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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지역 서원과 사우, 묘제 견학 후기

 

지난 4월 23일부터 24일까지 1박 2일에 걸쳐 영주와 안동에 다녀왔다. 대종회 씨족문화연구소(소장 위정철)에서 안동지역의 주요 서원과 사우, 그리고 묘제를 견학하기로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풍기의 소수서원과 후기에 건축되어 정형화된 서원인 안동의 병산서원을 둘러보았다. 사우와 묘지는 안동권씨 능동재사와 권태사묘, 안동김씨 태장재사와 김태사묘, 그리고 안동 태사묘를 찾았다. 한편 숙소는 하회마을의 하동고택(중요민속자료 제177호)으로 정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전통마을을 탐방하고 사대부고택을 체험했다.

 

첫 번째로 들린 소수서원은 고려 때의 유학자 안향을 향사하는 곳으로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다. 건물의 배치 형식이 정형화되기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어서 일반적인 서원과는 분위기가 다르다. ‘白雲洞’(백운동)이라는 편액이 걸린 강당을 중심으로 좌우로 제사와 강학 공간이 나뉘어져 있으나, 전체적으로 공간의 구분이 분명하지 않다. 누각, 동재와 서재, 강당, 사묘 등의 배치도 정돈된 모습이 아니다. 하지만 다음날 들린 안동 병산서원은 전학후묘의 건물 배치로 공간 구분이 분명하다. 안동지역 재사의 배치가 서원의 형식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병산서원과 같은 정형화된 모습은 사우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봉정사 가는 길목인 서후면 능동리에는 안동권씨 능동재사와 권태사묘가 있다. 능동재사는 권태사의 묘제를 지내기 위한 곳으로서, 조선시대 재사 건립 문화와 제례행사의 규모를 짐작하게 하는 대표적인 건물로 평가 받는다. 그리고 서원의 배치 형식을 적용한 재사이다. 누문인 추원루를 들어서면 ‘陵洞齋舍’(능동재사)라는 편액이 걸린 본채를 중심으로 동재와 서재가 자리잡고 있다. 동재 옆에 전사청과 임사청 및 주사가 작은 마당을 중심으로 튼口자형을 이뤄서 전체 배치가 日자형이다. 또한 재사를 구성하는 각 건물과 방의 성격을 규정하는 패찰들이 그대로 붙어 있어 구체적인 용도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권태사묘는 재사 맞은편 산줄기의 완만한 산등성이에 위치하고 있다. 500여년 동안 실전되었던 것을 1470년 16세손이 『동국여지승람』을 보고 찾았다고 한다. 봉분 전면의 우측에는 '高麗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權幸墓’(고려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권행묘)라는 묘비가 있고, 상석과 망주석에 이어 문인석이 차례로 서 있다. 삼중대광이라는 높은 관직이나 번성했던 후손들에 비해 소박한 형태의 원형 분묘이다. 정1품 관직에도 불구하고 묘소의 석물 배치도 단촐한 점이 특이하다. 용인의 정몽주묘나 양평의 정창손묘처럼 왕릉급으로 묘지를 조성한 것과는 다르다.

 

그런데 이곳을 답사하면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묘지의 형국은 천등산 주봉이 흘러내려 만든 옥녀단좌형의 명당이라고 하는데, 능선을 따라 묘소 3기가 직계 가족처럼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시조공 묘소 1기만 있는 일반적인 모습과는 다르다. 권태사묘 아래에 16세손의 묘가 있고, 맨 끝에는 풍산류씨 류운룡 부친의 묘소다. 오랫동안 실전되었던 묘지를 후손들이 찾았다고 하지만, 지석을 발견하지 못한 점도 논란거리다. 장동면 연하리의 제암산 자락에 자리잡은 충렬공의 묘소와 비교된다. 장흥위씨도 500년 이상이나 실묘했던 묘소를 다시 찾아 관리해왔기 때문이다.

 

봉정사 삼거리에서 우회전하면 곧장 안동김씨 태장재사와 시조 묘단이 나타난다. 태장재사라고 하면 재사 건물 전체를 일컫는 것이며, 배치 형태는 튼日자형을 취하고 있다. 건물 구성은 口자형의 재사와 一자형의 이상루, ㄷ자형의 관리사로 나뉜다. 이 가운데 재사는 ‘台庄齋舍’(태장재사)라는 편액이 걸린 몸채와 동서재로 구성되어 있다. 내정보다 한단 높게 조성되어 있으며, 제수를 준비하는 유사실과 전사청, 참제원실로 꾸며져 있다. 이상루는 재사의 전면에 있는 누각으로 시제 후에 음식을 먹거나 문중회의를 여는 장소이다. 재사 오른쪽에 위치한 건물은 관리사 영역으로, 평시에는 이곳 측문을 통해 재사로 들어갈 수 있다.

 

태장재사도 능동재사처럼 각 부분이 용도에 따라 명확히 구분되어 있다. 또한 70여칸에 이르는 웅장한 규모로 보아 세력이 큰 성씨의 재사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전국에서 400명 이상이 모이는 대규모 묘제를 매년 10월 올리는 공간이다. 그리고 재사 건물은 민속자료 제26호로 지정되었으며, 미리 예약하면 고택체험도 가능하다. 방문시에 재사의 각 부속실도 용도별 패찰 대신 일률적으로 호실 표시를 하여 고택체험실로 활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편 재사 위쪽에 위치한 단소는 천등산 끝자락의 산등성이에 자리잡고 있다. 700여년전에 자리잡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묘지의 위치를 찾아 단소를 마련한 것이다. 김태사 단소는 돌로 두른 사각형의 봉분으로 고려시대 무덤 양식을 취하고 있다. 단소 앞에는 ‘三韓壁上三重大匡亞父功臣金宣平墓壇’(삼한벽상삼중대광아부공신김선평묘단)이라는 제단비와 상석 및 장명등이 있고, 그 앞에는 문인석과 망주석이, 그리고 한단 내려와 무인석과 망주석이 차례로 서 있다. 석물의 배치는 2쌍의 망주석 위치가 특이하다.

 

묘지 석물은 혼유석과 상석 및 묘표에 이어 망주석, 동자석, 문무인석, 장명등, 석양 등의 순으로 배치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문하시중과 영의정을 각각 역임한 정몽주묘나 정창손묘의 석물이 이렇게 배치되어 있다. 이처럼 석물이 제대로 갖춰진 묘지들을 보면, 충렬공의 묘역에는 몇가지 아쉬움이 있다. 묘비가 상석의 측면이 아닌 묘지 전면에 위치한 것이 어색하고, 혼유석이나 장명등은 설치되지 않았다. 물론 봉분 주변에 곡담도 없는데, 이는 화강암 풍화토질을 고려하면 잔디 관리를 위해서도 필요할 것 같다. 그리고 ‘忠烈’(충렬)이라는 시호로 보나 문하시중을 역임하신 관직으로 보아 무인석도 함께 배치해야 될 것 같다.

 

태장재사는 능동재사와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재사의 전형으로 평가 받는다. 재사의 규모가 전국의 종친들이 한자리에 모여 묘제를 올릴 수 있을 정도로 크고 웅장하면서도 간결하고 검소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조선 중기 족보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실전된 시조공의 묘소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점은 평가 받을 만하다. 전래된 기록이 빈약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묘소 일대를 찾아내어 번듯한 단소를 조성한 것은 안동김씨의 세력을 보여준다.

 

한편 안동시내의 중심인 북문동에는 태사묘가 있다. 과거 안동대도호부가 자리했던 웅부공원의 바로 옆에 자리잡고 있다. 고려 건국시 왕건을 도와 후백제 견훤을 토벌한 개국공신인 삼태사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 곳이다. 따라서 이곳은 안동김씨와 안동권씨, 그리고 안동장씨의 성지인 셈이다. 성종 12년(1481)에 후손들이 묘우를 세울 터전을 마련하고, 중종 35년(1540) 현재의 위치에 사묘를 건립하였다. 이후 임진왜란과 6.25 동란 때에는 전란에 휩싸이면서 전소되어 재건을 거듭했다.

 

누각 건물인 경모루를 들어서면 전면에 강당인 숭보당이 있고, 좌우로 동·서재가 자리잡고 있으며, 그 뒤쪽으로 태사묘(사당)가 있다. 역시 서원의 배치 형태를 철저히 따른 것이다. 삼태사의 위패를 봉안한 태사묘의 묘정 좌측에는 ‘高麗三太師廟庭碑’(고려삼태사묘정비)가 세워져 있고, 우측에는 태사별로 묘비가 나란히 자리잡고 있는데, 용모양을 새긴 머릿돌이 돋보인다. 그 외에 유물을 보관한 보물각과 차전놀이용 동채를 보관하는 차전각을 비롯하여, 전사청, 고직사, 안묘당 등이 있다.

 

안동 태사묘는 장흥위씨의 하산사와 같은 곳이다. 1300여평의 경내 공간을 마련하여 세 성씨의 시조공을 배향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현재 강당인 숭보당에서는 안동지역 전통 예절 교육의 중심으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또한 지역민들은 태사묘가 안동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데 대해 자부심이 매우 강하다. 마치 안동이 우리나라 유교문화의 중심이라고 확신하는 듯하다. 문화해설사의 자신감에 가득찬 모습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언젠가는 하산사의 미래도 이런 모습이길 기대한다.

 

1박 2일간에 걸친 씨족문화연구소의 안동지역 견학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낄 수 있었다. 안동은 역시 영남 유림의 중심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게 유교적인 전통을 잘 지키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규모도 웅장했지만 격식도 철저하게 갖추려고 노력한 흔적들이 돋보였다. 다른 성씨들의 잘 갖춰진 사우와 묘제를 둘러본 것은 사고의 폭을 넓혀주는 좋은 경험이었다. 특히 본관 장흥에서 멀리 떨어진 안동을 방문한 것이어서 더욱 의미있게 느껴졌다. 이러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후원한 대종회(회장 위자형)에 감사드린다.

 <씨족문화연구위원 苑谷 위상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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