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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老와의 對談

 

魏門 조직의 중추 大宗會 산파

汎谷 燦鎬 전 會長의 20년 歷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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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흥 위씨 대종회하면 범곡 전 회장을 빼놓을 수 없다. 여기다 범곡하면 강인한 카리스마를 느끼게 한다. 그의 리더십은 스파르타를 연상하게 한다. 순천농고 재학 중에 피난수도 부산 간부후보생으로 입대한 후 대령으로 제대했으니 군대식 통솔력이 배인 까닭이리라. 성격을 타오르는 불꽃같고, 타산은 전광석화처럼 민첩하다.

대종회 총회가 2017년 3월 1일 충정로 한국경제신문사 11층 웨이딩 홀에서 열렸다. 작년과 올해는 추위도 별로 심하지 않는데 박근혜 대통령 탄핵 찬반으로 촛불과 태극기 집회로 인해 거리가 요란스런 겨울이었다. 이날도 양쪽의 집회로 광화문과 시청 앞 광장이 떠들썩했다. 마침 이 자리에서 범곡 전 회장님을 뵐 수 있었다.

올해는 대종회가 출범한지 27년째 되는 해이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그 강산이 3번이나 변할 연륜이다. 그래서인지 범곡 전 회장님의 얼굴도 여전한데 걸음걸이가 좀 달리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격려사는 여전히 특유의 박력이 옹골차게 묻어나왔다. 시간을 내서 대종회 출범과정 등 문중의 현안에 대해 대담을 나누었다.

<장흥위씨 종보 23호 편집실>

 

1. 시간이 많이 흘렀습니다. 제가 1990년 말쯤 범곡 회장님을 뵀으니까 어언 20년쯤 지났습니다. 회장님을 뵈니 묻고 싶은 게 많습니다. 우선 대종회의 출범입니다. 당시 다른 성씨도 일부 「대종회」라는 이름의 조직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2006년에 출범한 「도문회」의 전신인 「모선계」가 있을 때입니다. 1990년 11월 3일 대전 유성호텔에서 출발한 「대종회」의 출범 이유와 목표가 무엇이셨습니까.

 

대종회 창립이 1990년 11월로 벌써 27년 가까이 흘렀으니 세월은 쏜 살과 같다는 말이 새삼스러워지네그려. 내 나이가 올해로 미수(米壽)니 벌써 팔십 팔세가 되었네. 늘 그 때 일을 떠올리면 가슴이 벅차올라. 왜냐하면 내가 1972년부터 재경종친회에 몸담았지만 재경종친회로만 우리 문중발전이 한계가 있었다고 생각했지. 즉, 18년 동안 재경종친회를 구심점으로 활동했지만 사람, 재력, 기획 등에서 한계가 있었어, 한마디로 전국적인 네트워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고 직감적으로 느꼈지. 또한 수년전부터 문중 어르신들과 협의를 지속해 왔고 이미 고인이 되신 위욱량 아재의 간절한 요청이 시발점이 된 것이지. 대종회 출범의 목표와 이유는 대종회라는 중앙조직아래 전국에 산재한 세거지와 이에 소속된 종친들를 하나로 묶는 엄청난 작업이었지. 이는 급격한 산업화와 결혼이나 공부를 하러 많은 종친들이 고향을 떠나 전국으로 흩어져버린 것이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각오였지.

 

 

2. 대종회 출범을 앞두고 1936년에 발족한 기존의 「모선계」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새로 발족하는 「대종회」와의 명실 공이 문중조직의 일원화를 위해 어느 정도나 고려하고 모선계측과 협의하셨습니까. 아니면 일원화 등은 고려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와 관련된 비하인드 스토리 같은 게 있을듯한데 말씀해주시면 합니다.

 

사실 장흥을 기반으로 장흥위씨 문중의 근간을 이루는 도문회의 업무는 여러 곳에 산재한 묘관리, 재각관리 등의 재산관리와 장흥에 거주하는 종친들 관리라고 봐. 주로 장흥에 사는 종친들과 타 외지로 나간 일부 종친들이 소속되어 있지만 너무 인재 풀(Pool)이 좁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큰 일을 벌릴 수도 없고 확대하기도 어려운 점이 많다고 판단했었어. 또한 본향 장흥에 계셨던 분들도 대종회 출범에 찬성하는 분들이 여럿 계셨지. 대전 유성호텔 대종회 출범식에 참여한 72분의 종친들의 면면을 보면 금방 알 수 있지. 재경 수도권(서울, 경기, 인천)에 거주하는 종친들이 과반에 이르렀고 여타 중소도시에 거주하는 종친들이 갈수록 늘어나 이들의 의견을 수용하고, 수용된 의견을 종합하여 현실에 적용하려면 도문회 업무와 조직으로는 어렵다고 생각했지. 그 때는 도문회는 도문회대로 대종회는 대종회대로 할 일이 많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지난날은 지난 일로 치고 당시에는 어차피 문중의 중흥과 단합을 위한 것이었지만 지금이라도 하나가 되는 장흥위씨가 중요하다고 생각해. 아마 10년 이내에는 된다고 생각해. 나와 같은 세대가 지나가고 신세대 교육을 받은 전후세대들이 문중을 이끌 시기에는 많은 변화가 있으리라 생각하지. 결국 분열은 통일을 지향할 수밖에 없지. 그것은 내 세대 이후의 몫이라고 봐. 하여간 당시에는 나와 주변 종친들이 대부분 대종회 출범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지.

 

3. 대종회가 출범한 이후 실로 많은 사업을 추진하셨습니다. 당시 하산사(현 회주사)대제를 위한 전국 종원들의 참례독려 하는 것에서부터 1997년에 시작된 대동보 수단독려, 장학재단 설립기금조성, 종보 편찬의 정기화, 청소년 하계수련회, 성씨 표기 한문과 영문통일, 인터넷 홈페이지 개설, 장흥 위씨 요람 출판 등 실로 무수합니다. 이제와서 당시를 되돌아보시면서 가장 감회가 깊은 사업을 꼽으라면 어떤 것입니까.

 

많은 문중사업을 벌인 것은 내가 한국전쟁에서 운이 좋게 살았기 때문이지. 대령으로 예편해서 직업을 찾던 중에 간호학원을 우연히 차리게 되었어. 보사부에서 인가한 학생티오가 480명이었지. 한마디로 엄청난 돈을 모을 수 있는 기반이 되었던 거야. 그래서 사업이 안정되니 문중에 시간과 돈을 투자할 수 있었지. 가장 감회가 깊은 것을 꼽으라면 후진양성에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 우리 장흥위씨는 인구수도 적고 사업을 크게 하는 사람이 없지. 한마디로 한미하고 약하다는 것이지. 그래서 이를 타개하고자 사람에게 투자를 해보자는 것이었어. 하계수련회를 만들어 교육하고 장학금을 수여하여 문중에 봉사하는 마음이 들게 하려는 목적이었지. 십시일반으로 자금을 모으기 위해 동분서주했지. 그나마 요사이 우리 대종회에 젊은이들이 구름같이 몰려드는 것은 그래도 사람에 대한 투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자부하고 있지. 사람에 대한 투자가 나의 근본 생각이었고 이것은 금방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수 십 년 후에나 나타나. 봄에 씨를 뿌리면 가을이 되어서야 곡식을 거두고 나무도 심으면 그래도 십년이상 기다려야 재목으로 쓸 수가 있지. 그나마 위자형 회장은 후덕하고 매일 대종회 사무실에 나가 종친들을 내 몸같이 보살피니 이런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어. 앞으로도 사람에 대한 투자를 게을리 하지 말길 당부하고 싶어.

 

 

4. 장학재단 기금 3억원을 조성하기 위해 종인들을 만나 독려하기 위해 여러 차례 전국을 순회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여러 곳의 종인들을 만나면 대하는 모습이 천차만별하셨을 것입니다. 그 중에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어떤 극적인 경우가 있으셨습니까.

 

그때 장학금 3억을 거두기란 쉽지도 않았고 당시는 큰 돈이었어. 위씨라면 찾아가서 장학회의 취지를 설명하고 헌성을 요청했지. 어디 돈 걷기란 지금이나 옛날이나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지. 한마디로 십시일반이란 말이 머리에 떠날 날이 없었던 시기였어. 우리 씨족은 다른 씨족과 달리 가난해서 그것이 문제였어.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우하사 위재석 관북파 함경도 출신 배우자인 이인숙 여사께서 1억을 헌성한 것을 우리는 모두 본받아야 해. 누가 돈이 많아도 그 큰 돈을 희사하고자 할까? 해방직후 월남해서 식모살이로 푼푼히 모은 돈을 보탠 것은 대단한 결단이었지. 그래서 회주사 마당에 타른 성씨의 공적비가 세워진 것은 보기 드문 일로 시간이 흘러 먼 훗날까지 길이 남을 일로 생각해. 장흥위씨 장학회의 실질적인 공로자는 내가 아니라 이인숙 여사라고 늘 생각하며 고맙게 여기지.

 

 

5. 장학재단 운영과 관련, 회장님이 대종회를 운영하실 때와 지금은 사정이 천양지차로 달라졌습니다. 그때는 정기예금 이자가 많아 그 과실금으로 10여명의 학생에게 적지만 장학금을 지급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이 같은 상황이 앞으로도 개선될 조짐은 없습니다. 재단을 어떻게 하면 더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겠습니까.

 

하기사 요사히 은행이자가 1%나 되는 지 잘 모르겠어. 나는 그나마 부동산이 있어 그나마 나은 편인데. 그렇게 따지자면 장학회 원금 3억의 이자는 겨우 3백만원 선인데, 말이 재단법인 장학회지 너무 규모가 작은 것이 문제야. 이것 가지고는 장학금 혜택이라고 할 수도 없지.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단한가지야. 십시일반으로 자금을 확충하는 일이지. 자라나는 젊은 종친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크게 규모를 확대해야 하는 것이지. 내가 알고 있는 진주 강씨나 해남 윤씨는 부동산에 투자해서 월세를 장학금으로 준다던데. 한미한 우리 문중도 백지장도 맞들면 가볍다는 속담처럼 다시 한번 의기투합하여 기금조성을 해야 하지 않겠어. 나도 이제 나이가 많지만 기회가 오면 내 부동산을 처분하여 아들 하나와 미국과 한국에 사는 딸에게 주고 문중에도 기여하려고 집사람과 대화 중이지. 십시일반이라도 이인숙 여사처럼 규모있는 헌성자가 있어야 하는 데 그것이 바로 문제야. 참고로 내가 재경전남향우회장 재임 시 12억 원을 모았는데 전남출신 기업인들이 적극 참여했기 때문이야. 어떤 기업에서는 3억을 헌성하기도 했지. 물론 나도 헌성했지만 유망기업이나 대기업에서 참여하면 커다란 도움이 되어 일이 잘 진행되는 장점을 지니거든.

 

 

6. 회장님이 일선에서 물러나신지 여러 해가 됐습니다. 이제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당시를 되돌아보면 어떤 것을 어떻게 바꾸면 더 좋은 결과를 거둘 수 있겠다는 사항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은 자꾸 변하는데 그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려면 무엇을 이렇게 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대종회도 어떤 변화가 필요합니까.

 

우리의 목적은 장흥위씨 문중의 단합과 훌륭한 인재육성에 있다고 봐. 어떤 씨족은 말이 씨족이지 날이 갈수록 열악해져서 몇 푼도 않되는 돈 가지고 싸우고 난리야. 그러나 우리 문중은 그렇지는 않아. 의례적인 행사보다 많은 젊은 종친들이 점차 늘어나는 것이 실질적인 가치가 있다고 보여. 이는 위자형 회장이 날마다 출근하여 문중을 챙기고 종친들을 배려하는 겸손한 마음의 발로라고 생각해. 그래서 늘 위자형 회장에게 큰 짐을 새우지 않았나 미안하게 생각하지. 위자형 대종회장을 중심으로 굳게 뭉친다면 못할 일이 무엇이겠어. 난 기관총알이 빗발처럼 쏳아 지는 중공군과의 양구전투에서 8사단 소대장으로 지휘했지. 중공군에 포위되어 아군야포를 모두 소각하고 50미터 산을 넘는데 마치 20년과 같았어.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지만 사실은 부하들의 단합과 도움 그리고 본분을 잊지 않은 동료들의 은덕으로 생각하며 감사하며 살지. 우리 문중도 사람을 아끼고 키우고 서로가 하나 되는 일이 급선무야. 모든 일의 결론은 사람으로 여겨. 적재적소에 인재를 배치하는 작업이 바로 대종회의 본부이요, 사명이지.

 

 

7. 우리 후손들은 회주사를 「위씨의 성지」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회주사 경내는 어떤 성지다운 모습도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 회주사는 6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나 1936년 현 백산재가 들어선 이후의 유적들만 있습니다. 고작 80년의 역사만 있고 520년의 흔적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곳을 성지로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너무 좋은 질문이고 나도 여기에 대해 많은 생각을 가졌지만 이는 돈의 문제로 판단하지. 한마디로 회주사를 확대하는 원칙론과 총론은 일치하나 세부적인 각론에 가면 결국 돈이지. 언젠가 회주사 주차장 앞의 민가를 매입하여 종친들이 거주할 수 있는 팬션을 건립하고 다른 여러 성지화에 대한 구상이 있었지. 그러면 본향 방문자들의 숙식도 해결되고 평상시에는 다른 씨족들이라도 숙박시설로 활용이 충분히 가능하거든. 또한 회주사 성지화는 숭조하는 기본적인 구상이잖아. 하지만 이를 위한 큰 재력가가 나타나야 하는 데. 모두들 영세하니 그것이 문제라고 봐. 이를 타개하는 묘안이 필요하지. 그렇다고 마냥 내버려 둘 수도 없지. 이를 위해 대종회와 도문회가 힘을 모으는 구체적인 방법을 연구해야 된다고 봐.

 

 

 

8. 끝으로 그간의 경험을 토대로 후손들이 일생 동안 간직하면서 금과옥조로 여기며 숭조돈종의 모선정신을 고취시킬 당부말씀을 부탁하겠습니다.

 

 이제 나도 나이 들어 몸도 예전과 같지 않아. 생로병사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것이라 누구나 피해갈 수 없지 않겠어. 내 호 범곡(凡谷)은 내 고향 선배가 지어 주셨는데 순천 황전면은 산과 계곡이 많기로 유명해. 용두마을에는 폭포가 있지. 이 폭포가 생긴 이유를 가만히 생각해 보면 주변에 산이 많아 그 산사이로 계곡이 수 없이 많이 뻗어 있어. 계곡을 따라서 작은 물줄기가 모이고 모여 엄청난 폭포를 만들고 다시 하류에 커다란 저수지가 있어 관광지로, 농업용수로 이용되기도 해. 우리 문중은 수적으로는 미약하고 한미하지만 십시일반으로 서로 조금씩 문중을 위해 시간과 아이디어와 자금을 보탠다면 이것이 바로 문중 중흥의 길이라 생각하지. 한마디로 종친들이 모여서 하나가 되는 것이 최선책으로 여겨. 그리고 차선책으로 유망한 종친들이 나와서 문중에 헌신한다면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 현실이 어렵다고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긍정적인 생각을 지니고 나아가다보면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가끔 희소식도 들리기도 하지. 한 가지 더 보탠다면 생각을 높고 크고 멀리 봐야해. 나는 겨우 장흥위씨 대종회장, 재경황전면향우회장, 재경순천시향우회장, 재경전남향우회장, 간호사협회장, 한국학원총연합회장 등을 지냈지만 지금 생각하면 너무 작은 일에만 몰두 했어. 이를 타개하려고 여러 주변 인물들의 추천으로 순천, 구례에서 국회의원에 나가서 낙선했지만 후회는 없지. 대기만성이라고 했잖아. 앞으로 우리 문중을 이끌 지도자는 마음이 태평양과 같이 넓고 호탕했으면 좋겠어. 그래야만 큰 나무처럼 많은 종친들에게 과실도 제공하고 그늘도 줄 수 있지. 큰 생각은 큰 사람을 만들 듯이 우리 장흥위씨 문중도 이와 같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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