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4.23 13:37
詩에 이르기를 山嶽이 山神靈을 내려 보내서 甫侯와 申伯을 태어나게 하였다고 하였으니 山神靈의 내려옴이 어찌 예나 지금이나 안이나 밖이라고 해서 다르겠는가. 天冠山은 바로 長興의 남쪽 鎭山으로 그 동쪽 기슭에서 수리를 가면 동내가 있으니 傍村이라 하는데 長興魏氏가 대대로 살고 있다. 그의 中世祖인 諱 繼廷은 고려 때 門下侍中이니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으며 九代 째 내려와 諱 种은 벼슬이 閤門祗侯로 고려 공양왕조 때 李太祖에게 호응하지 아니하며 杖刑 百대를 맞고 멀리 유배되었다. 四代 째 내려와 諱 由亨은 승문원습독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끝까지 취임하지 아니하고 山亭을 지어 누었다 일어났다 자유롭게 지내면서 자신을 수양하였고 남추강(名은 효온)과 신영천(名은 잠) 諸公이 참으로 공경하고 重하게 여겨 아주 친하게 교유하였다. 아들을 두었으니 晉秀는 생원이요 晉賢은 참봉으로 다 같이 방촌에서 살았으며 생원의 손자인 德元은 訓練院副正으로 임진왜란 때 元帥의 陣營에 달려가 강개하여 용감하게 왜놈과 싸워 특수한 功績이 많으므로 공조참의에 증직되고 죽천사에서 享祀하고 있다. 德男은 主簿 벼슬로 임진왜란 때 부친께서 害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陣中으로 달려가 많은 功勳을 남겼다.
참봉은 五孫을 두었는데 첫째는 德弘이니 판사로 十七歲 때 향시에 세번을 합격하였으나 會試에는 불리하여 마침내 科擧를 보지 않았고 둘째는 德毅니 號는 聽溪로 임진왜란 때 王께서 서쪽으로 피란하였는데 분개한 충성심으로 걸어서 九十日만에 용만(지금의 義州)에 도달하여 明나라 장군 여응종과 같이 말을 주고받음에 여응종이 칭찬하기를 東國에 산은 천관산이 있고 인물로는 魏某가 있다고 하였으며 兵曹參議에 贈職되고 죽천사에서 享祀하고 있다. 셋째는 德寬이니 號는 雲巖으로 副護軍이요 넷째는 德和니 임진왜란 때 임금의 피란길을 護衛하였을 때 松都에서 비를 만나 終日토록 굶주렸는데 德和가 서숙밥을 임금에게 올리니 王께서 감탄하면서 이 맛이 八珍味보다 좋다고 하였다. 義州에 이르게 되자 따르는 臣下가 겨우 數十人이라 德和가 분개함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 높여 통곡하니 鄭松江(정 철)과 柳西厓(류성룡) 두분 또한 손을 들어 눈물을 닦으면서 말하기를 이는 모두가 우리들의 잘못이다 고 하였으며 戶曹判書에 증직되고 죽천사에서 향사하고 있다. 다섯째는 德厚니 號는 顔巷이며 일찍이 實學에 뜻을 두고 명성이 높아 세상에 알려짐을 구하지 아니하고 효도로 濟用監 判官에 임명되었다. 중략.....
(중략 내용은 德元의 子 廷說, 德男의 子 廷佑, 德弘의 子 廷望과 廷瞻, 德毅의 子 廷獻, 德寬의 子 廷灝, 德和의 子 廷喆, 德厚의 子 廷勳, 廷烈, 廷鳴과 廷烈의 현손(玄孫) 존재 伯珪 등의 공적(功績)을 기술(記述)하였다.)
天冠山이 높이 솟음이여 森嚴하게 벌려있어 칼과 창 같구나. 靈氣가 萬年토록 쌓임이여 방촌이란 마을이 있네 魏氏 대대로 살아옴이여 누가 시켜 玉을 심었는고? 五德이 일시에 태어남이여 도씨의 五虎요 순씨의 八龍 같도다. 하물며 그 子孫들이여 모두를 난조(鸞鳥)로 길러냈고 고니 새를 모아 놓았네. 亂離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보다 극심함이 없었음이여, 一門이 國難에 달려가 求하였네. 특별한 功勳을 세우지 않음이 없음이여 혹은 矢石에 殉節하였네. 朝廷의 융숭한 報答이 있음이여 功臣錄에 記錄하고 벼슬을 내리었네. 또한 士林의 公論이여 祠宇를 세워 祭를 올리었네. 어찌 그리 계례가 많고 어진이가 많음이여 祖宗의 법칙을 지키었네. 집집마다 孝悌에 독실함이여 사람마다 文學에 힘썼도다. 사람들이 德門이라 손을 꼽음이여 어찌 써 碑를 깊이 새김이랴. 아! 천관산이 오래토록 도움이여 千百世토록 빛나리라.
檀君紀元四千三百十六年癸亥三月之上旬 坡平 尹丁鍑 撰
瑞興人 金昌東 謹書
聽溪公 十三世孫 聖基 謹竪
장흥위씨 세장비는 1983년 3월에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 사거리(일명 객사골) 장흥대로 국도변에 세웠다. 찬(撰)은 중헌(重軒) 윤정복(尹丁鍑 파평人, 1917~2002) 선생이 하였다. 선생은 전남 나주시 남평읍 태생으로 조선말 유학자 심암(心庵) 양계묵(梁啓默 제주人, 1882~1941)선생과 화순 태생 효당(曉堂) 김문옥(金文鈺 광산人, 1901~1960)선생의 문하(門下)에서 수학(修學)했다. 특히 효당 선생이 화순군 남면 절산리 거주 때에는 重軒(윤정복), 誠齋(나갑주), 晩翠(위계도)선생이 동행(同行) 수학하였다. 이런 연유로 관산읍 당동마을 태생으로 성균관 고문 의재(毅齋) 위석한의 사자(四子)인 만취(魏啓道 1926~1999)선생의 청(請)에 의해서 비문(碑文)을 지었다고 한다. 3권의 중헌유고(重軒遺稿)을 남겼다. 타계 후 광주광역시 광산구 박산사(博山祠)에 배향되었다.
근서(謹書)는 장흥위문과 연(緣)이 각별한 고당(顧堂) 김규태(1902~ 1966) 선생의 일곱째 아들인 창석(菖石) 김창동(金昌東 서흥人, 1947~ ) 선생이 섰다.
세장비 부지(敷地) 50평을 장천문중(長川門中)에서 위계석님으로부터 매입(買入) 마련하였다.
근수(謹竪)는 청계공 13대 종손인 경독재(耕讀齋) 위성기(1924~ 2011)의 700만원 헌성(獻誠)으로 세워졌다. 또한 경독재는 1975년 평화 하산도문중에 위토답(位土畓) 3두락과 2000년 자신의 전 재산이라 할 수 있는 논 19두락을 장흥읍 월평 집안에 희사하였다. 2011년 장흥위씨 대종회에서 주관한 후손들의 장학사업 기금조성 운동을 버리면서 헌성 참여와 주변 종친들에게 적극 협력토록 독려하는 등 선친(先親) 성재(誠齋) 위동환(1899~1970)의 모선정신을 몸소 실천하였다. 이 장흥위씨 세장비는 방촌마을 중앙 장흥대로 국도변에 위치하여 오가는 내방객이 쉽게 찾아 볼 수 있어 집성촌(集成村)의 상징물이요, 큰 자랑이 아닐 수 없다.
자문 : 장흥위씨 장천문중, 덕운 위황량, 남전 위정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