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씨와 관련된 고사성어(1)
원산 위정철
고사성어와 사자성어는 같은 뜻이 아니다. 고사와 사자성어는 고사 여부에 따라 구분된다. 고사성어는 춘추전국시대에 많이 이루어졌는데 위나라와 관련된 고사를 2회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 주)
1. 결초보은(結草報恩)
진나라(晉)의 대부(大夫) 위무(魏武)는 첩(妾)이 있었다. 어느 날 위무가 병으로 몸져눕게 되었다. 아직 제정신일 때 아들(魏顆)에게 일렀다. “내가 죽으면 서모를 개가(改嫁)를 시켜줘라.” 했다. 그 뒤 병이 심해 죽게 되었는데, “내가 죽으면 저 여인은 순장을 시켜라.”라고 유언을 했다. 위과는 “정신이 있을 때의 명령을 좇아서 서모를 개가를 시키리라.”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서모를 개가시켜줬다.
이후 진(晉)과 진(秦)나라 간에 전쟁이 일어나 위과는 晉의 병사로 전투에 나갔다. 위과는 秦의 두회(杜回)와 싸우다가 위험에 이르렀는데 두회가 풀에 걸려 넘어져 위과가 두회를 생포하는 큰 전공을 세웠다. 그날 밤, 위과의 꿈속에 한 노인이 나타나 “나는 그대가 출가시켜 준 여인의 아비요. 그대는 아버님이 제 정신일 때의 유언에 따라 내 딸을 출가시켜 주었소. 그 후로 나는 그대에게 보답(報答)할 길을 찾았는데 이제야 그 은혜(恩惠)를 갚은 것이오.”라고 했다.
2. 삼인성호(三人成虎)
전국시대 위(魏)나라 혜왕(惠王)은 조(趙)나라와 강화를 맺고 그 증표로서 태자를 조나라에 볼모로 보내게 되었다. 당시에는 국가 간에 흔히 있는 관행이었다. 그러나 귀한 신분인 태자를 타국에 홀로 보낼 수는 없으므로 돌봐 줄 후견인 한 사람을 붙여야 했다. 이때 발탁된 사람이 방총(龐葱)이란 대신이었다. 방총은 이윽고 출발에 앞서 왕에게 하직 인사를 하게 되었을 때, 방총은 임금에게 이렇게 물었다.
“전하! 지금 누군가가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한다면, 전하께서는 믿으시겠습니까?”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누가 믿겠소.” “그러면 또 한 사람이 같은 소리를 한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역시 나는 믿지 않을 거요.” “만약 세 번째 사람이 똑같은 말을 아뢰면 그때도 믿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때는 믿어야겠지.” 이 말을 들은 방총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 간곡한 목소리로 임금님에게 말했다.
“전하! 저잣거리에 호랑이가 나타날 수 없음은 애도 알 만한 상식입니다. 그러나 예컨대 ‘없는 호랑이를 사람 셋이 만드는 셈’이지요. 신은 이제 조나라로 떠나거니와, 아마도 신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여럿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조나라 한단(邯鄲)은 이 대궐에서 저잣거리보다 수천 배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라 신은 변명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쪼록 전하께서는 이 점을 참작해 주십시오.”
“과인의 아들을 맡기면서 어찌 경을 의심하겠소? 절대 그런 일 없을 것이니 안심하고 떠나도록 하오.” 그러나 방총이 태자를 모시고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그를 헐뜯는 참소가 임금의 귀를 어지럽히기 시작했다. 혜왕도 처음에는 일축했으나, 같은 소리가 이어지자 귀가 솔깃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 태자는 귀국하게 되었지만, 방총은 끝내 돌아올 수 없는 신세가 되었다.
3. 절부구조(竊符救趙)
전국시대 사군의 한 명인 위공자 신릉군(信陵君) 무기(無忌)는 위소왕의 막내로 안리왕의 이복동생이었다. 신릉군은 덕과 지혜를 겸비했으며, 인자하고 겸손하며 예의가 발랐다. 그래서 선비들이 사방 수 천리에서 앞을 다투어 모여들어 식객이 3천 명이나 되었다. 그러나 신릉군은 이 중에도 동문(東門)을 지키는 후영이란 문지기를 스승처럼 위했고, 백정 주해(朱亥)를 귀인처럼 대우했었다.
기원전 256년 안리왕(20), 진의 소왕은 조 군을 장평에서 물리친 후 도읍 한단을 포위했다. 조의 혜문왕과 평원군은 안리왕과 신릉군에게 구원을 청하자 장군 진비(晉鄙)에게 10만 군사를 주어 조나라를 돕게 했다. 이에 진소왕이 사자를 보내 이렇게 말했다. “만약 제후 중에 누구든 조나라를 돕는 나라가 있으면 조나라를 격파한 후 반드시 군사를 돌려 그 나라를 공격하겠다.”라고 위협했다.
뜨끔한 안리왕은 진비에게 진격을 멈추게 했다. 신릉군은 어쩔 수 없이 후영의 조언을 받아 왕이 총애하는 여희(如姬)를 통해 병부(兵符)를 훔치고, 그 병부로 군대를 가로채려했다. 그러나 진비가 병부를 인정하지 않자 주해가 진비를 격살한다. 신릉군은 영을 내려 “부자와 형제가 함께 군중에 있으면 아비와 형은 즉시 귀국하라. 형이 없는 자 또한 귀국해 부모를 봉양하라.”라고 했다.
이렇게 하여 남은 8만 군사를 이끌고 진격하여 조나라를 구했다. 조나라 평원군은 신릉군과 처남매부였다. 즉 누나가 평원군의 아내이다. 신릉군을 병부를 절취한 죄로 인해 10년이나 귀국하지 못했다. 이 ‘절부구조’는 정도(正道)가 아니라 패도(覇道), 즉 패자의 도이다. 곧 인의(仁義)에 의한 것이 아니라 무력과 권모술수를 통한 패업의 추구이다. 전국시대에나 가능했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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