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25 15:42
*.2014년~2015년[장흥위씨 청장년회BAND]에 게재한 글에서 발췌하였습니다.
35세(1761년 辛巳)
스승에게 <古琴>을 보여주다
가을에 광주 <서석산(瑞石山)> 과 화순 동복(同福) 적벽(赤壁) 건너편에 있는
<물염정(勿染亭)>등을 유람하고 감회를 읊었다. 겨울에 스승을 찾아갔다.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 대해 문답했다. 한편 2년 전(1759)에
저술한 <고금>을 보여주자 스승은 그 끝에 시경(詩經)의「심경찬(心經贊)」16字를 써주었다. 심경찬은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전해주는 16자의 말씀 즉「人心惟危, 道心惟微, 惟情惟一, 允執厥中」 ‘사람의 마음은 위태롭기만 하고, 도를 따르는 마음은 지극히 희미하니, 오직 정밀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여 그 중용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의 금구(金句)인 것이다. 이
금구는 불가에서도 반야심경(般若心經)에 나온다. 공즉시색(空卽是色), 색즉시공(色卽是空)은 결국 같은 뜻이라고 풀이한다.
◇新鷰
蟄羽初來意氣來 칩거한 제비 처음 날아와 의도 새로운데
穿花拂柳報嬌春 꽃을 뚫고 버들 스치며 아리따운 봄을 알리네
分明隔歲慇懃意 분명해라 한 해 넘긴 은근한 뜻을
細語啼啼故趂人 지지배배 속삭이며 짐짓 사람을 따르니
◇晩春
滿架圖書萬院芳 시렁에 책이 가득, 정원엔 꽃이
가득
四山濃翠洪軒堂 온 산의 짙은 녹음이 집을 감싸 안네
等閑識得春風意 봄바람 부는 뜻을 알려고도 안하는데
流水聲中白日長 흐르는 물소리에 한낮만이 길도다
◇遊瑞石山
羾出塵埃翼迅風 빠른 바람 날개 삼아 티끌 속을 벗어나
逈臨穹岳四望同 아득히 높은 산에 오르니 사방 모습이 같구나
山川錯落三韓國 산천은 삼한 땅 여기저기에 널려 있고
天地褰開大海東 천지는 위대한 해동에 활짝 열렸네
萬壑靈觀皆造化 만학의 신령스런 경관 모두 조물주 솜씨이니
千年正氣幾英雄 천년의 정기로 영웅을 몇이나 냈는가
雙眸領略人間世 두 눈동자로 인간세상 두루 이해하면
消得經綸多少功 경륜에 얼마간의 공을 얻으리라
◇勿染亭
滄浪之上瑞石東 창낭천 위쪽 서석산 동쪽
天爲名區役化工 하늘은 명승지를 위해 조화공을 시켰으니
千古烟光歲碧瀨 천년토록 안개 빛은 푸른 물결 간직하고
一年風物染丹楓 한 해의 풍물은 단풍으로 붉게 물들었네
鳥歸錦石秋雲裏 새들은 가을 구름 속에 비단 바위로 돌아오고
人在江上畵幛中 사람은 구름 같은 장막의 물가에 있네
盡日淸遊猶未足 온종일 청아한 유람에도 여전히 부족해서
更隨漁火宿村翁 다시 고기 잡은 불 따라 촌옹과 함께 묵네
36세(1762년 壬午)
가뭄에 따른 窮乏을 탄식하다
장천재에서 지냈다. 덕산을 왕래한 기록은 없다. 스승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체류할 때 먹을 양식을 가지고 가야한다. 그러나 가뭄으로 양식조달이 어려우니 어쩌면
덕산으로 스승을 찾아가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 가뭄이 심해지면서 주민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二月 장천동(長川洞)> <청명(淸明)>과 ,<고한(苦旱)> 유월(六月)> 굶주림에 시달리는 농촌의 참상 등 가뭄에 따른
연작을 읊었다. 천관산 올라 <포봉기(蒲峯記)>를 썼다.
◇二月 長川洞
二月田家倒瓶甖 2월의 농가에는 쌀독 이미 바닥났고
不堪時事苦營營 시사를 감당 못해 허둥지둥 괴롭네
花開古峽鳥鳴磵 옛 골짝에 꽃피고 물가에 새우는데
惟有春風非世情 오로지 봄바람만 세정과 다르구나
◇淸明
無雨無花春欲窮 비도 없고 꽃도 없고 봄은 다하려 하는데
淸明時物也全空 청명절의 시물이라곤 하나도 없구나
晴窓靜對先天畫 맑은 창가에서 고요히 선천도 마주하니
自在風光六六宮 천지의 풍광이 육륙궁에 있는 것만 같구나
◇苦旱
靑冥雲氣太淸風 푸른 하늘의 구름과 맑은 바람이
戱作狂威幻作峯 장난삼아 세찬 위력으로 봉우리 만드는구나
待爾快心然後雨 네 마음이 상쾌해진 뒤에라야 비가 내린다니
其於人世烈燄烘 인간 세상에는 여전히 뜨겁게 달군 더위로구나
枯苗抽芒纔覆阡 마른 모가 싹을 틔워 겨우 두렁 덮였지만
賊風螟雨日相連 사나운 바람과 멸구 떼가 나날이 이어지네
只應肉食憂民食 벼슬아치들이 백성의 끼니를 걱정하겠지만
未必山人愁不眠 촌사람 수심 겨워 잠 못 자는 것만 같으리
◇六月
售田賣畜己春初 밭이랑 가축 팔았는데 어느덧 초봄이라
一粒何曾度夏餘 쌀 한 톨 남은 여름 어찌 보내려나
爲語門前索租吏 문 앞에서 세금 거두는 관리들에게 말하노니
姑紓民命待收畬 백성들 목숨 위해 추수까지만 기다려 주오
◇詠而齋重陽節 敬次家君賞菊韻
未承培植媚春光 심지도 기르지도 않았는데 봄볕에 아름답더니
委倒寒堦保晩芳 찬 섬돌에 뒤덮여 늦게까지 향기 온전하구나
直待凡花搖落後 다만 뭇 꽃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爲君珍重玉壺傍 너를 위해 진중히 옥호 곁에 두어라
◇蒲峯記 저술
37세(1763년 癸未)
증광시 對策에서 일등을 하다
가을 증광시 동당에서 일등을 했다. 이는 ‘대책(對策)에서의 일등이다’는 말일 것이다. 당시 선생이 반촌에 유숙(留宿)하면 권세가의 자제들이 만나자고 회유했으나 문을 닫고 거절했다. 반촌에서도 ‘위 선비는 비록 벽촌 출신이지만 학문의 수준이 높다’는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그 같은 소문으로 고문갑제들이 사귀자며 손을 내밀어도
뿌리치자 이후에는 ‘괴이한 사람’이라거나 ‘괴물’ ‘촌놈’이라는 등의 악의적인 별명으로 불렀다. 촌사람들은 고관자제들이 사귀자고 하면 혹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선생은
그들의 제의에 상대는커녕 거들떠보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 돌아오는 것은 험담뿐인 것은 빤한
결과인 것이다. 막내 동생 백순(伯純)은 감시(監試)에 합격했다.
귀가하는 길에 스승을 찾아뵙고 <경사차의(經史箚義>와 문답했다. 스승이 서재의 헌호를「存存齋」라고 지어 대자(大字)를 써주었다.
◇贈別任性汝 若源
故人拾我去 벗은 나를 버리고 떠나가
幾日到山陽 며칠이면 산양에 도착하겠지
雲影璣前水 구름 그림자 낚시터 앞 물에 비치는데
送君度石梁 그대를 보내고 돌다리 건네노라
◇任子中家吟
雲物埋山郭 구름은 산줄기를 묻었고
江聲繞石臺 강물 소리는 석대를 감도는데
翛然竹裏館 조용한 대밭에 집이 있으니
惟有淸風來 시원한 바람만이 불어오누나
38세(1764년 甲申)
三僻의 恨에 悲憤慷慨하다
3월 19일 밤 자는데, 마루의 벽에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 구암(久庵) 윤봉구(尹鳳九) 선생의 초상이 걸려있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본 영정은 녹색비단으로 배접됐고, 둘레는 상찬이 쓰여 있었다. 깜짝 놀라 일어나 영정이 걸린 벽에
차례로 절한 뒤에 <갑신 3월 감회>를 읊어 기렸다. 또 스승의 성정이기동이론에 대한 화답시를 짓기도
했다.
특히 세상 사람들이 삼벽(三僻)이라며 조소함을 <회포를 풀다(遣懷)>란 한시를 통해 ‘자신의 능력(人僻), 태어난 무대(地僻), 한미한 성씨(姓僻)라고 무시당하지만 요순의 포부로 산다’고 자부한다.
이후 1797년 풍환으로 옥과현감에서 물러나 경기전령에 제수되나 ‘저 백규는 해안가의 빈한한 백성으로 늘 삼벽을 제 분수로 삼았으니, 초목이 황량한 산과 흐르는 물에서 죽고 시드는 것은 본디 자기 자리입니다’라며 감영 유참봉에게 보낸 편지에서 재차 강조했다.
5월에 장흥부에 모함하는 송사가 접수되자 상경해 반촌에서 공부했다. 일종의 도피인 셈인데
사연은 확인할 수 없으나 대수롭지는 않았다. 가을에 한성시(漢城試) 종장(終場)에 합격했다.
겨울 남한산성 옥정사(玉井寺)에서 지내면서
<등남한산성(登南漢山城)>과 <재유남한<再遊南漢)> 등을 남겼다.
1년에 3차례나 한양을 왕래하였으니 아마도 생애에서 가장 장기간 체류한 것이다.
◇甲申三月感懷
太歲涒灘慢度臨 몇 번이나 갑신년을 맞지 했던가
百年中土尙羶祲 백년간 중원 땅은 오히려 오랑캐 냄새
朝鮮忍負神宗懷 어찌 조선이 신종의 덕을 저버리리오
天地明知孝廟心 천지는 효종의 마음 잘 알고 있네
大報壇崇仙御近 대보단은 높아 임금 수레와 가깝고
壽皇亭古刦雲沉 수황정은 오래되어 층층구름에 잠겼네
無窮宇宙英雄淚 끝없는 우주에서 영웅들 눈물 흘리는데
江漢東流水自深 강수와 한수는 동으로 흘러 절로 깊도다
◇夢見尤庵 寒水齋 久庵三先生眞影有感
嫡傳三世一心通 삼세에 걸친 전수가 한 마음으로 통했으니
不絶春秋在大東 춘추의리가 끊어지지 않고 우리나라에 있네
夢覺書窓增感慨 꿈에서 깨어 서창에서 감개한 마음 더하는데
海天朝日照丹衷 바다에서 떠오르는 해가 마음을 밝게 비춘다
◇遣懷
三僻由來世共鳴 삼벽이라 세상사람 모두가 비웃지만
每逢佳境獨吟詩 매번 좋은 경치 만나면 홀로 시를 옲조리나니
經綸器局雖非呂 경륜과 재주 비록 여상은 아니지만
堯舜襟期豈讓伊 요순의 포부를 어찌 이윤에게 사양하랴
暗不欺心天可質 하늘도 보장할 떳떳한 마음이며
學全師古我無疑 의심 없이 옛 성인을 배우고자 함이여
明窓晝永春風暖 긴긴 낮의 밝은 창에 봄바람 따뜻하니
幽人夢覺時正是 바로 은자가 꿈에서 깨어난 때라오
경윤과 재주가 여상에는 못 미치나 포부는 이윤에게 사양할 수 없다고 했다. 이는 겸양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하(夏)의 걸왕(傑王)을 쳐서 상(商)을 건국한 이윤(伊尹)이나 무왕을 도와 은(殷)의 주왕(紂王)을 쳐서 주(周)를 세운 여상(呂尙)에 뒤지지 않다는 자부심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재주를 알아준 지도자와 벽항출신, 끌어 줄이 없는 성씨로 태어난 것이 곧 삼벽이란 것이다. 김석회
교수는 ‘지금도 선생은 삼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진단하고 있다.
그의 진단은 정곡을 찌른다. 한국은 중앙중심이다. 경제도
학문도 다르지 않다. 가령 언론의 사건보도도 같은 비중이면 중앙에서 발생하면 크게 보도한다. 학계도 근기중심, 고관출신 위주다.
김교수는 ‘우리가 18세기
향촌사회와 문화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존재 선생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존재 선생의 삶과 문학은
보는 자가 보고자 하는 만큼만 그 실체를 드러내는 저 千古名勝 天冠山과 같은 신비한 존재다’라는 말을 우리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謹次久庵先生性情理氣同異韻
性心理氣語難盡 성심이기란 말로 다하기 어려우니
小子其如此說何 소생이 이 학설을 어떻게 말하겠는가
最是躬行到底後 으뜸인건 몸소 실천해서 끝까지 다다름이니
分殊原一自無差 만 가지 달라도 하나로 근본하면 어긋남이 없으리
◇登南漢西將臺
藜杖排磨折木榜 청려장 짚고 베인 나무 곁에 이르니
古城秋霽葉初霜 오래된 성에 맑은 가을날의 첫서리 내릴 때네
江環大野朝京邑 강은 큰 들에 에워싸서 한양을 조회하고
天作高山壯關防 하늘은 높은 산을 만들어 관문 역할 장대하다
無事元戎觀錦樹 일없는 장군은 단풍나무들만 바라보고
有功神廟食巫陽 공이 있어 모신 신며엔 무양을 제사 지내네
如何保障千年計 어찌해서 우리나라 천년 보전할 계획에
只得三良竹帛香 역사에 향기로운 삼양만 얻었던가
◇再遊南漢
危巒壘嶂互糾紛 겹겹이 높은 산봉우리 서로 얽히고 얽혀
海東形勝漢陽軍 해동의 빼어난 경치이자 한양의 주둔지라
砲垣撑柱天南壁 포대는 하늘 남쪽 벽을 지탱해주고
譙閣平臨薊北雲 초각은 계북의 구름에 가지런히 임했네
學士綱常山萬古 삼학사의 충절은 만고의 산과 같고
溫王功業國三分 온조왕으리 공업으로 삼국시대가 열렸지
書生未必憂時事 서생은 굳이 시사를 근심하지 않으니
且看無忘樓上文 다시 무망루 위에 걸린 글을 읽어 본다오
39세(1765년 乙酉)
生員覆試 합격, 進士가 되다
봄에 상경해 반촌에서 지내면서 2월 29일 생원
복시(覆試)에 합격함으로써 진사(進士)가 됐다. 연보
상으로는 28세 때인 1754년(甲戌)에 증광시에 응시한 이후 11년 만에 진사에 급제한 것이다. 사마방목(司馬榜目)에는 생원 3등 59위로 입격한 기록이 있다. 생원과 진사시를 통과해서 생원이나 진사
타이틀을 따면 본인 아래로 4대가 양반신분을 유지할 수 있을 수준이었으니 생원 및 진사시의 난이도 자체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웠다.
그리고 소과 통과한 사람들이 성균관에 입학하는데, 이 성균관에서 연 300일 이상 출석하지 않으면 대과 응시자격이 박탈된다. 설상가상으로
성균관에서는 시험도 엄청 많고 어려웠다고 한다. 10일마다 한 번씩 보며 한 달에 한번 또 보고, 한 단원이 끝날 때 또 본다. 월 평균 10회의 모의고사를 치른다고 한다. 일정 횟수 이상 최하점을 받으면
낙제를 시켰으며, 하루 출석 1점씩, 연 300점 이상을 채우지 않으면 대과에 응시 자체가 불가능했다
윤 2월에 스승을 찾아뵈었다. 여름에 고창 선운사의
도솔암(兜率庵)과 동쪽으로 광양 옥룡사(玉龍寺)를 유람했다.
진사시에 급제해서 마음의 부담을 조금 덜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런데 이전까지는 유람지에서
반드시 감회를 읊었으나 선운사와 옥룡사에서는 아무 시도 남기지 않았다. 혹시 산실된 것이 아닐까. 그래서 학계는 이해를 저작이 없는 무작년(無作年)으로 치나 1390년 고려 전복을 기도한 이성계세력을 제압하려다 장형 백대를
맞고 유배된 판사공 등 선조들 가운데 국가에 공을 세운 <장흥 위씨 충의록>을 썼으니 무작년은 아니다.
◇ 贈人
天賦全來有是非 천부의 자질 온전해도 잘잘못이 있거늘
人間何事不相違 인간사 어떤 일인들 서로 어긋나지 않으리오
蹠蹻場裏風鹿暗 도척과 장교의 마당은 풍진으로 어두운데
孔孟門前道路微 공자와 맹자의 길은 은미하기만 하는구나
旣識性焉從吾好 이미 성을 알았으니 좋아한바나 따르면서
勿欺心耳任他譏 마음을 속이이지 않을 뿐 다른 비방은 상관없네
新衣着處思先語 새 옷을 입을 때마다 선인의 말을 생각한다면
體胖眞工可庶幾 덕을 쌓는 진정한 공부도 거의 가까워지리라
<시를 지어 남에게 주다(贈人)란 제목의 한시는 제작연대를 알 수 없다. 이 시는 성리설을 통해 <삼벽>에서처럼 ‘비방을 해도 상관 않겠다’며 덕을 쌓는데 매진하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있다. <국역 존재집> 1권에 제작연대를 규명할 수 없는 한시는 34편이 있는데 규명해야할
과제이다.
◇長興 魏氏 忠義錄 저술
40세(1766년 丙戌)
마지막으로 스승과 問答하다
진사시험급제는 과장출입의
한 매듭이라 할 수 있다. 작년에 생원복시에 합격했으니 당연히 성균관에서 수학해야 한다. 입학했다면 1년간 300일
이상을 정해진 과정을 따라야 한다. 그럼에도 가을에 스승을 찾아뵙고 의문에 대해 문답했다. 그리고, 서울로 올라와 도봉서원을 찾아가 우암의 시를 차운해서 읊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으로 보면 성균관에 들어가지 않았음을 보여준 것이다. 성균관에
들어가지 않은 것은 복시에 대한 자신일 수도 있고, 아니면 경제적인 이유일 수 도 있다. 결국 진사시험의 합격으로 과장출입을 마감한 의도를 읽을 수 있다. 선생은
이후 2회 정도 복시에 응시하나 자의는 아닌 듯 보인다.
진사시험에 합격한지 31년만인 1797년(丁巳) 전주 감영의 유참봉(孟煥)에게 보낸 편지 내용의 한 대목을 보자. ‘돌아보건대 비루하고 졸렬한 제가 14, 5세부터 40세가 될 때까지 과거공부에 종사하여 한양과 지방을
분주하게 오갔으니, 당초 어찌 분수를 지키며 벼슬 없이 사는 것을 평안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다만 오로지 가업을 이어받아 업으로 삼다가 성균관에 올라 비루한 인간이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렸으니, 두더지가 강물을 마시듯 이미 배가 불렀고 요행을 바라는 마음은 벌써 사라졌는데 하물며 재주를 팔 일이 있겠습니까. 대책(對策)에 일곱 번이나 합격하고도 끝내 복시(覆試)의 관문에서 낙방하여 대과(大科)에 대한 희망은 운명처럼 끝났으니(중략)’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동안 몇 번이나 과거에 응시했을까. 연보의 기록을 보면 △1754년(甲戌) 28세 때 증광시 동당시 △1757년(丁丑) 31세 정시 응시를 권유받았으나 응시여부 불명 △1758년(戊寅) 32세 생원초시합격 △1759년(己卯) 33세 별시 생원초시합격 △1763년(癸未) 37세 증광시 동당 1등(대책 1등 착오일 가능성) △1772년(壬辰) 45세 아버지 권유로 증광시 동당 응시 △1785년(乙酉) 59세 생원 복시합격 등의 기록이 보인다. 만일 59세까지 과장을 출입했다면 무려 46년간이다. 과장출입 기사는 더러는 착오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대책을 7번이나 합격하고도 번번이 낙방했으니 그 심정을 어느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그래도 오직 부모를 즐겁게 해줘야 한다는 마음 하나로 버틴 것이다.
가을에 스승을 뵙고 『근사록(近思錄)』을 질문했는데 이때가 사제 간의 마지막이 됐다. '근사'란 자하(子夏)가 '간절하게 묻고 가까이서 생각한 것'(切問近思)에서 따온 것이며, '인간들이 날마다 쓰는
것'(人倫日用)과 밀접하게 관련된 사상이다. 이어서 상경해 도봉서원을 찾아 송시열의 시를 차운했다. 도봉서원까지
찾아가서 우암의 시를 차운해 읊은 것을 보면 그를 매우 존경했던 모양이다. 그의 이름이 왕조실록에 3000번 정도 나오고, 소중화주의자로 조선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서인영수이다. 그러나 주자의 글은 한자 한 획도 고치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정적을 죽이기까지 한 그를 우러러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도제(徒弟)에 따른 학통(學統)의 의리가 아닐까 싶다.
◇道峯書院次尤庵韻
滿庭秋色廟門開 뜰에 가득한 가을 색에 사립문은 열려있고
萬丈峯高水九回 만길 높은 봉우리에 물줄기 굽이도니
自是吾儒多感慨 이로부터 유학자를 감개한 이 많았거늘
先生又使後人來 선생은 또 후인들을 찾아오게 하는구나
◇山中雨
石灘輕噴玉 돌 여울은 가볍게 옥구슬을 뿜어내고
林霧細隨風 솔 안개는 가느다랗게 바람을 따르네
藥圃多春事 약포에는 봄날 일이 많기에
臨階喚小童 섬돌에 서서 아이들을 부르네
◇道峯書院次尤庵韻
滿庭秋色廟門開 뜰에 가득한 가을 색에 사립문은 열려있고
萬丈峯高水九回 만길 높은 봉우리에 물줄기 굽이도니
自是吾儒多感慨 이로부터 유학자를 감개한 이 많았거늘
先生又使後人來 선생은 또 후인들을 찾아오게 하는구나
41세(1767년 丁亥)
進士 농군 ‘社講會’를 이끌다
사강회를 출범시켰다. 선생은 생계의 주체로 나선다. 그리고
강경병진의 사강회를 출범시켜 일꾼들과 함께 손수 농사를 짓다. 이전 계당과 양정숙은 문중 어른들의 권유에
의해 서당을 운영했던 것이다. 그러나 사강회는 과장출입 30여년을
청산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향을 실현해보고자 스스로 선택한 교육과 농사를 동시에 실현하는 향약(鄕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강회는 선생으로서는 세 번째 서당(書堂)의 형태라 할 수 있다. 곧 성리학 이념과 사회적 경제적 여건을 조화시키는
것을 소명으로 여기고 선택한 교육의 방법일 수 있다. 곧 도학이념을 실현하는 방안으로 농사지으면서 공부하자는「향약」과「교육」의
병행을 꾀한 활동이랄 수 있다. 아마 선생의 사강회는 역사상 누구도 경험해보지 않는 운동이다.
그는 농사를 직접 지어보면서 문학적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이 무렵 가사(歌辭) <농가구장>과 <罪麥> <麥對> 보리 연작 등 주옥같은 작품들이 산출된다. 다만 <靑麥行>에 대해 김석회 교수(인하대)는 65세 작품일
수도 있다고 본다. 그리고 <권학가>의 제작 시기는 밝히지 않았으나 강회를 시작하면서 대상자들을 깨우치려는 의도로 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12월 7일 스승이 별세했다는 부음을 받았다. 스승의
타계는 큰 충격이었다. 그러나 부음을 늦게 받은 데다 바로 조문하기 어려웠다. 어차피 장례에 참여할 수 없었기에 문상을 차후로 미뤘다. 선생은
아마도 사강회를 통해 자신의 이상향을 실현하고 싶었던 것 같다. 다행히 구성들이 동족이라는 장점을 살려
강경(講耕)병진을 통해 품격 높은 고장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기 위한 길잡이가 <권학가>가
아니었을까. 학계는 <자회가>나 <농가구장>은
연구하나 <권학가>나 <합강정선유가>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않고 있다. 그러나 선생이 ‘사강회’라는 특수한 형태의 강경병진형 교육형태를 그 대상자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일종의 취지문이 <권학가>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한문식 취지문보다 당사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확인할 길은 없지만 <권학가>는 선생이
국문가사로 작품을 쓰게 한 동기를 부여한 촉매 역할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농가구장>과 <죄맥> <연년행> 연작이 사강회를 계기로 지어진 작품이
나올 수 있었다. 또 하나 다산초당 또는 다산정사는 선생의 학문적 성과가 결실을 맺은 공간라고 볼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장천재는 수학의 공간이며 다산정사는 저술의 공간이다.
◇ 講學 期間
명 칭
운 영 기 간
비 고
溪堂書堂
1748년(22세)~1751년(24세) 3년
계당학규 17조
養 正 塾
1755년(29세)~1758년(33세) 4년
橘友軒 사랑방
社 講 會
1766년(40세)~1769년(45세) 13년
강학과 향약시행
茶山精舍
1785년(59세)~1798년(72세)
저술과 강학
◇勸學歌
◇農歌九章
◇觀魚之樂
幾人爲履幾人書 몇 사람은 신을 삼고 몇 사람은 책을 보고
團坐桑陰罷午鋤 뽕나무 그늘 아래 한나절 김매기를 마치고 둘러앉았네
堪笑野人多事事 야인들은 일도 많다 비웃어 대지만
夕陽歸路又觀魚 석양에 돌아오는 길엔 고기 볼 여유도 있다네
壟上歸人意氣多 밭두둑에서 돌아가는 발걸음 의기도 많으니
澹煙斜日半肩菱 옅은 안개 지는 볕에 도롱이를 어깨에 걸쳤네
悠然獨嘯臨風久 물끄러미 홀로 휘파람 불며 바람을 쏘이나니
兒道山前有客過 아도산 앞으로 길손이 지나가는 구나
관어지락에는 사강회가 어떤 방식으로 운영됐는지를 동영상처럼 보여주고 있다. 일하고 쉬는
틈을 이용해 뽕나무 그늘 밑에서 일꾼 중 몇 사람은 짚신을 짜고, 몇 사람은 책을 보는 모습이 보인다. 바로 이게 사강회의 강과 경의 진면목이다. 그걸 야인들 즉, 일부 시기배들이 조소하고 있지만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고기 볼 여유와 휘파람 불며 바람 쐬는 기분은 모른다.
◇罪麥 (84句)
학계(김석회 교수)는 농가구장과 보리 연작을 ‘선생의 궁경 독서기의 서막을 알리는 표상에 해당하고 그 내용 또한 리얼리즘
시의 주요 전형 가운데 하나다’(중략)라며『죄맥』은
마치 ‘검사가 피고인의 죄상을 낱낱이 들추어 적은 기소장과
같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법관은 검사의
기소장을 보고 심리공판을 거쳐 유무죄를 판단해 선고하게 된다.
보리의 죄상을 보자. 짜다/ 성난 돼지 뺨과
고슴도치 털과 같다/ 오월 염천이 수확기라 모내기와 겹쳐 노동력을 분산시킨다/ 타작하는데 독한 티끌이 흙비처럼 난간에 날린다/ 까끄라기는 땀밴
이마를 벌레 쏜듯하다/ 패질하는 남정네 머리에 쑥대를, 키질하는
아낙 몸엔 독침을 쏜듯한다/ 고약한 껍질이 살갗에 붙은다 등이 파종과 수확에 따른 죄이다.
어디 그뿐인가. 방아를 찧어 삶아 놓으면 쉰 냄새가 진동한다/ 남긴 찌꺼기는 닭도 싫어한다/ 양양가가 없어 얼룩 뺨을 구더기처럼
만든다/ 뱃속에 들어가면 독침을 숨기고/ 밥을 지을 때도
두 번이나 불을 때서 삶은다/ 숱가락엔 잘 얹져지지 않고/ 그릇에
담으면 우뚝 솟아오른다/ 씹힌 촉감은 모래와 같고/ 살사와
방구는 악취를 뿜어댄다는 등이다.
보리의 단점을 나열하는 그 기상천외한 발상은 가히 선생의 문학적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다. 보리농사를
지어보지 않은 요즘 사람들은 보리를 웰빙식품으로 상찬한다. 그러나 가을에 파종하고, 봄에 두둑 밟고, 수확과 방아 찧고, 두 번 삶아 밥짓고, 먹은 후의 트림과 배앓이, 설사와 방귀 등을 겪어보면 그 단점을 죄로 다스리고 싶은 것이다.
◇麥對 (146句)
146구에 이르는 장편
『맥대(麥對)』는 검사가 적시한『죄맥(罪麥)』의 죄(數罪)에 대한 보리측의 항변이다. 일방적 단죄로 이루어진 『죄맥』과는 달리 화자와
보리 사이의 문답형식을 골격으로 하고 있으며, 이러한 문답을 매개하는 몇 구절의 지문(地文)을 동반하고 있다. 도입을 위한 지문(1-6), 보리의 항변(7-136), 화자의 사과와 자책(137-140), 마무리를 위한
지문(141-146)의 구조로 검사와 피고간의 격렬한 논리싸움을 전개하는 공판정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
『죄맥』의 주제는 본사(本詞)에 해당하는 보리의 항변이 드러나는데 대목마다
경전(經傳)이나 사서(史書)의 어구를 인용한다. 이는 화자가 부귀나 영화가 헛것임을 논증하면서 청빈한
삶을 강조하고 자기야말로 ‘악의악식’하지만 한토(寒土)의 삶을 지탱하는 실제적인 물적 기초임을 강조한다. 그래서「죄맥」의 결론부는 76구인데 반해「맥대」의 본사부는 130구에 이르고 있다. 마지막에는 아내에게 보리밥을 짓게 해서 먹고는
‘달기가 사탕 같다’며 보리를 평가한다.
◇靑麥行 (24句)
『청맥행』은 풋보리로
보리죽을 지어 춘궁기를 넘기는 농촌의 실정을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다. 결국 검사가 보리의 죄상을 조목조목
들춰내 기소한「죄맥」은 자신이야 말로 농민의 기아를 없애줬다는「맥대」의 항변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원고인 검사와 피고인 보리의 입장을 인정해 마무리하는 결론이「청맥행」이라는 할 수 있다.
‘行’으로 표제한 가행체(歌行體)라서 오언과 칠언이 주를 이루고 있지만 호흡에 따란 완급을 조절하고 있다. 화자는
풋보리를 베어 보리죽을 쑤기까지의 과정에서부터 보리죽을 먹고 난 뒤의 포만감과 거지 아이들의 문전당도를 다소 해학적으로 그렸다고 김석회 교수는
설명한다. 우리는 춘궁기라는 절대빈곤을 200년 후인 1970년대 초까지 체험했다.
김교수는 이 작품의 기본적 배경을 이룬 것은 제9행 조대(措大)의 집이라 한다. 풋보리로 굶주림을 면한 화자와 한 그릇도 얻어먹지 못해
발을 구르며 낙담하는 거지아이 그리고 개와 돼지까지도 밥과 고기를 먹은 주문(朱門)의 풍경을 제시함으로써 사회적 모순을 드러냈다. 절대빈곤이 해소되기 이전까지
걸인 등이 떼지어 다닌 모습이 당시의 사회다.
◇年年行〈一〉(100句)
『연년행(年年行』연작은 「농가구장」「죄맥」「맥대」「청맥행」등과 함께 존재 문학의 진수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농가구장」4-6장이
2003년 대학수능시험에 출제되기는 했어도 선생의 문학은 아직도 진흙 속에 묻혀 있는 보석처럼 빛을 내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다룰「연년행」연작에 대해서도 학계는 제작시기와 간암공(艮庵公)의 작품임이 분명?한 『임계탄(壬癸歎)』과의 상통성을 놓고 김석회(인하대), 임형택(성균관대), 이형대(고려대) 등의 해석이 분분하다. 여기서는 김교수의 견해를 보고자 한다.
『존재 선생의「年年行」연작은 그 연대 추정의 근거가 미심하다. 작품연보를 중심으로 살피는 이 자리에서 본격적인 논의는 유보해 두고자 한다.
다만 최근 들어 임형택 소장의 현실비판가사 ‘壬癸歎’을 발굴, 소개된 바가 있는데, “존재
선생의 「年年行」과 여러모로 상통”하는 바가 있어 본격적인 대비고찰이 기대된다. 이 가사는 장흥지방의 壬子(1732) 癸丑(1733) 무렵의 실상을 담고 있는데, 이해는 「年年行」에 나오는 “차충위재심수한(此蟲爲災甚水旱) 임계을병인상식(壬癸乙丙人相食)”이란 구절의 ‘壬癸’와 일치한다. 여기서의 ‘壬癸乙丙’이란 壬子(1732), 癸丑(1733), 乙卯(1735), 丙辰(1736)을 지칭하는데 선생의 나이 6∼7세,
9∼10세 되던 해이다. 이때에는 실제로 사람이 사람의 고기를 먹을 정도였는데 그 구체적인
참상은 「壬癸歎」속에 너무나도 생생히 묘파(描破)되어 있다. 「임계탄」의 한 대목을 보자. “연치(連値) 대살년(大殺年)의 갈수록 참혹하다/ 만고에 이런 시절 듣기도 처음이요/ 생래에 이런 시절 보기도 처음이라/ 슬프다 사해창생 자가의 죄악인가/ 위로 부모동생 아래로 처자식이/ 일시에 죽게 되니 이 아니 망극한가/ 참혹하다 하려니와 이다지도
자심한가(이하 생략).” 壬癸乙丙을 떠올리며 쓰인 「年年行」또한 이러한 재앙의 정도에서 차이만 있을 뿐 여전히
해마다 되풀이되고 있음을 증언하고 있다. 「年年行」이란 제명 자체가 오고 오는 年年의 세월을 헤어날 길 없는 재앙의 굴레로 규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45세(1771)에 지은 「苦旱」에도 이상(異常) 가뭄이 그려지고 있으며, ‘觀物說’ 연작에도 천지의 피폐상이 묵시적인 분위기에 가깝게 묘파되고 있다. 존재의
이런 작품들은 어쩌면 「임계탄」의 연장선상에 있을지도 모른다』
「연년행」<一><二><三>은 마치 선율의 리듬 같다. 가행체<一
>
은 한해, 수해, 멸구, 태풍, 역병 등 5대 재해에 대한 농민의 고통을 그리는 서론 격으로 음악에서 보통 빠른
모테라토(Moderato)의 단계로 볼 수 있다. 아마 작가 가운데 선생만큼
농민들의 여러 시달림을 절절하게 묘사한 작가는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없지 않을까. 이는 감농자가 아니라
직접 농사를 지어보지 않으면 착상마저도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벌레 재앙은 장마 가뭄보다 더 심하여/ 임․계년, 을․병년엔 사람이 사람을 먹기까지 되었네/ 가문 해 늦모는 항상 이로조차 패하나니/ 김매기 제쳐두고 사람마다 달라붙어 멸구 잡이 일이 되니/ 손에 깨진
바가지 잡고 물 창을 희게 쳐대네/ 아전들 구걸하는 구실은 수 십 가지 명목이네/ 좌수 별감 구하는 것 또 따로 있네/ 면임(面任)과 송임(松任)의 예급곡 구실/ 이전 장의 어른, 어제
재임 양반/ 어깨치며 간청하노니 형육(刑育)만은 구해 주시오
年年行〈二〉(54句)
「연년행」<二>는 리듬의 속도가 뛰는 정도인 알레그로(Allegro) 쯤으로 느껴진다. 가행체는 노래이니 가락과 곡(曲)이 가미돼서 그럴까. 선생은 음풍농월(吟風弄月)을 하지 않고도 애민시를 지을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가진 시인인 것이다.
시해마다 가물어/ 밤낮 봇도랑에 두레박질로 살이 터지고/
해마다 장마비/ 김매고 둑 보수하느라 비옷이 썩어나네/ 해마다
멸구/ 물을 치며 잡아내니 우는 소리 머금었고/ 해마다 바람/ 백곡이 쓰러져 온전한 수확 한번 못해보네/ 해마다 역병/ 사철 두려워 피하기, 머리둘 바를 아지 못하네/ 한해 한 재앙은 오히려 좋다 해도/ 다섯 재앙 갖춰 오니 백성은
어디로 가야하나/ 한해 걸러 한 재앙도 오히려 살아남기 어렵거든/ 해마다
다섯 재앙 어찌 이리 독할고
年年行〈三〉 (32句)
「연년행」<三>은 매우 빠른 리듬인 프레스토(Presto)처럼 느끼게 한다. 연시조를 읽으면서 음악적인 감흥을
주는 작품은 「연년행」을 이외에는 찾기 어렵다. 해마다 미친바람, 바다의
회오리바람/ 해마다 뿌리 갉아먹는 벌레, 마디 갉아 먹는
벌레/ 해마다 전염하는 돌림병, 당나라 학질/ 해마다 벼 한 톨 없고 보리 한 톨 없고/ 해마다 목화솜 또 누에고치
없고/ 해마다 채소도 어염도 없고/ 해마다 땔감이 귀해지더니
이제는 아주 떨어져 버렸고/ 해마다 소먹일 꼴도 귀해져 이제는 아예 없어져 버렸네/ 해마다 돈은 귀신이 숨기는지(중략)/
해마다 병들고 주려 파리해지/ (중략) 머지않아
이 땅엔 사람 하나 볼 수 없으리(중략)/ 백번 절하며 하늘에
비노니 일찍 사하여 주소서/ 백성들이 죽이라도 먹게 하며 베옷이라도 입게 하소서/ 육친을 보전하시어 서로 꾸짖음이 없게 하소서. 민초들의 삶을 이토록
생생하게 묘사하는 선생은 가히 시선이다. 만일 선생이 줄곧 이 길로 매진했다면 시성(詩聖)이 되었을 것이다.
◇湖泮講會 占因月課韻
42세(1768년 戊子)
冷笑에 過飮으로 몸을 해치다
강회를 시행한지 1년쯤 지나자 예학의 경우 일상생활에서 그 효과가 나타났다. 그러나 사강회를 시작할 때부터 ‘농사꾼이 무슨 독서며 글짓기냐’며 냉소가 점점 심해져갔다. 당시 선생은 ‘경박한 풍속이 날로 심해지고 사람들이 먼지 털 듯 헐뜯어, 가까이는 동네서부터 멀리는 도내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도 마음을 알아줄 사람이 없었다’라고 한심스런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도학의 고장으로 만들고자 시작한 강회는 기로에 섰다. 그도 그럴 것이 농사꾼들과 지필묵을
논밭으로 가지고 가서 쉬는 시간을 이용해 공부하는 게 낯설게 보일 것은 당연하다. 講耕 병진운동은 무식한 농사꾼들을 개안시켜 한시를 지을 정도로 유식하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구성원들 가운데는 마땅찮게 생각한 사람도 있지만 반대로 온갖 방해를 해도 강행하자는 이도 있었다.
그런데 우러러 따랐던 스승이 타계하니 마음을 의지할 곳이 없었다. 그는 ‘스승에게 배울 때엔 언제나 마음이 기쁘고 뜻이 흡족하여 돌아가기를 잊었을 정도였다’고 회고한다. 다만 거리가 멀고 집이 가난해서 계속 찾아뵈올 때마다 오래
머물면서 배울 길이 없어 몽매간에도 잊지 못했던 스승이 떠난 자리는 너무도 크고 휑했다. 오로지 술에
의존하자 몸은 날로 쇠약해져 갔다.
12월 2일 노천정(魯天政)과 함께 스승의 영전에 곡을 했다. 상제(喪制)에도 찾지 못한 죄스러움이 복받쳐 목이 메었다. 산문(山門)을 나오는데 이 세상에 함께 대화를 나눌 사람이
없는 외로움을 견디기 어려워 절구 한수를 옲었다. -이는 주자의「홀로 요금(瑤琴)을 품고 옥계(玉溪)를 지나다(獨抱瑤琴過玉溪)」라는 시의 운인데,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로 전해져 차운한 것이다.
칠언절구 <옥병계차회옹운 증윤고령도이여작별 병서(玉屛溪次悔翁韻 贈尹高靈道而與作別幷書)> 기행문<덕산행(德山行)>을 스승의 장남에게 전했다. 스승에 대한 간절한 추모의 정을 토로한다. 사실상 덕산과의 인연을
마감한다. 스승의 영전에 조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계룡산(鷄龍山)에 올라가 정감록(鄭鑑錄) 등 비기류(秘記類)에 갖가지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산세를 둘러봤다
그리고 귀향을 위해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전주(全州)와 진안(鎭安)등 장장
1500리를 유람하고 28일 만인 12월 30일에 귀가했다. 충청도와 전라북도 일원을 돌아 본 것이다. 이때의 출타는 사강회에 대한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 역겨워서 아니면 피해서 심신을 달래려는 의도를 포함한 여행이었다. 11월 12일 장남 도립(道立)이 낙안(樂安) 백현(栢峴) 김옥(金沃)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玉屛溪次悔翁韻 贈尹高靈道而 心協 因與作別
서울과 호남을 20년간 다니면서 한 번도 권세가에게 명함을 내민 적이 없었다. 아무리
빼어난 재주와 아담한 선비를 만나더라도 그와 얼굴을 익히려 하지 않았다. 감히 거만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좋아한 대로 했을 뿐이다. 그런데 마침내 속수(束脩)를 지니고 스승을 뵈면서 세상에 큰 어른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헛되이 평생을
보내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이 생기고, 그간 자포자기했던 것을 부끄러워하면서 깊이 사모하게 되었다.
해안가에서 고기를 잡고 나무하던 내가 비록 자주 왕래하며 받들어 모시지는 못했지만 아련히 꿈속에서나마 풍잠(風岑)과 옥계(玉溪) 사이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지금 선생님께서 돌아가셨으니 장차 어디에
의지하겠는가. 곡을 하며 영전에 하직하고 이른 새벽에 짚신과 지팡이를 꾸렸다. 찬 구름이 아침 해를 가렸고, 손바닥만 한 눈발이 날렸다. 절구 한 수를 읊어 봄날의 감회를 부질없이 시에 부쳐 본다. 시의
운은 주희의 옥계시를 차운한 것이며, 일찍이 선생께서 차운한 것이다.
悵然長嘯出玉溪 구슬피 깊게 탄식하며 옥계를 나오는데
北風空山雨雪時 북풍 부는 빈산에 눈 내리는 시절일세
如今亦小荷蕢者 지금 같은 때에는 삼태기를 맨 사람 적으니
有心無心不怕知 내 유심과 무심을 알까 두렵지 않네
◇附 先師次悔翁韻
千古溪名同玉溪 천고의 시냇물 이름은 똑같이 옥계이니
月明遙想抱琴時 밝은 달빛에 거문고 안고서 아득히 생각해 본다
無心雖久無難盡 무심한 지 오래되었다지만 무심하기란 어려워
未忍全忘却怕知 차마 모두 잊지 못했으니 누가 알까 두럽네
◇登鷄龍山
◇宿金山寺
◇登全州寒碧堂
◇龍湫
◇龍穴
◇龍湫
蟄跡藏神懒不起 자취도 신비함도 숨긴 체 일어나는데 게을러
澄泓萬丈斂波濤 맑고 깊은 만 길의 물이 일렁임도 없구나
本心自任蒼生雨 본심은 백성에게 비 뿌리는 것으로 자임했으니
天若興雲豈待禱 하늘이 구름 일으킨다면 왜 빌기를 기다리겠는가
◇溪上次蔡上舍季能盆梅韻
古姿幽韻出天然 옛 자태와 그윽한 운치는 하늘이 빚은 듯
特地風光棐几前 보기 드문 풍광이 책상 앞에 펼쳐졌구나
未禁暗香恒漏泄 저절로 그윽한 향기 늘 피우더니
好看淸影自團圓 볼수록 맑은 그림자 스스로 어울리는구나
芳隣剩接詩書架 꽃다운 이웃은 시렁의 책과 실컷 만났는데
花意留從造化緣 개화는 조화옹의 인연에 달렸어라
氣味但敎同處覓 기상과 멋이 비슷한 것을 찾으려 한다면
園松階竹喜雙全 동산과 섬들의 송죽은 기쁘게도 다 온전하다오
43세(1769년 己丑)
변변한 親舊 없음을 自歎하다
스승이 돌아가신 이후
변변한 친구 하나 없는 외로운 신세를 한스럽게 여겼다. 평소의 삶을 되돌아보고 일찍이 마음먹었던 일들이
전혀 이루지 못한 것을 괴로워했다. 그 괴로움을 심중에 쌓아두니 점차 울화병으로 발전될 정도였다. 마침내 정력과 혈기는 날로 쇠잔해져 정신과 기운이 어둡고 멍해졌다. 언동에
작은 실수라도 범하지 않으려고 아침에 저지른 잘못은 낮에 반성하고 낮에 저지른 잘못은 밤에 한탄하며 조신에 더욱 신경을 썼다.
다산초당에서 향음주례를 가졌다. 27세부터 시작했으니 벌써 16년째의 행사인 셈이다. 덕 있는 어른은 아마 당시 66세인 아버지 영이재공일 것으로 보인다. 선생은 또 노부모를 위해
가중사시회(家中四時會)도 계속 베풀었다. 행사는 매년 사계마다 5형제의 식구들이 대청에 모여 북쪽에 양친을
모시고, 남자는 동쪽, 여자는 서쪽, 아동은 남쪽에 앉게 하고 유개(柳開)의 삭망훈(朔望訓)으로 일깨웠다. 제작 연대가 분명치 않은
<五月방탁영대>이다.
◇五月訪濯纓臺
水滿澄潭樹滿臺 맑은 못엔 물 가득 누대엔 울창한 나무
淡雲濃翠正排徊 엷은 구름과 짙은 녹음이 배회하는구나
主人淸趣眞堪少 주인의 청아한 정취가 참으로 부족하기에
五月中旬始一來 오월 중순에야 비로소 한 번 와 보는구나
44세(1770년 庚寅)
講會 20회를 2회로
縮小하다
사약회서(社約會序)와 사중약강회명첨서(社中約講會名帖序)를 썼다. 사강회서의
한 대목을 보자. ‘강회를 시행한지 3년(1770년)이 되자
거의 효과를 이를 수 있었는데 무더위에 더위를 먹거나 혹 도연명(陶淵明)처럼 파리하게 야위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세상 사람들이 낯설게 보고 또
눈과 해의 이상한 조짐도 없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중간에 그만두게 됐다. (중략) 마침내 간략하게 축소, 대략 1년에
두 번 모임을 갖기로 하고 존양(存羊)의 뜻을 부쳤다’라고 했다.
강규에 따르면 1767년부터는 1월과 8월을 빼고 매월 1일과 보름에 강회를 열었다. 아침 식사를 하고 강회에 나가 절하고 앉기 의식 등에 맞게 했다. 30세
이하는 각기 정해진 책을 가지고 평상시의 의식대로 나가 강(講) 즉 외웠다. 동자들은 《소학》《격몽요결》을 강하고, 그다음에 세계를 외웠다. 8세 이하는 각기 정해진 책을 강하고, 그다음에는 육갑(六甲)을 외우게 했다. 강을 마치면 강원 모두가 《가례》와 《상례비요》의 의심나거나
모르는 곳을 질문하게 했다.
그리고 농규(農規)에 따르면 여름에는 매번 아침을 먹고 각자 도롱이에
삿갓, 호미와 낫, 읽어야 할 책과 붓통을 갖추어 일직(日直)의 밭에 모였다. 사시(巳時)가 되면 밭 갈기를 중지하고 시원한 나무 그늘아래서 휴식을 취하는데, 이때
어떤 이는 책을 읽고, 어떤 이는 글씨 연습을 하며, 어떤
이는 신발을 짜되, 다만 낮잠을 자서는 안 된다. 미시(未時)가 되면 다시 밭을 가는 일을 했다. 비가 오는 날에는 강당(講堂)에 모인다. 매번 겨울이 되면 돛자리 짜는 일을 겸한다.
결국 강회가 출범한지 3년 만에 기존의 규정을 대폭축소해서 운영한 것이다. 그러니까 매월 1일과 보름 즉 한 달에 2회씩 열었던 강회가 1년에 2회로
단축됐다는 말이다. 사실상 명목만 유지된 셈이다. 이 말은 1월 8월을 제외하고 10개월
간 20회의 강회가 10분의 1로 줄어 고작 2회에 그쳤다는 얘기이다. 어쩌면 자존심에 대한 수모이며, 어쩌면 좌절인 것이다. 그러기에 울화는 점점 심해지고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었으며, 몸은
나날이 쇠약해져 갔던 것이다.
◇社講會序와 講會名帖序 저술
01)社約綱領(五倫)
02)六行(孝․友․睦․婣․任․恤)
03)六德(知․仁․聖․義․忠․和)
04)六藝(禮․樂․射․御․書․數)
05)完議(飭躬․睦族․敬長․齊家․訓子姪․慶弔․契規)
06)賻助式
07)付罰式
08)會規
09)講規
10)農規
45세(1771년 辛卯)
鬱火 시키려 旅行을 떠나다
사강회를 바라보는 향촌의 정서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주변의 곱지 않은 시선에 좌절하면서
술로 마음을 달래니 건강이 갈수록 악화되어갔다. 부모형제 모두가 선생의 건강을 염려할 정도를 지치고
쇠약해져갔다. 그대로 집에 앉아 있으면 질식할 것 같았다.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여행길에 나섰다. 여행지는 나주의 봉황에 있는 납상정(納爽亭) 등이다. 정자는 지금 영산포 송월동 일대인데 당시에는 봉황에 속했다. 강변은 빼어난 풍치를 자랑했다.
모재(茅齋) 박씨(朴氏)의 초청으로 떠난 여행이다. 이해도 가뭄이 심했다. 납상정에는 왕곡출신으로 훈구파의 대부였던 윤원형을 축출시켜 사림의 시대를 열었던 성균관 대사성, 예조판서, 한성부 판윤, 영의정에
올랐던 사암(思庵) 박순(朴淳 1523-1589)과 석촌(石村) 임서(任㥠1570~ 1624), 홍처랑(洪處亮), 홍우서(洪禹瑞) 등의 시가 남아 있어 조선 중기에 지어진 정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의 5언절구는 사암 박순이 남긴 시다.
江上亭依竹 강가의 이 정자가 죽림(竹林)속에 자리하니
門前野接天 대문 앞의 넓은 들이 하늘가에 닿아 있네
百年無事客 평생 동안 별 일없는 한가로운 이 사람이
有酒卽陶然 맑은 술잔 기울리며 많은 기쁨 누렸네.
◇次朴友茅齋韻
近水淸陰滿一床 물이 가까워 맑은 그늘 책상에 가득하네
世間誰似此君凉 세상에 그 무엇이 대나무의 서늘함만 같으랴
誠知物我元無二 물아가 원래 둘이 아님을 진실로 알고 있지만
欲問亭名子己忘 정자의 이름 물으려다 그대 벌써 잊었구나
◇納爽亭 十二景
<錦江晴波>
江水漣漪劈野來 강물이 넘실넘실 들판을 가르며 흘러와
高亭迎挹阧成臺 높은 정자가 맞아들이듯 돈대를 이루었네
須識有源方有此 근원이 있어야 이러한 경관도 있는 것이니
憑欄誰肯詑詩才 난간에 기대 누가 시재를 자랑하는가
<紗泉古跡>
< 伽倻秀色>
< 月出晴巒>
< 磯頭漁火>
< 浦口瀛島>
< 郎山晩霞>
< 十里平郊>
< 百尺虹橋>
< 一眉鷺峯>
< 夕陽風帆>
< 蘆洲落雁>
◇雙溪寺 羅州 贈僧
46세(1772년 壬辰)
覆試, 試券 분실해 落榜하다
겨울에 아버지의 권유로
증광시에 응시했다. 예상치 못한 문제로 낙방했다. 시관(試官)이 합격자를 발표한 뒤에 봉투에서 대책권(對策卷)을 꺼내 보이면서 선생에게 ‘장차 일등에 뽑힐 것인데, 합격자를
발표하는 방방(放榜)할 때 답안지(試券)를 잃어버려 결국 낙방했으니, 이는 운수라고나 해야겠다’고 위로했다고 한다. 아무리 운이 없다지만 답안지인 두루마리를 잃어버려서
낙방으로 처리된 것은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는 운수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1750년(庚午) 장흥부사로 재직할 때 ‘才高行美, 學遂啓蒙’라며 천거한 정언(正言) 이진의(李鎭儀)가 정시(庭試) 1소 시관이 되어 2소에서 1소로
장소를 옮길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2소에서 그대로 보겠다고
했다. 선생은 ‘만일 성주(이진의)가 시관으로 있는 곳으로 옮기면 성주에게도 피해를 줄 수 있고, 내
자신도 평소에 지닌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이는 정실로 인한 말썽을 우려한 것이다. 12월 딸을
영암 조광근에게 출가시켰다.
47세(1773년 癸巳)
遣懷辭로 性善의 天性을 달래다
아래 <견회사(遣懷辭)> 즉, ‘회포를 풀며’를 통해서 증광시에 낙방한 심정과 각오를 다지고 있다. 억지로 구차하게 관직에 나가지 않겠다는
뜻을 새롭게 했다. 더 이상 과거에 매달린다고 해서 급제할 가능성이 없다고 확신한 것이다. 사실 선생의 과거에 대한 기대는 저버린 지 오래다. 그저 부모의
간절한 바람을 저버릴 수 없어 과장을 출입 했던 것이다. 그는 12세
때에 이미 ‘萬物之備於我兮 ‘만물은 나에게 갖추어져 있다’고 깨닫고 있었다. 그가 추구하는 이상은 성인이나 현인이 되고자했던 것이다. <견회사>는 그런 자신의 의지를 다시금 굳게 결의하고
있다. 이는 사강회로 인한 좌절에서 벗어나려는 전기로 보인다.
◇遣懷辭
視人猶己子 다른 사람을 나의 자식처럼 보는 것은
吾固得之天而莫之革也 본시 나의 천성이니 바꿀 수가 없구나
人皆自入於千仍之坑兮 사람들이 스스로 천 길 구덩이로 빠지는데
孰使余而呼之 누가 나로 하여금 부르게 하는가
萬物之備於我兮 만물은 나에게 갖추어져 있나니
從吾所好復奚疑 내 지향하는 것 따르고 다시 무엇을 의심하리오
48세(1774년 甲午)
梅花와의 대화록 ‘然語’를 짓다
복시에 낙방하면서 문학세계는 더욱 넓고 깊어져갔다. 여느 유학자처럼 매화(梅花)를 사랑했다.
드디어 매화를 의인화해서 마주하고서 말을 주고받은 글을 지었다. 이름은 연어(然語)이다. 《존재집》권20에는 제사(題辭)에 이어 그 한편인 원지(原旨), 신회(神會), 학례(學禮), 등으로 짜여있다.
연어가 담고 있는 내용은 그 자신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매군과의 대화를 통해 표현한 일종의 자서전이라고 볼 수 있다. 아직 이들 작품들에 대한 연구자가 없어 단언하기는 어려우나 아마도 몇 해에 걸쳐 이루어진 작품일 것으로 보인다. 12월 차남 道及이 나주 발산(鉢山) 이경준(李慶俊)의 딸과 혼인했다. 향사례(鄕射禮)를 베풀었다.
◇然語
연어는 자화와 매군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대담형식을 통해 표현하고 있다. 즉, 질문하고
대답하는 형식이다. △원지(原旨)에서 문답의 횟수는 자화 37, 매군
36, △신회(神會)에서는 자화
20, 매군 17, △학예(學禮)에서는 자화 2, 매군 2, △의례(儀禮)에서는 자화
8, 매군 9차례 문답하고 있다. 그러므로 질문과
답변은 무려 132구에 이르는 장편으로 이루어졌다. (筆者 註)
< 題辭>
옛날에 장주(莊周 莊子)가 그림자가 말을 한다고 하자 사람들은 괴이하다 했고, 미불(米芾)이 ‘돌 어른(石杖)’이라고 부르자,
사람들이 미쳤다고 했다. 그림자는 말하지 않고 돌을 어른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매화(梅花)와 말하면서 매화를 ‘君’이라고 하니,
나는 과연 괴이하고 미쳤단 말인가. 아니면 장주와 미불이 소인이 아니니, 나는 과연 장주(莊周)와 미불(米芾) 같은 사람이란 말인가. ‘매군’과 더불어 대화한 것을 ‘연어(然語)’라고 이름 붙이니, 사람들이 나를 괴이하고 미쳤다고 말하는 것도 당연하다. 비록 그렇다
하더라도 나로 하여금 괴이하고 미치게 하는 자는 또한 누구이겠는가.
< 原旨>
< 神會>
日日今來苦不運 요즘 들어 나날이 금방 지나가고
眠昏書廢古尤疑 눈 어두워 책 덮으니 옛날 더욱 의심스럽다
鸎兒乍語還飛去 꾀꼬리 잠간 울다 도로 날아가 버리고
又送新春過柳技 또 보내는 새봄 버드나무 가지로 지나가네
<學禮>(善과 惡)
< 儀禮>
49세(1775년 乙未)
詠而齋를 茶山草堂이라 하다
서재인 영이재의 수리에 착수했다. 영이재는 태어나기 7년
전인 1700년(庚辰)에 증조 휘 동식(東寔, 1640~1708)이 서재용으로 지어 영이재(詠而齋)라 했다. 6년 후 조부 삼족당(三足堂)이 보수한 바 있고, 1775년에 아버지 명에 따라 용마루와 서까래를 수리, ‘다산초당’이라 했다’라고 「영이재 중건기사」에서 밝히고 있다. 여기서 거처하며 조신에 더욱 힘썼다.
마을 자제들에게 ‘독서’와 ‘농경’을 입버릇처럼 강조했다. 곧 ‘독서는 정밀하고 깊게 해서 오묘함을 깨달아야 하고, 글을 짓는 일은 조화롭고 온후하게 할 말을 다 갖추어야 실로 깨닫는 묘미가 다른 사람에게 전해질 수 있다. 문장의 묘리를 깨달으면, 또한 이를 가지고 스스로 즐길 수 있고, 부귀와 빈천도 그 마음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재주가
둔한 자, 경솔한 자, 뜻이 없는 자, 서두른 자, 시류를 즐기는 자, 빈한한
자와 성리학에 어두우면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졌더라도 문장의 묘리를 터득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10월에는 시집 온 둘째 며느리가 타계했다. 울화가 고질의 빌미가 되어 기(氣)가 역상했다.
부모와 형제들은 건강을 위해 지극한 보살폈다. 가족들의 정성이 아니었다면 목숨마저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평소 소옹(邵雍)의 안빈낙도를 바랐지만 성이 차지 않았다. 주변의 따가운 눈총을 받던 사강회를
위해 최선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회오와 매운 16절을 지었다.
◇悔悟
日日知非自少時 어렸을 때부터 날마다 잘못을 알아
于今四十九年知 지금 사십구 년 동안 잘못을 알았지
偶得伯玉年堪愧 우연히 거백옥의 나이 되니 부끄럽구나
覺後眞成一呆癡 이렇게 깨친 뒤 어리석은 한 사람이 되었네
◇梅韻(16絶)
< 梅室>
步庭繞古梅 뜰을 걸을 때도 고매 주위를 맴돌고
入室望古梅 방에 들어와도 고매 바라보자니
傍人來相問 이웃 사람들이 찾아와 묻기를
何事戶常開 무슨 일로 문을 항상 열어두는지요
<梅㩜>
< 梅簷>
< 梅窓>
< 梅階>
< 梅庭>
< 梅澗>
< 梅泉>
< 梅風>
< 梅月>
< 梅雨>
< 梅烟>
< 梅霜>
< 雪梅>
< 梅禽>
< 梅酒>
◇磻谷 族叔命慶 古梅
磻谷古梅天下稀 반고의 늙은 매화는 천하에 드문 것이라
問公何處得此物 이 매화 어디서 구했는지 족숙에게 여쭙네
病骨生肥縮輪困 야윈 가지에 윤기나며 울퉁불퉁한 모습으로
龍腰龜背相欹側 용의 허리 거북 등처럼 서로 의지해 있으니
千奇萬怪鬼神驚 정말 기괴하게 생겨 귀신조차 놀랄 것이며
化工不敢偷雕刻 화공도 감히 엿보아서 새겨내지 못하리라
嶄巖高髻勢凌雲 우뚝 솟은 윗부분은 기세가 구름을 뛰어넘고
偃蹇魁幹孤不坼 기우뚱한 큰 가지들은 외로이 떨어지지도 않아
仙歸洞庭月滿樓 동정호에 신선 들어가 달빛이 누대에 가득한 듯
雨灑天門雲出石 하늘에 비 뿌려 구름이 바위에서 나오는 듯
柴扉桑柘鹿門山 사립문은 뽕나무 밭 가득한 녹문산이고
霧笠烟簑淸渭湄 도롱이와 삿갓은 안개 자욱한 청위로다
虫蠹榛棘百年物 벌레와 가시덩굴은 늘 있는 것인데
成此瑰瑋呵誰知 옥매화를 만들도록 누가 보호했는가
春原桃杏盡落後 봄 언덕에 복사꼭 살구꽃 모드 떨어진 뒤에야
氷玉高標世方奇 빙옥 같은 저 매화 세상을 기이하게 하리라
‘고매’는 제작연도는 분명치 않지만 매화와의 대화를 다룬 ‘연어’와 ‘매운’ 16절과 함께 49세조에서 다뤘다.
50세(1776년 丙申)
등잔불 밑의 讀書를 그만두다
3월에 영조(英祖)가 서거하고 정조(正祖)가 등극했다.
사강회가 9년째에 이르렀다 .48세 때(1774년 甲午)에 지은
<然語>처럼 <창수(唱酬)>도 ‘자화’와 ‘매군’의 대화형식을 취하고 있어 당시의 작품으로 보였으나 내용 가운데 ‘볼품없는 쉰 살짜리 졸렬한 남자라네(平頭五十年拙男兒)란 표현으로 미루어 50세 때의 작품임이 분명해졌다. 또한 <시흥(時興>은 어느 때의 작품인지 확실치 않지만 마지막 절구의 표현과 <春日吟(龍潭歸後)>과의 배열로 보아 이때로 보인다. ‘등잔 앞 독서는 이미 그만둔 지 오래지만(己甘廢却燈前讀)’의 표현에 있다.
등잔불 밑에서 책 읽기를 그만 두었다는 고백은 선생의 관심이 저술 쪽으로 이동하는 신호이기도 하다.
그래서 학계는 이후 옥과현감으로 제수되기 이전까지를 ‘강학저술기’로 구분하고 있다. 선생은 평소 책을 읽을 때 저술을 위해 중요한 대목을 적어서 모아두었다. 이
같은 독서습관이 혼자서 90권 이상의 방대한 저술을 남긴 결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다산이 500여권의 저작을 하면서
18제자와 공동작업으로 완성한 것과는 정반대의 경우라고 볼 수 있다. 선생은 저술마저도
고단했다. 12월 둘째 아들 道及이 보성 박곡(亳谷) 曺命東의 딸과 재혼했다.
◇春日吟(龍潭歸後)
柳綠花明水滿沼 짙은 버들 화사한 꽃 연못 가득한 물
小園晴暖靜無風 맑고 따뜻한 작은 동산에 바람 자고 고요하네
衣塵快拂歸來好 옷의 먼지 시원하게 털고 집으로 돌아오니
頓覺春光在此中 이곳에 봄날의 풍광 있음을 갑자기 깨닫노라
◇唱酬 (26首)
< 子華>
子華非是愛偷閒 자화는 한가롭게 즐기는 것 사랑하지 않지만
田有烟鋤磯有竿 밭둑에 담배와 호미 있고 물가에 낚시대있네
世事只應安分好 세상일은 다만 분수에 평안해야 좋은 법이니
此心惟識不欺難 이 마음속이지 않기가 어렵다는 걸 알아야지
春來富貴花千樹 봄이 오면 부귀하게 온갖 나무에 꽃이 피고
靜後賓朋月一欄 고요해지면 벗님처럼 한 난간에 달 떠오르니
醉倚高梧天地濶 술에 취해 오동나무 기대자 천지는 드넓어서
應埃野馬解頤看 티끌과 아지랑이를 웃으며 바라본다오
< 梅君>
< 子華>
< 梅君>
< 子華>
< 梅君>
< 子華>
< 梅君>
< 子華>
< 梅君>
< 子華>
< 梅君>
< 子華>
< 梅君>
< 子華>
< 梅君>
林屋閒醉淡夷猶 숲속 집의 한가로운 정취 담담해서 여유 있고
書架爐薰春日愁 서가의 화로 훈기에 봄날의 해가 길구나
吼石狂奔溪意氣 돌에 부딪쳐 세차게 흐르니 냇물의 의기인가
盈郊爭茂草風流 들판 가득 다투어 무성하니 풀의 풍류로다
林間鳥語知誰使 숲속의 새 노래 누가 시키는지 알건만
醉後吾眠奈自由 취한 뒤 나의 잠은 어디에서 말미암는가
懶把我詩詩又澁 게을러 시 지어 보지만 시 또한 난삽해서
夕陽釣下白鷗洲 석양에 갈매기 모래톱에서 낚시 드리운다오
<子華>
人人自謂我有知 사람들 저마다 많이 안다고 스스로 말하지만
知彰知微果是誰 드러남과 은미함 알아채는이 과연 누구인가
虞帝以前吾無見 순임금 이전에는 내가 본 적이 없고
漢宜以下世堪悲 한나라 선제 이후로는 세상사 가슴 아파라
湖海每愧無眞隱 강호에 참다운 은자 없어 매번 부끄럽나니
日月如常助不欺 해와 달을 변함없이 속이지 못 한다오
知者知之將可奈 지혜로운 자 알고 있으면 그뿐이라지만
聊將詩句試言之 애오라지 시를 지어 시험 삼아 말해 보네
<梅君>
萬物具來萬事俱 만물이 다 모이고 만사가 갖추어지니
一身荷負自懸弧 이 한 몸 사내의 포부는 태어난 때로부터라
詩書禮樂能知了 시 서 예 락을 잘 알면
虞夏商周得見乎 우 하 상 주 시대를 볼 수 있으리라
無可奈何人老去 어찌할 수 없이 사람은 늙어가지만
不會埋沒醉工夫 술에 취하는 공부에 빠진 적이 없다오
三更獨起憑欄久 한밤에 홀로 일어나 오래도록 난간 기대니
碧落雲消月滿梧 푸른 하늘 구름 걷히고 오동에 달빛 가득하네
<子華>
善惡得失禍與福 선악의 득실에 따라 화복이 내린다지만
芒芒今古想堪疑 아득한 고금을 보면 의심할 만하다오
聖賢尙不眞情語 성현도 오히려 진정으로 말하지 않았고
天地何曾有意爲 천지도 언제 의도적인 행위를 한 적이 있던가
萬物原宜强食弱 만물은 원래 약육강식하기 마련이니
千年未見實勝欺 천년토록 진실이 거짓 아긴 것 못 보았다오
誰知此事至於此 이 일이 이 지경에 이를 줄 누가 알았으랴
且置勿思却似癡 그런데도 놔두고 생각하지 않으니 바보 같다오
<梅君>
眞是子華愚拙客 참으로 자화는 어리석고 졸열한 나그네니
惟吾與汝臥雲烟 오직 그대와 함께 구름과 안개 속에 누워 보네
人生左海三千里 삼천리 우리나라에서 태어나서
天老開○四萬年 하늘이 개벽된 지○○ 사만 년으로
周孔程朱嗟去矣 주공, 공자, 정자, 주자는 아, 떠나갔지만
松篁梧菊幸在焉 솔 대 오동 국화가 다행히 남았거늘
不如意處還如意 뜻대로 할 수 없는 데에서 뜻대로 해야 하니
聊與汝遊太古前 애오라지 그대와 함께 태고 이전에 노니리라
<子華>
< 梅君>
< 子華>
< 梅君>
< 子華>
< 梅君>
◇時興 (6絶)
天難欺處婦幼語 하늘은 못 속인다고 부녀자와 아이들도 말하는데
我自喜時屋漏心 내 절로 기쁠 땐 옥루에 부끄럼 없는 마음이라
若有良朋酬語好 만약 어진 벗 있으면 주고받은 말 좋거늘
慢因佳句用情深 부질없이 아름다운 시구 지으려고 고심하네
常看不厭雲間月 늘 봐도 싫지 않은 것은 구름 사이의 달
時到多情柳上風 때때로 다정함을 느끼는 건 버들 위의 바람
意思常周天地外 마음속 포부는 천지 밖을 떠돌지만
形神聊寓酒人中 몸과 정신은 술 마시는 사람에게 부쳤다오
化供賞晨含露重 새벽에 꽃 감상하니 이슬 잔뜩 머금었고
山饒看月吐雲遲 산 위 달 실컷 바라보니 구름 더디게 토하네
空懷往哲發歎際 부질없이 옛 철인 생각하며 탄식할 지음에
獨立虛欄微笑時 텅 빈 난간에 홀로 서서 미소 짓는 때라네
夕陽嘗牖圖書淨 석양빛이 창가에 이르니 도서는 말끔해지고
花氣凝軒杖屨香 꽃향기 마루에 머무니 장리는 향긋해지네
慣夢古人凭枕數 늘 고인을 꿈꾸며 베개기댄지 몇 번이던가
喜迎新雨掃溪忙 기쁘구나 새 비에 계곡물 씻기느라 바쁜 것이
尋常意氣隣翁酒 평소 마음은 이웃 늙은이의 술에 있지만
黽勉句當學子書 힘써 행하는 일이란 서생의 글이라네
親見唐虞元有命 태평성대 만나는 건 원래 운명에 달렸으니
不憂蔬水豈求譽 가난 걱정을 않는데 어찌 명예를 구하겠는가
己甘廢却燈前書 등잔 앞 독서는 이미 그만둔 지 오래지만
不得放過雨後耕 비 온 뒤 밭가는 건 내버려 둘 수야 없지
如欲踐行言自小 실천하고자 한다면 말부터 아껴야 하니
纔分人我意難平 남과 내가 나눠질 때 뜻이 화평하기 어렵다네
51세(1777년 丁酉)
府使 요청으로 封事를 짓다
군내의 유력한 장로로서 활동하며, 안정된 생활을 누렸다.
이해 12월 21일 장흥부사로 부임한 운오재(雲烏齋) 황간(黃幹, 1713~?)과의 교류가 각별하게 깊었다. 그는 1744년(영조 20년) 생원시, 1759년(영조 39년) 복시 병과에 합격해 출사했다. 황부사의 재임기간은 1778년
12월 24일까지 고작 1년에 불과했다. 그러나 14세의 나이 차에도 그와 선생과의 교류는 매우 깊었다. 일설에는 병계 선생과의 사승을 비롯된 인연이라 하나 확인되는 않는다.
그런 정황은 황부사가 왕의 구언교(求言敎)에 따라 자신을 대신해서 상소문을 지어주도록 요청했던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다. 요즘도
군수나 경찰서장으로부터 각별한 존경을 받으면 지역사회의 유지라 할 수 있다. 황부사의 요청에 따라 선생은 30세 때에 저술해 그 동안 여러 번 보강한 「정현신보」의 시폐와 구폐를 저본으로 「봉사(封事)」설폐(說幣) 28조목을 지어 전했다. 봉사에서 언급한 당시 과거시험의 부패상 한 대목을 보자.
『한양에서 보는 과거의 경우는 그 폐단이 더욱 심하다. 지난날에는 과거 보러 온 시골 선비를
꾀어내서 답안을 대신 작성하게 하고도 오히려 그런 짓을 부끄러워할 줄 알아 겸연쩍어하며 감추려고 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혼자서는 더디고 신통치 않음을 싫어하면서, 한 사람의 유생이 부릴 사람을 두루 고용하여 대과(大科)와 소과(小科)의 복시(覆試) 때 시험장에 초두객(初頭客), 보서객(鋪敍客), 항구객(項句客), 회하객(回下客), 편종객(篇終客)과 정사수(正寫手), 중초수(中草手), 부사수(副寫手), 호사수(呼寫手) 마묵수(磨墨手), 음식수(飮食手)등 11명과
함께 들어가 시험을 치른다. 때로는 향시(鄕試)의 정원이 미달된 자리를 먼저 차지하려고 꾀하느라, 고용한 유생을 합격자
시험장에 들여보낸다』
◇封事 저술
52세(1778년 戊戌)
관북출신 弘祖, 萬庵을 만나다
봄에 첫째 동생 학암(鶴巖) 백호(伯昊), 둘째 동산(東山) 백신(伯紳), 넷째 서계(書溪) 백순(伯純)과 사촌 해의재(奚疑齋) 백훈(伯勛) 그리고 행원의 족손 행헌(杏軒) 영찬(榮纘) 등 6명과
상경해 반촌에 투숙했다. 여기서 관북의 만암(萬庵) 광조(光肇)와 우연히 조우해 이를 기념하기 위해 소회를
밝힌「반촌시서(泮村詩序)」를 남겼다.
상경 이유에 대해 만암(萬庵)은 과거를 보기 위함이라고 밝히고 있으나 남쪽에서
상경한 7인은 그 이유가 미상이다. 아마도 이들 중에 과거응시자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다면 반촌에서 묶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7월 덕산을 찾았다. 귀향길에 스승의 장남 고령(高靈) 윤심협(尹心協)과 함께 남포(藍浦) 수령 위홍조(魏弘祖)를 만났다. 관북 31세로 두형(榮祖, 昌祖)와 함께 4형제 중 3형제가 문과에
합격함으로써 일약 관북명문의 반열에 올라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둘째 학촌(鶴村) 창조(1703-1771)는
영조(英祖)의 명으로 북도 릉전지(陵殿誌)를 짓고, 호조참판에
오른 조선 후기 장흥 위씨 중 유일한 당상관이다. 남포는 충청도의 사포(寺浦)와 옥산(玉山)을 관할하는 현(縣)이다. 한산(韓山)을 거쳐 대매진(大每津)을 건넜다. 이어 임피(臨陂)와 만경(萬頃)과 벽골제(碧骨堤)를 유람했다. 향사례를 베풀고, 사강회
발(跋)을 지었으며,
또 『封事』도 보완했다.
◇泮村詩序
「我魏大於東邦仟有餘歲於長興咸興最盛每恨涯角落落無以合席敍倫戊戌不佞以觀光到京師適會宗氏六人於東泮逆旅陳世德敍親誼甚繾綣款洽此誠吾宗盛事而況子華氏丈文章雅望平日之素所慕仰而邂逅承顔於千里他鄕則甚爲愜願如何哉臨別不可無識故謹以絶奉呈要和以二備他日莫遠之資云爾」 光肇書
위씨가 동방에서 크게
번성한지 천여 년이며 장흥과 함흥에서 가장 성하였다. 매양 여기저기 떨어져 사느라 함께 정을 나누지
못한 것을 한탄스러워했다. 그런데 戊戌年(1778) 내가 과거보러 서울에 왔다가 마침 종씨 6인을 여관에서 우연히 만나 세덕을 이야기하고 친의(親誼)를 나눴다. 이는 진실로 우리 종씨의 성사이며 더구나 자화(子華)씨 어른의 문장과 아망을 평소에 모앙(慕仰)하였는데 천리타향에서 뜻밖에 뵈오니 참으로 바라던
바를 이룬 것이다. 헤어지기 섭섭함을 달래기 위해 시 2절을
지어 봉정하고 화답을 받아 타일의 자료로 갖춘다.
■ 光肇
吾宗宗約貴親親洛水萍逢意更新情話燈前兼雅謔却忘身是客中人
系出冠山摠懿親秦城邂逅此遊新苟將孝思追先祖百世何殊一室人
우리 문중 종약은 친한
이를 친히 함을 귀하게 여기는데 서울에서 나그네로 만나니 뜻이 다시 새롭도다. 등불 앞에서 점잖게 정화를
나누며 화기애애하니 문득 나그네임을 잊었네. 관산에서 출계하였으니 모두가 의친이라 진성(秦城)에서 뜻밖에 만나니 새롭구나. 진실로 효사로 선조를 추모한다면 백세가 되더라도 어찌 일실인들 다르리오.
■ 伯珪
三百年前同室親旅窓團會語還新此後相傳仍百代莫敎忘若逢人
彛情百代便相親蘭臭旅牕契又新難耐每年秋後雁聲啼送意中人
3백 년 전 동실의 가까움이라
여관에서 단란하게 모여 이야기 하니 도리어 새롭구나. 이제부터 상전하여 백대에 이르기까지 서로 잊지
않고 길 가던 사람 만나듯 하지 말세. 이정은 백대 되어도 서로 친하니 난초의 향기처럼 정 또한 새롭구나. 해마다 가을 지나면 기러기 우는 소리 견디기 어려우니 정다운 사람 울려 보내리.
■ 伯昊
洛水秋風舊懿親兩逢情誼覺相新莫言契闊從今又同雲衢來去人
낙수의 가을바람 옛날의
의친이라 양쪽에서 만난 정의 서로가 새로움을 느끼네. 이제 또한 다시 만남이 기약 없다 말하지 말라
다 같이 구름거리를 오가는 사람이리.
■ 伯紳
千里逢迎百代親幾年契潤語還新莫言族世今相遠自是當年毘季人
천리에서 백대의 친함을
맞이함이 몇 년 만인가 하는 말이 새롭구나. 일가의 대수는 이제 서로 멀다고 말하지 말고 당년부터는
형제이거늘.
■ 伯勛
地北天南幾世親相逢此日誼愈新情話一宵旋告別客牕曉月兩鄕人
북쪽 땅 남쪽 하늘 몇
대의 친함인가. 오늘 서로 만난 정의가 더욱 새롭구나. 한밤의
정다운 이야기 얼마 지나 고별하니 객창의 새벽달 두 고을 사람이네.
■ 榮纘
洛水萍逢始覺親一門敦誼此宵新二千里外湖關客三百年前毗季人
낙수(洛水)에서 나그네로 만나니 비로소 친함을 깨닫네. 일문의 돈독한 정이 이 밤에 새롭구려. 이 천리 밖 호남과 관북의
나그네가 3백 년 전에는 형제였네.
■ 伯純
親誼非關見後親相逢歡意倍相新旅窓話語無窮盡爲是原來一本人
幾代參商百代親漢陽萍水拭靑新燈前半夜悠悠話依舊當年一室人
친의는 만남 뒤에 친함과
관계없으니 상봉한 즐거움이 배나 더 새롭네. 여창의 이야기를 다할 수 없으니 이는 원래 한 본이기 때문이네. 몇 대를 떨어져 살았어도 백대의 친함을 한양의 평수 씻고 보니 청신하네. 등불
앞 한밤의 정담 예대로 당년의 한 방 사람들이네.
◇封事補完
◇社講會跋 저술
53세(1779년 己亥)
冠山의 鎭山 ‘支提誌’를 짓다
이해에 ‘지제지(支提誌)’를 저술했다.
1780년(庚子)의 저술로 알려졌으나 이때는 지제지발 ‘발(跋)’을 썼던 것이다. 한 권의 책이 나오려면 자료수집과 저술 등의 과정을 거쳐야 가능하다. 이
책 또한 여러 해를 준비해야만 가능하다. 지제산의 산명은 천풍(天風), 천관(天冠), 불두(佛頭), 우두(牛頭) 등이 있다. 원래
정명국사(靜明國師) 천인(天因)이 쓴 ‘천관산기’가 동문선에 실려 있다. 그리고 신동국여지승람 장흥도호부조에 ‘지제산적기’가 있다. 선생은 이를 토대로 36개
봉우리, 89개 암자(庵子)를 답사해서 책을 만든 것이다.
강회를 계속하면서 향사례를 베풀었다. 이때 사강회는 명목만 유지하는 형태로 운영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발족 후부터 강회를 질시한 눈초리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12년째
이끌었는지 그 진정한 사연을 파악할 수 없어 아쉽다. 이전 해에 사강회 <跋>을 지었으니,
사실상 그 막을 내릴 준비를 했던 셈이다. 서책에 서(序)가 시작이라면 ‘발’은 끝맺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출범 3년
후의 사강회는 아마도 선생의 적극적인 참여 없이 그의 직계 자제들에 의해 그럭저럭 유지되지 않았을까. 저술이
없는 해로 알려지고 있으나 잘못이다.
◇宿冠寺贈僧
山籟引風生夜壑 산에 바람이 불어 밤 골짜기에 소리가 나고
磬聲和月隱虛櫳 경쇠소리는 달과 함께 빈 창가에 은은하네
須看感應皆由動 감응은 모두 움직임에서 시작됨을 봐야 하니
然後方知靜不空 그런 뒤에 고요함이 빈 게 아님을 알리라
선생은 어느 때 산사에서 밤을 지낸 감상을 읊었다. 바람이 불면 골짜기에서는 바람소리가
난다. 그 바람으로 사찰의 경쇠는 흔들거리며 소리를 내고 밝은 달빛은 창문에 은은하게 비춘다. 인간의 감응은 모두가 움직임에서 시작되고 고요하다고 빈(空)게 아니라고 한다. 이 시에서 산사의 승려에게 주역 계사전(繫辭傳)의 이치 즉 불가의 ‘空’에 대한 인식을 깨우쳐주고 있다.
◇支提誌 저술
54세(1780년 庚子)
13년 만에 사강회 문을
닫다
독경변진(讀耕並進)의 사강회는 잡음이 그치지 않더니 13년 만에 문을 닫았다. 구성원의 한 사람인 사락헌(四樂軒) 백침(伯琛)의「양거성난의(兩擧誠難矣)」에서의 표현처럼 논밭에까지 서책과 필묵을 가지고 다니면서 이 둘을 강박적(强迫的)으로 결합시켰다는 것이다. ‘월과운(月課韻)’은 일종의 숙제이니, 강박을 줄 수도 있다. 선생이 제자들의 수준에 따라 한시의 운(韻)을 내는 등 숙제를 주면 운에 맞춰 시를 짓는다. 교육이란 자유방임으로 방치하면 어떤 결과도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세상이
발전한 지금도 학교에서의 숙제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해 10월 27일 영암(靈巖) 신사준(愼師浚)을 빈(賓)으로 초대해 향음 주례를 베풀었는데 인근지역에서
수 백 명이 참가했다. 선생은 41세부터 농사꾼들을 깨우쳐
도학이 숨 쉬는 고장으로 만들고자 사강회를 출범시켰다. 그러나 출범
1년 뒤부터 입방아를 찍어 3년부터는 규모를 10분의 1로 줄여 이해에 문을 닫은 것이다. 어찌 회한이 없겠는가. 그래서 빈으로 모신 신사준이 영암으로 귀가할 때 그와 동행해 월출산을 등산한 후 진도 벽파진과 강진 만덕사를
유람한 것으로 보여 관련된 한시를 여기에서 소개한다. 도급에게서 장손 영간(榮幹)이 출생했다.
◇登月出山
穿林遙趁上方鐘 숲을 뚫고 멀리서 절간의 종소리 들려오는데
步步層崖信短筇 지팡이 가는 대로 한층한층 단애로 오르네
海國烟雲藏大壑 바닷가의 구름과 안개는 큰 골짜기에 잠겼고
玉淸星月宿深松 옥청의 별과 달은 깊은 소나무에 묵고 있네
化工艱閱三元刧 조화옹은 수천 년 시간을 어렵게 지내 왔지만
遊客輕登萬丈峯 나그네는 만장봉을 가볍게 올라 보네
到處奇巖還可笑 도처의 기이한 바위는 오히려 가소로울 뿐
隨名强作佛僧客 이름 따라 억지로 불승의 모습 지어 보네
◇次李忠武公刀字韻
功存朝鮮國 공훈이 조선 땅에 남아 있으니
節薄秋雲高 절개가 가을 구름에 닿을 듯 높아라
立儒遺風在 나약한 이 세우는 유풍이 있어
書生撫大刀 서생도 큰 칼을 어루만지누나
◇萬德寺
山茶花落綠莎縐 동백꽃 떨어져 푸른 잔디에 아롱지는데
懶步今沙選勝幽 금모래 한가로이 밟으며 그윽한 승경 찾네
一曲漁歌江日晩 한 곡조 어부의 노래 저녁 강가에 퍼지니
忽然人上洞庭樓 홀연히 나그네는 동정루에 올라 보네
◇宿坪村
月色圍平楚 달빛은 평야를 에워싸고
江聲滿野村 강물 소리는 마을 어귀에 가득하네
行人夜未息 행인들이 밤새도록 끊이지 않으니
警起水鳬喧 물오리들 놀라 깨어 시끄럽구나
◇支提誌 跋 저술
55세(1781년 辛丑)
母情 그리며 ‘思誠錄’을 짓다
윤5월 15일 어머니 오씨(平海)가 80세를 1기로 별세했다. 107일간의 장례절차를 거쳐 9월 4일 다산등 할머니 백씨의 유택 계하에 산소를 썼다. 어머니께서 생전에 온화와 공손, 검약과 절조, 지성과 천명을 편안하게 받아들인 사실을 적은 사성록(思誠錄)을 저술해 자손들로 하여금 감계(鑑戒)로 삼게 했다. 어머니의 별세는 집안에 연쇄적으로 파장을 일으켰다. 우선 어머니가 별세한 후 아버지 영이재공께서도 정신과 기운이 쇠약해져 대소변을 가리지 못할 정도로 악화됐다. 동생과 아들과 딸로 하여금 시중에 열중하도록 했으나 시름이 깊었다.
사강회의 문을 닫았으니 딱히 신경을 써야할 일도 없는 셈이다. 사강회를 운영할 때는 비록
논밭으로 나가 일꾼들과 일을 하지 않는다하더라도 책임자이니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책임에서 자유로우니 이해부터가 학계에서 선생의 생애를 △자수면업기(출생-24세) △덕산수학기(25-41세) △궁경독서기(41-54세)를
거쳐 △강학저술기(55-71세)로 접어든 시발점이 된 것이다. 이해에 사성록 전편을 썼다는 것은
강학저술기의 첫 작품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강학이란 말은 찾아와 묻는 자에게 가르쳤다는
얘기도 될 것이다.
◇思誠錄 前篇 저술
56세(1782년 壬寅)
長川齋 重修 ‘頌禱詩’를 짓다
5월 어머니 상복을 벗고 심제(心制)했다. 종중에서는 장천재를 중수하고 낙성연을 베풀었다. 장천재는 16세기말쯤에 지어진 후
1659년, 1705년, 1724년, 1747년에 수리를 했는데 이해에도 수리를 했던 것이다. 족보 지장록에는 1659년에 지었다고 하나 안항공의 장남인 청금공(聽禽公) 휘 정훈(廷勳, 1578-1652)의 「제장천당(題長川堂)」이란 한시와 그가 1600년(庚子) 11월에 장흥부를 순시하는 상국(相國,․전라관찰사)에게 올리는 ‘상순상서(相巡上書)’란 제목의 서간에도 그때 이전에 지어진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기에 장천재의 연혁을 재규명돼야 한다.
어찌됐건 장천재는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됐다. 첫째, 날씨가
나쁠 때 18세 습독공(習讀公) 배위 신씨 등의 묘전시제를 지냈다. 둘째,
문중자제들의 강학공간으로 사용했다. 16세기 초에 위씨가 관산에 터를 잡은 후 당동 수가(水閣)에 이어 두 번째 강학소였다. 셋째, 족보편집실로 기묘초보 등의 산실이다. 넷째, 종중의 회의와 계(契) 그리고 복(伏)다림의 장소였다. 다섯째, 제야(除夜)와 원단(元旦)의 공간이다. 여섯째, 군수 등
진객을 접대하고, 시민묵객들과 수창(酬唱)하는 영빈관이다. 일곱째, 꽃지짐과
달맞이 등 민속놀이 등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1782년의 중수사실은 기묘대동보 지장록에서도 기록되지 않았다. 장천재는 21세 때인 1747년에
이어 이해에도 수리를 했던 것이다. 그러니 계당학숙(溪堂學塾)은 장천재를 수리한 이듬해인 1748년(戊辰)부터 운영했던 셈이다. 다만 이해(壬寅)의 수리사실이 왜 누락됐는지 알 수 없다. 다행스럽게도 선생의 장천재 중수 ‘송도시(頌禱詩)’를 통해 이때의 중수를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아쉬운 것은 선생이 주옥같은 어휘로 후손의 번성을 간절히 축원하는 이 ‘송도시’가 장천재 판상(板上)에 걸려 있지 않은 것인지 후손들의 무관심이 기이하다.
俯溪堂落成宴頌禱詩 七章
活活長川 콸콸 흐르는 장천이여
幽幽南山 그윽한 남산이여
築室旣成 집을 다 짓고 보니
孔奕且安 정말 아름답고 편안하구나
承我先墓 우리 선영 받들어
載繁其祉 이 복을 번창시키리라
殖殖其庭 반듯한 뜰이여
閒閒其楹 우람한 기둥이여
齋宿以時 목욕재계 때맞추어
歲薦我祀 해마다 제사 올리리라
於千萬年 아! 천년만년토록
勿替引之 중단 말고 이어가리라
噲噲其正 훤칠한 정면에다
噦噦其冥 깊숙하고 아늑한 방
講學於斯 이곳에서 강학하고
宴飮於斯 이곳에서 술도 마시겠지
子孫保之 자손들아, 보전해서
今聞不己 아름다운 명성 끊이지 말게 하라
生徒濟濟 많고 많은 생도들
夙夜匪懈 밤낮으로 부지런하고
侁侁錙疇 많고 많은 유생들
亦旣來處 어느덧 자리에 왔구나
匪今斯今 지금뿐만 아니라
永世如之 영원토록 똑 같아라
我有旨酒 내게 맛 좋은 술 있어
以速嘉賓 아름다운 손님들을 초대하네
父老無故 부로들 탈이 없고
兄弟具存 형제들 모두 살아있어
鼓瑟吹笙 비파 타고 생황 부니
樂且無央 즐거움이 끝이 없어라
賓之初筵 손님 처음 자리에 나올 때
其儀不忒 거동이 흐트러지지 않다가
或麻克終 혹 끝까지 잘 마시지 못해
醉舞僛僛 술에 취해 비틀비틀 한다면
酌彼兕觥 저 뿔잔에 술을 따라서
逝其罰汝 그대에게 벌주로 내리리라
吹笙擊鼓 생황 불고 북을 치며
俯我旨酒 맛난 술을 권하니
和樂旣洽 화락함은 그지없고
威儀孔閑 위의도 매우 우아하네
父兄有慶 부형에게 경사 있으니
眉壽萬年 만년토록 장수하소서
57세(1783년 癸卯)
아우 거실 竹西齋라 追題하다
8월 2일 막내 동생 백헌(伯獻)이 42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어머니
오씨께서 돌아가신지 고작 2년 사이다. 슬픔이 너무 컸다. 선생은 동생의 타계가 몹시 안타까워 그가 생전에 거처하던 소실(所室)을 죽서재(竹西齋)라 추제(追題)했다. 사는
사람이 죽은 사람을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그것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와 며느리에 이어 동생까지 유명을 달리하니 그 마음이 오죽했겠는가. 아마도 만사가
귀찮았던지 아무런 글도 쓰지 않은 무작년이다. 그러나 글을 쓰는 선비가 1년 내내 글을 쓰지 않음은 오히려 어려운 일이다. 지금까지 확인되지
못했거나 발견하지 못했을 뿐 어디엔가 선생의 저작이 남아 있을 것이다.
58세(1784년 甲辰)
아버지 詠而齋公이 타계하다
2월 10일 아버지 영이재(詠而齋)께서 타계했다. 어머니가 타계한신 3년
후 막내 동생에 이어 아버지까지 잇달아 상을 당한 것이다. 영이재공은 장흥 위씨 문중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 첫째는 문중 조직인 문회(門會)를 만들었다. 이전까지는 일가 중심의 작은 모임만 있었다. 문회를 발족시키면서 전체를 아우르는 조직이 만들어 진 것이다. 둘째, 충렬공 묘소를 찾아 1741년부터 묘전에서 시제를 지냈다. 그리고 묘전에 비석을 건수했다. 셋째, 1759년에 위씨 최초의 족보인 기묘보(己卯譜)를 장천재에서 발행했다. 당시에는 족보가 있는 성씨와 없는 성씨의 사회적
신분이 크게 차이가 있었다. 그는 후손으로 하여금 행세를 하게 만들었다.
3월 6일 어머니 산소에 합장했다. 선생은 유택(幽宅)에 대해서 당시는 물론 지금도 납득하지 못할
파격적인 사상을 몸소 실천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묘소도 세대 순서로 매장한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으나 선생은 이 같은 순서를 무시하고 산소를 썼던 것이다. 7월에 아버지의 마음가짐과 행동을 전편에서와
같이「思誠錄」후편에 상세히 기록했다. 그는 양친이 타계했지만 그때까지 자신의 탯줄이 남아 있었는데 이를 작은 주머니에 담아 지니고 다니며, 부모님의 은혜를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제낭명(臍囊銘)을 썼다. 겨울에 증조부(東寔) 때부터 서재로 사용했던 다산초당(茶山草堂)을 약간 옮겨 규모를 더 넓히는 공사에 착수했다.
◇思誠錄 後篇 저술
◇臍囊銘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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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공(存齋公)에 대한 서적이 몇 권있으나 연대(年代)순으로 작품을 소개하고 생애를 조명한 것이 없어서 [청장년회BAND]에 게재하신 圓山 소장님의 글에서 발췌하였습니다. 내용이 방대하여 1~3회차로 나누어 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