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聽溪 위덕의 선생의 아내 추모작, 상왕부(傷往賦)」
碧泉 위윤기(35世, 장학회 이사)
「 목차
1. 들어가는 말
2. 작품의 배경
1) 文林 장흥
2) 文家 위씨
3. 작품분석
1) 임진왜란과 喪配
2) 글의 형태와 특징
3) 단어의 선택과 집중
4. 평가
1) 圓山 위정철
2) '유몽득(劉夢得)의 상왕부' 비교
5. 나가는 말
별첨 속상왕부병서(續傷往賦並序) 해설 및 전문 」
1. 들어가는 말
우리네 삶 속에는 시공을 넘어 희노애락의 숨은 이야기가 늘 살아 숨 쉬고 있다. 이 글에서 청계선생은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을 賦라는 글의 형식을 빌려 오늘까지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또한 남여사이의 사적인 감정을 초월해 시대적 아픔으로 승화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문화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유기체론이 설득력을 지닌다. 먼저 이 작품이 나오게 된 배경과 애절한 로맨스를 음미하며 작품을 분석했다. 또한 그 속에 숨겨진 의미를 평가하고 조명했다.
2. 작품의 배경
씨줄과 날줄은 과거와 현재를 엮어가며 미래를 향해 나아간다. 씨족을 시간적 씨줄이라면 장흥이라는 지역적 공간은 날줄로 보고 이 작품의 배경으로 삼았다. 즉, 바로 문림 장흥과 文의 전통을 자랑하는 씨족이다. 장흥이라는 지역성과 위씨라는 성씨를 기초자료로 삼아 청계선생을 조명해봐야 비로소 그 진면목을 볼 수 있다. 지역과 성씨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유기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림 장흥과 문가 위씨 또한 불가분의 관계이다.
1) 文林 장흥
청계선생은 1573년 사마시에 합격한 문장가로 지금까지 전해오는 한시나 아내 추모작품인 ‘상왕부’를 살펴보면 문학에 대한 자질이 탁월해 묘사와 서술 양쪽 모두 뛰어났다. 청계선생이 문학적으로 천재적 자질을 연마한 배경에 대해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간과 공간을 기준삼아 청계선생의 당시 상황을 주시하자는 것이다. 지역적으로 장흥의 文林에 대한 흐름이 어떠했느냐와 시기적으로는 씨족의 文의 전통과 어떤 견인성을 지니느냐이다.
우리가 흔히들 혈연, 지연, 학연이란 말을 자주한다. 공간이란 지연을 뜻하고 사람이란 사회적 동물이기에 공간을 떠나 살 수는 없다. 사람은 공간과 상호 유기적으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의미이다. 장흥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는 한마디로 문화를 꽃피울 장소로 적합했다는 것이다. 산과 물과 그 가운데 사람이 있는데 시인묵객들은 정자를 만들어 계산풍류를 읊는 것을 좋아했다. 마치 문의 발상지처럼 예양강과 천관산을 중심으로 문풍(文風)은 번져만 갔다.
먼저 장흥이 文林의 단초의 제시한 인물은 바로 牧隱 이색이다. 조선시대 백광홍이 1549년 과거에 급제한 이후 많은 선비들이 출사했다. 기봉이 문장으로 떨친 배경으로 유배인의 영향이 컸다. 기봉은 신잠(申潛)의 문하생으로 입문 후 이항(李恒)에게 수학했다. 장흥으로 유배된 선비들을 통해 장흥에서 태어난 자제들은 수도 한양에서 배우고 익힌 선진학문을 자연스럽게 배우게 되었다. 그리하여 장흥은 남도를 대표하는 문림의 고장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특히 백광홍(1522-1556)의 관서별곡을 시작으로 장흥은 가사문학의 텃밭이라 불린다. 위세직(1655-1721)의 금당별곡에서 남도의 아름다움을 읊었고, 위세옥(1689-1766)의 임계탄에서 백성들의 고통을 대변했다. 노명선(1707-1775)의 천풍가는 천관산의 아름다움을 읊은 기행가사이다. 위백규(1727-1798)의 자회가, 권학가, 합강정선유가가 있다. 위백규의 작품은 실학자 겸 문학가로서 그 가치가 매우 뛰어나다는 평가다. 특히 국문이나 국한문 혼용체 사용은 재평가가 절실하다.
장흥이 문림의 고장이라는 사실은 지금도 여실히 증명된다. 송기숙, 이청준, 한승원은 장흥을 대표하는 3인방이다. ‘송기숙의 삶과 문학’의 저자 조은숙은 「삶과 문학을 통해 당대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고 개선하려는 일관된 자세를 유지했다. 개인적으로는 강직하고 양심적 지식인이었으며, 작가로서는 민중의 구체적인 모습을 작품으로 승화시켰던 그의 삶과 문학적 실천은 문학의 사회적 책임을 환기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정의한다.
2) 文家 위씨
항간에 문의 가문이니 무의 집안이니 하는 말들이 많다. 선대 어르신들이 문관이 주류냐 아니면 무관이 대세냐를 기준삼아 나온 말이다. 청계선생은 장흥위씨 21세로 21개 종파 가운데 청계공파의 파조로 칭송받고 있다. 더구나 청계선생의 아내 추모작품 ‘상왕부’를 보는 이마다 찬사를 보낸다. 이는 문학의 형식을 잘 지키면서 예술성이 빼어난 名文이기 때문이다. 예술이란 노력한다고 되는 것만은 아니다. 유전을 통해 전해지는 예술성을 어떻게 연마하느냐의 문제이다.
文家 위씨의 선대에는 널리 알려진 문장가가가 많았다. 고려충신 충렬공(휘 계정)은 한시와 국가 간 외교문서인 ‘賀天安節表’를 남겼고, 원감국사(휘 원개)는 원나라 황제에게 보낸 請田表, 上大元皇帝謝賜復田表와 승려의 고달픔과 백성의 아픔을 시로 노래했다. 습독공(휘 유형)은 秋江 남효온과 수창하며 지냈다. 당대에도 문장가는 많았다. 특히 임진왜란 때 참전을 독려해 국난을 극복하는데 큰 공을 세운 괴봉공(휘 대용)은 고향 장흥에서 과거 동기생들과 어울려 시를 지었다.
씨족 내 文의 영향은 가장 가까운 형제관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아버지인 성균관 진사공 곤(鯤, 1515~1583)의 아들은 판사공 덕홍(德弘, 1537~?) 군자정, 청계공 덕의(德毅, 1540-1613) 병조참의, 운암공 덕관(德寬, 1547~1628) 부호군, 판서공 덕화(德和, 1551~1598), 안항공 덕후(德厚, 1556~1615) 제용감판관이다. 16세기 당시 국가와 사회적으로 상당한 위치에서 활동한 점을 감안하면 19살 터울의 형제들로서 학문의 영향이 절대적이었다.
文風을 후세에 전했다. 청계선생은 나이 들어 고향 장흥으로 돌아와 청금공(휘 정훈, 1578~1652), 반계공(휘 정명, 1589~1640), 병조참판공(휘 정철, 1583~1657) 등을 지도했다. 특히 병조참판공은‘瀋陽往還日記’를 남기었다. 그래서인지 현대에도 청계공파 출신 예술인이 타 종파에 비해 유독 많다. 위선환 시인을 비롯해 위홍환, 위성유, 서예가로 德雲(황량)丈, 화가로 위용환, 위명온(女), 위진수(女), 한학자로 위창복 등 셀 수도 없이 무수히 많다.
‘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에서 문의 전통인 씨족의 지성사를 집대성했다. 씨족이 천년동안 흥망성쇠를 거듭하면서 총 66명의 씨족 내 걸출한 문장가를 소개하고 있다. 이곳에는 정치가의 외교문서, 선비의 상소문, 종교가의 가송 등 그 넓이와 높이는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무엇보다 청계선생의 시와 산문의 중간형식을 취한 아내 추모작‘상왕부’는 빼어난 감성으로 예술의 극치를 이룬 걸작으로 평가된다. 청계선생은 가교로서 16세기를 대표하는 문학가이다.
위덕의 선생은 아호인 청계(聽溪)와 동호(桐湖)를 자주 사용하고 다른 사람들이 부르는 것을 즐겨했다. 두 아호의 뜻에는 자연친화적인 철학, 즉 도교적인 향취가 숨겨져 있다. '시냇물 소리를 듣는다,와 '호수가에 심겨진 오동나무' 라는 의미이다. 아무래도 예술적인 감성을 선천적으로 물려 받았고 그 자질을 부단히 절차탁마한 청계선생의 입장에서 자연은 스승에 견줄 높은 경지의 배움터였다. 특히 빼어난 풍광을 지닌 씨족의 터인 천관산과 예양강은 창작심을 자극했을 것이다.
3. 작품분석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비참했던 임진왜란 7년이 작품의 동기이다. 국가 간의 전쟁은 백성들의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해 그 전쟁 속에서 살아가는 백성들의 세세한 생활상과 운명의 적나라한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또한 작품을 기계적으로 분석함에 있어 단어를 모아 문장(文章)으로, 3~10여 개의 문장이 모여 9개의 문단(文段)을 이루었다. 청계선생은 문단이란 긴 글을 쓸 때 내용에 따라 적당하게 잘라 토막 친 짧은 이야기를 글에 엄격히 적용했다.
1) 임진왜란과 喪配
임진왜란은 1592~1598년 7년 전쟁을 통칭해서 사용한다. 그러나 이를 구분해서 1952년 임진년에 시작된 1차 전쟁을 임진왜란이라 하고 기간은 1592년부터 1596년까지 5년간이다. 2차 전쟁은 1597년 정유년에 시작되었고 다시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고 해서 후세학자들은 정유재란으로 명명했다. 기간은 1597~1598년 2년간이다. 여기서 청계선생과 관련해 주목해야 할 점은 1차 전쟁과 2차 전쟁에서 보여준 청계선생의 활동상이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이다.
53세 되던 해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해 1차 전쟁은 58세 되던 해인 1597년 끝난다. 청계선생은 1차 전쟁 때는 세달 간이나 걸어서 선조임금이 피해있던 함경북도 압록강 인근에 소재한 의주까지 가서 임금을 보필했다. 또한 임진왜란을 맞아 국가의 핵심보직에 있던 동생 덕화(德和)와도 만났다. 선조임금은 별좌라는 벼슬과 형조좌랑 및 영남 운향관에 임명되었다. 연이어서 벼슬을 제수 받은 것은 그만큼 청계선생이 임진왜란 중 구가에 끼친 공로가 컸다는 뜻이다.
특히 영남 운향관은 경상북도 선산에 있었다. 이곳에서 재임 중 명나라 장군 여응종(呂應鍾)과 정경달(丁景達) 목사, 김복선(金復巽) 별좌와 함께 운향관이었던 청계선생이 지은 7언 한시는 오늘날에도 전하고 있다. ‘一樽難與消餘恨 更向東邊怒欲狂(일준난여소여한 갱향동변노욕광)’이다. 그 뜻은 바로 ‘한 동이 술로 남은 한을 녹이기가 어려운데 다시 동변을 향하니 노여움이 미칠 것 같네’이다. 경상북도 선산에서 일본군에 대한 감정을 토로한 시다.
2차 전쟁인 정유재란은 1597년 1월 15일 발발한다. 5년 전만해도 건강했던 아내가 병을 얻게 되었다. 갑작스런 일본군의 침공에 어떻게든 피난을 가야할 형편이었다. 앞서 청계선생은 1540년 태어나 1573년 사마시에 합격한다. 그해 진원朴氏 부인과 혼례를 올린다. 첫째 부인 안동金氏와 사별하여 다소 늦어진 청계선생 나이 34세였고 박씨부인은 18세였다. 어린 나이의 박씨부인은 친정에서 잘 교육받은 현숙한 여인으로 상왕부에 자세히 실려져있다.
박씨부인은 청계선생과 24년간 해로했는데 말년에 몸이 허약해 병치레가 잦았다. 부인 나이 42세 되던 해 1597.08.16. 정유재란으로 인해 청계공은 배를 빌려 병든 아내와 함께 바다로 피난을 가다가 영광에서 아내가 타계하자 인근에 시신을 묻게 된다. 1차 전쟁 때와는 현저히 다른 청계선생의 모습이다. 그만큼 1차 전쟁에 비해 2차 전쟁은 미리 대비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추측된다. 아내의 병은 치료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전쟁 중이라 병의 차도는 더욱 더 악화되었다.
1차 전쟁에서는 나라를 걱정하고 임금에게 충성했으나 2차 전쟁에서는 병든 아내와 함께 피난을 떠나는 애처로운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나라와 가정은 둘이 아닌 공동운명체요, 나라와 가정은 불가분의 관계로 가정이 확장되어 국가로 나아간다지만 어떻든 간에 1차 전쟁 때와는 판이하다. 전쟁 후 선무 호종원종3등훈(扈從原從三等勳) 이등(二等)에 녹훈되었고 진원현감으로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별세 후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2) 글의 형식과 특징
먼저 이 글은 완벽하게 부(賦)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상왕(傷往)은 상서(傷逝)와 동일한 말이다. 여기에다 부를 붙여 상왕부나 상서부라 부른다. 한마디로 죽은 아내를 추모하는 글이다. 문학의 한 형태인 소(騷)가 주관적이고 서정적이라면 부는 묘사와 해설에 가까워 운이나 여러 형식에서 제약이 덜해 자유로운 형태이다. 이글의 형태인 부는 산문과 시의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다. 부는 신라시대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 때도 겨우 명맥만 유지하는 글의 형식이다.
첫째로, 이 글은 구조적으로 기승전결의 완벽한 문단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1개 문단으로 구성된 서(序)에서 글의 쓰게 된 동기를 간략하게나마 밝히고 있다. 이어 ① 기(2개 문단) : 상배의 슬픔, ② 승(3개 문단) : 신혼의 생활과 아내의 성품, ③ 전(2개 문단) : 병치레와 타계 상황, ④ 결(1개 문단) : 재회의 희망으로 총 9개의 문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부의 특징인 균형 잡힌 대구가 엿보인다. 청계선생의 문학적 소양이 잘 드러나고 있으며 문학적인 천재성이 돋보인다.
이 글은 「상배의 슬픔->사랑의 기쁨->투병과 타계->재회의 희망」으로 전개된다. 상배의 슬픔은 사랑의 기쁨으로 반전되고, 사랑의 기쁨은 투병과 타계로 다시 반전된다. 투병과 타계는 재회의 소망으로 또다시 반전된다. 결국 마지막 절정은 재회의 희망이라는 키워드를 부여해 반전에 반전을 거듭시킨다. 핵심은 뒷날 황천에서 아내와 다시 만날 기약을 그리며 글을 마무리하는데 있다. 청계선생이 노년에 이르러 과거를 회상하며 삶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쓰인 글이기 때문이다.
둘째로, 글의 특징은 긴 행과 중간에 휴지기가 있는 것이다. 긴 행은 시보다는 산문에 가깝다는 것은 부의 일반적인 특징이다. 그러나 중간 중간에 휴지기가 있는 것은 특이하다. 1개의 문단으로 이루어진 서를 포함해 2, 3, 2, 1로 이어지는 기승전결의 8문단 끝자락에 늘 휴지기를 갖는다. 휴지기는 반전의 의미도 있지만 글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쉬어가라는 여유이기도 하다. 달리 말하면 수박을 통째로 먹지 말고 잘게 잘라 먹으라는 배려이다.
셋째로, 글의 특징은 통일성이다. 사랑의 기쁨과 이별의 슬픔이 핵심주제이다. 이 주제를 뒷받침하기위해 완벽에 가까운 통일성이 엿보인다. 전쟁을 치르듯 글을 이끌어 가고 있다. 병사라는 다양한 단어들이 문장이라는 상위 조직인 분대에 줄서는 모습이다. 문장은 또다시 소대라는 문단을 향해 진군하고 있다. 또한 서(序)를 포함 9개의 문단은 중대를 이루고 있다. 병사, 분대, 소대, 중대, 즉 단어, 문장, 문단, 장(章)이 공동의 목표를 향해 작전을 벌이고 있는 형국이다.
3) 단어의 선택과 집중
기(起)는 상배의 슬픔을 표현하는 글이다. 여기서 주제단어는 역시 슬픔이다. 이 슬픔을 뒷받침하는 보조단어는 주로 「우는, 버린, 눈물, 원망, 탄식, 홀로, 恨만」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부수주제는 그리움이다. 그리움을 받쳐주는 부수단어는 「지워져, 잊어져, 생각, 달려가, 지난, 찾으려, 어루만지네, 꿈속」으로 나타난다. 두 번째 부수주제는 고통으로「끊어져, 드물고, 불고, 시들었네, 저문, 서러워, 참통」을 나열해 분위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승(承)은 세 단락으로 핵심 포인트는 신혼생활과 아내의 성품이다. 이 글 중에서 가장 밝고 아름다운 부분이다. 먼저 신혼에 대해서는 사랑을 표현하는 단어로「새롭게, 그윽하네, 넘침이여, 화락」을 나열하고, 보조단어로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화려한, 밝음이여, 가득함이여」로 장식한다. 아내의 행실은「이지러짐이 없음이여, 기쁨, 온화, 공손, 유순, 아름다웠네, 공손」과 성품은 「갖추어졌네, 자혜, 부끄럼, 지혜, 숙자, 정성, 공경」으로 열과 오를 정확히 일치시키고 있다.
전(轉)은 병치레와 타계상황으로 두 단락에 걸쳐 소개하고 있다. 병치레는 「약질, 사풍, 질병, 눈물, 약으로」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다. 더 나아가 아내의 죽음에 대해 시대적인 아픔으로 승화시키는 작업의 공간인 타계 부분은「꺾임이여, 적의 칼날, 흉음, 찢어지고, 메임이여」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개인의 사적인 감정과 시대적인 상황의 아픔이 서로 교차되어 융합되는 부분이다. 개인과 시대의 아픔을 동일시하는 불가분의 상황으로 묘사하고 있다.
결(結)은 재회의 희망이다. 희망은 과거의 정을 그리는 회고와 다시 만날 날을 그리는 희망으로 나누어져 나타난다. 먼저 정은 사랑의 다른 표현으로 사용된다. 「사무친, 억제하지, 외로운, 한탄함이여, 망망하고, 침침, 홀몸이여, 보내리오」라는 단어는 희망을 구성하는 보조단어들과 대구를 이루어 묘한 느낌이 지배적이다. 또한 희망은 「뒷날, 황천, 같이함이여, 남은 정성, 맺으리다」라는 단어로 청계선생 자신이 늙어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생애를 정리하는 대목이다.
청계선생은 단어를 선택하고 집중시키는 大家였다. 문단은 몇몇 문장을 거느리고 단락을 이룬다. 문장은 글의 최소단위인 단어로 구성되어 있다. 단어의 선택과 집중은 글의 핵심이다. 이 글의 기승전결을 기준으로 단락마다 특징 있는 단어를 샘플로 추출해 분석했다. 아내사랑이라는 주제를 위해 단어를 선택했고 이 단어들로 인해 주제를 더욱 빛나게 하고 있다. 청계선생은 풍성한 문학적 소양을 지녔고 자신의 감정을 부라는 형식을 통해 적절히 표현했다.
4. 작품의 평가
1) 圓山 위정철 존재기념사업회 이사
圓山 위정철 존재기념사업회 이사는‘장흥위씨천년세고선집’에서「관산에서 의주까지 90일을 걸어서 왕을 알현한 청계공(聽溪公)은 명(明)나라 여(呂)장수와의 수창하고, 피난길에 부인의 타계를 토로하는 비통한 글을 남겼다. '속상왕부병서'에 대해 ‘한편의 장편 서정시다. 현대적 시보다 더욱 애틋하고 절절한 사랑의 언어들이 독자를 놀라게 한다. 그 탁월한 서정적인 문장과 사랑의 표현력은 저자의 문학적 소양을 짐작하게 한다」고 극찬하고 있다.
2)'유몽득(劉夢得)의 상왕부'비교
청계선생은 이 글의 서두에서 유몽득(劉夢得)의 상왕부를 보고 내 마음처럼 느껴져 그 사(詞)에 차운(次韻)한다고 밝히고 있다. 두 작품 모두 한자로 되어있고 글의 양은 9문단인 청계선생에 비해 유몽득의 작품은 6문단으로 다소 짧은 편이다. 청계선생의 작품 중 기와 전은 슬픔이요, 승에서 아내에 대한 추모의 성격으로 신혼과 아내의 성품을 다소 길게 기록했다는 특징이다. 유몽득은 유우석(劉禹錫, 772~842년)으로 중국 당나라 때의 문신이요,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5. 나가는 말
두 번씩이나 아내를 사별한 청계선생의 마음을 헤아리려 이 글을 기계적, 논리적으로 분석에 치중했다. 탁월한 단어선택과 집중은 작품을 명문으로 도약시켰다. 상처의 아픔을 잊으려 아내의 체취(體臭)를 찾으려 손 떼 묻은 그릇과 옷가지를 어루만지는 청계공의 모습이 처량하기만 하다. 하지만 청계선생의 아내를 향한 사랑의 기쁨과 세레나데는 아직도 우리들 심장에 용솟음치고 있다. 누구나 이런 에피소드가 있지만 그것을 글로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 별첨 : 속상왕부병서 (續傷往賦並序)
서 : 글의 쓰게 된 동기
『내가 丁酉年(1597년) 8월 16일 병을 앓은 아내(박씨)와 함께 배를 타고 바다에 있다가 이틀 뒤인 18일 배에서 아내가 숨을 거뒀으니 최상(摧傷)함이 어떠했겠는가. 운상할 형편이 되지 못해 영광경상(靈光境上)의 풀숲에 시신을 묻고 슬픈 마음을 달랠 길 없어
유몽득(劉夢得)의 상왕부를 보고 내 마음처럼 느껴져 그 사(詞)에 차운(次韻)한다』
『余於丁酉秋八月迨旣望載病妻朴氏淨海越十八喪于舟上摧傷奈何勢難運傷草瘞於靈光境上傷懷之極見劉夢得傷往賦信乎先獲我心聊抒悲傷之意續而次韻其詞曰』
① 기 : 상처의 슬픔
아 슬프도다. 내가 흐느껴 우는 것이 누구를 슬퍼함인가. 그 슬픔은 이 사람이 나를 버린 슬픔이네. 인정이 점점 지워져 조금씩 잊어져가는 데 어찌하여 해를 넘겨도 더욱 슬퍼지는가. 방혼(芳魂)을 불러본들 미치지 못함이여! 눈물만이 하염없이 흘러 그칠 줄 모르네. 형해(形骸)를 생각함이여 어느 곳에 있는가. 마음은 하루에도 구천(九泉)으로 달려가나 지경(地境)이 끊어져 인적(人跡)은 드물고 바람은 슬픈 듯이 불고 풀마저 시들었네.
따라가고자 하나 갈 수 가없어 푸른 하늘(蒼天)을 원망하며 탄식하네. 흙덩이처럼 홀로 뫼 가운데 서서 지난 일을 생각하며 저문 햇빛을 서러워하네. 그의 체취(體臭)를 찾으려 손 떼 묻은 그릇과 옷가지를 어루만지네. 유허(遺墟)를 찾아 헤맸으나 기장만 무성하여 이슬도 햇볕에 마르지 않았구나. 어제 밤 꿈속의 형영(形影)이여 단지 한(恨)만 더하고 슬픔만 더하구나. 세상에 짝 잃은 이가 많으련만 참통(慘痛)함이 어찌 나와 같으리요.
「噫歟欷吾誰傷兮傷斯人之我遺人情漸刷而少弛兮夫何越歲而愈悲招芳魂兮靡及淚潛兮無時歇疑形骸兮在何處祚一日而九馳境絶兮人稀風悲兮草衰欲往從兮末由籲蒼天而怨咨塊獨處兮山之中弔前迹於殘暉辱手澤於遺器兮撫芳塵於餘衣立遺墟兮求寢處黍離離兮露未晞昨宵夢裏之形影兮只以添恨而增悲人世常多喪匹兮慘痛誰似我者追惟新聘之日兮往在癸酉臘月旬下紛旣結縭以佩訓兮只知無違乎夫帷下」
② 승 : 사랑의 기쁨(신혼생활과 아내의 성품)
신빙(新聘)한 날을 더듬어보니 지난 계유(癸酉 :1573년)년 섣달 하순이었네. 분잡(紛雜)함은 끝나고 향주머니 속에 훈계(訓戒)담아 허리에 참은 단지 남편의 뜻 거스르지 않은 것만 알았네. 장막 아래 새롭게 단장함이여 비단 이불과 화려한 저고리였네. 천도(天桃)의 봄이 밝음이여 높은 가지 매화향기 그윽하네. 신방(新房)에 기쁨 넘침이여 부부의 정(情) 화락(和樂)하였네. 술이 맑은 술동이에 가득함이여 빛이 물결처럼 떠서 움직이네.
방파즉(旁派則) 적(籍)이 초홀(貂忽)에 이르렀네. 다행이 그대가 주어 함께 감춤이여 진실로 하늘과 같으며 신(神)에 비유하리라. 그 행실을 보면 이지러짐이 없음이여 그 재주를 말하여도 또한 갖추어졌네. 시집온 당일이여 일실이 기쁨이 넘치었네. 자혜가 족히 사람에게 미침이여 감동하지 아니한 자 그 누구인가. 얼굴빛 온화하고 말을 공손하나 유약하지 아니했네.
아름다운 태도 유한(幽閒)함이여 유순한 거동 아름다웠네. 공손하게 나를 섬기고 지혜롭고 부끄럼이 많았으며 사람을 대할 때는 어리석은 듯하였네. 집안을 다스림이여 가문에서 숙자(淑姿)라 칭찬하였네. 6년 동안 제사를 받음에 정성과 공경을 다하였네. 분가해 살림한지 3년이여 매양 근고(勤苦)하였네. 부질없이 백세동실하자고 다짐함이여 어찌 사람의 일 헤아리랴.
「新粧兮錦衾華襦天桃春曉兮標梅香徵歡溢新閨兮鼓琴瑟之陶陶酒滿淸樽兮動浮光之漪漪旁派則光生組綬兮先系則籍連貂笏幸與子而偕臧兮信天同而神比顧其行則靡虧兮語其才則亦具于歸當日兮一室懽如慈惠足以及人兮不致感者伊誰色溫而能厲兮語恭而非飴嘉度幽閒兮柔儀葳㽔恭事我兮多慧差對人而如癡宜家宜室兮門稱淑姿奠蘋六載兮幾盡誠敬之歸疑營家三歲兮每見勤苦之容謾擬百歲同室兮豈料人事」
③ 전 : 병치레와 타계상황
속절없이 보낸 42년의 춘광(春光) 쉽게 꺾임이여 약질(弱質)에다 사풍(邪風)까지 걸리었네. 5개월 동안 밖에 있어 삼성(參星)과 상성(商星)처럼 멀리 떨어짐이여 한 몸인데도 노내기가 공공이처럼 하지 못하였네. 온갖 질병을 앓으면서도 다정함이여 손수 일폭을 만들어 눈물 섞여 봉해 두었네. 내가 갑작이 창문을 열고 손을 잡음이여 먼저 어디서 오느냐고 물었네.
눈물 머금고 서로 바라봄에 두 마음 하나같이 몽몽(夢夢)한데 이르렀네. 약으로 다스린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또한 어찌 적의 칼날을 만나는가. 한 배를 타고 바다에 뜸이여 물도 거의 거슬러 오고 산도 거의 다 하였네. 비록 일분의 살아남을 희망으로 구원중(舊園中)에서 같이 즐기기를 바랐었네. 천의도 어찌 그리 은혜롭지 못함이여 문득 파상(波上)에서 흉음을 만났네. 오장이 찢어지고 목이 메임이여. 슬픈 눈물 음음(淫淫)함을 견디지 못하겠네.
「擲空四十二春光易摧兮弱質遽罹於邪風還慮巳病之染我兮每勉我而遠通五月在外爲參商兮一體未足爲蚷蛩百端病裏之情兮手裁一幅和淚封忽余自牖而執手兮問先及兮來何從共含淚而相對兮兩心皆至於蒙蒙曾藥治未畿兮又何賊鋒之迫逢載一舟以浮海兮水幾遡兮山幾窮庶將一分之向蘇兮冀同歡舊園中何天意之未惠兮奄遭之波上凶音五內摧裂而哽胭兮不堪悲涕之淫淫」
④ 결 : 재회의 희망
사무친 정을 억제하지 못함이여. 어찌 자상(自傷)하는 이 잠(箴)을 알았으리요. 아! 그대와 같이 말하였을 때 어찌 오늘이 있을 줄 알았으랴. 다른 곳 외로운 무덤이여. 천길 단애로다. 이봉(移封)치 못함을 한탄함이여. 땅도 망망하고 하늘도 침침(沉沉)하네. 슬프고 슬프도다. 백수의 홀몸이여 어떻게 세월을 보내리오. 뒷날 황천에 가서 같이함이여. 다시 이 세상의 남은 정성 맺으리다. 장자가 토해낸 피에 물들음이여. 고편(古篇)에 화답하여 읊으노라.
「情不能以自制兮豈知自傷之是葴鳴乎與子成說兮豈知有今異地孤瑩兮斷岸千尋恨未及期移封兮地茫茫兮天沉沉哀哀白首之單形兮豈獨留隙上光陰異日泉裏之則同兮更結此世之餘忱染莊生之吐血兮和古篇而悲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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