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7 10:41
6) 행원파 (杏園派)
관산파는 자량(自良)의 두 아들 중 큰아들 종복(宗復)이 유형(由亨)·작은아들 유정(由貞)으로 갈라져 유형 후손은 진보(晉寶)·인손(仁遜)·대성(大成)의 곡성현감파(谷成縣監派), 진수(晉秀)·전(醴)·덕원(德元)의 양곡공 덕원파(暘谷公 德元派), 진수·전·덕린(德疑)의 종사랑파(從士郞派), 진수(晉秀)·방(箚)·덕남(德男)의 주부공파(主簿公派)와 진현(晉賢)·곤(鯤)·덕홍(德弘)·덕의(德毅)·덕관(德寬)·덕화(德和)·덕후(德厚)의 오덕파를 이뤄 관산파를 이룬 것은 이미 살폈다.
유정 후손은 원충(元忠)·억문(億文)·대용(大用)의 괴봉공파(魁奉公派), 원충·억문·대방(大方)의 직장공파(直長公派), 원충·억무(億武)·대의(大義)의 첨정공파(僉正公派), 원충·억무·대례(大禮)의 참판공파(淙判公派), 원충·억장(億章)·대경(大經)의 상주영장공파(尙州營將公派), 원신(元信)·문필(文弼)·인행(仁行)의 인행, 원신·문보(文甫)·대기(大器)의 충청수사공파(忠淸水使公派). 원신·문보·대홍(大洪)의 부장공파(部將公派)로 행원파를 이룬다.
(1) 괴봉공파 (魁峯公派)
계보 : 자량(自良)─종복(宗復)─유정(由貞)─원충(元忠)─억문(億文)
대용(大用)─홍주(弘宙)─산보(山寶)─천추(天樞)─영만(英萬)─경한(慶漢)
복만(宓萬)─시구(時玖)
정보(廷寶)─천기(天機)─필만(必萬)─시정(時鼎)
시성(時聖)
천표(天杓)─혜만(惠萬)─시경(時烱)
시우(時瑀)
상만(相萬)─시침(時琛)
천두(天枓)─성만(聖萬)─시철(時喆)
국보(國寶)─천자(天者)─재만(載萬)─경덕(慶德)
세만(世萬)─경창(慶昌)
천회(天會)─득만(得萬)─수징(壽徵)
익만(翼萬)─한징(漢徵)
천상(天相)─태만(泰萬)─일징(一徵)
구징(龜徵)
혁만(赫萬)─원징(原徵)
서보(西寶)─천후(天厚)─당만(當萬)─경일(慶逸)
●세거지 : ① 장흥군 장흥읍 행원(杏園) (대동보 4권p.1∼558)
우선 행원의 지명에는 두 가지 설(說)이 있다. 하나는 그 옛날 행원에는 살구나무가 많아서 살구의 정원(庭園)을 뜻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옛날 동네 뒷산에 행원사(杏園寺)라는 절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그런 행원과 행원파는 언제 누가 어떤 동기로 인연을 맺었을까. 역시 기록은 없다. 후손들에 따르면 괴봉공과 행원과의 인연은 혼인으로 맺어졌다고 한다. 즉 처가가 광산 김씨라서 자연스럽게 연고가 된 것이다. 그러나 위씨가 행원에 살기 시작한 시기는 임진왜란 전후가 아닌가 여겨진다.
괴봉공은 왜란 당시 행원에 거주했는지 평화에서 살았는지 모른다. 다만 분명한 것은 공을 비롯해서 의병대열에 참여한 집안형제인 대의(大義)·대례(大禮)·대경(大經)·인행(仁行)·대기(大器)·대홍(大洪) 등의 유택이 모두 평화에 있다. 행원에서 살면서도 유택은 평화에 장사했는지 아니면 평화에서 살았기에 그랬는지 모른다.
이런 이유로 평화에서 가장 오래 거주한 파는 행원파라고 볼 수 있다. 관산파는 유형(由亨)의 사전사후에 용산(蓉山)의 어산(語山)을 거쳐 관산으로 이거한다. 자공은 사월(沙月)·관북파(關北派)는 평화를 떠나 용산 사월방(沙月坊)에서 살다 장손을 남겨둔 체 멀리 함주를 개척하러 떠났다. 결국 평화에는 행원파만 남아 (29세) 조상들이 개척한 보금자리를 지켰다고 추정된다.
대동보 면주(面註)로만 보면 괴봉공의 4손자(山寶·廷寶·國寶·西寶) 중 서보(1602∼1676)에 의해 이루어졌다. 큰형과 둘째형의 유택은 포곡(浦谷)에, 셋째형의 유택은 대덕(大德)에 있는 반면 그의 유택은 행원 고래등(古來嶝)에 있다. 그 후 둘째형 정보의 둘째 아들 천표(天杓)의 후손들이 행원에 터를 잡아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평화나 행원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행원파가 시들어간 시기는 괴봉공 사후로 여겨진다. 그는 문중은 물론 장흥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지도자였다. 혁혁한 전공을 세운 4촌과 종형제들도 사별하거나 각자 살길을 찾아 헤어지고 그마저 세상을 떠나니 지도력에 큰 공백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서보(西寶)는 평화에서 행원에 자리를 잡아 오늘의 세거지를 만들지 않았나 생각된다.
행원파의 중심은 괴봉공파다. 그 괴봉공파는 평화를 떠나면서 여러 곳으로 흩어졌다. 종파는 주로 행원을 지키나 지손들은 인근 유치(有治)·장동(長東)·장평(長平)·보성(寶城)·고흥(高興) 등지는 물론 전북(全北)·제주(濟州)·충남(忠南)에 이르기까지 많은 곳에 분포되어 있다. 그들의 객지생활은 여의롭지 못해 이곳저곳을 배회한 듯한 족적이 면주에 나타나고 있다.
종손 懸鍾(1936년 丙子)
●세거지 : ② 보성군 득량면 해평(海平) (대동보 4권p.24∼520)
보성군 득량면 해평에는 장흥 위씨가 상당히 세를 이루며 살고 있다. 이쪽의 갈래는 괴봉공·홍주·산보·영만·경한·치명까지 행원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의 아들 27세 영한(榮漢·1751∼1811)대에 보성 조양(朝陽) 서촌(西村) 즉 지금 해평에 자리를 잡았다. 그가 고향 행원을 벗어나 이곳에 보금자리를 잡은 것은 향후에 이루어질 득량만 간척지의 풍부한 농경지를 가질 수 있다는 희망으로 결단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세거지 : ③ 고흥군 대서면 금마 (대동보 4권p.24∼520)
보성군 득량면 해평에 정착한 후손 일파가 이웃 고흥에 둥지를 틀었다. 주인공은 영한의 고손인 길환(吉煥·1853∼1911)이다. 그는 처음에 고흥군 도촌면 기남(起南)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아들 성수(聖洙)는 대서면 남당(南堂)에 정착한다. 그의 형제와 일가들은 해평과 조성(鳥城)은 물론 순천·여수 등지로 나가 살고 있다.
●세거지: ④ 보성군 미력면 화방(華枋) (대동보 4권p.25∼539)
보성군 미력에도 위씨의 세거지가 있다. 그들은 천추(天樞)의 둘째아들 시구(時玖)의 후손들이다. 27세까지 행원에 살다가 유치에 살던 아들을 입양하면서 삶의 무대가 격변하게 된다. 양자 덕조(德祚)는 태생지에서 그대로 눌러 살았으나 큰아들 숙(攻)은 장평에, 둘째, 셋째는 유치에서 산다. 그러다 숙의 아들 계빈(啓斌)은 보성군 미력면 화방리로 이사한다.
이후 후손들은 그 곳에 정착한다. 그러나 방계 후손들은 유치와 장평에 사는 흔적이 면주에서 확인되고 있다. 한 자리에 정착하지 못한 것은 그만큼 생계유지수단에 여유롭지 못해서 빚어진 결과일 수 있다.
●세거지: ⑤ 전북 김제시 공덕동 신곡(新谷) (대동버 4권p11∼273)
전북에도 행원파의 일부가 산다. 괴봉공의 8대손이 그 주인공이다. 28세 영원(榮源)의 둘째 아들은 처음 전북 부안군 변산으로 들어가 살았다. 그러나 그의 아들 상용(相庸)은 만경평야가 펼쳐진 김제시 공덕동 신곡으로 옮겨 살고 있다.
●세거지: ⑥ 충남 옥천군 안내면 오덕(五德) (대동보 4권p.69∼388)
최근에는 충북 옥천군 안내면 오덕에도 위씨가 산다. 괴봉공 현손인 수징(壽徵)의 후손들이다. 괴봉공·홍주·국보·천회·득만·수징·치도·영재·태조·억근(億根)의 장남 계수(啓秀)가 개척한 보금자리다. 그곳에 정착한 위씨 중 일부는 경기도 평택시 오산리에 진출해서 살고 있다.
●세거지: ⑺ 제주도 서귀포시 표선읍 하천(下川) (대동보 4권p.82∼455)
괴봉공파의 역외(域外) 세거지 가운데 가장 큰 규모는 제주도의 위씨들이다. 이곳은 28세 영수(榮壽·1825∼?)가 개척한 세거지다. 그가 언제 무슨 이유로 당시에는 교통도 불편한 이곳에 정착하게 됐는지 알 수 없다. 나이만 따져보면 19세기 초엽에 태어났으니 아마 1850년 전후에 개척하지 않았나 여겨진다. 이는 어디까지나 짐작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