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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廉 化身, 忠烈公

충렬공은 한국 위씨 후손 가운데 가장 높은 벼슬아치로 후손에게 자긍심을 심어준 어른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국무총리에 해당된 품계이다. 그는 청백리로 유명하다. 왕의 명령이라도 부당하면 그 자리에서 따를 수 없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천하의 문장으로 외국에 보낼 국서를 짓기도 했다. 사절로 외국에 가서도 일행들이 진귀한 물건을 구입해도 한 가지도 사지 않았다. 후손들의 결백증은 바로 충렬공의 유전자일 수 있다.
관북문중은 1689(
己巳)에 발행하려던 족보에서 공을 특별하게 여겼다. 문제의「己巳譜」는 통천(通川)군수 정상(定相)이 초안을 완료하고 인쇄할 단계에서 자금사정으로 발행되지 못했다. 그는 미완의 족보 서문에서 우리 충렬공 계정(繼廷)께서는 벼슬이 고려조 때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고, 그 후로 누대에 걸쳐 고관대작이 끊이지 않았으니 운운했다(하략). 이어서 12대조께서 함주로 와서 살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왜 이렇게 기록했을까. 아마도 전거에 자신이 없어서 비롯된 결과가 아닐까. 족보에는 반드시 세계가 있어야 한다. 세계도 없는 족보는 가승(
家乘)이거나 파보(波譜) 수준이다. 이는 역으로 세계를 짜기가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아마도 상계를 모르니까 높은 벼슬아치를 서문에서 거론해서 후손의 긍지로 삼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나마 고려 때 문하시중을 좌의정으로 알았다면 그 전거가 그만큼 미치지 못한 것이다.  
기사보는 남쪽 영이재(
詠而齋)께서 발행한 1759년 기묘초보보다 무려 70년 전이다. 결국 미완의 관북 기사보는 시조로 충렬공을, 중조로는 16세인 자공(自恭)으로 이어진 세계를 염두에 둔 기록처럼 보일 수 있다. 중조에는 문제가 있으나 신라와 고려를 통해 역사적으로 분명한 조상은 충렬공이 너무도 뚜렷하기 때문일 것이다. 만일 남쪽의 기묘초보에서도 충렬공을 중조로 모셨더라면 보의론 문제는 나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1.
萬春 저택 파괴 奏請  
위계정은 그 가계(家系)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문종(文宗) 때에 급제한 후 문장으로 이름이 났다. 벼슬이 여러 번 올라 좌보궐지제고(左補闕知制誥)가 되었으며, 선종(宣宗) 때에는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임명됐다. 당시 왕이 사랑하는 첩() 만춘(萬春)이 집을 크고 화려하게 짓자, 위계정이 왕에게 아뢰기를만춘이 전하를 기만하고 유혹하였으며, 백성들에게 괴로운 부역을 부과하여 대규모로 사제(私第)를 신축하였으니, 그것을 허물도록 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했으나 왕은 듣지 않았다.
또 그가 추밀승선(
樞密承宣)으로 있을 때에, 연등(燃燈) 행사하던 날 밤에 왕이 연회를 베풀었는데, 술이 거나해지자 위계정에게 일어나 춤을 추라고 명령하였다. 그는 왕의 명령을 사절하여 말하기를, “광대가 있는데 어찌 제가 춤을 추겠습니까?”라고 하니 왕도 강요할 수 없어 그만두었다. 숙종(肅宗) 때에 이부(吏部)와 예부(禮部) 두 부의 상서(尙書)를 역임하고,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로 옮겼고,  문하시랑평장사 겸 태자소사(門下侍郞平章事兼太子少師)로 승진되었다.

2.
일곱 번의
辭退공방
예종(睿宗) 초기에 문하시중으로 임명되었을 때, 퇴직을 청원했으나 허락하지 않았고, 재차 퇴직을 요청했으나 왕은 여전히 허락하지 않았으며, 좌승선(左承宣) 유인저(柳仁著)를 그의 집으로 보내 퇴직하지 말라고 타일렀으나, 위계정은 굳이 병을 칭탁하면서 왕에게 표()를 올려 퇴직할 것을 간청하였다. 왕이 다시 친필로 쓴 조서로서 허락하지 않았다. 예종이 위계정에 사퇴의사를 거두라고 내용의 조서를 내렸다.
그대는 탐오하고 간사한 무리들이 꺼리는 바 있었으나, 추호도 충직한 절조를 고치지 않았으므로, 선왕(
先王)께서는 그대의 어진 행적을 가상히 보시고 일찍이 중대한 임무를 맡기시었고, 과인(寡人)은 즉위한 후 같은 마음을 품은 대신으로 여기고 있다. 그대는 금년 봄부터 병을 칭하면서 퇴직을 요청하여 왔는데, 이는 비록 만족한 것을 알고 그칠 데를 아는 가상한 생각이기도 하지만, 내가 의지하고 기대하는 마음과는 부합되지 않는 바 있다. 행여나 내가 그대를 생각하는 지극한 성심을 알거든 지나친 사양을 하지 말라. 전자에도 이미 간곡하게 말한 바 있었는데, 또 다시 무슨 말을 하는가?”라고 하소연하면서, 드디어 내인(內人) 한교여()를 보내 돈독하게 설복하였으며, 이내 수태보(守太保)로 승진시켰다.
위계정(
魏繼廷)이 다시 출근하여 일을 보았는데, 어사(御史)가 아뢰기를, “위계정은 신병이 있어 일 년이 되도록 일을 보지 못했고, 누차 은퇴할 것을 청원하였는바, 전하께서는 더욱 후대하시고, 200일간이나 휴가를 주셨습니다만, 다시 휴가 기일이 지난 지 수십 일이 지난 뒤에야 일어나 출근하였다는 것은, 대신의 체통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니, 그를 파면하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으나, 왕은 파면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후 2년 간에 3차에 걸쳐 사직청원서를 제출하니 왕이 조서를 내렸다,
그대의 청백한 범절과 두터운 덕행은 백관들이 마음으로 추앙하는 바이며, 곧은 절개와 높은 명망은 모든 사람들이 이목을 기울이게 한다.
문종(
文宗)께서 그대를 등용하시어 사신(詞臣=글로써 시종하는 신하)으로 삼으셨고, 돌아가신 숙종(肅宗)께서는 수상(首相)으로 삼으셨다. 또 지금 나는 미숙한 사람으로, 명철한 노대신(老大臣)의 보좌에 의지하고 있는데, 그대가 신병이 있다고 갑자기 중책을 사퇴하려 하기에, 재차 글을 내려 나의 지극한 심정을 전하며 간곡하게 효유하면서 위로했다.
일곱 번에 걸쳐 글을 올리고, ()이 확고한 뜻을 바꾸지 않으므로, 그대의 견고한 청원을 계속해서 거절하기 어려워, 편안히 휴식할 것을 허락하노니, 마땅히 잘 조섭하여 될수록 신속히 다시 출근하도록 하라
얼마 후에 중사(
中使)를 보내 그를 위문하고, 두 은합(銀合-은제 그릇)의 차와 약을 보냈다. 위계정이 다시 글을 올려 녹(祿)을 받지 않겠다고 사양하니, 왕이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그대는 오랜 기간 재상으로서 보필하는 공적을 쌓아 왔는데, 우연히 피부병에 걸렸다. 내 생각에는 몸을 편히 쉬우지 않으면, 병이 속히 치료되지 않을 것 같으니, 비록 보내기는 몹시 안타까웠으나, 억지로 참고 은퇴 청원을 받아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다시 글을 올려 녹(
祿)을 받지 않겠다고 청원하는가? 퇴직한 후에 국록을 주는 것은 상례(常例)이니, 나의 마음을 이해하야 너무 굳이 사양하지는 말라!”
그러나 위계정은 재차 글을 올려 녹을 사양했고, 왕이 또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그대는 널리 배우고 학문에 힘써서 학계의 으뜸이 되었으며, 몸을 바치고 곧은 절조를 지킴으로써 일대의 명신(
名臣)이 되었다. 병으로 인하여 벼슬에서 은퇴하고 가는 것도 심히 애석하거늘, (祿)마저 아니 받겠다 하니, 이것은 짐()이 어진이를 우대하고 노인을 존경하는 뜻과 배치되므로, 삼사(三司)에게 지시하여 녹의 반액을 공급할 것을 명령하노라.” 얼마 후 타계했는데, 시호를 충렬(忠烈)이라고 했다.
위계정(
魏繼廷)은 청백하고 검소하며 원만하고 강직했다. 이자의(李資義)가 송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1103癸未), 그가 부사(副使)로 동행하였는데, 이자의는 진기한 물건을 많이 샀으나, 위계정은 한 가지도 사지 않았다. 양부(兩府)에 등용된 후에도 본래의 지조를 바꾸지 않았으며, 또 당시 사람들이 불도를 숭상하는 풍습을 따르지 않았다.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가 큰일을 이룰 것을 기대했으나, 그가 정승이 되었을 때는 이미 몸이 늙고 병들었을 뿐더러, 또한 대세가 어찌 할 수 없음을 깨달아,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뜻을 드러내지 않았다. 인종(仁宗)이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렸다.
위계정(
魏繼廷)은 숙종(肅宗)의 유명(遺命)을 받아 선군(先君)을 보좌하였으며, 청렴하고 정직하게 시종 한결같은 절개를 지켰으니, 마땅히 예종(睿宗)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 할지어다.”

睿宗 廟庭 配享 敎書(高麗史 60, 卷第14)  
수사공중서시랑평장사 정간공 유인저(守司空中書侍郞平章事貞簡公 柳仁著)
수태사문하시중영평백 문숙공 윤관(守太師門下侍中鈴平伯文肅公 尹瓘)
수태부문하시중 문성공 김인존(守太傅門下侍中 文成公 金仁存)
수태부문하시중 충렬공 위계정(守太傅門下侍中 忠烈公 魏繼廷)

(
원문) 高麗史 95 - 列傳 卷第8 - 魏繼廷
魏繼廷, 史失其世系, 文宗朝, 登第, 以文章名, 累遷左補闕知制誥. 宣宗朝, 爲御史中丞. 王嬖妾萬春, 起第壯麗, 繼廷奏: “萬春誑惑上意, 勞役百姓, 大起私第, 請毁之.” 不報. 又爲樞密承宣, 王以燈夕置宴, 酒酣, 命繼廷起舞, 辭曰: “有伶人, 何用臣舞.” 王不得强, 乃止. 肅宗時, 歷吏禮二部尙書, 轉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進門下侍郞平章事兼太子少師.
睿宗初, 爲門下侍中, 上表乞退, 不允, 再乞退, 又不允, 命左承宣柳仁著, 至私第宣諭. 繼廷固稱疾, 上表乞退, 又手詔不允曰: “卿貪邪所忌, 忠亮不回, 先考尙賢, 早授洪鈞之任, 寡人受命, 以爲同德之臣, 自春已來, 稱疾求免, 雖嘉止足之義, 未符倚注之心, 知予至誠, 無或遜避, 前已曲諭, 夫復何言?” 遂命內人韓如敦諭, 尋加守太保. 繼廷入省視事, 御史奏: “繼廷寢疾彌年, 不能視事, 數請告, 上待益厚, 賜假二百日, 假已盡, 乃復遷延累旬, 然後扶起入省, 非大臣意, 請罷之.” 不許. 二年復三上表乞退, 詔曰: “卿淸規重德, 鎭服百寮, 直節令名, 聳動群聽. 文祖擢爲詞臣, 英考命作首相, 惟予冲人, 方賴耆哲之輔, 乃稱有疾, 遽辭機務之煩, 再下書詔, 朕已諭於至懷, 七上封章, 卿不移於確志, 重違勤請, 許遂便安, 宜加調攝, 速副登庸.”
尋遣中使慰諭, 賜茶藥二銀合, 又上表辭祿, 詔曰: “卿久積股肱之勤, 偶嬰腠理之疹. 朕以謂身若不安, 疾難速愈, 雖深惜去之意, 勉從告退之誠. 何復奏於章牘, 請不支於祿錢. 乞骸之後, 賜廩有常, 當體眷懷, 無煩固遜.” 再上表辭祿, 又詔曰: “卿博學攻文, 詞林宗匠, 匪躬直節, 爲世名臣. 因疾解官, 甚惜其去, 又從而辭祿, 非朕所以優賢敬老之意, 令三司給二分祿.” 未幾, , 謚忠烈.
繼廷, 淸儉蹇直, 嘗副李資義, 奉使如宋, 資義多市珍貨. 繼廷一無所求, 至登兩府, 不改素節, 又不徇俗好佛, 國人想望大用, 及爲相, 已老病, 且知勢之不可爲循, 無所建明. 仁宗詔曰: “魏繼廷, 嘗受肅宗遺命, 左右先君, 淸儉正直, 終始一節, 宜令配享睿宗廟庭.”

(
원문) 高麗史 60 - 卷第14 - 睿宗室
守司空中書侍郞平章事貞簡公 柳仁著
守太師門下侍中鈴平伯文肅公 尹瓘
守太傅門下侍中文成公 金仁存
守太傅門下侍中忠烈公 魏繼廷

3.
출렬공의 忠諫 승품

1)
高麗史 10
1082
11월 임술(壬戌)일에 왕이 친히 기도를 하여 눈 내리기를 빌었다. 무진(戊辰)일에 팔관회를 열고, 왕이 법왕사로 갔는데, 그 길로 신중원(神衆院)으로 갔다. 그 다음날인 기사일 대회 때 눈이 내려서, 연회에 참가했던 신하들의 의복이 모두 젖었는데, 저녁이 되어 돌아가려 할 때는, 하늘이 개고 달이 밝았다. 왕이 창덕문 밖에서 수레를 멈추고, 여러 종친들로 하여금 왕에게 잔을 들어 장수를 축원하게 하였더니, 간의(諫議)들인 김상기(金上琦)와 이자인(李資仁), 그리고 보궐(補闕) 위계정(魏繼廷)이 이를 간하므로 그만두었다.

(
원문)
高麗史 10 - 世家 卷第10 - 宣宗
遣戶部尙書李資義禮部侍郞魏繼廷, 如宋謝恩兼進奉
위계정(魏繼廷)을 예부상서한림학사 승지(禮部尙書翰林學士承旨)
魏繼廷爲禮部尙書翰林學士承旨; 爲禮賓卿樞密院副使
위계정(魏繼廷) 빈객(賓客)
위계정(魏繼廷)을 이부상서(吏部尙書)
위계정(魏繼廷)을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주국(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柱國)
위계정(魏繼廷), 참지정사(叅知政事) 곽상(郭尙)에게 각각 말 한 필씩 하사
위계정(
魏繼廷)을 수사도판예부사(守司徒判禮部事)
위계정(魏繼廷)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위계정(魏繼廷)을 태자태부(太子太傅)
위계정(魏繼廷)을 수태위문하시중상주국(守太尉門下侍中上柱國)

(
원문)高麗史 10 - 世家 卷第10 - 宣宗
十一月壬戌(1082), 親醮祈雪.
戊辰(1088), 設八關會, 幸法王寺, 遂幸神衆院. 己巳(1089), 大會, , 侍宴群臣皆霑服, 及夕將還, 天霽月明, 王駐輦昌德門外, 命諸王, 奉觴獻壽, 諫議金上琦李資仁補闕魏繼廷, , 乃止.

2)
高麗史 10
가을 7월 계미(癸未, 1103)일에, 호부상서 이자의(李資義)와 예부시랑 위계정(魏繼廷)을 파견하여, 송나라로 가서 숭녕(崇寧) 황제(2)의 은혜에 사의를 표하는 동시에 공문을 전달하게 하였다.

5.
忠烈公辭退 固執했을까?

위계정(魏繼廷)은 청백하고 검소하며 원만하고 강직했다. 이자의(李資義)가 송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1093), 그가 부사(副使)로 동행하였는데, 이자의는 진기한 물건을 많이 샀으나, 위계정은 한 가지도 사지 않았다.
文宗께서 그대를 등용하시어 사신(詞臣)으로 삼으셨고, 돌아가신 肅宗께서는 수상(首相)으로 삼으셨다. 또 지금 나는 미숙한 사람(睿宗)으로, 명철한 노대신의 보좌에 의지하고 있는데, 그대가 신병이 있다고 갑자기 중책을 사퇴하려 하기에, 재차 글을 내려 나의 지극한 심정을 전하며 간곡하게 효유하면서 위로했다.
그러나
일곱 번에 걸쳐 사퇴의 글을 올리고, 경이 확고한 뜻을 바꾸지 않으므로, 그대의 견고한 청원을 계속해 거절하기 어려워, 편안히 휴식할 것을 허락하노니, 마땅히 잘 조섭하여 될수록 신속히 다시 출근하도록 하라


충렬공은 문하시중직을 사퇴하기 위해 예종에게 무려 일곱 번이나 사양하는 글을 올렸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랬을까. 사퇴의 변은 늙고 병을 앓고 있다는 이유이다. 그럴 수 있다. 최 시중보다 후배이니 1037년생쯤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면 71세이다. 그러나 보다 큰 이유는 당시의 정국상황과 맞물려 당신의 힘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변수가 컸을 것이다. , 여진족 정벌과 문관과 이자겸 등의 반발도 변수로 볼 수 있다.
이자겸(?-1126)은 명문출신이라 1083년 음서로 합문지후(
閤門祗候)에 임명됐다. 아버지 이호(李顥)는 자신의 딸을 文宗 맏아들 順宗에게 시집보내 외척의 반열에 올랐다. 왕비의 오빠라 과거도 보지 않고 요직에 앉힌 것이다. 그러나 順宗 즉위한 지 고작 3개월 만에 죽어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오히려 여동생인 순종의 왕비인 장경궁주가 순종 사후에 노비와 간통하다가 발각돼 이자겸도 관직에서 쫓겨나는 등 수모를 겪었다.
뒤이어
獻宗 즉위했다. 이때 계림공(鷄林公)이 이자겸의 사촌인 이자의(李資義)가 대립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숙종이 1095년 즉위한 후 이자겸은 좌사낭중(左司郎中)을 거쳐 형부시랑일 때 임의(任懿)와 국신사(國信使)로 요()나라를 다녀왔다. 1098년 중서사인(中書舍人), 동궁시학사(東宮侍學士)일 때 국신사로 조규(趙珪)와 송()을 다녀왔다. 1099년 우간의대부, 한림시강학사, 좌간의대부 때 임의와 일할 수 없다며 사퇴했다.
숙종 재위기간은 최사추(
崔思諏, 1034-1105), 위계정(魏繼廷, ?-1107), 윤관(尹瓘, 1040-1111), 임간(任幹), 임의(任懿), 김인존(金仁存, ?-1127), 김부식(金富軾, 1075-1151)등 신라계다. 이자겸은 시중 최사추의 사위이며, 선종, 헌종, 숙종의 내시인 김인존은 처남남매이다. 충렬공은 숙종 즉위 후 소보(少保), 예부상서, 한림원사,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주국, 태자태부를 거쳐 예종(睿宗) 1105년 문하시중, 수태보에 올랐다.
이자겸은 1101년 추밀원주지사(
樞密院知奏使)로 승진, 양주로 가서 궁터를 살폈다. 이때 장인 최사추와 윤관 등과 동행한다. 숙종은 최사추를 1103년 문하시중에 임명했다. 그런데 숙종이 1105년 동명성왕릉을 시찰하다가 갑작이 죽자 17세의 예종이 즉위한다. 최 시중 또한 그해 타계한다. 예종은 그해 위계정을 문하시중에 임명했다. 예종은 1106년 이자겸의 둘째 딸을 왕후(순덕왕후)로 맞아 문관들의 여진정벌 반대를 무마하려했다.
고려의 북변에는 여진족이 살았다. 문종 27 1078 4월에는 15개 족장이 귀순했지만 반대파가 득세하자 3만병력을 투입, 평정했다. 숙종 말기 하얼빈지역의 추장 경기가 무리를 규합하고, 1104년 그의 조카 오야속이 함경도 장평인근까지 와서 고려와 충돌했다. 숙종은 문하시랑평장사 임간을 보냈으나 패하고, 이어 추밀원원사 윤관을 보내 겨우 화친을 맺고 정평과 장성지역을 넘겼다. 윤관은 숙종에게 기병부족이 패인이라 주청했다.
숙종은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11개 부대의 별무반(
別武班)을 조련했다. , 기병은 신기군, 보병은 신보군, 승병은 항마군이다. 그러나 숙종은 숙원은 여진족 정벌을 못하고 급서했다. 아들 예종이 즉위해 아버지의 유지를 실현하고자 했다. 그래서 1107년 윤관 대원수에게 17만병력을 주어 제3차 여진정벌에 나서게 했다. 신라계문관들은 출정자체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들은 국토의 면적이 줄어들더라도 정치적 이익을 중시했다.
이때 위 시중은 어떤 위치였을까. 시중이라는 중임을 맡았으니 왕의 뜻을 따라야 했다. 1105년부터 시중에 오르기 이전부터 숙종은 강압적으로 항마군을 동원했다. 조련한 북벌군은 1107년 출정시킬 예정이다. 위시중의 시름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김인존과 신라계 문신들은 정벌에 반대한 입장이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입장이다. 왕의 뜻에 따라 여진족 정벌에 찬성할 수도 없고 나이도 몸도 늙어 사퇴를 고집한 것으로 보인다.
예종은 태자이자 이자겸의 외손자인 해(
, 초명 )에게 선위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자겸은 예종대에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그다지 크지 못했다. 예종은 철저하게 중립정치를 구현하며 외척에게 힘을 실어주는 일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이자겸은 당시 관료들을 이끌고 있던 한안인(韓安仁) 등과 보이지 않는 권력다툼을 벌이며 외손자인 태자가 왕위에 오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안인 등은 태자보다는 왕의 아우들 가운데 한 명에게 선위하는 것이 나라의 안정을 도모하는 일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임종을 앞둔 예종은 이자겸을 믿고 14(1108년생)의 태자 구에게 왕위를 넘겼다. 예종은 이자겸에게 태자를 부탁했고 성심을 다하겠다고 했다. 이자겸에게는 세력이 없었지만 상서우복야인 할아버지
李子淵 꾸준히 투자했던 불교 승려 세력이 있었다. 불교 세력 역시 유교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그의 동맹 제안을 받아들인다. 예종이 자신의 아들을 부탁할 정도로 이자겸을 신임했던 것은 그가 자신의 장인이라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예종이 믿었던 것은 경원(지금의 인천) 이씨 집안이었다.
1122
년 예종의 병이 위중해지자 하늘에 쾌유를 빌었으며, 명산대찰을 방문해 기도를 했으나 효험이 없었다. 예종이 종양으로 병석에 눈지 한 달 만에 죽었다. 이자겸은 민첩하게 궁궐을 장악하고 외손 인종을 옹립하는데 성공한다. 왕이 승하한 후 왕위를 노리는 예종의 아우들을 저지하고 유조(
遺詔)에 따라 인종을 등극시키는데 공헌했다. 인종이 왕위를 이으면서 이자겸은 절대 권력을 차지한다. 인종은 정사를 맡기다시피 했다.
이자겸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권력을 독식하기 위해 정적 제거작업에 착수했다. 한편 한안인(
韓安仁)文公仁(초명 문공미) 등은 예종의 동생인 대방공(帶方公) ()를 내세워 왕위를 찬탈하려고 했다. 한안인은 예종에 의해 중용된 인물로서 이자겸과 정치적으로 동일한 노선을 걸었으나, 그가 인종을 옹립하자 반발했던 것이다. 그들의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어 한안인은 죽음을 당했으며 대방공 보와 문공인 등 60여명은 유배됐다.
인종을 추대한 공로로 양절익명공신(
亮節翼命功臣)에 책록, 중서령(中書令) 겸 영문하상서도성사(領門下尙書都省事), 판이부사(判吏部事)와 판병부사(判兵部事), 서경유수사(西京留守事)를 겸임, 참지정사(參知政事),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거쳐 정2품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로 승진했다. 뒤에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수사도(守司徒) 중서시랑(中書侍郞) 겸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등을 지내고, 소성군개국백(邵城郡開國伯)에 봉작됐다. 식읍 8000호와 식실봉 2000호를 하사받았다. 부인은 진한국대부인(辰韓國大夫人)에 봉해지는 한편 여러 아들들의 관직도 승급했다.

 
1087閤門祗侯(文宗, 7)
 △ 1095
년 좌사낭중
 △ 1098
년 중서사인, 동궁시학사, 송나라 사신
 △ 1099
년 우간의대부, 한림시강학사, 좌간의대부
 △ 1101
년 추밀원지주사,
南京시찰
 
1106知門下省事(인종의 國舅 次女 睿宗妃 揀擇 이후)
 
1109년 예빈경 추밀원부
 
1110년 전증감 추밀원사
 
1111년 어사대부, 검교사공, 형부상서
 
1112년 참지정사, 수사공 병부상서, 판삼사
 
1113년 상서좌복야, 검교사도 주국
 
1114년 수사공상서좌복야, 참지정사, 중서시랑, 동중서 문하평장사 수태위
 
1115년 익성공신 수태위, 母金氏 통의국대부, 부인 崔氏 조선국대부인
 
1116년 판이부사, 同德功臣, 삼중대광
 
1121년 추성좌리공신 소성군개국백
 
1121년 협모안사공신 수태사중서령, 소성후 책봉(인종)
 
1124亮節翼命功臣, 領門下尙書都省事, 判吏部事, 判兵部事, 西京留守, 尙書左僕射, 門下平章事, 開府儀同三司, 守司徒 中書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 卲城郡開國伯, 朝鮮國公冊封,식읍8000, 崇德府(居處), 懿親宮(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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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장흥위씨 2600년 그 뿌리를 찾아서(영상) 1147
공지 성씨표기 통일화 추진 결과 보고서(2015년 11월 21일 작성) 902
38 天冠山과 邊山에서 東征艦 建造 / 圓山 위정철 131
37 천재 실학자 존재 위백규의 학문세계(박석무)/ 위신복 제공 293
36 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 file 99
35 입춘(立春) 절후 관장하는 위징(魏徵) 제5부 (끝) / 梧堂 위운량 file 180
34 입춘(立春) 절후 관장하는 위징(魏徵) 제4부 / 梧堂 위운량 file 200
33 입춘(立春) 절후 관장하는 위징(魏徵) 제3부 / 梧堂 위운량 file 161
32 입춘(立春) 절후 관장하는 위징(魏徵) 제2부 / 梧堂 위운량 file 180
31 입춘(立春) 절후 관장하는 위징(魏徵) 제1부 / 梧堂 위운량 file 85
30 存齋集과 四君子(존재집과 사군자) / 벽천 위윤기 385
29 위씨 성의 유래 / 圓山 위정철 699
28 聽溪公의 續傷往賦幷序(속상왕부병서) / 圓山 위정철 246
27 圓山 위정철 所長의 12권의 著書를 종합해 보았습니다/벽천 위윤기 file 472
26 『존재집(存齋集)』대장부의 운명값 file 200
25 존재 위백규 선생의 생일잔치 의미 252
24 새로 발굴된 문중사료 2008/03/05 원산 201
23 圓山 위정철 소장의 [艮庵公의 生涯와 思想] [1] 804
» 圓山 위정철 소장의 [忠烈公, 淸廉의 化身] 307
21 圓山 위정철 소장의 [存齋公의 生涯 및 著述 年譜3-3(59세~72세)] 865
20 圓山 위정철 소장의 [存齋公의 生涯 및 著述 年譜3-2(35세~58세)] [1] 948
19 소설 원감국사 file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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