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01.19 19:18
≪續傷往賦並序 全文≫
「余於丁酉秋八月迨旣望載病妻朴氏淨海越十八喪于舟上摧傷奈何勢難運傷草瘞於靈光境上傷懷之極見劉夢得傷往賦信乎先獲我心聊抒悲傷之意續而次韻其詞曰
噫歟欷吾誰傷兮傷斯人之我遺人情漸刷而少弛兮夫何越歲而愈悲招芳魂兮靡及淚潛兮無時歇疑形骸兮在何處祚一日而九馳境絶兮人稀風悲兮草衰欲往從兮末由籲蒼天而怨咨塊獨處兮山之中弔前迹於殘暉辱手澤於遺器兮撫芳塵於餘衣立遺墟兮求寢處黍離離兮露未晞昨宵夢裏之形影兮只以添恨而增悲人世常多喪匹兮慘痛誰似我者追惟新聘之日兮往在癸酉臘月旬下紛旣結縭以佩訓兮只知無違乎夫帷下新粧兮錦衾華襦天桃春曉兮標梅香徵歡溢新閨兮鼓琴瑟之陶陶酒滿淸樽兮動浮光之漪漪旁派則光生組綬兮先系則籍連貂笏幸與子而偕臧兮信天同而神比顧其行則靡虧兮語其才則亦具于歸當日兮一室懽如慈惠足以及人兮不致感者伊誰色溫而能厲兮語恭而非飴嘉度幽閒兮柔儀葳㽔恭事我兮多慧差對人而如癡宜家宜室兮門稱淑姿奠蘋六載兮幾盡誠敬之歸疑營家三歲兮每見勤苦之容謾擬百歲同室兮豈料人事擲空四十二春光易摧兮弱質遽罹於邪風還慮巳病之染我兮每勉我而遠通五月在外爲參商兮一體未足爲蚷蛩百端病裏之情兮手裁一幅和淚封忽余自牖而執手兮問先及兮來何從共含淚而相對兮兩心皆至於蒙蒙曾藥治未畿兮又何賊鋒之迫逢載一舟以浮海兮水幾遡兮山幾窮庶將一分之向蘇兮冀同歡舊園中何天意之未惠兮奄遭之波上凶音五內摧裂而哽胭兮不堪悲涕之淫淫情不能以自制兮豈知自傷之是葴鳴乎與子成說兮豈知有今異地孤瑩兮斷岸千尋恨未及期移封兮地茫茫兮天沉沉哀哀白首之單形兮豈獨留隙上光陰異日泉裏之則同兮更結此世之餘忱染莊生之吐血兮和古篇而悲吟」
〈해설〉
『내가 丁酉年(1597년) 8월 16일 병을 앓은 아내(박씨)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에 있다가 이틀 뒤인 18일 배에서 아내가 숨을 거뒀으니 최상(摧傷)함이 어떠했겠는가. 운상할 형편이 되지 못해 영광경상(靈光境上)의 풀숲에 시신을 묻고 슬픈 마음을 달랠 길 없어 유몽득(劉夢得)의 상왕부를 보고 내 마음처럼 느껴져 그 사(詞)에 차운(次韻)한다』 아 슬프도다. 내가 흐느껴 우는 것이 누구를 슬퍼함인가. 그 슬픔은 이 사람이 나를 버린 슬픔이네. 인정이 점점 지워져 조금씩 잊어져가는 데 어찌하여 해를 넘겨도 더욱 슬퍼지는가. 방혼(芳魂)을 불러본들 미치지 못함이여! 눈물만이 하염없이 흘러 그칠 줄 모르네. 형해(形骸)를 생각함이여 어느 곳에 있는가. 마음은 하루에도 구천(九泉)으로 달려가나 지경(地境)이 끊어져 인적(人跡)은 드물고 바람은 슬픈 듯이 불고 풀마저 시들었네.
따라가고자 하나 갈 수 가없어 푸른 하늘(蒼天)을 원망하며 탄식하네. 흙덩이처럼 홀로 뫼 가운데 서서 지난 일을 생각하며 저문 햇빛을 서러워하네. 그의 체취(體臭)를 찾으려 손 떼 묻은 그릇과 옷가지를 어루만지네. 유허(遺墟)를 찾아 헤맸으나 기장만 무성하여 이슬도 햇볕에 마르지 않았구나. 어제 밤 꿈속의 형영(形影)이여 단지 한(恨)만 더하고 슬픔만 더하구나. 세사에 짝 잃은 이가 많으련만 참통(慘痛)함이 어찌 나와 같으리요.
신빙(新聘)한 날을 더듬어보니 지난 계유(癸酉 :1573년)년 섣달 하순이었네. 분잡(紛雜)함은 끝나고 향주머니 속에 훈계(訓戒)담아 허리에 참은 단지 남편의 뜻 거스르지 않은 것만 알았네. 장막 아래 새롭게 단장함이여 비단 이불과 화려한 저고리였네. 천도(天桃)의 봄이 밝음이여 높은 가지 매화향기 그윽하네. 신방(新房)에 기쁨 넘침이여 부부의 정(情) 화락(和樂)하였네. 술이 맑은 술동이에 가득함이여 빛이 물결처럼 떠서 움직이네.
방파즉(旁派則) 적(籍)이 초홀(貂忽)에 이르렀네. 다행이 그대가 주어 함께 감춤이여 진실로 하늘과 같으며 신(神)에 비유하리라. 그 행실을 보면 이지러짐이 없음이여 그 재주를 말하여도 또한 갖추어졌네. 시집온 당일이여 일실이 기쁨이 넘치었네. 자혜가 족히 사람에게 미침이여 감동하지 아니한 자 그 누구인가. 얼굴빛 온화하고 말을 공손하나 유약하지 아니했네.
아름다운 태도 유한(幽閒)함이여 유순한 거동 아름다웠네. 공손하게 나를 섬기고 지혜롭고 부끄럼이 많았으며 사람을 대할 때는 어리석은 듯하였네. 집안을 다스림이여 가문에서 숙자(淑姿)라 칭찬하였네. 6년 동안 제사를 받음에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네. 분가해 살림한지 3년이여 매양 근고(勤苦)하였네. 부질없이 백세동실하자고 다짐함이여 어찌 사람의 일 헤아리랴.
속절없이 보낸 42년의 춘광(春光) 쉽게 꺾임이여 약질(弱質)에다 사풍(邪風)까지 걸리었네. 5개월 동안 밖에 있어 삼성(參星)과 상성(商星)처럼 멀리 떨어짐이여 한 몸인데도 노내기가 공공이처럼 하지 못하였네. 온갖 질병을 앓으면서도 다정함이여 손수 일폭을 만들어 눈물 섞여 봉해 두었네. 내가 갑작이 창문을 열고 손을 잡음이여 먼저 어디서 오느냐고 물었네.
눈물 머금고 서로 바라봄에 두 마음 하나같이 몽몽(夢夢)한데 이르렀네. 약으로 다스린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또한 어찌 적의 칼날을 만나는가. 한 배를 타고 바다에 뜸이여 물도 거의 거슬러 오고 산도 거의 다 하였네. 비록 일분의 살아남을 희망으로 구원중(舊園中)에서 같이 즐기기를 바랐었네. 천의도 어찌 그리 은혜롭지 못함이여 문득 파상(波上)에서 흉음을 만났네. 오장이 찢어지고 목이 메임이여. 슬픈 눈물 음음(淫淫)함을 견디지 못하겠네.
사무친 정을 억제하지 못함이여. 어찌 자상(自傷)하는 이 잠(箴)을 알았으리요. 아! 그대와 같이 말하였을 때 어찌 오늘이 있을 줄 알았으랴. 다른 곳 외로운 무덤이여. 천길 단애로다. 이봉(移封)치 못함을 한탄함이여. 땅도 망망하고 하늘도 침침(沉沉)하네. 슬프고 슬프도다. 백수의 홀몸이여 어떻게 세월을 보내리오. 뒷날 황천에 가서 같이함이여. 다시 이 세상의 남은 정성 맺으리다. 장자가 토해낸 피에 물들음이여. 고편(古篇)에 화답하여 읊으노라.
위덕의(魏德毅, 1540-1613)의 호는 청계, 충무공(忠武公) 이순신(1545-1598)보다 3년 앞선 1573년(선조 6)에 생원시에 합격했다. 임진년(1592)에 3개월간 걸어 의주(義州)로 가서 선조(宣祖)로부터 주부(主簿)와 병조좌랑을 제수 받고 영남 운향관(運餉官)의 임무를 맡아 경상도 선산까지 군량을 운반한 후 귀가했다. 이후 진원(珍原)현감에 제수했으나 취임하지 않고 청금 등 문중 자제 등 후학을 지도하며 여생을 마치자 병조참의를 증직됐다.
위덕의에 대한 문헌상의 기록으로는 명나라 장수 呂應鍾이 극찬하여 이르기를 여기서 치축험조(馳逐險阻)라는 표현은 험하게 막힌 것을 달려들어 물리친다라는 뜻으로 군량운반에 관련된 일종의 해결사적인 의미의 업적 평가로 보이기도 하나, 극찬에 적당한 연유는 확실치 않다. 그런데 이 날짜의 이순신이 백의종군하려 임지로 내려오다 다시 3도수군통제사로 제수된다. 이후 회진에 와서 쓴 정유 일기(Ⅰ)의 같은 날짜(정유) 8월 19일)을 보면 벼슬이 있는 자이되 이순신에 의해피란인(避亂人)으로 표현됐다.
기사를 보면 회령포 만호 민정붕(閔廷鵬)은 위덕의의 술과 음식 등에 매수되어, 전선(戰船)을 사적(私的)인 용도로 이용하도록 내어 주었기에 때마침 당도한 통제사 이순신에게 발각되어 곤장 20대의 처벌을 받았다고 했다. 또 배상렬이 지은 「임진왜란 외전」에서는 위덕의의 사적 용도란 전선을 이용할 정도로 규모 있는 전란 중의 상거래임을 의미할 것이며, 그의 솜씨 있는 장사수완은 명나라 장수 여응종의 찬사와도 무관치 않은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라고 서술해 사자명예훼손으로 고소해 유죄판결을 받았다.
한편 위덕의의 정유재란 때 아픈 아내 박씨를 살리기 위해 회진만호 민정붕에게 빌린 배에 태우고 해상 피난에 나섰다. 영광 어느 해변에 이를 때 아내가 숨을 거두자 어쩔 수 없이 해변의 숲속에 매장했다. 금슬이 남 달랐던 터라 공의 여한 또한 이를 데 없었다. 그 애틋한 마음을 적은 글이 바로 이 글이다. 이 글은 책장 설합에 두고 떠났다. 그러다 후손들이 우연한 기회에 공이 생전에 쓰던 물품을 정리하다 발견했다. 이 기록으로 말미암아 이순신의 일기 정유 8월 19일조의 진실을 밝히는데 결정적 단서가 된 것이다.
圓山 위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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