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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老와의 對談 4영원한 대종회 사무국장위태선 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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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파(一波) 위태선(魏泰善) 은 기사(己巳)생으로 올해 9순이시다. 옹은 초창기 대종회 사무국장으로 20여년 간 일하셨다. 그래서 종인들에게 위태선하면 바로 떠오른 강열한 이미지((Image)가 있다. 영원한 장흥 위씨 대종회사무국장.” 이미지의 사전적 의미는 심상(心象), 영상(映像), 표상(表象) 등을 뜻한다. 인간의 마음속에 그려지는 사물의 감각적 영상을 가리키며 주로 시각적인 것을 말하지만 시각 이외의 감각적 심상도 이미지라고 한다.

어원은 라틴어 이마고(imago)이며, 동사형인 라틴어 이미타리(imitari)'모방하다(imitate)'는 뜻도 있다. 따라서 이미지는 "어느 대상, 특히 사람의 외적 형태의 인조적 모방 또는 재현"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체코의 작가 밀란 쿤데라(Milan Kundera)는 인간들을 움직이는 것은 이제 더 이상 논리적 사상 체계가 아니라 단지 일련의 이미지와 암시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이데올로기라는 말 대신에 '이마골로기(imagologie)'라는 말을 만들었다.

일파옹에게는 또 하나의 이미지가 있다. 그것은 영원한 군인이다는 이미지다. 그는 아버지(文煥)와 어머니(金西芬) 사이의 쌍둥이 중 차남으로 1929년에 함남 영흥에서 태어났다. 고급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바로 625 직전 홀로 월남해 육군 간부후보생으로 입대했다. 이때부터 육군대학을 거쳐 중령으로 제대하기까지 30년 이상을 군문에서 생활했다. 그런 탓에 함경도 사투리에 절도 있는 군인 말투가 몸에 배여 영원한 군인의 이미지가 붙게 된 것이다.

무술년인 201843. 올해는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나라가 전쟁의 근심에서 평화분위기로 반전되고 있다. 4월에는 남북정상이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회담하고, 5월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북미정상회담이 예정되어 있다. 이런 나라안팎의 분위기처럼 우리 위문에도 좋은 일이 연속되기를 기대하고 싶어진다. 일파옹과 원로와의 대담을 위해 남양주 마석의 자택을 찾았다. 만나 옛날을 회상하며 위문발전을 위해 허심탄회한 대담을 나눴다. (편집자 주)

 

장소 : 남양주 마석 자택

일시 : 2018.04.03.() 오후

대담 :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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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오랜만입니다. 그 동안 건강하셨습니까. 여쭤보고 싶은 사연이 많았는데 막상 직접 뵈니 말문이 막힙니다. 모든 가족을 고향 영흥에 둔 채 혈혈단신으로 월남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때의 구체적인 시국상황과 월남한 실질적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원산역에서 손 흔든 아버지 모습 못 잊어-

영흥공립농업학교에 이어 고향 집에서 꽤 떨어진 항구도시로 잘 알려진 원산고급중학교로 전학해 19487월 졸업했는데 아버지께서 고향 영흥 횡천리에서 내가 있는 원산까지 느닷없이 찾아오셨어. 반가워 어찌 이곳까지 오셨냐고 물어보니 다짜고짜 서울의 남대문 근처에 살고 있는 아버지 친구주소를 주면서 찾아가서 공부를 더해서 훌륭한 인물이 되어 돌아오라고 하셨지. 그때가 내 나이 20살이었으니 지금으로부터 꼭 70년 전이네.

아버지는 전대를 꺼내시더니 금덩이를 내 호주머니에 넣어 주셨어. 다음날 내가 원산역에서 연천(전곡)행 기차를 타는데 아버지의 손 흔드는 모습이 마지막이 될 줄이야 꿈에서도 몰랐지. 늘 그날 아버지 모습이 떠올라 눈물이 쏟아져. 그때 이미 38선이 막혀서 전곡에 내려 아버지께서 내가 무사히 월남하도록 돈을 주고 안내원을 한 사람을 부쳐주었는데 한탄강 지류에서 북한사무소원이 있는 것을 보고는 겁을 먹은 안내원은 도망 가버렸어요.

남쪽으로 가는 길을 전혀 모르는 나는 하늘을 보며 울다가 일단 강을 건너기로 결심했어. 배꼽까지 차는 한탄강 지류를 건너니 마침 남쪽과 북쪽을 오가며 물물교환을 하는 여자 몇 명을 만났어. 인적이 없는 곳에서 사람을 만나니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었어. 워낙 그 여자 상인들은 길을 잘 아는 장사꾼들의 도움으로 남쪽인 포천까지 쉽게 내려 수 있었어.

남쪽의 포천지역 어느 지서(경찰서)에 가서 내가 가지고 있던 북에서 발급받았던 인민증과 지서장이 발급하는 증명서와 교환을 했어. 때마침 지서 앞에 나무를 잔뜩 실은 목재트럭이 있어 몰래 타고 축석을 거쳐 미아리, 즉 돈암동에 도착하게 되었어. 돈암동에서 전차를 타고 국도극장 앞에 내리니 배우인 황해와 백설희 주연의 화전(火田)이 상영되고 있더라구.

민가에서 몇 날을 지내다가 아버지께서 소개한 친구를 찾아갔는데 사는 데는 신설동으로 몇 개월 거주하면서 북에서 아버지가 주신 금도 몽땅 빼앗기고 쫓겨서 거지신세가 되고 말았어. 그래서 종로를 이리저리 배회하다가 영흥거주 선배인 한동규 씨를 만나게 되었어. 그는 종로3가 호림장(虎林場)이라는 단체를 운영하는데 친일파를 잡아들이고 공산당을 때려잡는 전위대와 같은 단체였어. 6.25가 터지기까지 거의 2년 동안 나의 행적이지.

 

2. 간부후보생으로 입대해 소정의 과정을 밟고 소위로 임관하신 후 위씨의 집성촌인 방촌을 찾아가신 얘기를 자주 피력하셨습니다. 당시 방촌이란 곳에 대한 정보를 고향에서 들으셨습니까. 또 방촌 종씨들에게 가는 과정과 호의는 어떠했습니까.

 

 

-방촌 1주일 그 때를 행복했던 날로 기억-

월남한 직후 6.25가 발발했어. 선배 한동규와 호림장에서 지냈는데 전쟁이 일어나고 627일경 한강다리가 끊어졌어요. 피난은 가려면 한강을 건너야 하는데 한동규 선배가 태선이 너는 수영을 잘하니 노량진에 헤엄쳐가 보트를 가져오면 좋겠다고 해서 2척을 가져왔어. 1대는 한동규 부부와 내가 타고, 나머지 한 대는 주위의 사람에게 줬는데 무사히 한강을 건너고 11명이 탄 다른 보트는 뒤집혀버려 11명 모두 죽고 말았지. 이후 피난경로는 노량진-시흥-대전-김제-신태인-부안 줄포-고창-영광 법성포-목포항-거제도 장승포로 이어지는 도보, 기차, 선박을 통해 이루어진 고통의 시간이었지.

거제도에 가게 된 이유는 피난의 목적도 있었지만 육군신병교육대가 있었기 때문이야. 후에 인민군과 중공군포로수용소가 되면서 부산 가덕도로 옮기게 되지만 그 당시에 방위군 교육대가 주둔했거든. 전쟁통이라 스스로 찾아와 지원하니 기특했던지 글씨를 써보라고 장교가 명령했지. 횡서가 아니라 종서로 한문으로 쓰니 가히 명필이라고 하면서 잠시 행정병으로 근무하다가 방위군 교육을 받고 육군소위로 임관하게 되었어. 이후 경주 예비사관학교 소위, 보병학교 갑종간부 15기로 광주에서 최종적으로 소위임관을 해서 세 번씩이나 소위를 다는 행운을 누렸지. 전쟁 중이라 행정상 미비한 것이 많았어요.

광주에 있을 때 함께 근무하던 위달수라고 하는 분이 있었어요. 나는 북한 함흥이 고향이고 월남했다고 했더니 전남 장흥 방촌에는 위씨들이 많다고 하더라구. 그러면서 방촌에 거주하는 몇몇 분을 소개해서 외박을 내서 방촌에 갔었지. 이집 저집을 돌아다니며 음식을 대접받고 술을 함께 권하며 장흥 위씨 문중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어요. 한마디로 육군소위로 종씨에다 월남한 함경도 함흥출신이니 말소리도 신기했고 아무래도 불쌍하기도 하고 전시니만큼 든든하기도 했다고 봐야 해요. 1주일을 꼬박 방촌에 있었으니 그때가 행복했던 날로 기억하고 있어요. 다시 한 번 이 자리를 빌려 고맙다는 인사를 드려요.

 

 

3. 199011월에 장흥 위씨 대종회가 대전 유성호텔에서 출범했습니다. 처음에는 다른 종친이 사무국장이었다는데, 어떤 연유로 종친회에 참여하셨으며, 사무국장으로 오랫동안 위문발전에 헌신하시게 된 동기라도 있으신가요.

 

 

-에서 를 만들고자 마음먹고 달려들었지-

1990113일 대전유성호텔에서 범곡 위찬호 재경종친회장의 주도로 70여 명의 전국의 장흥위씨 핵심멤버들이 모여 대종회를 출범시키게 되었지요. 1993412일 범곡 위찬호 대종회장의 서울역 근처 건물을 빌려 본격적으로 대종회 업무를 시작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지.

대종회 창립 전인 1981년 관북파는 관북장흥위씨족보를 간행했고, 그해 823일 관북장흥위씨종친회를 작년에 작고하신 송당 위재형 어르신 주도로 나도 깊게 관여를 하게 되었어. 이때 범곡 위찬호 초대 대종회장이 삼고초려식으로 간곡한 요청을 여러 번 했어요. 또한 이런 말을 하면 좀 그렇지만 사무국장은 나와 관계가 좋지는 않았어요. 또한 범곡회장은 나와 함께 6.25전쟁을 성공적으로 치루고 나는 중령으로 예편했지만 범곡회장은 대령으로 예편했거든. 나보다는 나이가 한 살 어려도 뭔가 사람을 당가는 강한 카리스마가 있고 문중을 위한 신념이 대단했다고 느꼈어.

또한 범곡회장의 주변에 송담 위자형, 송당 위재형, 덕운 위황량 같은 분들이 있었던 것도 큰 작용을 했지. 무엇보다 사무국장을 하게 된 가장 큰 동기는 나라를 위해 전쟁을 했고 30년 가까이 군에 근무한 경력, 2급 공무원인 전사편찬위원으로 10년 가까이 근무 등을 끝마치고 이제는 장흥위씨 문중을 위해 헌신하고픈 생각이 앞섰기 때문이지. 사실 봉급을 생각했으면 어려운 자리였지. 실제 처음에는 급여가 얼마 되지 않았어. 에서 를 만들고자 마음먹고 달려들었지. 사명감과 하고자하는 의욕이 충만했기에 견딜 수 있었어.

 

 

4. 당시 재경종친회는 나중에 결성된 관북종친들이 주축이셨다고 합니다. 사무국장에 발탁되기까지와 그 후의 관북종친회와의 관계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또한 월명회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십시오.

 

 

-한 핏줄인데 너와 내가 있을 수 없잖아요-

앞서 잠간 언급했듯이 관북종친회는 1981년이 중요한 해로 기억이 돼요. 신유보 간행을 계기로 관북장흥위씨종친회가 창립되고 19811099인의 관북종인들의 모임이 있었어요. 이 모임이 이어져 1990224일 관북종친회 임원들의 친목단체인 월명회가 창립되고, 199341711인의 종인이 모여 관북종친의 구심체로 자리를 잡은 계기이기도 했어.

초대회장 대선씨로 부터 광도회장, 송당 재형회장, 순환회장, 재균회장, 성열회장 등 월남 1세대가 주류였고 난 사무국장을 퇴임하고 나서 회장을 지냈지. 우리 관북종친회나 월명회나 모두 장흥위씨를 사랑하고 조상의 얼을 되새기고자 재경종친회와 대종회 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열의가 강했어요. 한 핏줄인데 너와 내가 있을 수 없잖아요. 그래서 송당 재형회장이 장흥위씨종보와 월명송을 함께 편집했고, 회주사 대제참가와 대종회 기금찬조에도 앞장서서 했지. 특히 사월재 제향에 참가하고 성균생원공 할아버지 기념사업, 백씨할머니 묘역매입 등의 사업은 길이 남을 사건으로 기록되리라 봐요. 문론 이것은 사월문중과 끊어진 오랜 시간을 극복하고 가교를 이은 것과 깊은 맥을 같이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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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우리 장흥 위문은 부자종인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 열악한 처지에서 대종회 살림을 끌어가기가 참으로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국장님께서는 여러 가지 사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셨다고 합니다. 혹시 그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헌성금은 종인들의 피와 살이라눈물이-

정말 어려울 때였어요. 에서 를 창조해야하는 막중한 책임에 때론 잠을 설치고 매일 밤 모래성을 쌓았다가 아침이면 무너뜨리곤 했지. 초창기 대종회 3대사업은 장학기금조성, 학생수련회, 종보발간, 이었는데 그보다 급선무는 종인록을 만드는 것이 우선이었어요. 주변 종인들에게 전화를 해서 방문해서 몇 년간에 걸쳐 종인들의 전화번호와 주소, 직업과 고향 등을 수집했지. 첫 번째는 경조사를 챙기기 위해서였고 둘째는 기금을 헌성해달라고 조르기위한 사전작업이었지. 지금이나 옛날이나 돈을 걷기는 좀 어려워. 그래도 거의 매일 개개인을 찾아다니며 구걸하다시피해서 3대사업을 꾸리고 대종회를 운영했어요.

범곡 위찬호 회장의 개인 사무실을 얻어 사용한 것도 대종회 운영에 많은 도움이 되었고 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계기였어. 특히 3대사업을 위해 많은 종인들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십시일반으로 헌성했어요. 이런 재무상황을 매년 투명하게 장흥위씨종보에 올려 불필요한 오해도 없애고 작은 헌성이라도 모이면 문중에 큰 힘이 된다는 동기를 제공하게 되었다고 봐요. 장학회 원금 3억이나 수련회 운영비와 종보 발행 비용 등의 헌성금은 종인들의 피요, 살이라 생각해요. 정말 마른 수건이라도 짜면 된다는 심정으로 절약했어. 식대를 한 푼까지라도 아끼려고 절략하려했어. 한마디로 짠돌이 역할을 스스로 감수한 게지.

 

 

6. 대종회의 최대 행사이자 다른 성씨의 부러움을 받은 대학생 하계수련회입니다. 더위가 심한 8월에 손자뻘 되는 학생들을 인솔하기 위해 땀을 뻘뻘 흘리며 숙식을 함께하신 모습이 생생합니다. 장흥종친회 임원들의 협조도 있었지만 대부분 혼자 힘으로 열심히 준비하고 직접 현장에서 수련생을 지도하셨다는데 당시 수련회 상황과 그 사명감은 어디서 나옵니까.

 

 

-6.25 때 전쟁하듯이 죽기 살기로 했어-

아마 내가 15년간 장흥하계수련회를 맡아 학생들을 데리고 조상들의 흔적을 찾아 그 얼을 되살리고자 노력했지요. 장흥의 삼복더위는 정말 대단해서 매일 온 몸이 땀범벅이 되기 일쑤였지. 문론 덕운 위황량 부회장과 아산 위성태 전교가 현지에서 많이 도와주어 큰 힘이 되었어. 처음 시작하는 수련회라 경험도 없지, 현지 사정도 어둡지, 돈도 부족하지 어려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어. 6.25 때 전쟁하듯이 죽기 살기로 했어.

수련회 중 덕운 위황량 부회장께서 내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고서 태선사무국장은 꼭 파도가 한 번 쳐서 바다를 송두리째 흔드는 고집과 집념이 강해요. 성격도 다혈질이구. 어차피 사무국장이라면 아호가 있어야 하니 일파(一波)라고 해요, 라고 해서 졸지에 호를 얻게 되었지. 나는 덕운장님의 대단한 호에 대해 정말로 만족해요. 내 성격과 부합되기 때문이지. 이 자리를 빌려 덕운 위황량 원로께 다시 감사를 드려야겠구먼.

그래도 수련회를 위해 참가할 학생을 모집하고, 그에 따른 제반 준비를 해서, 현장체험을 하고, 수기로 남기는 등 이런 일련의 과정들이 우리 문중에 전통으로 자리잡아가고 있어서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이제 우리 문중에 젊은이들이 많아졌고 다양한 재능을 지닌 종인들이 참여해서 선조들의 얼을 새롭게 창조하는 활기찬 수련회가 되길 바래요.

 

 

7. 범곡 위찬호 회장님은 성격이 불같다고 들었습니다. 이따금 회장님은 사무국장님에게 신경질을 내셨다고 합니다. 그때 목격한 종인들도 민망스러웠다고 합니다. 그래도 두 분은 대종회를 원만하게 운영하셨고 엄청난 업적을 이루셨습니다. 범곡 초대 대종회장에 대한 소회 한 말씀 부탁합니다.

 

-참을 수 없는 경우 많지만 범곡은 지휘관, 난 참모-

범곡 위찬호 초대회장과 나와의 관계는 참으로 애증이 많았어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말 하지요.

먼저 범곡 회장의 인간적인 면은 너무나 따뜻하고 좋아요. 그는 인상과는 다르게 함께 울고 웃고 동고동락하는 이타성이 강한 성격의 소유자예요. 그래서 어느 종인이 어렵다고하면 꼭 그 문제를 해결해야 직성이 풀리는 거지요. 이런 점을 우리는 그의 장점을 본받아야한다고 여겨요.

다음으로는 범곡회장의 업무스타일이에요. 한마디로 냉혹할 정도로 정확하고 불같은 성품으로 철저하게 상대방을 다그치지요. 옆에서 보면 오해를 할 정도로 지나친 면이 있어요. 카리스마가 흘러넘치는 전형적인 권위주의적 리더십으로 보면 되지. 마치 군대의 지휘관처럼 대종회를 일사분란하게 운영해서 그나마 지금의 안정적인 문중이 유지되는 발판을 만든 것이라 생각해요. 에서 를 창조하기에는 많은 사람, 엄청난 자금, 질 좋은 기획이 반드시 필요한데 그 당시엔 민주적인 리더십으론 대종회를 이끌 수도 없고 거의 불가능했다고 봐요. 사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경우도 있었지만 범곡회장은 지휘관이고 난 참모였잖아요. 일평생 몸에 배인 군생활로 수직적 체계가 오히려 편한 점도 있었어요. 참모의 능력은 지휘관의 일거수일투족을 읽고 바로 조직에 적용해야하거든요. 참모의 지휘관에 대한 의도파악능력이 조직의 승패를 좌우하니까요. 내 마지막 군생활인 야전군 감찰참모를 할 때처럼 대종회 사무국장도 했다고 보면 되지요.

마지막으로 범곡회장은 욕심이 많고 성취욕이 강해 입신양명형이예요. 그것이 나쁜 방향이 아니고 옳바른 방향, 즉 육군대령 출신으로 그 능력을 엉뚱한 곳에 쓰지 않고 문중에 발휘하여 긍정적인 결과를 도출했다고 봐야 해요. 또 하나는 한번 믿은 사람은 끝까지 책임지고 믿고 일을 맡기는 스타일이에요. 내풍(內風)은 잠재우고 외풍(外風)도 철저히 막아주어 밑에 사람이 일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바람막이 역할은 참으로 고맙게 생각해요.

 

 

8. 위씨의 성지는 회주사입니다. 그곳은 우리와 600년간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지를 상징하는 기념물은 시조공사적비와 물질적으로 도움을 준 11분의 비석이 전부입니다. 온전한 성지를 만들려면 무엇을 갖춰야 할까요.

 

 

-관북종친회의 희망인 위재형 공적비도 반드시-

아 그 질문이 마음에 꼭 드네요. 우리 위씨의 역사는 638년부터이니 어림잡아 1,400년이지요. 시조공 할아버지부터 지금까지 문중에 훌륭한 분이 많은데 시조공 동래비와 장학비 외 공덕비는 10여 개 정도인 것 같아요. 우리 문중의 대표인물인 충렬공, 원감국사, 존재공, 임란과 호란의 양난의 주역들인 수사공, 청계공, 괴봉공 등의 선조들의 흔적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또 하나 부탁하고픈 것은 관북종친회의 간절한 희망인 송당 위재형 공적비도 반드시 회주사에 세웠으면 해요. 송당공은 관북파 종인들이 문중에 기여하기까지 산파역을 자처한 대표인물이지요. 또한 송당공께서 이루어 놓으신 업적도 크다고 봐야 해요. 관북종인들의 마음속에 회주사를 생각나게 하고 때를 따라 방문하도록 하는 길이 바로 이것이라고 봐야지지요. 나중에 통일이 되어 관북종인들이 장흥을 찾을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하잖아요. 해방 전후와 6.25전쟁 때 월남하여 어려운 시절을 이기고 문중을 위해 헌신한 종인이 있었다는 것은 알면 위씨를 화합시키고 하나가 되게 하는 촉매제가 되잖아요. 크게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힘이 드는 것도 아닌데 그게 늘 아쉬워요.

그리고 회주사는 너무 좁아요. 신실도 너무 작구요. 자금이 허락한다면 주변지역을 크게 키워 반듯한 성지가 되도록 후손들이 힘써야 해요. 왜냐면 우리 문중의 영혼이 깃든 곳이요, 장흥위씨의 상징이요, 얼굴이니까요.

 

 

9. 대종회는 이제 종원들의 숙원이었던 대종회관을 마련했습니다. 청장년회 등 조직도 갖추었습니다. 지금 대종회는 태선 국장님께서 하셨던 일들을 그대로 유지,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4차 산업혁명의 물결이 우리 앞에 와있는데 씨족문화와는 이질적이라 우려가 많습니다. 돌파구로 더욱 지속적인 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개선했으면 좋겠습니까. 영원한 사무국장의 입장에서 고견을 부탁드립니다.

 

 

-소아(小我)를 버리고 문중을 생각해야-

람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덕목은 희생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소위 계급장을 달고 수도사단 1연대 9중대 2소대장으로 수도고지전투에 참가했어요. 결국 1, 3소장을 비롯해 많은 군인들이 전사했고 난 그나마 동료들의 도움으로 다리에 부상당해 포천에 있는 이동병원에서 치료를 했어요. 그러나 죽어가고 있는 동료들이 생각나 다시 1연대를 지원해 전투를 계속 치렀지요. 나 하나 편하고자 한다면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지요. 조직은 리더에 의해 좌지우지되지요. 더구나 리더가 갖추어야 할 조건은 바로 희생이지요.

우리 문중에서 희생의 덕목을 지닌 지도자가 바로 송담 위자형 대종회장이에요. 송담회장을 구심점으로 똘똘 뭉쳐야 다른 성씨가 감히 얕보질 못해요. 현재 엄청난 발전을 이룩한 것도 희생의 반사이익이라고 생각해요. 희생 없는 평화도, 발전도, 조직은 없는 게 당연하지요. 나라는 소아를 과감하게 버리고 문중이라는 대아를 생각하는 분들이 대종회를 이끌어야 해요.

가끔 아내와 희생에 대한 이야기를 해요. 아내(金福順)1932년생으로 육군소위시절 서대문형무소에 잠시 있을 때 1952년에 결혼을 했으니 67년을 함께 산 셈이죠. 나는 군인이라 매일 외부의 일밖에 모르고 아내의 정성스런 희생으로 33녀를 무탈하게 키웠지요. 그런데 아들 하나가 먼저 저 세상으로 가벼렸어요. 나도 이제 90이고 아내도 몸이 병들어 이젠 추억을 먹고 살고 있어요.

 

 

10. 위씨의 한자 표기를 해결하기 위해 위원으로 참여하셨습니다. 그리고 보의론도 세계를 제외하고 일단락됐습니다. 그런데 일부 종인들은 관북 장흥 위씨란 표현보다 장흥 위씨 관북종친회가 자연스럽다고 합니다. 관북 장흥위씨 표현은 선조들의 표현이라 따랐다고 하나 혹시 관북종친회에 숨은 이야기라도 있으신지요.

 

 

-관북을 앞에 붙이는 것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사실 이 질문을 받으면 난 무척 난감해요. 관북파 어르신들의 전통에 의해 관북이란 두자를 장흥위씨 앞에 붙이게 되었지요. 우리는 늘 겸손해야 해요. 교만하면 언젠가 망하게 되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요. 그런 측면에서 관북을 서두에 붙이는 것은 반드시 시정되어야 해요. 장흥위씨가 있고 관북파가 있는 것이지 관북파가 있고 나서 장흥위씨가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일에 있어 우선순위란 무척 중요해요. 지금의 상황은 지극히 잘못된 것이지요. 후손들이 참작하길 바래요.

 

 

11. 장흥위씨 씨족사회가 공고히 발전하려면 조직체계가 튼튼해야 합니다. 현재 우리는 50, 60대가 주축이 되어 움직여 많은 다른 성씨에게서 부러움을 사고 있습니다. 현재 장흥위씨는 도문회와 대종회가 기능적으로 분할된 이원적인 조직체입니다. 단일화 체계가 필요하다고 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만 생활패턴이 도시와 농촌 간 차이가 많아 지금의 이원조직체가 타당하다고 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태선국장님의 견해는 어떠하신지요?

 

 

-도문회와 대종회, 이원화는 바람직한 것 아니죠-

사실 도문회와 대종회의 일원화냐? 이원화냐?는 보는 관점에 따라 서로 다를 수 있어요. 분열된 조직이 서로 통합을 지향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요, 법칙이 아닐까요. 마디로 하늘에 태양이 하나이듯 장흥위씨는 반드시 하나로 통일되어야 해요. 나도 대종회 창립에 관여했으나 그 당시에는 그것이 차선이라 생각할 수 없는 최선의 선택이고 그 결과도 긍정적이라 여겨요. 지금의 도문회와 대종회의 이원화는 바람직한 모습은 결코 아니에요. 남쪽의 위씨를 다 합해봐야 3만 명 이쪽저쪽인데 그것이 반토막이 나서 어디 있을 법이나 하나요. 반드시 하나 되면 좋겠고 그러게 되는 것이 순리잖아요. 모든 일에는 절차와 내용에 하자가 있으면 문제가 발생해요. 너무 서두르지 말고 신중하게 하나가 되는 절차와 그 방법을 찾아가는 길밖에 없지요. 통합은 대세라 어느 조직이든 대세에 부합하지 못하면 점차 약해져 소멸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어요. 이것은 우리 지혜로운 후손들의 몫이 되었네요.

 

12. 앞으로 더 건강하시고 온 가족이 함께 즐거운 여생이길 소망합니다. 혹시 원로로서 장흥위씨의 발전을 위해 후손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부탁드립니다.

 

-9, 월남 70주년인 2018년에 대담을-

우리 아버지는 42녀의 자녀를 두었어요. 쌍둥이인 형(익선) 바로 아래가 나고 여동생(순녀), 남동생(일선)과 배다른 남동생, 여동생이지요. 나 홀로 1948년 월남하여 9순이 다 되도록 고향 땅을 가보지 못해 눈물이 나요. 그나마 이산가족에 대한 방송에 두 번이나 나가는 바람에 고향의 조카로부터 편지는 받았지요. 400만 이산가족들이 하루 빨리 왕래는 시절이 왔으면 좋겠어요. 난 가끔 고향이 생각나서 외로울 때면 영흥타령이라고도 불리는 신고산타령을 부르곤 해요. 신고산은 영흥에서 강원도 쪽으로 가는 길목의 안변에 위치하거든. 또한 글 쓰는 데 소질이 있어 36권의 세계문학전집을 읽던 그 시절을 생각해요. ‘전쟁과 평화, ’안나까레니나, 등 이었지.

북쪽에도 우리 장흥위씨들이 남쪽보다 많다고 해요. 함흥인근에는 위씨 세거지들이 무척 많아요. 성균생원공 할아버지 후손들을 남쪽의 종인들이 관심 가져 주고 따뜻하게 대해주고 쓰다듬어 주어야 해요. 누구나 고향을 떠나면 늘 허전하고 불안하잖아요. 더 나아가 통일을 대비해서 문중차원의 남북종인 화합전략도 필요하리라 봐요. 급하게 하지 말고 차근차근 신중히 준비해야겠죠. 내 나이 9, 월남 70주년인 2018년에 대담을 했으니 의미가 깊네요. 장흥위씨 문중에 늘 좋은 소식이 이어지길 소망해요.

 

 

일파 위태선(一波 魏泰善) 옹 이력

장흥위씨 38, 관북 정삼파

부모형제 (위문환), (김서분), (익선), 본인(태선), (순녀), (일선),

異腹(), 異腹()

수상 금성화랑무공훈장, 인헌화랑무공훈장, 월남일등무공훈장, 보국훈장삼일장

 

 

1929.09.17 영흥군 횡천면 하평리 239번지에서 출생

1942.07. 영흥공립농업학교 졸업

1948.07. 원산고급중학교 졸업

1948.10. 월남

1950.07. 육군사병 입대

1950.10. 방위군 소위임관

1950.12. 예비사관학교 소위임관

1951.05. 보병학교 갑종간부 제15기 소위임관

1952.07. 수도고지전투 소대장(수도사단 1연대 9중대 2소대)으로 6.25참전

1952.08. 수도고지 전투 중 다리부상

1952.05. 결혼(配 金福順 1932), 자녀(33)

1968~1969. 월남전 참전(소령)

1979.10. 육군중령 예편(육군본부 1군 감찰참모)

1979~1987. 국방부 전사편찬위원(2급 공무원)

2004.03. 남북이산가족협의회를 통해 북에 있는 가족소식을 편지로 받음

1990~2009. 장흥위씨 대종회 사무국장

2010~현재 장흥위씨 대종회 명예고문

1993~2001. 장흥위씨 관북종친회 부회장 7~10

2001~2005. 장흥위씨 관북종친회 총무 11~12

2011~2015. 장흥위씨 관북종친회장 16, 17

2015~현재 장흥위씨 관북종친회 명예회장 18, 19

 

태선 7.jpg

 

 

 

위태선 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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