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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문진작(斯文振作)에 앞장선 남전 위정우(南田 魏禎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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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림(儒林)과 장흥위씨 문중 내 사문진작(斯文振作)에 앞장서다.

  남전은 1936210일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에서 출생했다. 장흥위씨 32() 판서공(判書公) 덕화(德和)11대 손이다. 고조 운곡공(雲谷公)이 판서 종가에서 분가해 나왔고 부친 송암공(松庵公)과 모친 영광정씨(靈光丁氏)1남 3녀 중 장남이다. 유년기를 일제 말엽 잔혹한 침탈을 겪으며 어렵게 자랐다. 가세가 극빈하여 10세 전후부터 지게를 지고 풀을 베며 가사를 도왔다. 그러나 위씨는 장흥토반이고 판서공 3대가 벼슬을 하였고 고조 운곡공이 장흥향교 전교를 역임한 전통 유가의 후예라는 긍지와 대대로 이어온 효우지심(孝友之心)의 유전자가 있었다. 남전은 교육행정직 공무원으로 근30년 봉직했다. 관산중학교에서 9년 동안 근무할 때 자녀 4명이 중학과정을 밟게 되어 자녀교육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퇴임 후 광주시교육청 인사위원과 학교법인 세종고등학교 관선이사에 추대되어 화려하게 공직을 마무리 하였다. 남전은 공직 퇴임과 동시 사단법인 광주·전남 충의사(忠義士) 현창회(顯彰會) 사무국장에 발령되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인좌란 등 외침과 내란이 있을 때 애국 충정을 발휘한 광주·전남 충의사 2,115위가 등록되어 있으며, 우리 조상 30위가 포함되어 있다. 충의사를 추모하는 충혼탑(忠魂塔)2014년 국고 10억의 지원으로 담양 창평에 있는 한말 의병장 녹천(鹿川) 고광순(高光洵) 기념사업회 부지에 세워졌으며 매년 전국의 유림과 후손이 모여 봉사(奉祀)한다. 남전은 10여년 봉직하다 퇴임하고 일반 임원으로 계속 참여하고 있다. 20003월 유도회 전라남도 본부 총무국장에 겸직 발령되면서 본격적인 유림 활동이 시작되었다. 유림 경력을 보면 광주향교 병설 유교대학을 이수하였고, 광주향교 장의, 성균관 유도회 본부 임원, 성균관의 전학, 전의, 사정위원, 중앙상무위원을 역임하며 십수년 사문진작에 앞장섰다. 실천예절지도사 자격을 취득하여 방학 중 도내 초··고 학생들의 인성교육에 솔선했다. 유림의 저변확대와 이념교육에 진력하여 성균관과 도내 각 향교 유림 지도자들의 신임을 얻게 되었다. 튼튼한 유림 인맥은 존재(存齋)선생 거사비(去思碑:頌德碑)를 세울 때와 의재(毅齋)선생 송시집(頌詩集)을 출간할 때 빛을 발했다. 또한 성균관을 비롯하여 도내외의 서원(書院)과 사우(祠宇) 제관(祭官)80여 차례 망정(望定)되었으며 주로 축()과 집례(執禮)를 맡은 것도 그 인연에서 비롯된 것이다. 남전 본인은 공직 30년보다 유림 10여년이 더욱 보람되었다고 회상한다.

 

 

  도문회와 대종회 간 오해를 원만하게 조정역할을 하는데 진면목을 보였다.

  남전은 30여년 문중사에 참여해 왔다. 1986년부터 광주종친회 재무, 총무, 부회장 등을 역임하다가 2002년 회장에 피선되었다. 재임 시 옥과 유림들과 손을 잡고 존재선생 거사비를 세운 것이 무엇보다 보람을 느꼈다고 한다. 특정 개인이 경비 일체를 부담하겠다는 호의를 사양하고 전국 종인들의 성금과 관련 문중의 협찬으로 건립기금에 충당했으며 옥과 유림이 사업을 주관하여 향교 앞 중앙에 세워졌다는 것이 뜻 깊은 일이다. 존재선생은 비록 13개월 짧은 재임기간이었지만 역대 현감중 제3대 하서(河西) 현감 다음으로 107대 존재현감을 훌륭한 현감이라고 추모해 오고 있으니 후손들과 지역 주민들이 뜻을 함께 한 쾌사(快事)였다. 그리고 광주 종보 창간호와 2호를 발간하여 당시의 이모저모를 기록으로 남겼으니 지역종친회로서는 쉽지 않은 사례였. 남전은 숭조돈종(崇祖敦宗) 정신이 남달라 도문회와 대종회를 넘나들며 문중사에 깊이 참여했다. 먼저 도문회 활동상을 살펴본다. 조상 제향은 물론 각종 행사에 거의 참여했다. 2006년 회주 문중이 도문회로 조직개편 이후에는 상임위원 운영위원을 번갈아 가며 십수년 성의를 다했다. 특히 2010년 대동보 보의론 연구위원회 간사직을 맡으면서 1년 가까이 노력한 활동상은 보의론 연구결과보고서세계조(世系條) 번복경위와 진상이라는 책자에 고스란히 담겨있고 위씨 종보 17에 당시의 전말을 담았으니 후세에 좋은 참고 자료가 될 것이다. 매년 5현조 제향 때면 집례 또는 상례 자리에 서서 5현조의 행적과 참례자의 자세 등에 대해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던 모습이 생생하다. 특히 옛날 홀기가 너무 지루하고 내용을 알아들을 수 없는 점을 감안하여 이를 간소화시키면서 우리말로 풀이까지 해주니 편하고 고마웠. 대종회에는 장학회 이사직을 10여년 연임했고 수석부회장을 3대 연임했다. 씨족문화연구소 간사 역을 맡아 장흥위씨 요람 편찬에 정성을 다 했고 천년세고 선집 발간 때에는 원고 수집과 번역을 주선하는 등 숨은 노력이 많았다. 송담 회장과는 고교시절 1년 선후배 관계로 제반 사안을 허심탄회하게 상의하면서 대종회를 이끌어왔다. 남전은 도문회와 대종회 간 크고 작은 오해를 원만하게 조정역할을 하는데 진면목을 보였다 할 것이다. 그 중 도문회가 가지고 있는 1999년 기묘대동보 발행의 잉여금 1억원을 대종회 사무실 구입비로 지원하게 하는 것을 꼽을 수 있다. 이로써 도문회는 돕는 모습을 보였고 대종회는 채무의 부담에서 벗어난 것이다. 2009년에는 의재(毅齋) 위석한(魏錫漢) 선생의 기적비 제막을 기념하는 송시집(頌詩集) 발간을 주도했다. 선생께서는 성균관 및 유도회 총본부의 고문을 역임하였고 호남절의록, 전남도지 발간 도유사였으며 충남의 문충사와 죽림서원 창건 임원에 피선된 국유(國儒)로 평가 받는 분이다. 남전은 1년 동안 각 방면으로 연락하며 원고 수집에 노력했다. 평소 유림활동을 하면서 맺어진 인맥을 동원하여 성균관 유림대표, 지역의 유림 및 한학자, 종친 등 200여명으로부터 귀한 시문을 얻어 모양새 있게 편집했다. 그러면서도 큰 어른에 대한 예우가 미흡했다고 겸손해 한다.

 

 

  뿌리가 견고해야 가지와 잎이 무성하고 물의 근원이 깊어야 흐름이 길다‘.

  남전과 배 청주 김귀례(金貴禮 1937317) 슬하에 황(), 승희(承希), 대훈(大爋), 승완(昇完), 장섭(壯燮) 41녀를 두었다. 자녀교육에 관심이 높았던 만큼 바르게 성장시켜 은행원, 자영업, 변호사(전 판사), 의사 등으로 진출시켜 주위의 찬사를 받고 있다. 무슨 특별한 방법이라도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빙그레 웃으며 본인들이 노력한 결과다. 학원은 생각치도 못했다. 다만, 관심을 갖고 인성교육은 소홀히 하지 않았고 어릴 때 책은 많이 읽었으며 도움이 되었다면 사춘기인 중학생 때 그 학교에 근무하면서 선생님들과 소통했던 것이 보탬이 되었으리라고 가볍게 대답했다. 남전은 8순을 넘기면서 본인의 생애를 기록으로 정리하여 자녀들에게 남겼다. 살아가면서 참고하라는 아빠의 당부였다고 보여 진다. 그리고 몇 년 전에는 판서공파 운곡종중 가승(家乘)을 만들어 시조공으로 부터 스스로에 이르기까지 계통을 밝히면서 폐지된 호적등본(적등본 포함)까지 첨부하여 당내간인 조카들한테 나누어 주었다. 근원을 잃지 말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2004년도에는 운곡공 이후 4세 묘역을 치장하고 4세 유택 및 가계비를 세웠다. 뒷면에 근본고이지엽무(根本固而枝葉茂)요 천원장이유파장(泉源壯而流派長)이라뿌리가 견고해야 가지와 잎이 무성하고 물의 근원이 깊어야 흐름이 길다라고 크게 각()하여 비유적으로 조상숭배 정신을 강조한 것이다. 끝으로 남전의 문중 3대 종보 기고문을 정리했다. 광주종보에는 창간호(2003) 발간사인 종친의 번영을 기원하며, 창간호(2003) 존재 현감 위공 백규 거사비 건립, 2(2004) 하산사 성역화 시급하다, 3(2006) 대종가 복원 가능한가, 4(2010) 의재공 송시집의 재조명이다. 위씨종보에는 제9(2003) 문중 현안에 대한 시대적 책임, 10(2004) 기산 위인백 박사 출판기념회를 다녀와서, 12(2006) 성지 하산사 위락촌 둔갑 우려, 14(2008) 족보 기록을 수정할 중요자료 발굴, 15(2009) 의재공 기적비 건립 유감, 17(2011) 보의론 연구 또 하나의 역사이다. 월명송에는 관북종친의 애족정신을 실었다.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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