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11 20:08
湖南長興天冠山下之堂洞故韓成均進士唐谷魏公諱鯤之舊居也 호남의 장흥 천관산 아래 당동은 조선조 때 성균진사인 당곡 위(魏)공 諱 곤(鯤)의 구거지다. 公은 중종 乙亥 15115년 2월 16일에 이곳에서 출생하여 장성하고 이곳에서 늙었다. 중략(中略)...
명(銘)하노니, 천관산이 높고 험함이여 푸른 하늘을 괴고 높이 서 있구나. 당수(唐叟)의 경개(耿介)함이여 당일의 큰 삿갓을 상상하네. 동천(洞天)을 넓혀 복지(福地)를 만듦이여 당우(堂宇)를 세우니 소쇄(瀟灑)하구나. 이미 거문고 뜯으며 노래하고 술잔 들며 시를 지은 고요하고 아름다움이여 또한 농부들과 담소하였네. 청삼(靑衫)입고 춤을 추니 넓은 소매 펄럭임이여 진령장(榛笭章)을 생각하며 잠꼬대처럼 읊조리네. 중정(中庭)의 보수(寶樹)를 돌아봄이여 어찌도 그리 명절이 많은고? 당동의 옛터에 풀과 나무는 지금까지 향기를 풍기는구나. 큰 비를 다듬어 내 말을 새김이여 후래자(後來者)를 가르치기 망망(茫茫)하구나.
乙酉光復後初己未閏六月初吉 文學博士 眞城 李家源 謹撰
瑞興 金昌東 前面書
唐谷公 十一代孫 容喆 後面書
聽溪公 十一代孫 啓孝
顔巷公 十一代孫 啓天 謹竪
施工者 寶城石物工場 代表 金南模
당곡진사 위 곤(1515~1582)은 강릉참봉공 진현(晉賢)의 자(子), 승문습독공 유형(由亨)의 손(孫), 한성참군공 종복(宗復)의 증손(曾孫), 통덕랑공 자량(自良)의 현손(玄孫)이다. 자(字) 大冲이요. 1549년(己酉 명종4) 식년 진사시 3등 60위로 합격하였다.
배(配)는 광주이씨다. 묘소는 회진면 대리 묘좌(卯座)로 동영합조(同塋合兆)다. 자(子)로는 장자 판사 덕홍(德弘), 차자 청계 덕의(德毅), 삼자 운암 덕관(德寬), 사자 호조판서 덕화(德和), 오자 안항 덕후(德厚)이다.
손(孫)은 정망(廷望), 정첨(廷瞻)은 덕홍(德弘)의 출(出)이며, 정헌(廷獻)은 덕의(德毅)출(出)이며, 정호(廷灝), 정봉(廷鳳)은 덕관(德寬)의 출(出)이며, 정철(廷喆), 정혁(廷赫)은 덕화(德和)의 출(出)이며, 정훈(廷勳), 정렬(廷烈), 정명(廷鳴)은 덕후(德厚)의 출(出)이다.
이후 후손들은 관산읍 방촌, 당동, 옥산, 옥동, 용전, 부산면 기동, 대덕읍 초당·도청, 용산면 모산, 안양면 당암, 기산, 월암, 비동, 동촌, 유치면 단산 등 장흥군 일원을 중심으로 번손하였다.
이밖에 여수시 개도, 보성군 회천면 도강, 웅치면 유산리, 김제시 월현, 경북 상주, 예천 명봉리, 효갈리 지역에도 후손들이 정착하여 세거지(世居地)를 이루었다. 대한민국 장흥위씨 중, 60% 이상이 당곡 진사의 후손에 해당된다.
公의 유장비(遺庄碑)는 1979년 6월에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당동마을 입구에 세웠다. 근찬(謹撰)은 문학박사 이가원, 전면서(書) 김창동, 후면서(書) 위용철, 근수(謹竪) 위계효, 위계천, 시공자는 보성석물공장 대표 김남모 이다.
이중, 근찬(謹撰)한 문학박사 이가원(진성人 1917~2000) 선생은 1987년 장흥읍 평화 회주사(懷州祠) 앞 "장흥위씨 시조공 사적비" 근찬과 "1999년 기묘대동보 서문(序文)"을 썼다.
전면서(書)한 김창동(1947년생) 선생은 장흥위문과 연(緣)이 각별한 고당(顧堂) 김규태(1902~1966) 선생의 일곱째 아들이다. 당시 33세 연령으로 다른 성씨 문중의 비(碑) 전면 글을 쓴 것은 참으로 경이롭다.
후면서(書)한 춘사(春史) 위용철(1922~2008)은 방촌리 계춘동 태생으로 안항공 10대손이자 다암(茶嵓) 위영복 선생의 증손(曾孫)으로 1999년 기묘대동보 편찬시 도유사 중책을 맡아 서(序)를 썼다.
근수(謹竪)한 계헌(溪軒) 위계효(1917~2004)는 당동 태생으로 청계공 10대손이자 성균관 고문 의재(毅齋) 위석한 선생의 장자(長子)이다.
관포(冠圃) 위계천(1923~ )은 방촌리 태생으로 안항공 10대손이다. 2003년~2005년 하산도문계장을 맡아 문중사를 이끌었다. 위계효는 청계공 10대손, 위계천은 안항공 10대손이다. 각 11대손 기록은 오기(誤記)로 사료된다.
公의 묘소인 회진면 대리는 손(孫) 병조참판공 위정철(1583~1657)이 41년간 봉직하고, 1644년 마직막 관직인 함경도 만포진첨절제사를 퇴임하여 귀향하였다. 이후 청금(聽禽) 위정훈(1578~1662) 선생, 웅천현감공 위정렬(1580~1656) 두 종형(從兄 4촌)과 함께 당대 국풍(國風) 이의신를 대동하고 천관산에 올라 조부(祖父)인 公과 부(父) 호조판서 위덕화의 이장(移葬) 묘(墓) 자리를 잡았다. 또한 두 종형의 집터인 현재의 근암고택과 존재고택을 잡았다고 傳해진다.
公의 원래의 묘(墓) 자리는 현재 장자(長子) 판사공 위덕홍 묘소가 위치한 관산읍 당동 뒤 탄현등(嶝)이 유력한 장소로 추정된다. 제향(祭享)은 매년 陰 10월 1일 장천문중 주관으로 묘전에서 봉행(奉行)한다.
호조판서공 위덕화의 원래 묘(墓) 자리는 관산읍 농안리 천관산 자락 화운동이었다. 이곳에 장자(長子) 위정철은 자신의 묘(墓) 자리로 잡아 두었던 것을 동생 정양재 위정혁(1589~1627)이 39세 젊은 나이에 타계하자 매우 애석(哀惜)해 하면서 자리를 내어 주었다고 傳해지고 있다. 현재 정양재 위정혁 등 선조 묘소 5基가 위치하고 있다.
청금(위정훈) 선생은 타계 후 관산읍 농안리 천관산 자락 화운동, 부(父) 안항 위덕후 아래에 묘소를 안장(安葬)하였다. 웅천현감공(위정렬)은 장천재 묘각 뒤에 묘소가 위치하고 있다. 병조참판공 위정철은 타계 후 조부(祖父) 당곡 진사공과 부(父) 호조판서공 묘소가 위치한 회진면 대리에 안장(安葬)하였다. 이후 손(孫) 송와 위세기(1675~1747)와 간암 위세옥(1689~1766)선생 두 형제는 선친 상원군수공 위동전(1649~1713)의 뜻에 따라 1746년 현재의 천관산 500m 감시봉에 이장(移葬)함이 국역(國譯) 존재집 간암처사공 행장에서 확인된다.^^ 栢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