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에 ‘대흥시옹(大興詩翁)이 있었습니다.
- 박형상(변호사, 서울) -
현금이야 ‘이청준, 한승원’ 선생님을 비롯하여 사회각계각층에 다양한 인재를 배출하였지만, <장흥읍지 정묘지(1747)>의 ‘대흥방 편’은 그 기재내용이 퍽 빈약하였다. <천관> 독자들이 서운해 할 수 있겠으나, 그 시절에는 ‘문풍(文風) 혜택을 못 받은 오지(奧地)로, 소과입격자 1인, 무과급제자 1인도 없다’고 했다, 바로 그 무렵 1751년에 노년의 ‘위씨 선비’가 천관산 남쪽에 낙남(落南)하였고, 이후 15년간 살다가 78세에 대흥(大興) 사람으로 타계하였다. ‘간암(艮庵) 위세옥(1689~1766)’ 선생으로, 만시(輓詩)에서 ‘대흥시옹(大興詩翁), 오차시호(烏次詩豪)’로 불려졌다. 그런 영광스런 호칭 배경은 과연 어떠했을까?
1) ‘대흥방 문풍(文風)’을 진작한 최초 선비라 할 수 있다. - 1751년경 2차 낙남(落南)을 계기로 ‘간암 위세옥’은 ‘대흥방 도천(陶泉/초당)’에 신와(新瓦)를 짓고 활동을 시작하였다. ‘개거기천(開渠祈泉)축문, 대(代)신흥(新興)제인 지신제(地神祭)축문, 천룡제(祭)축문’ 등 지역행사에 참여하는 애정을 보이면서, 1752년에 대흥(大興) 앞바다 네 섬에 대한 <사도(四島)설진방략>을 썼으며, 인근 재산가들에게 학자금(學資金) 출연을 제안하는 ‘권분학자(勸分學資)상(上)근방군자인장(引狀)’을 보냈다. 특히 1754년에 <대흥방 향약(鄕約)>을 성안하고서 장흥부사에게 올린 글에서 문화 불모(不毛)상태를 통렬히 지적하고서 문풍진작(文風振作)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대흥면 향약성립후 본부(本府)에 보낸 글>, ‘명교예법(名敎禮法) 삼강오륜(三綱五倫)과 거리가 멀다’고 하면서도, ‘대박질실(大樸質實) 기풍은 아직 남아있으며, 성대기상(盛大氣像) 인정상후(人情尙厚)하며, 순박고풍미(淳朴古風味)가 없지 않다’고 부연하였다.
2) 그가 머문 곳은 어디일까? - ‘간암’은 낙남 거처로 천관산의 끝자락 ‘도천(陶泉/초당)’을 선택하였고, <행장>에 따르면, ‘도천’에 새 집을 지으면서 비로소 ‘간암(艮庵)’ 편액을 사용하였다. ‘간암’의 간(艮)은 “끝에 이르러 머물 곳에 머문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고읍방 방촌’ 인근에 있는 ‘신기, 가남쟁이’를 ‘간암정(艮庵亭)’에 결부하는 견해도 있으나, <간암 행장>에도 나오지 않는 사정이다. 또한 “간암 당대에는 초당(草堂)이 없었고, 간암의 손자 대에 이르러 초당이 성촌되었다”고 보는 일부 견해가 있다지만, 1747년부터 추기된 <장흥읍지>에 이미 ‘초당(草堂), 위씨촌’이 나왔다. ‘초당(草堂)’이 ‘초당(草堂)’으로 굳어진 것은 ‘간암처사(處士)’라는 초야(草野)선비의 독서 강학처로 공인된 사정에 연유했을 것. 1766년경 ‘도천, 초당’에서 타계한 간암을 기진 만시(輓詩)에서 ‘은암 김응룡(1747, 소과생원)’은 “초당적막(草堂寂寞)”이라 표현했다.
3) 탑산사(塔山寺) 시 – 아쉽게도 대부분 시문이 일실되고 말았다. 비록 영조에게 ‘위세봉’ 이름으로 올린 <구폐(救弊)6조, 7실자(實字) 응지상소,1734>가 있고, <가사 임계탄>의 작자로 지목되며, <만혼사(1737)>도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 식견과 문학적 성과를 알려주는 대부분 자료들은 유실되고 말았다. 최근에 출간된 <간암선생문집, 장흥문화원, 2020>은 퍽 다행스런 일이다.
- 탑산사(塔山寺) (도천(陶泉) 노인, 장흥읍지 정묘지, 역 위의환)
千年傑構今何狀(천년걸구금하상) 천년 뛰어난 건물 지금 모습 어떠한가
半面穨甍不耐高(반면퇴맹불내고) 반쪽 용마루 감당 못해 무너져 내리네
謝屐靑山行㯙蠟(사극청산행철납) ‘사운영’의 청산유람은 밀랍을 거두었고
謫仙黃鶴輿雄豪(적선황학여웅호) 적선 ‘이백’은 황학 타던 웅호(雄豪)였네.
4) 안타까운 인생사 – ‘위덕화. 위정철, 위동전’을 잇는, 위씨3대 무과급제자 집안 후손이지만 서출(庶出)이었다. 부친 위동전(1649~1713) 타계 후 악화된 환경 속에서 간암(艮庵)은 서울과 관산(장흥)을 오가면서 가히 ‘과거 40년’을 거듭했다. 아마 서울에서든 장흥에서든 이방인(異邦人) 경계인(境界人)이었을 처지에 그 마지막 정착지로 ‘대흥방 도천(陶泉)’을 선택했다. 그는 위씨집안 족손 ‘위백규’가 ‘병계 윤봉구’ 선생의 제자가 되도록 주선하였다.(1765년에 ‘위백규’는 소과입격을 하였다) 또한 ‘경화사족 여흥민씨’ 집안과 ‘하향한문 장흥위씨’ 집안의 인연을 잇는 중개자 역할을 하였다. ‘대흥 초당’에도 제자들을 두엇을 것이지만, 선생 만년에는 건강 악화에 경제적 곤궁으로 크게 불우했다.
5) ‘간암’을 추모하는 만시에 드러난 평가 – 결코 언사치레 과장으로 볼 수 없는, 칭송일색이다. 대흥시옹(大興詩翁, 김몽룡), 좌해문장 경향망사(左海文章 京鄕望士, 김몽룡), 오차시호(烏次詩豪, 임시덕), 관산부자(冠山夫子, 김덕만), 효유전가(孝友傳家, 조윤락), 남국아사(南國雅士, 현명직), 고명북학(高名北學, 정규환), 선종후신(先宗後身, 문덕호), 불후도천(不朽陶泉, 백관후), 사표일문(師表逸文, 위명호), 시주선(詩酒仙, 위명현), 애종사기(愛宗捨己, 위명경), 효제군자 향리사종(孝悌君子 鄕里師宗, 문언룡), 낙여인위선 유공유대이(樂與人爲善 惟公有大而, 위백규), (한편, 위백규의 부친 ‘위문덕’은 “시중인(詩中人)우(又)예중인(禮中人) 도천본색 명여경(陶泉本色 明如鏡)”이라 했다.) 간암선생은 천관산 남쪽의 용지(龍池) 부근, 청교저수지를 바라보는 연지리 산자락에 묻혔다.
덧붙인다. 1) 이제 이 시대의 ‘대흥시옹, 오차시호’는 누구인가? 황학(黃鶴)을 타고 올, 제2제3의 ‘대흥시옹, 오차시호’의 출현을 기대해 본다.
2) 간암선생의 호(號)로도 사용한 ‘도천(陶泉)’은 혹 ‘도자기 생산’에 연관된 샘(泉)에서 유래한 것 아닐까? 옛 지명 ‘오차현(오아현)’에서 유래한 ‘오차시호(烏次詩豪)’의 ‘오차(오아)’ 역시 ‘검을오(烏), 아(兒)’로 ‘가마<烏兒’에서 온 것 아닐까? 지난번에 필자가 제기한 ‘대흥(大興) 가마터 산지說’에 공감하면서, 그 산지 사례를 제시해 준, 어느 <천관> 독자분의 각별한 관심에 감사드린다.
※출처: 월간천관 2021.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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