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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위씨 성씨표기 통일원칙


무왕(武王)BC 12세기에 주()나라를 세웠다. 그의 아버지는 은()나라 서백(西伯)이었으며, 성은 희(). 이름은 창()이다. 무왕 발()은 문왕(文王)의 맏아들로 폭정으로 백성을 못살게 한 은나라 주왕(紂王)을 쳐서 천자가 됐다. 무왕의 동생이자 문왕(文王)15째 아들 희고(姬高)는 형을 도와 주나라를 창업한 공으로 필지(畢地)를 봉토 받아 대부가 되면서 성이 희씨에서 畢氏로 바뀐다.

필고(畢高)의 후예 필만(畢萬)은 춘추시대 진()나라 헌공(獻公)이 이웃나라를 정복할 때 참승(驂乘)으로 참전한다. 그 공으로 BC 661년 위지(魏地)를 봉토 받아 대부(大夫)가 되면서 畢氏에서 위씨(魏氏) 성의 태시조가 된다. 이후 제후국인 위나라는 BC 453와 함께 삼가분진(三家分晉)한 후 BC 403년 주나라 위열왕(威烈王)으로부터 왕호를 받아 178년간 왕업을 유지한 전국칠웅이다.

대종회는 이상과 같은 위씨 성의 유래와 자전(字典)을 근거로 성씨 표기의 통일을 기하려 20147월에성씨 표기 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특위는 종파와 법조 및 학계 씨족사전문가 등 15명으로, 이들 위원들은 그 동안 진지한 연구와 토론과정을 거쳐 아래와 같은 이유로 성씨표기 통일 원칙을 채택하오니 종원들께서는 이 원칙에 따라 성씨 표기를 통일해 줄 것을 권고키로 결의했다.


20151121

장흥 위씨 대종회 성씨 표기 통일 특별위원회 



<아래>

 

첫째, 위씨의 성씨는 지명(地名)과 국명(國名)에서 비롯된다. 즉 중국 산서성(山西省) 예성현(芮城縣)에 있는 옛 지명 魏地가 태시조 畢萬公의 봉토지다. 그러므로 사성(賜姓)과도 성격이 다르다.

 

둘째, 위씨의 성씨 윗나라 위자는 지명도 되고, 국명도 된다. 그리고 국명으로 쓰면 나라 위자이며, 성씨로 쓰면 성 위자인 것이다. 따로 성 위자는 없고, 오직 나라 위자뿐이다.

 

셋째, 漢字象形, 指事, 會意, 形成, 轉注, 假借 6개 조자(造字)의 원칙과 부수(部首)로 이루어지며, 以形索意는 즉, 글자의 모양(자형)은 구조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나라 위자는 변에 자의 회의문자이다. 따라서 귀신의 위원이란 뜻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넷째, 조상들이 써온 이른바 성 위자변의 귀신 의 꼭지 점을 빼고 모방진 그릇 방()또는 상자 방()을 반대로 쓰는데 이렇게 생긴 부수는 자전 214개의 부수(部首)에는 없다. 부수가 없는데 써 온 것이다. 최초로 한자 자전을 저술한 나라 허신(許愼)은 모두 540개 부수에 9353자에 이른 자전을 펴냈다. 자전에 따르면 상형(象形) 149, 지사(指事) 17, 회의(會意) 21, 형성(形聲) 27자 등 214부수이다.

 

다섯째, 조선시대 조정의 교지나 조상들이 쓴 성씨 표기는 귀신 귀자()를 금기하고, 붓으로 썼던 글씨이다. 이 글씨는 북위 장맹룡비(張孟龍碑), 당나라의 구양순의 구성궁예천명(九成宮醴泉銘)의 나라 위자, 나라 강희대자전의 위자, 표기는 간체자(簡體字)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위씨 성의 표기를 놓고 소모적인 논쟁은 무익하다. 그러니 컴퓨터나 옥편에 나온 대로 쓰는 것이 옳다. 다만 간체자도 그것은 같은 자이다. 왜냐하면 옛날 왕조시대에 한자의 본고향 중국이나 조선에서도 비석(碑石)이나 교지(敎旨)에 그렇게 썼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쓰고 싶은 대로 그냥 쓰되 자녀들에게는 성씨의 위자는 나라 위자가 맞다라고 가르쳐야 한다. 이는 자라나는 세대에게 성씨의 혼란을 덜어주기 위해서다. 더러 성위 자가 따로 있는 것처럼 주장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나라 위자 뿐임을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성자표기통일 위원회가 표기원칙을 밝힌 것은 어디까지나 선언적이다. 따라서 강제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마치 영문 표기도 WI라고 했으나, 종원들 마다 wee 또는 wie 등으로 표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지만 미래세대의 혼란을 덜기 위해 선언이다. 이는 기성세대의 의무이고, 문중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20151121

장흥 위씨 대종회 성씨 표기 통일 특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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