의 출생(1735년·乙酉) 전후로 추정된다.
동기야 어떻든 후손들은 왕성하게 번성했다. 종가는 대단한 부자로 고을 원임이 부임해서 맨 먼저 찾아가 부임인사를 드리지 않으면 안될 만큼 영향력이 대단했다고 전한다. 본향인 관산을 내왕하기 위해 별도로 말을 관리할 위마답(爲馬沓)을 두었을 정도이니 알만하다. 상당한 부자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그러나 탐진강에 댐이 들어서면서 단산의 영화도 막을 내렸다. 그 좁은 고장에서 수백석의 수확을 올렸던 농경지와 한때 100가구가 살았던 마을은 형체도 없이 사라졌다. 아직은 수몰되지 않았으나 2005년에는 그 나마 보기 어려울지 모른다. 인걸도 산천도 모두 자취를 감춘 단산은 먼 역사 속에 잠겨있다.
●세거지 : ⑧ 보성군 회천면 영천리 도강(道崗) (대동보 2권p.519∼1024)
도강의 입향조는 행와(幸窩) 사급(師汲·1717∼1776)이다. 그는 단산의 입향조 사갑(師甲)의 중제이다. 역시 집이 가난해 무남독녀 남평 문씨와 혼인하면서 삶의 무대를 바꾼 경우다.
입촌 시기는 장남의 출생년인 1748년(英祖·戊辰) 전후로 보면 지금으로부터 250년 전의 일이다. 후손들은 일부를 제외하고 살림이 여유롭지 못했다.
그래서 공의 아들 4명중 첫째(守約)과 넷째인 수관(守寬)은 이웃인 웅치(熊峙)로, 셋째는 장흥군 안양면 검단(劍丹)으로 2차 이주해 오늘이 이른다. 특히 장손 집안은 종손을 비롯 28세 영흔(榮昕)의 후손들은 광주를 거쳐 대전에서 살고 있다. 한편 29세 의조(懿祚)의 후손들은 이리저리 이사하다 본향의 친척들과 연락이 끊겨 소식을 알 수 없다.
●세거지 : ⑨ 경북 예천군 다인면 마전(麻田) (대동보 2권p.546∼954)
경북 예천에는 청계공파의 후손 이외에 판서공파의 후손도 있다. 입향조는 사갑(師甲)의 다섯째 동생인 사중(師中)의 아들 27세 인지당(仁智堂) 수징(守徵·1740∼1795)이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장흥군 장평면 여의동에서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유는 아버지의 유택이 지금은 화운동(畵雲洞)에 모셔있지만 처음에는 여의동(如意洞)에 있다는 대동보 면주의 기록으로 보아 그렇다.
그러나 공의 유택은 ‘복거경상상주단밀장곡(卜居慶尙尙州丹密長谷)’이라고 적혀 있어 그가 예천의 보금자리를 개척한 것이 분명하다. 처음에는 상주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의 아들 28세 영운(榮運)이 예천군 다인면(多仁)으로 옮긴 것으로 짐작된다. 장평에서 이주한 시기는 전후사정으로 미루어 1760년대로 추정된다. 후손들은 이미 36세가 많은 것으로 보아 번성했음이 확실하다.
⑤ 안항공파 (顔巷公派)
계보 : 자량(自良)─종복(宗復)─유형(由亨)─진현(晉賢)─곤(鯤)
덕후(德厚)─정훈(廷勳)─동엽(東燁)─세성(世成)─명익(命益)─백원(伯元)
백상(伯祥)
세종(世琮)─명걸(命傑)─백남(伯南)
동훤(東暄)─세과(世果)─명호(命虎)─백윤(伯允)
백형(伯衡)
백린(伯麟)
백기(伯麒)
세선(世瑄)─명경(命慶)─백연(伯延)
백인(伯仁)
정렬(廷烈)─동식(東寔)─세보(世寶)─문덕(文德)─백규(伯珪)
백신(伯紳)
백순(伯純)
백헌(伯獻)
세린(世璘)─시양(侍養)─백호(伯昊)
동헌(東憲)─세형(世瑩)─명징(命徵)─백선(伯善)
백평(伯平)
백언(伯彦)
백팔(伯八)
세함(世咸)─명직(命直)─백훈(伯勛)
백협(伯協)
정명(廷鳴)─동현(東晛)─세호(世瑚)─명이(命履)─사탁(師鐸)
명득(命得)─백양(伯陽)
백유(伯愉)
백휘(伯暉)
●세거지 : ①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傍村) (대동보 3권p.1∼789)
안항공 덕후(德厚·1556∼1615)는 진사공의 다섯째 아들이다. 그도 역시 4명의 형들과 함께 당동에서 태어났다. 공은 혼인해 분가하면서 안항과 인연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 이유는 아호다. 지명인 안항(顔巷)을 아호로 썼다면 그곳에 살지 않고는 붙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설(異說)도 있다. 천관공(天冠公)은 오덕(五德)의 이주(移住) 순서를 맨 처음 판사공이 새터, 두 번째 운암공과 세 번째 판사공은 방촌, 네 번째로 안항공이 서항(西巷)으로 분가했다고 주장했다. 또다른 설(說)도 있다. 즉 병자호란 이후 방어사 정철(廷喆)이 방촌의 첫 입향조란 것이다.(전통문화마을 장흥방촌p.95)
물론 확실한 기록이 없으니 고증할 길은 없다. 안항공(또는 반계공)은 새로운 보금자리 계춘동(桂春洞)의 연소(蓮沼) 위에 임경당(臨鏡堂)을 짓고 후학의 강학장소로 이용했다고 전한다. 집터를 옮기면서 안항공파 후손들은 다른 파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승승장구 발전을 거듭한다. 공의 아들 3명(廷勳·廷烈·廷鳴)이 손자 11명을 낳고, 그들이 17명의 증손을 낳고, 또 그들이 21명의 고손을 낳고, 다시 고손들이 41명의 현손을 낳는다.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난 후손의 수는 오덕파(五德派) 가운데 가장 번성한 파로 자리 매김 됐다. 1999년 기묘대동보에 수단(收單)을 내지 않은 일가가 있지만 안항파는 대동보 3권(789페이지)을 전부 차지하고 있다. 후손들의 삶의 무대 또한 여러 곳에 분포되어 있다. 계춘동 일원에는 주로 안항공 차손의 직계인 동식(東寔)·동헌(東憲)·동황(東晄) 후손 일부만 살고 있다.
종손 준환(準煥·1933년생 癸酉)
●세거지 : ② 장흥군 관산읍 성자동(聖子洞) (대동보 3권p.2∼789)
후손이 불어나면 삶의 무대가 좁아지게 마련이다. 그러면 보다 나은 조건을 찾아 이사를 할 수밖에 없다. 안항공의 넷째 손자인 동훤(東暄)의 후손들도 마찬가지다. 26세 백윤(伯允·1735∼1768)·백형(伯衡)·백린(伯隣·미단)·백기(伯麒) 등 형제들의 후손들은 성자동을 거쳐 장흥읍 등지로 진출하게 된다.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농경지가 삶의 조건을 좌우했던 당시에는 그만큼 붙여먹을 논밭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백윤의 28세 영익(榮益·1792∼1850)의 유택은 성자동에 있다. 그러므로 그가 성자동에 입촌한 주인공이 아닌가 여겨지나 단정하기는 어렵다.
●세거지 : ③ 장흥군 안양면 월암(月岩) (대동보 3권p.5∼559)
월암에는 26세 서계(書溪) 백순(伯純·1737∼1815)의 후손들이 살고있다. 그는 영의재(詠而齋) 문덕(文德)의 셋째 아들이자 존재(存齋)의 아우이다. 공의 후손 중 누가 월암의 입향조인지는 모른다. 처음에는 후손들이 고향을 오가며 살았던 흔적이 많다. 공의 손자와 증손자들의 유택이 방촌의 다산(茶山)·관산의 송현(松峴)과 평화의 다전등(茶田嶝)에 있는 것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그러므로 월암에서 정착한 시기는 30세 희식(希植·1846∼1927)대가 아닌가 추측된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경제적으로 여의롭지 못하다가 차츰 형편이 풀려 여유가 생긴 것으로 보인다. 후손들은 발전해서 인재와 재물을 갖춘 집안이 됐다.
●세거지 : ④ 해남군 옥천면 대산(大山) (대동보 3권p.9∼640)
안항공의 후손 중 25세 명직(命直)의 둘째 아들인 백협(伯協·1733∼1815)의 자손들이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에서 살고 있다. 이들의 해남 정착도 처음에는 몹시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공을 비롯 아들 도수(道洙)·손자 영옥(榮玉) 등 3대의 유택이 해남이 아닌 고향에 묻혀있다. 어떤 인연으로 객지에 보금자리를 잡았지만 경제적 여유를 갖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린 것이다.
해남에서의 뿌리는 증손대에 이루어진다. 29세 진조(鎭祚·1875∼1931)의 유택부터 이곳에 묻힌다. 그러나 그의 아들대로 접어들면서 장남만 터전을 지키고, 작은아들은 경기도 양주군 양적면 석우리로 이사, 그곳에서 살고 있다.
●세거지 : ⑤ 보성군 보성읍 우산(牛山)·회천면 군학(群鶴)·영천(聆川) (대동보 3권p.162∼724)
안항공파 후손은 보성읍 등 3개소에도 살고 있다. 공의 둘째아들 정렬(廷烈)의 다섯째 아들 동인(東寅)의 증손 26세 보극(輔極·1721∼1781)의 후손들이 그 주인공들이다. 공의 장남 도성(道聖)과 손자 영박(榮璞)은 종형 백순(伯純)과 같이 장흥 안양면 월암에서 살았다. 그리고 차남 도환(道煥)은 관산 신동(新東)에서, 손자 인조(麟祚)는 월암에서, 증손자 삼식(三植)은 관산에서 살았다. 이렇게 삶의 무대가 각각 다른 것은 손자와 증손을 양자로 이었기에 나온 현상으로 보인다.
또 도성의 둘째아들인 영육(榮堉·1787∼1837)은 안양에서 살았으나 그의 둘째 증손인 31세 계봉(啓奉·1891∼1950)은 보성군 보성읍 우산리에서, 다섯째 증손인 계효(啓孝·1899∼1973)는 보성군 회천면 군학리에서, 영육의 셋째 아들인 계조(繼祚)는 회천면 영천리에서 살고 있다.
●세거지 : ⑥ 순천시 낙안읍, 보성군 보성읍 봉산(鳳山)
안항공의 셋째 아들 정명(廷鳴)의 후손 일부가 순천의 낙안읍과 보성군 보성읍 봉산리에 살고 있다. 그들은 반계공(정명)의 둘째 고손자 명택(命澤·1710∼?)의 손자 28세 영옥(榮玉)의 후손들이 순천시 낙안읍에 살고 있다. 그리고 명택의 고손자 30세 기식(琪植)의 후손이 보성군 보성읍 봉산에서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