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노경(경주人 1766~1837) : 자는 가일(可一), 호는 유당(酉堂) 영의정 김흥경(金興慶)의 증손,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의 손, 형조판서 김이주(金頤柱)의 자이며, 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생부이다. 1801년(순조 1) 선공부정(繕工副正)을 지내고, 1805년 현감으로서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 승지를 거쳤다. 1809년 동지겸 사은부사로 북경에 다녀왔다. 이후 이조참판 및 경상도와 평안도의 관찰사를 지냈다. 1819년 예조판서를 지낸 후 이조·공조·형조·병조판서를 지냈다. 이후 1822년 동지사로 북경에 다녀온 후 대사헌을 거쳐 1827년 판의금부사·광주부유수·지돈령부사 등의 요직을 거치고 익종이 대리청정을 할 때 김 로(金 鏴)·홍기섭(洪起燮) 등과 같이 중직에 있으면서 전권을 행사하고 이조원(李肇源)의 옥사를 밝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1830년 지돈령부사 재직 중 삼사와 의정부의 탄핵을 받아 강진현의 고금도(古今島)에 유배 되었다가 1833년 풀려나 판의금부사를 지낸 뒤 1837년에 졸하였다. 1857년에 시원임대신(時原任大臣)의 연차(聯箚)로 신원되고 관직이 복구되었다. 글씨를 잘 써 아들인 김정희, 명희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신라경순왕전비> <신의왕후탄강구묘비> 등의 글씨가 전한다.
1.웅천현감공 위정렬의 관직에 대한 고증자료
- 公은 임란 후 24세 때 1603년(선조 36) 완도 고금도에서 실시된 무과에서 종제 정철(廷喆)과 합격하였다.
역대 현감 인명에서(6줄 처음) "위정렬 거장흥(魏廷烈 居長興)"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웅천현(熊川縣)은 지금의 경남 창원시진해구 웅천동이다.(진해문화원 사무국장 정남식)
2.묘갈명 중요 내용
장흥위문 내 묘갈명을 포함한 대부분의 비문 서두에 시조공(鏡), 충렬공(5세 繼廷), 합문판사공(14세 种)과 해당 파조(派祖), 고조(高祖), 증조(曾祖), 조(祖), 부(父)를 간략히 기술하고 비문의 주인 행적을 기술한다. 다음 子와 孫을 간략히 기술함은 찬(撰)의 통상적인 순이다. 웅천현감공 묘갈명에서도 이 같은 순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말미에 ‘公이 몰(歿)한 뒤 100여년에 현손 伯珪가 학행으로 조정에 알려져 우리 寧考(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린 임금의 뜻)인 正祖大王이 특별히 소견하고 포상하여 玉果縣監에 특별히 임명하니~’ 라고 기술하고 있다. 웅천현감공은 존재(伯珪)선생의 고조부가 된다. 다른 비문과 달리 특별하게 현손의 행적을 기술하고 있다.
어려서 公의 3형제는 伯父 판사공(德弘)과 仲父 청계(德毅)선생의 가르침을 받았다.
1624년 이괄의 난을 당하여 형제인 청금(聽禽) 정훈, 아우 반계(磻溪) 정명은 義兵을 모집하고 북상하여 청주까지 출전을 기술하고,
1627년 정묘호란 때 형 청금(聽禽) 정훈, 아우 반계(磻溪) 정명과 종형 정망(廷望), 정헌(廷獻)은 의병과 군량을 모아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 사계(沙溪) 김장생 격문에 응해 국난에 참여하고 난리가 수습된 후 귀향하였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 청금(聽禽) 정훈, 아우 반계(磻溪) 정명은 우산(牛山) 안방준의 격문에 응해 출전 등 국난 극복 참여를 기술하였다.
묘갈명을 세운지 184년이 지나 글자의 식별이 어려워 현감공의 子 동식(東寔), 동헌(東憲)의 인명은 확인되지 않고, 孫 삼족당공(世寶), 춘담공(世璘), 세영(世瑩)공, 세감(世瑊)공의 인명은 확인되었으나 지장록 묘갈명 원문과 국역문에는 子와 孫의 인명이 생략되었다.
묘갈명에 崇禎紀元後四 乙未 淸明日 立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는 명(明)의 연호 숭정기원(1628년), 뒤의 네 번째 을미, 즉 1835년(乙未) 청명일(4월 5일)에 세웠다.
3.발견경위
필자는 2016년 10월 15일 장천재 시제 때 현감공 묘갈명 사진을 채증했었다. 1999년 기묘대동보 지장록 p674 웅천현감공 묘갈명 원문 및 국역문 내용과 채증 사진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현손 존재선생의 행적을 기술한 사실을 확인하고 찬(撰)한 인물, 묘갈명 근수(謹竪) 시기 등에 의문이 생겼다. 비문을 지은 김노경 선생은 추사(秋史) 김정희 선생(충남 예산 태생)의 생부로 생은 1766년, 졸은 1837년이다. 묘갈명을 세운 사람은 기록되어 있지 않아 알 수 없었고, 말미에 존재선생을 기술하고 있어 선생의 아들 송오공(道立, 1748~1808), 양천공(道及, 1754 ~1821) 때 세웠을거라 추정하였으나, 두분은 묘갈명을 세우기 前에 별세하였음을 족보에서 확인하였다.
존재고택에서 거주하고 있는 웅천현감공의 12대 종손 위재현은 9대조 영이재공(文德)부터 선친 수암(守菴) 계환까지 9대간, 고택에서 소장해온 유품 1,000여점을 2018년 12월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에 위치한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에 연구 목적으로 기탁하였다. 이 유품중에 1830년~1833년 김노경 선생이 강진 고금도 유배 때 선생과 아들 김명희(1788~1856)가 존재선생의 손자 위영억(1788~1841)과 교류한 서간(書簡 편지)이 확인되었다. 이 시기에 6대조 현감공의 묘갈명 찬(撰)을 청(請)했을거라 사료된다.
4.서간 현황 및 내용
김노경 선생 서간은 1832년 3건, 1836년 서간 1건, 김명희 선생 서간은 1832년 1건 등 총 5건이 현존한다. 이중, 김노경 서간 2건과 김명희 서간 1건을 소개한다.
1)1832년(壬辰 순조 32) 7월 12일 귀양살이 중인 김노경(金魯敬)이 위영의(魏榮嶷)에게 보낸 편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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