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07 09:14
행원 예찬(杏園 禮讚)...
행원의 지명에는 두 가지 설(說)이 있다. 하나는 옛날 행원에 살구나무가 많아서 살구나무 정원(庭園)을 뜻해서 붙여진 이름이다는 설과 다른 하나는 옛날 동네 뒷산에 행원사(杏園寺) 또는 해원사(海院寺)라는 절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 살구나무 동산이든 행원사든 모두 좋다.
행원뒷산에는 100년전에만해도 1장(丈) 5척(尺)(약4.5m) 높이의 9층탑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없다. 언제 사라졌는지 아는 이도 없지만 절이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곳의 지명은 “큰까끔(큰언덕)”으로 불리우며 600년이 넘는 수령을 자랑하는 비자나무가 위엄을 자랑하고 있다. 그 주변은 대부분 야생차숲으로 그 청정한 찻잎은 장흥의 명물이자 신비의 전통 발효차 “청태전(靑苔錢)”의 원료로 공급되고 있다. 그땅의 주인은 광산 김씨 문중으로 대대로 잘 관리 되고 있다.
행원마을 북동쪽은 산이요 남서쪽은 넓은 평야지대로 그끝은 예양강(汭陽江)이다. 예양강은 탐진강의 옛이름이지만 지금도 곧잘 장흥사람들에게 그리웁게도 불리운다. 굽이굽이 흐르는 행원 예양강은 ‘강정모텡이’에서 시작된다. 지명에서 알 수 있듯 과거에 정자가 있었다. 그정자의 이름은 “취해 잠든다” 또는” 잠에 취한다”는 “취수정(醉睡亭)”으로 정자의 주인은 “번쾌불사 장비부생(樊噲不死 張飛復生 번쾌가 죽지 않았고 장비가 다시 살아났다.)의 위천회다.
행원에는 사우(祠宇)가 둘 있다.하나는 장흥인 괴봉 (魁峰) 위대용을 주벽으로 총11위가 배향되어 있는 석천사(石川祠)이며 다른 하나는 중봉(重峯) 조헌을 주벽으로 총4위가 배향된 행강사(杏岡祠)다. 2곳에 배향된 대부분의 인물은 임진왜란등에서 활약한 무반출신이다. 특히 행강사에 배향된 광산인 김헌은 금산전투에서 조헌과 같이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 전사한 그들이 함께 묻힌 유택은 충남 금산에 ‘칠백의총(七百義塚)’으로 불리우며 살아남은자들에게는 국가에 대한 헌신과 충성의 상징이다. 조선후기 호남3대천재로 불리우는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는 그의 저서 존재집(存齋集)에 “의도 김공전(義徒金公傳)”을 남겨 그의 충절를 따로 기록했다.
장흥고을 사람들중에 글깨나 읽고 유식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1기산 2행원 3방촌 4평화 5어산 이라고들 한다.물론 순서에 대한 이론은 항상 있다. 하지만 1기산과 2행원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이론이 없다. 언제부터 이렇게 불렸는지 모르지만 그마을 출신들은 늘 자랑스럽게 이야기 한다. 1기산의 안양면 기산리는 사자산밑에 있어 풍광이 수려하고 조선팔문장가이자 “관서별곡”의 저자인 기봉(岐峰) 백광홍과 그동생이자 명필인 옥봉(玉峯) 백광훈의 출신지이며 기산마을에 있었던 봉명재(鳳鳴齋) 서당에서 열네분의 대과 급제자가 배출된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 이다. 2행원의 장흥읍 행원리는 특이하게 무과 급제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행원의 양대 집성씨인 광산 김씨와 장흥 위씨에서 조선중기 이후 대과 급제자가 배출되었고 특히 무과 급제자는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정도로 많다. 그들이 대부분 관료로서 혁혁한 공적을 남겼다.
행원에 사람들이 사라져 간다. 전통도 점점 사라져 간다. 하지만 아직까지 남아있는 전통이 있다. 호남의 전통놀이 고싸움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고싸움을 할려며 고싸움에 필요한 거대한 ‘고’가 있어야 한다. 행원에는 고를 만드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요즘에도 장흥지방의 축제인 ‘보림문화제’에 사용되는 고를 만드는 일을 행원에서 마을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으로 한다.
행원은 장흥읍내에서 2km정도로 가깝다. 과거에는 장흥부(長興府) 성밖의 대표적인 반촌(班村)이었다. 200호가 넘던 마을의 규모가 현대로 오면서 점점 축소되고 많은 사람들이 고향을 떠났다. 하지만 떠난이들이 늘 생각하고 그리워하면서 돌아가고 싶은 수구초심(首丘初心)의 고향이다. 남은자들에게는 지켜야할 고향이다.
재치(財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