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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立春) 절후 관장하는 위징(魏徵) 제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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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된 충언으로 당 태종이 초심을 잃지 않도록 한 위징

위징은 당 태종이 정관 초기의 초심을 잃지 않도록 끊임없이 간언한다.
당 태종이 집권하고 나서 몇 년이 흐르자 나라는 안정되어 갔다.
수나라의 전성기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만 경제도 회복되었으며 대외적으로도 당을 위협할 세력이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정관 초기 수(隋)나라의 멸망을 경계하면서 스스로 간언(諫言)을 구하던 당태종이 신하들의 간언에 종종 난색을 표하면서 또한 불쾌함을 드러내게 되었다. 위징은 이런 상황에 대해 정확하고 신랄하게 지적하였다.
그의 간언은 시의적절할 뿐 아니라 문제의 핵심은 언제나 당 태종에게 있음을 상기시켜 잘못된 처사의 시정을 촉구하였다.

태종이 여러 신하들과 적취지(積翠池)에서 연회를 배풀었다.
이때 위징은 서한부(西漢賦)를 지었는데 그 마지막에 이르기를 “끝내 숙손통(淑孫通)의 예(禮)를 빌려야만 황제의 존귀함을 알 수 있다네.”01라고 하니 태종이 “위징의 말은 일찍이 예의로써 나를 제약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라고 말하였다.
다음날 태종이 위징에게 조용히 묻기를 “근래의 정치가 어떠한가?”라고 했다.
위징은 나라가 오랫동안 평안하여 태종의 뜻이 정관 초기와는 같지 않음을 지적했다. “폐하께서는 정관(貞觀) 초에는 사람들로 하여금 간언(諫言)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3년 후에는 간언을 기꺼이 따르셨습니다.
그런데 근래 일이 년간에는 억지로 간언을 받아들이시고 끝내는 불평하십니다.”

태종이 놀라서 물었다. “그대는 무엇으로 그 증거를 댈 것인가?”
위징이 대답하길 “폐하께서는 처음 즉위하셨을 때에 원율사(元律師)에게 사형을 내리셨는데 손복가(孫伏伽)가 법대로 하면 사형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간언했습니다.
그러자 폐하께서는 손복가에게 난릉공주(蘭陵公主)의 정원을 하사하시니 그 값이 백만 금이었습니다. 여러 신하들이 말하기를 ‘상이 너무 후하십니다.’라고 하자 ‘짐이 즉위한 이래로 간언하는 자가 없었기에 그에게 상을 내리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간언하게 하신 것입니다.
후에 유웅(柳雄)이 수나라의 물자에 대해 거짓 보고하자 유사(有司)가 그의 거짓을 탄핵하여 사형을 선고했는데 대주(戴胄)가 그것은 징역에 해당되는 죄라고 상주했습니다. 폐하께서는 유웅을 잡아 5, 6년 감옥에 가둔 뒤 석방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대주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대가 법을 지킴이 이와 같으니 벌을 내리는 것을 남발할까 염려하지 않아도 되겠구나.’라고 하셨으니 이는 기꺼이 간언을 따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근래에 황보덕참(皇甫德參)이 상소를 올려 말하기를 ‘낙양궁(洛陽宮)을 보수하시는 것은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것입니다. 지세(地稅)를 거두시는 것은 세금을 너무 많이 받는 것이며 세간에서 높이 틀어 올린 머리가 유행하는 것은 궁중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라고 하자 폐하께서는 화를 내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 사람은 국가로 하여금 한 사람도 부리지 못하고 세금 하나도 거두지 못하며 궁인(宮人)들이 머리도 땋지 못하게 해야 직성이 풀리겠구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소신이 ‘신하가 상소를 올릴 때 그 상소가 격렬하지 않으면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없습니다. 그리고 때론 격렬한 언사는 비방하는 것처럼 들립니다.’라고 상주하였습니다. 폐하께서 비록 소신의 말을 좇으셔서 황보덕참에게 비단으로 상을 주시고 일을 매듭지으셨지만, 마음으로는 끝내 불평하셨습니다.
이는 간언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태종이 깨달아 말하기를 “공이 아니라면 이렇게 짐에게 말해 주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사람은 진실로 자신의 잘못을 자각(自覺)치 못하는구나!”라고 하였다.

이에 앞서 태종이 비산궁(飛山宮)을 지었을 때 위징이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렸다.
수나라가 천하를 소유한지 30여 년에 위풍이 만 리 밖에 이르렀지만 하루아침에 모두 없어져 버렸습니다. 저 양제(煬帝)라는 자가 어찌 평안히 다스려지는 것을 싫어하고 멸망하는 것을 좋아해서 수나라가 망했겠습니까? 이는 모두 자기의 부강함을 믿고 훗날의 환난을 생각지 못해서입니다.

모든 재물은 오직 양제 자신과 그 자녀들의 봉양과 사치에 쓰였고 천하의 백성들은 그의 궁전과 누대를 장식하는 데 동원되었습니다. 끊임없는 부역(賦役)과 전쟁으로 백성들은 쉴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밖으로는 위엄(威嚴)을 보였으나 내정(內政)은 아첨하는 자를 등용하고 충직한 자를 물리쳤으니 윗사람이나 아랫사람이나 서로가 서로를 속이게 되어 천명(天命)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마침내는 임금이라는 자가 필부(匹夫)의 손에 죽임을 당했으나 그의 죽음이 오히려 천하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현명하신 폐하께서는 기회를 놓치지 않으시고 위태로운 지경에 빠져서 허덕이고 있는 세상 사람들을 구해 주셨습니다. 오늘날 궁궐의 누대나 정자는 모두 있을만한 곳에는 다 있고 진귀하고 특이한 보물들도 거둘 만큼 다 거두어 들이셨으며, 예쁘고 현숙한 궁녀들도 충분히 있어 폐하의 곁에서 시중들고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능히 수나라가 망한 까닭과 우리 당(唐)이 천하를 얻은 까닭을 잘 살피셔야 합니다. 값비싼 의복들을 불사르고 넓은 궁궐을 허물어 초라한 궁궐에서 편히 거처할 수 있다면 이는 덕(德) 중에서 상(上)입니다. 다음으로 공업(功業)을 이루시고 난 다음에도 이를 그만두지 않으시고 옛것을 지키시며 급(急)하지 않은 일들을 물리치시면 이는 덕(德) 중에서 중(中)입니다.
그러나 창업(創業)의 어려움을 생각지 않으시고 폐하께 천명(天命)이 왔다고 믿고 즐거운 마음으로 사치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폐하의 덕(德)은 보지 못하고 날로 수고롭게 부리는 것만 듣게 한다면, 이는 덕(德) 중에서 하(下)입니다.
이는 수양제의 폭정(暴政)을 새로운 폭정으로 바꾸는 것이고 이로 인해 세상에 난리를 일으키는 것과 같은 일입니다. 무릇 폐하께서 일을 하심에 법을 어기시고 모범이 되지 못하시면 폐하의 후손들이 바라볼 것이 없게 됩니다.
사람들의 원망을 사고 신(神)들이 노하면 세상에 재앙(災殃)이 생겨나고 세상에 재앙이 생겨나면 화(禍)와 난리가 일어나고, 세상에 화와 난리가 일어나면 정상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이 드물게 됩니다.

이해에 큰 비가 내려 곡수(穀水)와 낙수(洛水)가 범람하여 궁전과 사찰 19채가 훼손되고 인가(人家) 600채가 떠내려갔다. 위징이 이러한 사실을 아뢰며 다음과 같은 글을 올렸다.
폐하께서는 오늘날 다스리는 것은 군자에게 맡기시고 그 다스림의 득실(得失)은 소인에게 물으십니다. 이는 칭찬해 주거나 꾸짖는 자격은 항상 소인에게 있고 감독하고 책임지는 일은 항상 군자에게 부가되고 있습니다.
무릇 중간 정도의 지혜를 지닌 자에게 어찌 자그마한 공로(功勞)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일을 도모함이 멀리 미치지 못하니 설사 자신이 가진 모든 힘과 정성을 다한다고 해도 오히려 실패를 면치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마음속으로 간교하고 이익을 탐하는 생각을 품고 겉으로는 임금의 기색을 살피면서 무작정 따르기만 하는 자들은 어떻겠나이까?

오늘날 폐하께서는 그를 일러 선한 사람이라 하셔놓고 다시 그가 신의가 없을까 염려하시니, 이 어찌 곧은 나무를 세워 놓고 그 그림자가 굽었다고 의심하는 것과 다르겠습니까? 그러므로 윗사람이 믿음이 없으면 그로써 아랫사람을 부릴 수 없고, 아랫사람에게 윗사람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윗사람을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믿음’의 의의는 매우 큽니다.

옛날 제(齊) 환공(桓公)이 관중(管仲)에게 묻기를 “어떠해야 패자(覇者)가 되기에 해(害)가 되는가?” 관중이 대답하였습니다. “인재를 알아보지 못하면 패자가 되는 데 해(害)가 됩니다. 등용해도 그에게 적합한 임무를 맡기지 않으면 패자 되는데 해가 됩니다.
임무를 맡겼다 해도 믿지 못하면 해가 됩니다.
믿었다 해도 그 후에 소인으로 하여금 조사케 하시면 해가 됩니다.”
무릇 관중은 패왕을 보좌하는 신하였음에도 신임(信任)을 신중히 하고 아첨하는 이를 멀리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군자와 소인으로 하여금 시시비비를 섞이게 하지 않으려 하신다면, 반드시 그들을 덕으로 품으시고 믿음으로 대하시면서 의로움을 독려하시고 예의로 절제하셔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야 선을 선하다 하고 악을 악하다 하시고 상벌(賞罰)을 잘 판별하여 내리시면 무위지치(無爲之治)의 교화가 어찌 멀리 있다 하겠나이까.

그런데 선을 선하다 하시면서도 등용치 않으시고 악을 악하다 하시면서도 물리치지 못하시니, 벌이 죄 지은 자에게 미치지 못하고 상이 공로 있는 이에게 내려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되면 위태로워지고 망하게 될 때가 없다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태종이 친히 조서(詔書)를 내려 위징을 칭찬했다.
그리고 이때 명덕궁(明德宮), 현포원(玄圃院)을 없애어 물난리를 당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다른 뭇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면서 태종이 말하길 “정관(貞觀) 이전에 나를 좇아 천하를 평정하고 온갖 험난하고 어두운 길을 헤쳐 나온 것은 방현령[房玄齡, 우수(雨水) 절후를 관장]의 공이다. 정관 이후에 충성스런 간언으로 짐의 잘못을 바로잡고 국가의 위대한 이익을 도모한 자는 위징일 따름이다.
아무리 옛날의 명신이라 할지라도 어찌 이들보다 훌륭했으리!”라고 하며 친히 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풀어 두 사람에게 하사했다.
당 태종이 일찍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위징과 제갈량 중 누가 더 현명한가?”
잠문본(岑文本)이 대답하길 “제갈량은 장상(將相)을 겸비했으니 위징이 비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자 당 태종이 말하기를 “위징은 인의(仁義)의 길을 가면서 짐을 보좌하여 짐을 요순(堯舜)의 위치에 올려놓고자 하였으니 아무리 제갈량이라 해도 위징에게 필적할 수는 없다.”라고 했다.

이때 당 태종에 글을 올려 계책을 피력한 사람들이 많았는데 간혹 사리(事理)에 맞지 않으니 임금이 이들을 미워하여 이들을 내쫓으려 하였다.
위징이 말하기를 “폐하께서 폐하의 잘못을 듣고자 하신다면 마땅히 그들이 제멋대로 말할 수 있도록 놓아두십시오. 그들의 말이 옳다면 조정의 이익이 될 것이요 그릇되어도 정사에 손해되지는 않습니다.”라고 하자 태종이 기뻐하며 위징의 말을 따랐다.

[김유혁 제왕학 623-2] 주군 안색 안 살피는 위징의 범안직간(犯顔直諫)
https://www.youtube.com/watch?v=MQSaE1Bqz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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