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28 15:14
存齋集과 四君子(존재집과 사군자)
존재공께서는 조선후기 유학자요, 실학자로서 사군자에 대한 여러 글을 남겼다. 매난국죽(梅蘭菊竹) 중에서 어느 것을 가장 좋아하셨을까? 해답은 매화이다. 우문현답(愚問賢答)일지는 몰라도 국역 존재집(6권)을 읽다보면 유독 매화에 대해 관심이 깊으셨던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아마도 그 이유는 매화만이 열매를 맺기 때문이리라. 먹거리가 어려웠던 시절 백성의 허기를 달래주어 배를 채워줄 수 있는 매화, 배의 답답함을 해결해주는 약재로서의 매화, 늦겨울 초봄의 전령사로서의 매화, 중풍을 막아주고 쉽게 변질되지 않는 매화, 결국 원시유학의 본질을 숭상한 실학자적 입장에서 보면 어쩌면 당연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매화를 자신의 분신(分身)으로 자처하여 존재공 스스로를 매군(梅君)과 동일시하고 있다.
1. 존재집에 나타난 매(梅花))
2. 존재집에 나타난 난(蘭)
1) 난을 키우며(培蘭) 1집 108쪽, (34세 1760년)
3. 존재집에 나타난 국(菊)
1) 국화를 보내며 서암 이종욱에게 절구 한 수 드리다(移菊送恕菴 李宗旭 因呈一絶)1집 59쪽,
2) 영이재에서 중양일에 선친이 국화를 감상하며 지었던 시에 공경히 차운하여(詠而齋重陽日 敬次家君賞菊韻) 1집 115쪽, (36세 1762년)
3) 분국(盆菊) 1집 124쪽,
4) 송국은 만고에 변하지 않으리(松菊萬古心) 1집 54쪽,
5) 솔과 대는 푸르고 국화도 향기롭네(松竹靑蔥黃花菲) 1집 191쪽,
6) 부계당 국화필 때 만나자고 나와 기약했네(期我俯溪菊放輝) 1집 192쪽,
7) 국화꽃에 청주로 그 향기 감상하네(菊花淸䲤賞芳䋯) 1집 196쪽,
4. 존재집에 나타난 대(竹)
1) 대숲 언덕(竹塢)1집 70쪽,
2) 또(又) 송죽은 뜰까지 그늘 드리우고(松竹侵廷蔭) 1집48쪽, (34세 1760년)
3) 조용한 대밭에 집 있으니(翛然竹裏館) 1집 49쪽, (37세 1763년)
4) 말끔한 대숲은 푸른 소나무와 어울리고(䨹㿛脩篁伴翠松) 1집 90쪽,
5) 두 언덕의 솔과 대는 갈수록 그윽해지고(兩岸松篁境轉幽) 1집 110쪽, (34세 1760년)
6) 세간에 그 무엇이 대나무의 서늘함만 같으랴(世間諭似此君凉) 1집133쪽,
7) 노년의 교감은 대나무가 있을 뿐이라오(歲暮神交有此君) 1집 152쪽,
8) 조용한 꽃과 대나무는 사시의 마음이라(從容花竹四時情) 1집 159쪽,
9) 한겨울 풍경속에 솔과 대가 있구려(大冬風物有松篁) 1집 172쪽,
10) 대에 돌던 바람소리 멀리 솔밭까지 건너네(竹轉風聲度園松) 1집181쪽,
5. 원산의 四君子와 信陵君 魏無忌, 四君子 水墨의 發展과정
사군자는 예부터 文人들이 餘暇로 一筆法으로 사군자를 즐겨 그렸는데, 四君子란 춘추전국시대에 학문과 덕망이 높았던 제나라 孟嘗君, 조나라 平原君, 초나라 春申君, 위나라(大梁) 信陵君을 지칭하며 이를 매화(梅), 난초(蘭), 국화(菊), 대나무(竹)로 상징한 것이다. 사군자는 이러한 상징성 때문에 문인화의 기본적 화제(畵題)로 오랫동안 그려져 왔다. 繪畵의 한 장르로 사군자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명대의 화가인 진계유(陳繼儒)가 지은 梅蘭菊竹 사보(四譜)에서 처음 사용되었고, 이 사군자에 연꽃(蓮), 모란(牧丹), 목련(木蓮), 포도(葡萄), 파초(芭蕉), 소나무를 더하여 十君子라 한다. 文人들이 사군자를 많이 그린 이유는 이 식물들이 의미하는 상징성뿐만 아니라 종이, 먹,벼루 등 최소한의 도구로 쉽게 그림을 그릴 수 있기 때문에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사군자는 水墨畵를 배우는 기초적인 수련 과정에 속한다. 그 까닭은 蘭 잎에서 線의 變化를, 대나무 줄기에서 筆力을 매화 가지에서 構成을, 菊花 꽃잎에서 먹 色의 濃淡의 能力을 배울 수 있는 適切한 素材이기 때문이다. 기법의 습득 단계는 가장 단순하고 기초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난초에서 시작하여 대나무, 매화, 국화의 순서로 진행된다. 매화는 눈 속에서 꽃을 피우는 강인한 생명력 때문에 선비의 절개와 불굴의 정신을 뜻하게 되었다. 특히 북송 때의 시인 임포(林逋)가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자식 삼아 평생 은거한 이후 그 상징성이 더욱 유행하여 선비들이 그림 소재로 즐겼다. 19세기에는 매화그림의 대가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이 매화를 지극히 사랑하여 매화병풍을 둘러치고 매화 벼루에 매화 먹을 갈아 매화시를 쓰고 매화차를 마셨다고 한다.
난초와 국화는 대나무와 매화보다는 한참 후에 문인화의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南宋의 조맹견(趙孟堅, 1199∼1267경)이 묵란을 잘 그렸다는 기록이 있으나, 난초가 군자의 상징으로 각광받게 된 것은 元初 정사초(鄭思肖, 1239∼1310)부터였다. 난초는 예로부터 아름다움과 향기가 귀하게 여겨 초나라 시인 굴원(屈原)의 시에서는 충절의 대명사로 등장하고 공자는 군자와 동일시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묵란도는 난초 그림과 서예의 관련성을 더욱 강조한 김정희(金正喜) 이후 본격적으로 성행하게 되었다. 조선말기 난초그림의 쌍벽인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과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은 각각 물기 많은 춘란(春蘭)과 난 잎의 끝을 뭉툭하게 뽑아내는 건란(乾蘭)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사군자의 중에서 가장 먼저 접하는 것이 바로 난인데, 난을그린다 하지 않고 친다라고 했다. 이 말은 한 번에 난의 잎을 쳐 올리지 않으면 난의 잎을 표현하는데 자연스럽지 못하고 화선지에 번지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국화는 가장 늦게 유행하였다.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의 자는 이숙(頤叔), 호는 현재(玄齋) 또는 묵선(墨禪)이다. 겸재(謙齋) 정선(鄭敾)에게 그림을 배워 묵국도(墨菊圖)가 그려지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심사정은 부드럽고 밝은 화훼초충도(花卉草蟲圖)의 분위기를 내는 담채화를 즐겨 그렸다. 김홍도는 담백한 필치의 수묵화 외에도 계절감이 느껴지는 자연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국화의 모습을 서정적으로 묘사하였다. (원산의 四君子와 信陵君 魏無忌, 四君子 水墨의 發展과정에서 발췌)
6. 연어(然語)에서 자신을 梅君으로 자처하다
연어는 원지(原旨), 신회(神會), 학례(學禮), 詩<사회(寫懷) 1수 및 창수(唱酬) 26수>로 구성되어 있다. 차군(此君)은 대나무의 별칭. 왕휘지(王徽之)가 집 둘레에 대나무를 심어 놓고 “어찌 하룬들 차군(此君)이 없을 수 있으랴!”에서 나왔다. 존재공께서는 차군(此君)을 대나무(竹)를 예스럽게 부르는 말을 적용하여 “매군(梅君)과 더불어 말 한 것을 연어(然語)라고 이름 붙이니(5집 311쪽)라고 설명하고 있다. 매(梅)에다가 군(君)을 붙여 매군(梅君)으로 하였다. 매군을 독립된 객체로 보아 자신과 독백의 방식으로 원지와 신회를 기술하고 있다. 원지에서는 37여개의 문답을, 詩에서는 10여개의 문답과 더불어 시(時)에서 세월의 흐름을 표현하고 있다. 학례에서도 매군을 등장시켜 성선설과 묘제 및 신주 등에 대해 주고 받으며 마지막에는 “자화가 나는 현인이 못됩니다. 하지만 만약 좋은 벗을 얻는다면 반드시 소인의 대열에는 있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매군이 “구름낀 산은 천겹이나 되고, 바다의 파도는 하늘에 닿습니다” 사회(寫懷) 및 창수(唱酬)라는 시를 통해 “인생은 참으로 상심할 만하네(人生良可傷) 매군이짓다"로 끝을 맺는다.
원산(圓山) 위정철 씨족문화연구소장은 매화를 매군으로 의인화시킨 것을 세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1) 公이 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대화를 통해 기록한 자서전의 기록이다. 2)더 나아가 자가상담적 내면 치유과정이요, 성찰을 바탕으로 한 토론문학이다. 3)그래서 연어의 원지, 학례, 신회에서 밝힌 자신의 사상이 매군사회(시1수), 매군창수(시26수)를 통해 詩的 형상으로 집약된 것으로 파악했다. 한마디로 公 자신 스스로를 매화로 의인화하여 매군으로 자칭(自稱)했다고 볼 수 있다. 연어에서는 매군과의 132구의 질문과 답변 중 매군은 64회나 등장한다. 公의 나이 49세 1775년 씌여진 詩 “매화절구 열여섯 절”, 반곡 족숙 명경의 고매(磻谷族叔 命慶 古梅) 1집 193쪽, (49세 1775년), 유일한 수필인 반곡 족숙 명경 고매기(磻谷族叔 命慶 古梅記) 6집 72쪽, (49세 1775년)에서 매군으로 자칭해야만 했던 공의 번뇌와 갈등에서 당시 시대상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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