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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春秋戰國時代

① 春秋時代
 위씨는 은(商)을 멸망시키고 주(周)나라 건국의 토대를 마련한 문왕(文王) 창(昌)은 희씨(姬氏)이다. 무왕 발(發)은 문왕(文王)의 장남이며, 희고(姬高)는 열다섯째 아들이다. 고는 형인 발을 수행해서 은의 주왕(紂王)을 멸한 공으로 BC 1046 필지(畢地)를 봉토(封土) 받았다. 이로 인해 희고(姬高)의 성은 희(姬)에서 필(畢)로 바꿔지게 된다.  그래서 희고의 후손들은 이후 희(姬)에서 필(畢)자를 성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필고(畢高)의 후예들은 선조의 봉토를 지키지 못하고 서민으로 전락, 흩어졌다. 그러다 필고의 후손인 필만(畢萬)이 주나라 혜왕(BC 661)때 당진국(唐晉國) 헌공(獻公․676~651)이 위지(魏地)를 정벌할 때 참승(驂乘)으로 참전해 공을 세웠다. 헌공이 필만을「위지」의 제후로 봉하니 그가 곧 위씨의 시조「위필만」이다. 위국은 섬서성 예성에 있던 제후국이다. 시경(詩經)의 위풍(魏豊)은 이곳을 지칭한다.

魏姓의 創姓 過程

主人公
   姬高
BC 1046
  畢姓
周나라 武王의 殷 紂王 征閥 功勞
  畢萬
BC  661
  魏姓
晉나라 獻公의 魏地 征閥의 功勞


◇魏氏諸侯(三家分晋前)


魏주武子
畢萬의 後裔
魏取 簡子
魏舒의 아들
魏絳 昭子
魏주의 아들
魏侈 襄子
魏取의 아들
魏絳;獻子
魏絳의 아들
魏駒 桓子
魏曼多의 아들


②戰國時代의 魏國
제후국은 6대 동안 이어졌다. 그러다 6대 환자(駒)의 손자 위사(魏斯)가 주(周)나라의 위열왕(威列王) 23년 BC 403년 한(韓)과 조(趙) 양가와 함께 주나라 천자로부터 왕으로 책봉을 받아 왕국의 반열에 올랐다. 그가 문후(文侯)다. 문후 이후 가왕(假王) 위표(魏杓까지 8대에 걸친 위국의 부침사는 다음과 같다.

[晉나라 擊破]
문후(魏斯) 33년(기원전 413년), 오기(吳起)는 위나라 군대를 이끌고, 서하 전장에서 진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위하평원의 요충지 鄭으로 진격했다. 晉나라는 공황상태에 빠진다. 위의 태자 격(擊)은 진나라의 주력부대가 오기를 막는 틈을 타서, 군대를 이끌고 황하를 넘어 진나라의 군사거점 번방(繁龐)을 격파한다. 곧이어 오기가 임진(臨晉), 왕성, 원리, 낙읍, 합양, 음진 등 진나라 영토를 대거 점령한다.
문후 38년(기원전 398년)에는 서하지구를 완전히 점거하고, 상군(上郡)을 설치한다. 이렇게 하여 서부와 중원의 황금통로를 확실히 장악한다. 문후는 낙수의 동안에 장성을 구축하여, 관동의 이익을 독점한다.
무후 3년(기원전 393년)에 오기는 다시 진나라와 鄭나라를 공격하여, 진나라 군대를 주성(主城)에서 격파한다. 무후 7년(기원전 398년)에는 오기가 5만의 군대를 이끌고 양진성 밖에서 진나라의 50만 군대를 궤멸시킨다. 이것이 그 유명한 “양진지전(陽晉之戰)”이다. 그리고 파죽지세로 관중평원으로 쳐들어  간다. 무후 9년(기원전 387년) 오기가 무하(武下)에서 다시 진나라의 잔여군대를 대파한다. 이로써 진나라는 전적으로 항거할 힘을 잃어버린다.

[齊나라 分割]
문후 41년(기원전 405년), 제나라는 조나라를 공격한다. 조열후의 지원요청을 받고, 위나라는 병력을 일으켜 구해준다. 조나라, 한나라의 군대와 연합하여 상대방을 격파하고, 제나라 군대 3만명을 궤멸하고 전략문자를 대거 획득한다.
문후 42년(기원전 404년), 위, 조, 한의 삼진연합군은 제나라 장성을 격파하고,  제나라에 땅을 할양해 줄 것을 요구한다. 문후는 제나라 토지를 이전에 점령한 하내(河內)지구와 연결시키기 위해, 衛나라와 연합하여 제나라를 토벌한다. 위나라 군대는 박릉(博陵)까지 밀고 들어가니, 그 기세를 막을 수가 없었다.

[楚나라 降伏]
문후 때, 자주 鄭나라와 宋나라를 공격하여, 위나라와 초나라는 이해로 인해 충돌한다. 그러나 초나라 군대가 연속 패배했다. 위무후 5년(기원전 391년) 문후로부터 강대한 국력을 물려받아 삼진연합군을 이끌고, 초나라 군대를 대량(大梁), 유관(楡關)에서 패배시키고, 양릉을 차지한다.
초나라의 조야는 공포에 휩싸인다. 초도왕은 연속하여 사신을 파견하여 강화를 요청한다. 무후는 20년(기원전 374년)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초나라 군대를 다시 유관에서 격파한다. 초나라가 세력을 확장하려는 기도는 저지당한다.

[趙나라 屈伏]
삼진연합군의 기치를 내걸고, 문후는 위나라를 중심으로 하여, 비교적 약한 한나라를 끌어들이고, 이 기회를 틈타 조나라를 압박할 전략적인 공간을 확보한다. 문후 38년(기원전 408년), 위나라는 송나라를 격파한 후, 조열후의 요청을 받아, 날로 강해지는 중산국을 공격한다. 문후 40년 중산국을 격파하고, 진군하는 도중에 적지 않은 조나라 땅을 점령한다.
문후는 또한 衛나라의 제나라 세력을 몰아내는 것을 명목으로 하여, 제나라와 조나라가 계속 다투던 장수와 남안을 편입시킨다. 그리고 업현(鄴縣)을 설치한다. 이렇게 하여 조나라가 중원으로 남진하는 길을 막아버린다.
무후 13년, 조나라는 衛나라를 공격한다. 위신공(衛愼公)의 구원 요청을 받아,  출병하여 토대(兎臺)에서 조나라 군대를 격파한다. 이로써 위나라와 조나라는 한 때 사이가 악화된다. 무후 23년, 조나라는 다시 衛나라에 손을 뻗는다. 그러자 위나라는 다시 조나라 군대를 린(藺)에서 격파한다.

〔魏나라 滅亡〕
그러다 위나라는 가왕(假王) 표(杓) 2년 BC 225년 진(秦)나라의 장수 왕분(王賁)<진나라 노장수 왕전(王剪)의 아들>에게 기원전 222년에 大梁 : 西土 즉 開封을 수공(水攻)에 의해 잃고 멸망했다.(도읍지인 安邑에서 大梁으로 옮겨 양(梁)나라로 불렀음) 이로 인해 자손들은 거록으로 가고 윤(淪)은 서민이 됐다.

◇ 魏氏八代王(三家分晋後)
1 文侯 魏斯 303-396 내정 개혁        5 昭王 魏구 295-277 안읍 秦 헌납
2 武侯 魏擊 395-370 晉정공축출       6 安釐 魏행 276-243 회생 기회 줌
3 惠王 魏罃 369-319 왕호 사용  7 景閔 魏增 242-228 합종 秦 공격
4 襄王 魏嗣 318-296 합종책추진       8 假王 魏杓 227-225 秦 공격 멸망

 
◇中國의 魏氏 緣故地

  1
 畢地
섬서성 서안남부 함양동북쪽 畢原
 姬公 高의 封土地
 2
 魏地
산서성 예성현(芮城縣)BC ?-661
 畢公 萬의 封土地
 3
 魏國
산서성 안읍(安邑) BC403-225
 도읍지(首都)
 4
   〃
산서성 남부 운성(雲城)
 周禹王의 도읍지인근
 5
   〃
하남성 開封縣 大梁(BC361)
 秦(329년) 15현 獻上


〔滅亡 以後〕
일부의 중국 거록현(鉅鹿縣) 위씨의 기록에 의하면 장흥 위씨 시조이신 경(鏡)은 당나라 태종 때 재상을 지낸 위징(魏徵)의 형인 위유(魏攸)로 기록된 바 이 기록에 의존하여 위징공가보(魏徵公之家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四十四世祖諱金祥字長賢號念四妣劉氏生四子長從(攸)、次徵、三德、四塝。즉44세조 휘(諱) 금상(金祥) 자(字) 장현(長賢) 호(號) 염사(念四) 비(妣)는 유씨(劉氏)로 4형제를 두었는데, 첫째는 종(從), 둘째는 징(徵), 셋째는 덕(德), 넷째는 방(塝)이라 한다. 이는 확인되지 않았다.

(2) 魏氏의 世系

①華夏公譜


盤古→天皇→地皇→人皇→太昊伏羲→炎帝神農氏→黃帝軒轅氏→玄極→帝곡→后稷→不窟→公劉→慶節→皇樸→弗差→不屈→公非→高행→亞행→叔非→古公→季歷→周文王昌公→周武王發、周公旦、畢公高


②正譜『魏氏公譜』實記載
△太始祖畢萬公〈비;劉氏〉
△二世祖芒季公〈;張氏〉
△三世祖魏주公〈;孫氏〉
△四世祖魏絳公〈;鄭氏〉
△五世祖魏영公〈;周、寧氏〉
△六世祖魏舒公〈;高氏〉
△七世祖魏取公〈;張氏〉
△八世祖曼多公〈;陳氏〉
△九世祖魏須公〈;宋氏〉
△十世祖魏駒公〈;孔氏〉
△十一世祖汝模公〈;何氏〉
△十二世祖魏斯公〈文侯〉〈;曾氏〉
△十三世祖魏擊公〈武侯〉〈;趙氏〉
△十四世祖魏瑩公〈魏惠王、梁惠王〉〈;袁周楊氏〉
△十五世祖赫公〈魏、梁襄王〉〈;羅氏〉
△十六世祖魏讓公〈魏、梁哀王〉〈;馮氏〉
△十七世祖魏取公〈魏、梁昭王〉〈;陳孔氏〉
△十八世祖魏多公〈魏安釐王〉
△十九世祖魏增公〈魏景愍王〉
△二十世祖魏王假公被秦將王賁〈秦老將王剪之子〉於;公元前222年;引水灌大梁國都〈今開封〉,國滅子孫投奔鉅鹿淪;庶民!
이상의 기록으로 위씨의 시조 畢萬 이하의 세계(世系)를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위국이 대량(大梁)에서 진(秦)나라에 패한 이후 후손들이 어디에 정착해 살았는지 몰랐으나 이 기록을 통해 알게 됐다. 다만 이 기록이 사실과 맞는지는 개봉(開封)과 안읍(安邑) 위씨들의 기록과 대조해보아야 한다.  

《典據 : 史記 魏氏世家 第十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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