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3.20 11:42
호남5대 명산의 하나인 장흥군 천관산(723m) 풍호대(風乎臺)는 영은동천(靈隱洞天) 장천재(長川齋)에서 동쪽 방향으로 300m 가다보면 청룡등(嶝) 국유림과 경계한 장흥위씨 장천문중 임야(林野) 내 위치한다
이 정자(亭子)는 원래 1780년(庚子) 원취당(願醉堂) 위도순(魏道純 1748~1816) 선생이 지었던 정자다. 풍평대(風平臺)라고도 불렀다. 유치면 다산리 태생 복재(復齋) 위계민(魏啓玟, 1855~1923) 선생의 복재집(復齋集)에 시문이 있다. 정자는 사라지고 없던 것을 2006년 전라남도(장흥군)에서 2층 시멘트 건물로 복원(復元)했다.
위도순의 자(字)는 일극(一克), 호(號)는 원취당(願醉堂)이다. 안항(顔巷) 위덕후(魏德厚)의 6대손이며, 위백양(魏伯陽)의 아들이다. 방촌리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장천재에서 존재(存在) 위백규(魏伯珪) 선생의 강학(講學)을 받았다. 벼슬에 뜻을 접고 33세 때 정자를 짓고 자족(自足)하면서 흐르는 물과 부는 바람을 벗 삼아 자신의 심회(心懷)를 읊었다
정자에서는 원취당원운(願醉堂原韻), 장천재운(長川齊韻), 풍산정사운(次風山精舍韻), 최지사초당운(次崔知事(夢嵒)草堂韻), 풍호대기(風乎臺記) 등에서 시문(詩文)을 남겼다. 또한 시문에 탁월한 재주가 있어 원취당유고(願醉堂遺稿) 원취당처사유고(願醉堂處士遺稿)가 있다.
이러한 책은 1933년(癸酉) 현손 오헌(梧軒) 위계룡(魏啓龍 1870~ 1948)선생이 유고집을 간행하였다. 권두(卷頭)에 송사(奇宇萬)의 서문(序文)이, 권말(卷末)에 심석(鄭義林)의 발문(跋文)이 있다.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원취당의 현손(玄孫) 오헌(위계룡) 선생은 중수(重修)하고 풍호대중수기(風乎臺重修記)를 남겼다. 이후 풍호대는 언제 철거되었는지 알 수 없다.
1975년 그 자리에 옥천(玉泉) 위욱량(魏彧良 1921~1994)이 관산면장 재임(1970년 5월 7일~1975년 9월 27일) 때 백미(白米) 25가마를 자부담 하여 철재 기둥과 함석지붕의 육각정(六角亭)을 건립하였다.
이곳에는 松谷(안규동)이 쓴 풍호대(風乎臺)와 碧岡(김 호)이 쓴 별호(別號) 육각정(六角亭) 액호 편액을 걸었다. 육각정은 장천재와 함께 천관산을 찾는 등산객들의 쉼터 기능을 하면서 3~4월 농사일이 시작되기 前에 관산면 지역 각 마을 부녀자들의 중요한 행락(行樂) 문화공간으로 이용되었다. 이후 세월이 흘러 육각정은 기둥과 지붕이 낡아 방치 되어 제 기능을 못하고 있었다.
2006년 전라남도(장흥군) 지원사업으로 일금 150,000,000원이 책정되어 시멘트 기와 지붕 2층 정각, 현재의 풍호대를 건립하여 관산읍 일대를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 기능을 복원하였다. 이때 영월정(迎月亭) 앞 쉼터광장도 같이 조성되었다.
풍호대 내에는 주인(主人) 願醉堂(위도순)의 풍호대기(風乎臺記), 현손 梧軒(위계룡)의 풍호대중수기(風乎臺重修記), 7대손 觴山(위성탁)의 풍호대운(風乎臺韻) 시운 편액3점과 松谷(안규동)의 풍호대(風乎臺) 액호 편액이 걸려 있다.
최근 풍오대를 찾아을 때 목전(目前)에 나무들이 많이 자라있었다. 일부 관산읍 소재지 조망을 가리고 있어 유수(流水) 같은 세월의 시간을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는 관산읍 소재지, 죽교 앞 뜰, 방촌 뜰, 멀리 득량만 완도군 금당도까지 한눈에 조망되어 상큼한 봄바람을 마음껏 불러보았다.^^ 栢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