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백규 선생의 시장경제주체론」
碧泉 위윤기(35世, 장학회이사)
「목차
1. 들어가는 말
2. 경제주체의 역할
1) 국가의 도량형 감독
2) 국가의 생필품 물가조정
3) 상인의 세금납부
4) 백성의 질서유지
3. 경제주체론의 특징
1) 성리학적 해석
2) 계획경제와의 경계
3) 존재우화(存齋寓話), 기러기와 까마귀
4. 나가는 말 」
1. 들어가는 말
조선후기 실학자로서 존재선생의 시장에 대한 개념은 어떠했을까? 또한 추구하는 시장의 이상적인 모습은 무엇일까? 몇몇 물음을 통해 존재선생의 견해를 살펴보자. 수도 한양을 중심으로 경제가 집중되었던 조선 초기에 비해 난전의 발달로 점차 시장은 지방까지 확대되는 시기였다. 시장경제는 재화의 유통과정에서의 다양한 위험이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존재집에 수록된 글을 중심으로 세 경제주체의 역할과 그 특징을 살펴보자.
2. 경제주체의 역할
흔히들 시장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자연스럽게 움직인다는 것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다양한 위험이 나타나 시장은 왜곡되어 기존 정책을 수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이다. 제한적 시장개입으로 불리는 현대의 계획경제이론이다. 시장에는 예측 가능한 위험과 예측이 어려운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다. 바로 존재선생은 전자인 예측 가능한 체계적 위험을 미리 제거하거나 예방하여 안정적인 시장을 이상적인 형태로 추구했다.
존재선생은 시장을 마치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로 보았다. 성장할 수도 있고, 수시로 발생하는 위험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다면 소멸을 거듭할 수도 있다. 유기체로서 제대로 유지하기위해서는 시장의 세 핵심 주체세력인 국가와 백성, 상인의 손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고 보았다. 국가는 국가대로, 백성은 백성대로, 상인은 상인대로 위험에 대한 역할분담에 충실할 때에야 이상적인 시장으로서의 기능이 제대로 이루어져 소기의 목적이 비로소 달성된다고 역설했다.
1) 국가의 도량형 감독
‘각 면의 부정(副正)이 그 정령(政令)을 관장하며, 네 계절의 각 첫 달에 말, 되, 저울, 자를 바로잡는다. 각 서원 문밖에 돌을 세워 말과 되의 깊이는 몇 치이고 직경은 몇 치이며, 저울은 몇 근이고, 자는 몇 도(度)인지를 새기는데, 자는 그 길이를 모두 새기고, 말과 되의 크기를 비교하여 바로잡는 것은 모두 물로 한다. 곡물로 하지 못하게 한다.’ (존재집 시전(市廛))
도량형에 대한 위험은 늘 우리 주변에서 자주 발생한다. 도량형을 속이면 고객은 손해를 보게 되고 상인은 이중으로 가만히 앉아서 손쉽게 이득을 얻게 된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지방의 난전을 중심으로 시장경제가 활성화되어 상인들에 의해 도량형을 속이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이런 일을 당한 백성들은 상인에게 찾아가 항의를 하나 별 소용이 없었다. 이에 관아를 찾아 소송을 진행하기도 했다. 이러한 불공정한 위험을 미리 차단하려 존재선생은 도량형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국가에는 도량형을 통일하고 통일된 규정을 법으로 정해 관청과 상인에 대해 정기적인 현장감시를 통해 철저한 감독을 주문했다.
도량형의 철저한 감독은 먼저 관리 입회하에 법의 정한 바에 따라 1년 4회 상인들의 말, 되, 저울, 자를 점검하여 기준에 따라 바로 잡도록 했다.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상인들을 지방의 서원 정문으로 불러 모았다. 부피나 수량을 나타내는 양(量)은 두(斗), 승(升), 홉(合), 작(杓)으로 분리했다. 길이와 넓이는 척(尺), 분(分), 리(厘)로, 용량은 근(近), 냥(兩), 전(全)으로 통일시켰고 크기를 바로 잡는 기준은 곡물로 하지 않고 물(水)로 하게 했다. 그 이유는 밀도가 물이 곡식보다 더 조밀해 공간을 최소화시키려는 의도였다.
상인에게 있어 도량형은 도덕성의 지표라 그만큼 엄격성이 요구되었다. 중앙정부에서는 암행어사를 통해 부정부패를 바로 잡고자 했다. 조선시대 암행어사는 마패와 더불어 유척(鍮尺), 즉 약 20cm 내외의 놋으로 만든 자를 소지하여 관리들과 상인의 잘못된 측량기구를 감시했다. 암행어사는 갑자기 관아에 들이닥쳐 관에서 사용하는 도량형을 검사하여 수령의 책임을 묻는데 사용되었다. 유척은 그야말로 도량형 제도의 표준이요, 백성을 보호하는 정의의 도구였다.
척의 면에 새겨진 눈금에 따라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황종척(黃鍾尺)은 시신상처를 비롯해 범행에 사용된 도구를 측정하여 범인을 잡는데 사용되었다. 조선시대는 농업이 중심이어서 국가에서는 곡식이나 포목 등을 세금조로 현물을 거두어 들였다. 그래서 토목이나 건축에는 영조척(營造尺), 섬유에는 포백척(布帛尺)이 사용되었다. 또한 제기용기는 조례기척(造禮器尺), 토지에는 주척(周尺) 등 가히 맥가이버라 불려도 모자람이 없는 만능 놋쇠 자였다. 관리나 상인이 마음대로 자나 되를 늘려 잇속을 챙기거나 부당이득의 근원을 자르자는 의도였다.
조선후기 군과 현 예하 각 면에는 종3품 관직인 부정(副正)의 책임 하에 도량형에 대한 관리감독이 이루어졌다. 여기서 정령(政令)이란 도량형에 대한 국가의 시책을 의미한다. 존재선생은 농경사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던 말, 되, 저울, 자에 대해 비교적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길이, 직경, 높이, 무게, 도, 크기의 옳바른 사용은 도량형 제도의 생명이다. 그래서 도량형으로 인해 발생하는 위험을 미리 차단하고자 했다. 말과 되는 곡식을 사고 팔 때 사용하는 나무로 만든 네모난 기구이다. 저울은 무게를 달 때 근 등으로 표기된다. 자는 백성들이 입을 옷의 길이를 재는 유용한 도구로 사용되었다. 모두 생필품의 매매에 사용되는 도구였다.
2) 국가의 생필품 가격통제
존재선생은 존재집 전포(錢布)에서 돈에 대해 견해를 밝혔다. 먼저 돈과 관련 뇌물에 대해 언급했다. 뇌물은 상급자가 밝히지만 않으면 자연스럽게 해결되는 것으로 사람의 도덕성과 관련된 문제라고 정의했다. 2015년 제도화된 김영란법은 공직자의 청탁금지법으로 공직자의 비리를 규제하는 강화된 반부패법이다. 직무의 대가성 여부를 불문하고 공직자의 금품수수를 금지하고 있다. 존재선생은 이미 조선후기 때 부패는 힘 꾀나 부리는 사람의 문제라고 하면서 김영란법을 예고한 셈이다.
여기서 존재선생은 ‘돈은 중성이라 전혀 위험할 것이 없다’고 단언한다. 돈 자체에서 야기되는 위험은 전혀 없고 바로 사람에게서 생기는 위험이다. 누구의 손에 들어가 어떻게 사용되느냐의 문제이지 돈 자체는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는 견해이다. 즉 지혜로운 자에게 들어간 돈은 국가와 사회 및 가정에 소중하게 사용되나 어리석은 자는 이를 오용해 부작용이 심각하다고 보았다. 화폐제도는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수단으로 인식했다는 점이다.
또한 돈과 관련 물건의 매매가격에 대해 실학적 견해를 피력했다. 국가가 시장에 개입해 물건가격을 통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일정한 범위를 미리 정해 많아도 일정 수준을 넘지 못하게 하고, 적어도 일정 수준 밑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하는 물가안정제도의 도입이다. 물가제도의 도입주장은 근대적인 경제개념 묻어 있다. 특히 생필품에 대한 가격통제제도는 일방의 매점매석을 방지하고 예측 가능한 시장경제를 정착시키려는 선순환적인 취지로 해석된다. 가격의 위험은 국가의 시장개입으로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면 주식인 쌀은 3말~5말, 의식주의 옷은 3냥~4냥, 품질이 매우 좋은 무명베는 1.5냥~2냥, 모시는 3냥~4냥, 삼베는 1냥~2냥, 목화는 0.8냥~2.5냥으로 그 구간 안에서 매매가 이루어지도록 했다. 최고가와 최저가를 미리 정해 상인이나 백성들이 무리한 피해나 엄청난 폭리를 취하지 못하도록 하는 견제장치이다. 쌀은 최고가와 최저가의 차이가 2말로 60%, 옷은 1냥으로 75%, 무명베는 0.5냥으로 75%, 모시는 1냥으로 50%, 삼베는 1냥으로 75%, 목화는 1.7냥으로 313%나 된다.
비율 순으로 모시(50%), 쌀(60%), 옷과 무명베 및 삼베(75%), 목화는 313%이다. 모시와 쌀은 백성들의 생필품이라 격차가 50%, 60%대에 거쳤다. 옷과 무명베 및 삼베는 75%로 의류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섯 종목의 최고가와 최저가의 간극은 이해가 간다. 그러나 목화는 무려 313%라는 엄청난 격차가 발생한다. 격차가 크다는 것은 탄력적이라는 것이다. 자그마한 충격에도 시장가격이 요동해 수요자나 공급자간 가격의 괴리감이 크다는 방증이다. 당시 목화의 재배가 기후여건을 비롯 다양한 위험을 초래하는 요인이 상존했다고 보인다.
존재선생은 특정한 물품에 한해 공익을 목적으로 한다면 시장개입을 적극 찬성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생필품의 가격을 안정시키려는 목적이었다. 시장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위험이 종종 발견되는데 이를 방치하면 국가에 큰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 이런 시장위험의 원인을 찾아 해결하는 문제해결자로서의 국가역할을 추구했다. 오늘날 부동산문제나 독점기업, 외환시장 등의 위험이라면 조선후기는 백성들이 매일매일 먹고 입는 생필품의 안정이 무엇보다 절실히 요구되었다.
3) 상인의 세금납부
‘전세(廛稅 가게 세)는 큰 상인〔大賈〕과 행상(行商)에게만 거두고 일반 백성에게는 거두지 않는다. 큰 상인은 2푼씩, 행상은 1푼씩 모두 서원에 납부하여, 재능을 시험하는 비용에 보탠다.’(존재집 시전(市廛))
조선은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어 국가를 운영하고 존속시켰다. 세금은 예나 지금이나 백성들의 납세 능력에 따라 공평하게 부과되어야 하는데 세금회피나, 납부거부, 불공정한 세액 등 다양한 세금관련 위험이 상존했다. 존재선생은 이러한 위험을 없애기 위해 공평성에 의거 능력에 따른 차등적 세금징수를 주장했다. 보편적인 세금징수보다 몇몇 기초자료를 이용해 매출과 비용, 이익의 규모를 산출하고 이를 적용해 차등적으로 세금을 부과하도록 했다. 세금부과 기준은 매출규모와 상점의 위치, 이 두 가지를 적절히 조율하여 세금을 산출하도록 했다.
조선시대의 지방의 시장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통상 5일장으로 불리던 재래식 시장이 전국의 면단위로 운영되었다. 우리가 흔히들 말하는 보부상이라는 행상들이 주도가 되어 농수산물, 공업제품이나 의료품 등을 팔고 샀다. 지방에서 열리는 시장을 당시는 장시로 불렀는데 오늘날의 지방 재래시장이다. 으레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 물건을 사고파는 일을 넘어 다양한 시장문화가 발달하기 마련이다. 백성들의 놀이터요,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모이는 구경거리였다.
전세(廛稅)는 가게 세를 말한다. 자릿세로 우선 큰 상인은 2푼씩, 작은 행상에게는 1푼씩 모두 서원에 납부하게 하여 그 돈으로 서원이 운영되도록 했다. 조선후기는 상평통보인 엽전(葉錢)이 일반적인 재화의 교환수단이었다. 여기서 1관(貫)은 10냥이며, 1냥은 10전이다. 1전은 10푼(文)이다. 상인에게서 가게 세는 큰 부담이었다. 이를 간파한 존재선생은 대상과 행상을 명확한 기준으로 나누어 구분함으로 차등적 세금부과가 되도록 했다. 이는 미리 분쟁의 위험을 없애려는 의도였다.
존재집 군현(郡縣)편에는 백성들이 부담해야하는 세금은 잡다했다. 고을의 관리 취임하고 이임하는 비용을 비롯해 관리 가족들에 대한 접대비, 사신들에 대한 접대비, 방물(方物)의 진상, 유향소(留鄕所) 서리(胥吏)의 녹료(祿料) 등이다. 이 같은 비용을 세금조로 백성에게 거두어 들여야 하는데 큰 마을이나 풍년이 들어 농사가 잘되면 큰 어려움이 없었으나 태풍이나 가뭄, 병충해로 흉년이 들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존재선생은 옥과현감을 지냈기 때문에 누구보다 백성의 어려움을 잘 알고 있었다.
조선시대 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면세제도가 있었다. 소규모 영세상인인 일반 백성에게는 세금이 완전히 면제되었다. 오늘날 면세제도나 비과세제도로 일정금액 이하의 소득자나 특정품목에 한하여 세금을 매기지 않는 제도와 흡사하다. 존재선생이 말하는 면세제도의 혜택을 누리는 일반백성은 시장에서 장소를 할당받아 장사를 하는 그런 부류가 아니라 농사를 지으면서 생산한 소출을 소비 후 남은 일부의 생산물을 난전 같은 곳에서 파는 형태이다. 시장의 상점목록에 등재되지 않은 백성들이다.
조선시대 초기 때는 육의전(六矣廛)을 중심으로 지역적으로 특정한 매매권한을 가진 많은 시전(市廛)이 있었다. 상품을 독점 판매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다. 이에 반해 상점목록에 등재되지 않은 가게를 난전(亂廛)이라 하는데 조선후기로 접어들면서 전기에 비해 전국적으로 난전이 생겨나게 되었다. 초기의 일부 상인이 시장을 지배하는 독점시장 경제체제가 점차 완화되는 모습으로 변해갔다. 난전의 발달은 지방시장을 중심으로 독특한 문화의 공간으로 성큼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4) 백성의 질서유지
'군현의 각 면에 장시(場市)를 1곳씩 여는데, 반드시 텅 비어 있는 땅에 열고, 잡류(雜類)가 모여 촌락을 이루어 도적이나 협객의 소굴로 만드는 것을 엄히 금한다. 방시(坊市)에서 일어나는 여러 폐단은 관아의 위엄을 빌리지 않으면 무뢰배를 위압하여 복종시킬 수 없으니, 반드시 비용을 보조하여 사령(使令)을 두는 방도를 별도로 마련해서, 행패를 부린 자에 대해 곤장 10대 이하의 형벌을 스스로 판단하여 집행할 수 있게 하고, 죄가 무거운 자는 관아에 보고하게 한다.'(존재집 시전(市廛)
존재선생은 방시(坊市), 즉 시장의 거리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사적으로 처리하지 못하게 했고 이미 발생한 사고에 대해서도 개인적인 처리를 부정했다. 시장에서 발생하는 사건사고는 모두 공공기관인 관청에서 판결하도록 주문했다. 국가의 법적인 권위가 철저히 서지 않으면 시장은 몇몇 무리에 의해 난장판이 된다고 지적했다. 국가란 공권력은 백성과 상인들이 안정적인 상거래 질서를 유지하는 근원이었다. 시장이 몇몇 개인에 의해 사유화되는 위험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시장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다 보면 사건사고가 잦은 법이다. 조선시대 시장에도 온갖 사람들이 모여 별의 별 일이 많았다. 시장의 안정을 위해 종3품 관리인 부정(副正)이 시장을 총괄해서 관장했고 예하에 실무자인 사령(使令)을 두어 질서유지에 힘썼다. 여기서 사령이란 조선시대 관청에서 심부름하는 사람을 뜻한다. 관청에서 사령을 고용해 시장에 대한 관리업무를 돌보도록 했다. 존재선생은 관리들이 적극 개입해서 완벽한 질서유지를 선결조건으로 삼았다.
존재선생은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를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이런 자를 잡류(雜類), 도적, 협객, 무뢰배, 행패를 부린 자로 상당히 격한 언어를 사용해 꾸짖고 있다. 아무래도 여러 부류의 사람이 모이다보니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는 사람, 한쪽에서는 투전놀이 등 놀음이 공공연히 자행되었고, 연약한 여성에 대한 행패도 잦았다. 또한 물건을 훔치거나 값을 지불하지 않는 등 사건사고는 매우 혼탁했다. 도저히 상인들과 백성들 스스로에 맡겨서는 않되는 고질적인 위험이었다.
그 처벌의 수위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먼저 조선시대 5형 가운데 곤장이란 형구로 행패를 부린 자의 볼기를 쳤다. 곤장 10대 이하는 상부 보고 없이 현장에서 선조치하고 후보고하도록 했다. 이러한 처벌을 하는 이유는 경범죄자까지 모두 관청에 보고하면 일거리도 많아지고 백성들의 불만이 쌓여 사회가 혼란하게 되는 것을 미리 방지하려는 차원이었다. 관청의 부정은 사령을 미리 교육하여 그 명확한 기준을 제시하여 업무에 지장이 없도록 했다. 시장이 활성화 되는 것은 백성들의 질서유지가 필수요건으로 작용했다.
시장에서는 종종 큰 사건이 터져 혼탁하기까지 했다. 살인사건이나 방화, 도난 등 다양한 위험이 따랐다. 중범죄자에 대해서는 사령이 스스로 판단하여 처리하지 못하고 이를 소상하게 관아에 보고하여 처리하는 규정이 있었다. 특히 경제사범보다 형사사범이 이에 해당되는 경우가 많았다. 중범죄자로 분류되는 도둑에 대해서는 상당히 혐의가 무거운 형으로 처벌을 받았다. 시장 주변에 도적이 설쳐 난장판이 되는 위험을 미리 예방하려는 차원이었다. 백성들은 안전하게 시장을 통해 물자를 공급받고 상인은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3. 시장경제 주체론의 특징
시장은 늘 변화무쌍하다. 시시각각 변화하여 따라잡기가 쉽지 않은 것은 상수보다는 변수가 늘 상존하기 때문이다. 존재선생은 존재집의 여러 부분에서 조선후기 때 바라본 시장과 관련해 경제 분야에 대한 논제를 기록했다. 특히 존재선생의 시장에 대한 실학적 견해는 다음의 세 가지로 함축된다. 즉, 시장을 성리학적으로 해석하고자 했고, 시장경제와 계획경제의 경계선을 구체적인 품목을 나열하여 제시했다. 또한 질서에 대한 존재우화를 통해 비유로 잘 설명하고 있다.
1) 성리학적 해석
존재선생은 원시유학을 숭상했다. 존재집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경전의 바른 이해를 하는데 진력했다. 바로 사서차의가 대표적이다. 원시유학의 핵심은 바로 인본사상이다. 시장이라는 경제도 사람이 운영하는 만큼 세 경제주체의 역할을 강조했다. 존재선생은 이념에 치우진 기존의 성리학에서 탈피해 새로운 관점에서 유학을 바라보고 국가나 사회 , 백성에게 실재로 도움이 되는 성리학으로의 방향을 제시했으나 중농주의의 한계에서 벗어나진 못했다.
시장이라는 경제를 인본사상, 즉 백성의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했다. 더 나아가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을 적극 지지하는 편이었다. 성리학과 경제의 융합이랄까! 아니면 경제의 성리학적 해석이랄까! 한마디로 시장이라는 틀을 성리학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는 시도였다. 시장위험은 제도보다 인간에 의해 해결된다는 것과 화폐경제에 대한 발달은 시장을 발달시키고 백성들에게 풍요를 갖다 준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중성인 화폐는 인간에 따라 결정된다고 여겼다.
조선후기는 농업중심사회라 자급자족의 경향이 강했으나 백성들의 의식고양과 다양한 욕구분출로 다양한 물품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시기였다. 특히 의복이나 자급자족할 수 없는 농수산물, 기타 제기류 및 공산품 등에 대한 수요가 늘어났다. 초기의 한양에서 독점적 판매지위를 획득한 시전의 역할은 지역적으로 매우 제한적이었다. 후기로 접어들면서 지방 시장을 중심으로 난전이 하나 둘 늘어나게 되었다. 아무래도 한양에 비해 지방은 관청의 통제력은 미약했다.
자연히 지방의 시장에서는 다양한 위험이 존재하여 때론 큰 사건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위험을 일으키는 요인도 사람이요, 위험을 해결하는 것도 바로 사람인 것이다. 존재선생은 이러한 위험의 문제와 해결을 사람에게서 찾고자 했다. 이는 실학적 성리학자로서 경제원리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제도를 만드는 자도 사람이기에 제도 자체보다 사람의 인성을 교육을 통해 개조하려는 점진적 개혁론자의 입장에 섰다.
물론 위에서 제시한 도량형, 세금, 정령(政令) 등은 법으로 규정된 제도에 속한다. 제도란 계란의 껍질과 같아서 껍질이 없다면 계란의 흰자와 노른자는 보호가 어렵고 쉽게 부패된다. 그러나 존재선생은 계란의 목적과 근본가치는 껍질 자체가 아니라 껍질이 담고 있는 내용물이라 강조한다. 제도는 백성을 위해 존재하고 그 제도를 운영하는 주체도 바로 사람이라는 견해이다. 시장은 운영하는 세 주체인 국가, 상인, 백성의 윤리의식을 중시한 인본주의자다.
2) 계획경제와의 경계
사람의 욕구는 무한하다. 매도자인 상인의 입장에서는 폭리에 가까운 이익을 남기고 싶어 하고, 매수자인 백성의 입장에서는 좋은 상품을 값싸게 사고 싶어 한다. 돈 많은 상인은 특정상품을 일시에 모아 독점적으로 높은 가격에 팔 수 있다. 특정상품이 생필품이 아니라면 일부의 백성이 고통을 받겠지만 생필품이라면 가난한 백성들은 큰 어려움에 직면하여 생활고를 겪을 것이 분명하다. 국가의 입장에서는 사회가 혼란에 빠져 백성들의 불만이 쌓이는 단초를 제공하는 셈이다.
상반된 욕구는 통제되지 않으면 시장의 실패로 끝나게 된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존재선생이 제시한 일부 생필품에 대한 가격통제이다. 획일적인 가격통제보다 최저가와 최고가의 범위를 정해 품질의 등급, 시기에 따른 출하조절, 장소에 따른 가격조정 등에 따라 범위 안에서 매매가격이 결정된다. 이렇게만 된다면 상인은 상인대로, 백성은 백성대로 큰 이익이나 큰 손해를 보지 않게 된다. 국가가 시장에 직접 개입하여 일정한 범위 내에서 가격을 통제함으로 시장실패를 막을 수 있다.
매우 진보적 경제개념이다. 매매 당사자는 무한한 욕구로 인해 스스로의 통제능력을 상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국가는 어떤 경우에 시장에 개입하여 상품의 가격을 통제할까? 바로 시장경제를 주축으로 운영하나 백성들의 안정적인 물품구매를 제도화시키길 원했다. 국가도, 상인도, 백성도 이에 동의를 해야 했다. 생필품이란 말 그대로 사람이 생존하기위해 필수불가결한 생존물품인 것이다. 존재선생의 생필품 목록 제시는 안정적인 백성의 생활을 고려한 애민정신의 발로이다.
한편 존재선생이 주장한 특정 생필품에 대한 국가의 시장개입은 자칫 잘못되면 시장실패를 재촉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장사란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데 매매가격이 생산과 유통 등 비용을 초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상인은 공급을 포기하고 매매를 중단시킬 위험이 있다. 그래서 존재선생의 주장은 상품의 가격결정 구간을 설정하는데 있었다. 가격을 결정하는 요소를 다양하게 보고 그 구간을 설정함으로서 수요자인 백성들과 공급자인 상인 간에 절충구간을 제시한 셈이다.
3) 존재우화(存齋寓話), 기러기와 까마귀
또한 '기러기가 땅으로 내려와 모일 때에는 모이를 먹으러 가는 것인데, 역시 앞다투는 행태도 없이 날아서 차례로 천천히 내려온다. 먼저 내려온 기러기도 반드시 한 무리가 다 내려오기를 기다린 뒤에 모이를 쪼아 먹는다. 이런 점이 보통의 사물과는 상당히 다르다. 그런데 까마귀는 어지럽게 날고 한꺼번에 지저귀며 뒤섞여 싸운다. 사람들이 보고는 떠들썩함을 견디지 못하고 모두 머리가 아파 욕을 하지만, 정작 사람들 자신의 행동은 기꺼이 까마귀가 되지 기러기가 되지는 않는다. 이는 그 마음이 검기 때문이다.'사물(事物)
존재선생에게 있어 질서란 천지의 가장 근본이 되는 법칙이었다. 일월, 사시의 절기부터, 움직이고 숨 쉬는 사물과, 도구의 쓰임새나, 똥오줌을 누는 일까지 모두를 질서로 해석했다. 예를 들어 누에실이 가늘지만 비단을 만들고, 거미줄이 미세하지만 공중에 걸린 거미줄에서 질서를 찾았다. 누에나 거미에게서 나오는 실이 약하고 보잘 것 없으나 질서가 있기에 근본 목적에 부합한다는 결론이다. 시장의 질서도 이와 같다고 보면서 사람들이 본받아야할 일이라고 여겼다.
더 나아가 기러기와 까마귀 우화로 질서를 해석하고자 했다. 존재집의 사물(事物) 마지막 쪽에 질서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남겼다. 그중에서 기러기와 까마귀 우화는 질서를 적절히 설명하는 비유이다. 아마도 존재고택에서 천관산을 바라보니 넓은 벌판 위를 기러기가 줄지어 나르는 가지런하고 정돈된 모습에 넋을 잃고 말았다. 벌판에 내려서 모이를 먹을 때 서로 먼저 먹으려고 다투지 않고 큰 소리도 내지 않는는 모습에 감탄했다. 마치 성인군자와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까마귀의 어지러운 행태는 기러기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나는 모습도 뒤죽박죽, 우는 소리도 온 천지를 진동시킬 만큼 시끄럽고, 심지어 서로 먹으려고 싸움까지 일삼았다. 이를 보고 까마귀를 욕하는 사람조차도 기러기를 닮으려 하지 않고 까마귀를 닮는다고 질책한다. 무질서의 인간, 마음이 검은 인간이라고 한탄한다. 시장의 질서 또한 이와 같아서 백성들에게 까마귀보다 기러기와 같은 질서를 요구했다. 존재선생다운 우화로 질서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조선후기는 아직 사농공상의 신분제 질서가 확연한 때라 존재선생의 입장에서 시장거리를 보자면 무질서의 표본 그 자체였다. 폐쇄적인 신분체계가 명확하고 평생 학문에 몰두한 터라 좀처럼 시끌벅적한 시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리라. 오죽하면 사람들은 기러기를 닮지 왜 하필이면 마음이 검은 까마귀를 닮느냐고 질책을 하지 않았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선생은 백성들의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화폐와 상품경제의 표본인 시장의 존속을 적극 지지하는 편이었다. 다만 질서를 통해 시장이 안정되길 바라는 마음 간절했다.
4. 나가는 말
. 조선후기 시장의 이상적인 모습은 어떠했을까? 존재선생은 시전(市廛), 전포(錢布), 사물(事物)이라는 논제를 통해 시장경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위해 백성에게는 질서유지를, 상인에게는 세금납부를, 국가에는 엄격한 관리감독과 더불어 물건가격에 대한 제한적 시장개입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경제를 성리학적으로 해석하여 제도보다는 사람을 우선시했다. 백성들의 생필품에 대한 가격통제는 애민정신이 기저에 깔려 있고 질서에 대한 우화가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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