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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冠山과 邊山에서 東征艦 建造


元, 中書省에 보낸 보고서 확인
옛날 천관산은 소나무가 울창했다. 그러나 몽고가 1231년부터 침략한 후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전함을 건조하면서 발가벗었다 한다. 이 정도의 사실은 이미 알고 있으나 구체적으로 언제 누구에 의해 동정함을 제조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고려조정이 원나라 중서성에 보낸 다음의 전함조선 완료 보고서에는 그 전말이 확인된다. <필자 주>
1273년(癸酉) 대장군(大將軍) 나유(羅裕)를 원(元)에 파견하여 중서성(中書省)에 상서하기를, “금년 (1274년) 정월 3일에 조정의 지시를 받고 대선(大船) 300척을 건조하도록 즉시 조치를 취했으며,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허공(許珙)을 전주도(全州道)의 변산(邊山)으로, 좌복야(左僕射) 홍녹주(洪祿遒)를 나주도(羅州道)의 천관산으로 보내 목재를 준비시켰다. 또 시중(侍中) 김방경(金方慶)을 도독사(都督使)로 임명해 그 휘하의 관원과 장병들은 모두 정예들로 뽑았으며, 필요한 인부와 공장(工匠), 물품을 전국 각지에 사람을 파견하여 공급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재촉했다.
정월 15일에 한 곳에 모아서 16일에 공사를 시작했고, 5월 그믐에 완전히 끝내서 배는 대선과 소선(小船) 합계 900척 건조를 완료했으며 사용할 물품도 모두 원만하게 구비했다. 이 기록으로 보면 천관산과 변산에서 건조된 동정함(東征艦)의 규모는 대선(大船) 300척과 소선 600척 등 900척이며, 건조기간은 정월 16일부터 5월 말까지 4개월 보름간이다. 특이한 점은 13세기 전북은 전주도, 전남의 나주도로 불렀다. 유능한 3품관들에게 업무를 분담시켜 뱃머리를 돌려서 이미 김주(金州)를 향해서 출발시켰으니, 여러 재상들은 황제에게 잘 보고하여 주십시오.”라고 했다.<고려사>1274년 6월 16일(음) 갑술(甲戌), 1274년 7월 21일(양) <검색도사 野雲 제공>

 

麗元 東征艦隊의 戰果
麗元聯合의 東征軍은 두 차례에 걸쳐 日本을 침공했다. 1차 정벌은 1274년(甲戌 忠烈王1) 10월 도독사 김방경을 총사령관, 몽고군은 홀돈을 도원수, 홍다구를 우부원수, 고려군 류복형을 좌부원수로 삼아 몽고군 25,000명, 고려군 8,000명, 수로안내원 6,700명 등 모두 31,700명이 지금 경상남도 合浦(馬山)에서 900척의 전함에 분승, 스시마(對馬島)와 일기도를 거쳐 하카다항(博多港)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본군의 저항으로 11월 철수했는데 생존자는 13,500명에 불과해 66%가 희생된 것이다.
2차 동정군은 1281년(辛巳 忠烈王7) 5월 1차 때의 지휘관이었던 박구, 김주정 등이 포함됐다. 麗元연합군의 규모는 정벌군 9960명, 초군(哨軍) 및 수군 9729명 등을 포함해 10만여 명이나 됐는데 이들도 스시마(對馬島)와 일기도를 거쳤다. 그런데 忽魯勿塔의 몽고수군 113명과 초병 36명이 돌연 행방불명되고 말았다. 김방경은 초전에는 상당히 전과를 올리기도 했으나 지휘관이 죽고 신풍(神風)으로 11월 생환한 연합군은 1,939명에 불과할 정도로 대패했다. 그러나 그 기록이 엉터리라란 설도 있다.
원래 몽고군은 수군이 없었었다. 몽고군은 1231년 처음으로 고려를 침략한 이후 이듬해 고려가 강화도로 천도하자 멀리서 쳐다보기만 했을 정도로 무력했다. 그런데 일본을 치기 위해 1, 2차에 걸쳐 13만명의 동정군을 편성했지만 전투 한번 제대로 못해보고 13만명 중 1만 5천명만 생환할 만큼 대패한 것이다. 바다를 모르고 무모하게 나섰다가 가미가제라는 신풍을 만나 철저하게 패퇴한 결과를 빚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고려백성들은 전함을 건조하고 군비를 조달하느라 그 삶이 어떠했겠는가

 

2016.07  圓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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