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구와 위백규의 사제상(師弟像) 연구
(병계집과 존재집을 중심으로)
벽천 위윤기(35세, 씨족문화연구위원)
예나 지금이나 스승은 많으나 참스승은 드물고 지식은 전하나 지혜를 가르치기는 어렵다. 위백규 선생이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실학자로 성장하는 이면에는 학문을 지도하고 선비의 길을 가도록 이끈 참스승이 바로 병계 윤봉구이다. 그 스승의 그 제자로 불리는데 나름 이유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43살 연하의 제자에게 평생 쌓아온 경륜을 16년간 고스란히 전수했다. 여기서 윤봉구 선생 이력, 사제 간 소통과 학습법, 시기별 덕산유학 프로그램, 사제상의 특징을 살펴보자.
1. 강직한 선비, 병계 윤봉구(屛溪 尹鳳九)
검정색 동파관을 쓰고 조선시대 선비의 예복인 옥색 난삼을 입고 화문석 위에 앉아 있는 윤봉구 선생의 초상화가 있다. 관과 옷의 테두리, 짙은 눈썹이 검정색이라 강한 인상을 준다. 특히 마른 체격에 좌측 귀, 볼록한 코, 강열한 눈매, 희끗희끗한 수염은 옷 안에 들어가 숨겨진 두 손과 더불어 다소곳한 모습이지만 금방이라도 한 마디 할 것 같은 날카로운 인상이 지배적이다.
병계집에는‘증사진변군상벽(贈寫眞卞君相壁)이 수록되어 있다. 미국 로스엔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소장본은 화면 위쪽에 '병계거사 칠십세진(屛溪居士七十歲眞)' 기록과 동생인 윤봉오가 쓴 윤봉구의 글이 있고, 화면 오른쪽 밑에 '화사변상벽사(畵師卞相壁寫)'라는 관지가 있어 1750년에 화원 화가인 변상벽이 그렸음을 알 수 있다. 동일한 옷과 관을 착용한 모습을 가슴 위까지만 그린 반신상이 함께 있는 화첩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1) 대(代)를 이어 출사한 가문
윤봉구(1683.12.5~1767.12.7)의 본관은 파평(坡平)이며 호는 병계(屛溪), 옥계(玉溪), 구암(久菴)이다. 자는 서응(瑞膺),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그는 권상하의 제자로 강문팔학사의 한 사람이며 호론계에 속한다. 할아버지는 윤비경으로 참판을 지냈다. 윤비경 신도비명을 송시열이 찬했으며, 참정을 지낸 아버지 윤명운의 묘지명을 권상하가 찬했다. 윤명운의 스승이 바로 송시열로 1689년 기사환국 때 스승 송시열(宋時烈)을 변호하다가 해미에 유배되었다
병계는 어릴 때부터 노론계의 거목인 한수재(寒水齋) 권상하의 제자로 입문했다. 1710년 권상하에게 편지로 우암 송시열의 문집 간행에 대해 의논했고, 감시에서 수석을 차지하였으나 시문이 격식에 어긋난다 하여 탈락했다. 1725년 청도군수, 1734년 장령, 1739년 집의, 부호군, 1742년 군자감정, 1743년 진선, 사과, 1754년 서연관, 1760년 대사헌, 1763년 공조 판서가 되었다. 1767년 12월 별세하여 1805년‘문헌(文獻)’의 시호가 내려졌다.
2) 대(大)학자로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시호에 문(文)자가 들어가는 것은 당시 큰 학자라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그의 사상과 철학이 집대성된 문집인 병계집을 살펴보자. 병계집(屛溪集)은 활자본으로 1802년 경 간행되었다. 본집은 60권 30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권마다 목록이 있고, 서와 발은 없다.
권1~4는 詩 303題이다. 차운시, 만시, 기행시, 풍광을 읊은 시가 대부분이고, 시를 지은 연도가 표기되지 않아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이러한 여러 형식의 시들이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연대순으로 편차된 것 같다.
권5~8은 疏(42)이다. 1726년 경연관으로 입시하라는 명을 사양한 것부터 1767년 영조가 제방을 정리한다는 명분으로 반포한 「裕昆錄」 중에서 스승 권상하와 관련된 일을 변무한 마지막 상소까지 경연관, 지평, 장령, 집의, 진선, 대사헌 등의 사직소와 君德에 힘쓰라는 소, 陳戒疏, 병으로 金谷에 물러나 있으며 所懷를 아뢴 소, 東宮의 痘疫 후에 올린 上書, 貞聖王后와 仁元大妃의 상 후에 위문하고 대죄한 소를 포함해서 연도순으로 실려 있다.
권9~33은 서(664)이다. 가족들을 제외하고도 편지를 주고받은 사람이 250여 인이나 되며, 저자의 학문과 정치적 성향, 당시의 상황과 교유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주로 경서해석에 관한 의논, 당시 학자들의 관심사였던 인물성론, 영조 연간 노론의 의리를 밝히기 위한 대책, 상례와 제례 등에 관한 내용이 많다.
권34~36은 잡저(35)이다. 권43은 서(17),기(13)이다. 권44는 題跋(24), 箴(3), 銘(5), 贊(2), 婚書(3), 祝文(5)이다. 권45~46은 告文(14), 祭文(33), 哀辭(3)이다. 권47~60은 碑(9) 墓碣(32), 墓誌(41), 壙記(1), 墓表(41), 行狀(12), 家狀(1), 行錄(1), 遺事(2), 傳(1)이다. (출처 병계집)
▲병계 윤봉구 선생 초상화
2. 사제 간 소통과 학문지도
제자 존재는 평시는 고향 장흥 방촌에서 혼자 공부하다가 1년 2~3회 가량 충청도 덕산을 찾아 며칠간 머무르며 그간 공부한 궁금증을 병계 스승에게 묻는 방식으로 공부했다. 아마 덕산에서 계속 머무르기가 어려운 경제적 요인이 있었다고 보인다. 그래서 스승과 소통하는 방법이 대화, 문장, 편지 등을 통해 다양하게 시도되었다. 특히 시를 통한 소통은 백미 중의 으뜸이다. 왜냐하면 함축된 언어를 사용하여 의견을 충분히 상대방에게 표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1) 질의응답
병계 선생의 제자로 입문하면서 가장 많이 이루어진 학습방법이 질의응답이었다. 1753년 겨울에 병계 스승을 찾았는데. 그때 스승은 제자 존재에게 물었다. “인물성동이설(人物性同異說)은 여전히 분분하여 정해진 것이 없는데, 그대의 생각은 어떤가?”존재선생은 대답하였다. “저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서로 다르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바로‘성즉리(性卽理)’세 글자를 잘못 인식한 결과입니다. 기질(氣質) 중에 나아가서‘이’한 글자를 뽑아내야만 바야흐로‘성’이라는 이름이 있게 됩니다. 성이 이루어진 후에 인과 물이 어찌 같겠습니까. ~ (중략) ~ 평소 이 같은 견해를 가지고 있는데 어떻습니까?”
위의 글에서 나타난 1대1 대화를 통한 학습방식은 교육에 있어 가장 효율적이다. 스승은 묻고 제자는 답변하는 방식으로 주입식 교육이 아닌 토론식 대화법이다. 병계선생은 당시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한 사람과 사물의 성은 같은가? 다른가? 에 대해 제자의 의견을 묻는다. 스승의 질문에 제자 존재선생은 사서삼경을 비롯 다양한 고전의 글을 인용해 조목조목 답변한다. 이렇게 존재는 방촌에서 혼자 공부할 때 의문점을 꼼꼼히 메모하여 덕산에 와서 스승에게 물어 해답을 찾는 것이 16년간 지속되었다. 사제 간 나이 차이가 43년이나 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승 병계는 어린 제자 존재를 극친히 아껴 논리전개와 개념정립을 대견스럽게 여겼다. 그러나 존재선생은 자신의 대답이 불충분했다고 생각해 나중에 편지를 보내 스승의 질문을 보충해 답변을 한다. 병계는 이이, 송시열, 권상하의 학맥에 속하는 노론계열이다. 존재선생 또한 병계 선생의 영향을 받아 인물의 성은 다르다는 견해를 견지했다.
2) 사제 간 수창(酬唱)
스승 병계 선생은 제자 존재가 태어난 장흥이 몹시 궁금했던 것 같다. 충청도 덕산과는 천리나 떨어져 있고 천관산의 풍광도 한번쯤 구경하고 싶다고 존재에게 써준 시에도 나타나고 있다. 후에 여행일정을 잡았으나 더위로 실패했다. 제자는 천관산의 절경을 한시로 담아 스승에게 드렸다. 시는 함축성이 생명이다. 사제 간 시를 통한 소통은 백미 중의 으뜸이다.
아래의 시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천관산에 대해 시를 지어 구암 선생께 올리다〔詠天冠山呈久菴先生〕
산자락이 회주에 닿아 기세 더욱 완전하니 / 山到懷州氣益全
성대하고 깨끗함이 이렇게 꿈틀거리네 / 扶輿淸淑此蜿蜒
눈앞에는 별천지가 삼천리로 펼쳐지고 / 望中壺丈三千里
세상 밖의 풍연이 팔만 봉우리에 서려 있지 / 物外風烟八萬巓
깊은 동굴엔 용이 서려 우레와 비가 진동하고 / 嵌窟龍藏雷雨動
돌사다리엔 구름 개어 달과 별이 걸려 있으니 / 石棧雲霽月星懸
신령한 지역에 조화옹의 참된 주재 신비하여 / 靈區造化眞宰秘
스스로 하늘 남쪽 끝 해변가에 있구나 / 自在天南極海邊 (위백규)
아래는 속수례를 행할 때 윤봉구 선생이 쓴 시다.
천관산 빼어난 모습 꿈에서 그리워했는데 / 冠山秀色夢中回
그대가 관산에서 천리 길을 왔구나 / 君自冠山千里來
어느 날 그대와 함께 산 위에 올라가 / 何日携君山上去
남쪽 창해 바라보며 흉금 장대하게 하나 / 南臨滄海壯襟懷 (윤봉구)
이기일원론과 이원론은 조선시대 성리학의 주요쟁점이었다. 존재선생도 이에 대한 시를 남겼다. 우주의 근본인 이가 표현되는 기를 결국 하나로 보는 일원론을 시로 표현 한 것이다.
1761년 선생 35세 때였다. 겨울에 병계 선생을 뵈었다. 인물성(人物性)의 같고 다름에 대해 논의하고 시 한 수를 올렸다.
성은 이로 인해 품부되니 하늘에 근본하고 / 性因理賦本於天
사람은 온전함 얻고 동물은 치우치게 얻네 / 人得其全物得偏
한 근원으로 논하자면 같은 곳이지만 / 若論一原同處是
기의 측면에서 보자마자 천 가지로 달라지네 / 纔看氣上便殊千(위백규)
병계 선생이 화답하는 시를 내려 주었는데,
성선이 하늘에서 나온 것 자네는 알지니 / 君知性善出於天
기질이 치우침 여부는 따질 것 무엇인가 / 氣質何論偏不偏
학문은 원래 공부가 가장 중요하니 / 學問元來工最大
남들보다 백배 천배 더 노력하시게나 / 人能之十己能千(윤봉구)
이외에도 성리에 대한 한시가 여러 수 있다. 존재선생은 특히 병계 스승의 학통을 잇는다는 측면에서 스승의 시를 차운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스승이 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서 모방하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삼가 구암 선생의 〈성정이기동이〉시에 차운하여
〔謹次久菴先生性情理氣同異韻〕
성심이기란 말로 다하기 어려우니 / 性心理氣語難盡
소생이 이 학설을 어떻게 말하겠는가 / 小子其如此說何
으뜸인 건 몸소 실천해서 끝까지 다다름이니 / 最是躬行到底後
만 가지 달라도 하나로 근본하면 어긋남 없으리 / 分殊原一自無差
3) 편지를 통한 소통
제자 존재는 ‘병계 선생에게 올림(上久菴先生)’이라는 편지를 쓴다. 그 내용은 '근래 흉년이 심하여 오랫동안 안부를 여쭙지 못했습니다. 올 늦봄 날씨가 여느 해와 사뭇 다른데, 도체(道體)의 신상(神相)이 어떠하십니까. 동생 오헌(梧軒) 어른께서는 아마 이미 오셔서 만나셨을 것이니 늘그막의 단란함이 의당 더욱 화락하고 즐거울 것입니다. 어서 가서 뵙고 책상 아래에서 가르침을 받들지 못한 것이 한입니다. 저는 두 해에 걸친 흉년과 전염병에 나이나 먹어 가면서 그럭저럭 보내고 있습니다만, 흉년을 겪은 뒤 집안 살림이 더욱 어려워져 변변치 못하게도 부모님의 끼니마저 자주 끊겼습니다. ~(중략)~
전날 인물성동이설(人物性同異說)에 대해 선생께 듣다가 경솔하게 몇 마디 대답했는데 다행히 선생께서 수긍하셨습니다만, ~ (중략) ~ 하필 미리 먼저 금수도 오상의 본성을 갖추었다고 결정한 뒤에야 비로소 활기차게 배움에 나아간다는 말입니까. 제가 보잘것없는 학문과 좁은 소견으로 망녕되이 성명에 대한 논의에 참여하게 되었으니 극히 아름답지 않은 일인 듯합니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라고 한다.
위의 편지는 두 가지 면에서 특이하다. 하나는 스승에게 자신의 처지를 눈에 보이듯 일일이 자세히 알려주고 스승의 동생(윤봉오)의 근황에 대해서도 묻는다. 글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자신의 부족함을 중국고사를 통해 효성을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사제 간 흉허물이 없다는 것이고 그만큼 병계 스승을 존경했다는 증거이다.
둘째는 1대1 대면 시 스승의 인물성동이설에 대한 답변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생각했는지 집으로 와서 이에 대한 견해를 자세히 편지에 기록하여 스승에게 보내게 된다. 스승의 문집 병계집에는 서간이 많다. 권9~33은 書(664)이다. 가족들을 제외하고도 편지를 주고받은 사람이 250여 인이나 되며, 저자의 학문과 정치적 성향, 당시의 상황과 교유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주로 경서해석에 관한 의논, 당시 학자들의 관심사였던 인물성론, 영조 연간 노론의 의리를 밝히기 위한 대책, 상례와 제례 등에 관한 내용이 많다. 요즘과 달리 당시 편지는 소통의 방법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4) 저술 지도편달
존재가 저술한 '고금'을 병계선생이 지도했다. 즉 16자를 첨가하여 존재의 부족함을 보완해 주었다. 1759년 저술한 <고금>을 1761년 보여주자 병계 스승은 그 끝에‘시경(詩經)’의‘심경찬(心經贊)’16字를 써주었다. 심경찬은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전해주는 16자, 즉「人心惟危, 道心惟微, 惟情惟一, 允執厥中」'사람의 마음은 위태롭기만 하고, 도를 따르는 마음은 지극히 희미하니, 오직 정밀하게 하고, 한결같이 하여 그 중용을 잡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병계는 저술방향도 지도했다. 비판보다 대안마련이 핵심이다. 1757년 시폐(時弊) 10조를 열거하여 선생에게 드렸다. 병계 선생이 “이는 정치를 담당한 사람에게 글 한 통을 써서 의견을 말할 수도 있지만, 초야에서 하는 말은 무익하다. 다만 선비도 폐단을 구제할 방법을 몰라서는 안 되므로, 폐단을 구제할 방법을 조목별로 개진하는 것은 좋다.”라고 하였다.
스승 병계의 제자에 대한 지도력과 위엄이 숨어 있는 부분이다. 문제제기보다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마련에 진력하라는 말이다. 제자 존재는 이때를 기점으로 비판보다는 제도를 개선하고 사람이 깨닫도록 일깨우는 방향으로 연구를 지속하게 된다. 한마디로 병계 선생의 지도는 제자에게 일종의 전환점이 된 셈이다.
또한 1757년 주역총목(周易總目)에 대해 질문하고, 이어서 기형(璣衡)에 이야기가 미쳤다. 병계 선생이 대나무로 본떠 기형을 만들라고 말씀하셨는데, 완성한 뒤에 구암헌(久庵軒)에 두었다고 전한다. 구암헌은 충청도 덕산의 병계선생의 자택 내 건물의 일부분이다. 혼천의는‘선기옥형(璇璣玉衡) 또는‘기형’이라고도 하는데 물레바퀴를 동력으로 사용해 움직이는 시계장치와 연결되어 천체의 운행에 맞게 돌아가도록 하는 혼천시계(渾天時計)이다.
아래는 병계집 행력(行歷)에 나타난 제자 위백규 관련 내용이다. 그만큼 제자를 지도하는 스승의 자부심에 담겨 있다.
1751년 8월, 魏伯珪가 「疑禮問答」을 가지고 經義의 의문처를 묻다.
1763년 魏伯珪에게 存存齋라는 글을 내려주다.
1766년 魏伯珪에게 「近思錄」 疑義에 답해 주다
▲병계 윤봉구 선생 묘 및 신도비
3. 시기별 덕산유학 프로그램
사제관계에 있어 스승의 권위가 서야 그 가르침도 존귀해지고 스승과 제자가 한마음으로 연구해야 일정한 목적을 이룰 수 있다. 스승 병계는 평생 곧은 뜻을 세우고 강직한 삶을 살았다. 특히 스승 권상하와 학통으로 이어진 송시열에 대한 변호로 자신을 곤궁에 처하게 만들었다. 병계는 권위가 있었고 자신의 스승인 권상하과 늘 같은 길을 걷고자 했다. 존재선생도 이러한 스승의 뜻을 잘 받들었다. 참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담은 글이 저서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1) 윤봉구를 스승 삼은 20代
조선조 공조판서를 역임한 병계선생을 스승으로 모신 것은 제자 존재에게는 운명적인 만남이라 인생의 큰 전환점이었다. 좋은 만남은 좋은 결과를 가져오고 학덕 높은 스승의 가르침은 평생을 좌우하게 되는 것이다. 병계를 스승으로 모심으로 존재선생도 노론으로 분류되고 이이, 송시열, 권상하와 학통으로 연결되어 이기일원론과 인물성이설을 주장하게 된다.
(1) 속수지례
1751년 선생 25세 봄에 윤봉구 선생을 뵙고 속수례(束脩禮)를 드렸다. '대학'과 ‘중용'을 배웠다. 윤 선생이 시를 주었는데,
경서 뜻 알기 어렵고 말하기 또 어려우니 / 經意難知說亦難
말한들 말하자마자 이해하기 어렵네 / 雖言言下領之難
또 이해하여 분명 터득했더라도 / 又雖領會分明得
마음으로 체득해 행하기 가장 어렵지 / 心體行時覺最難
여기서 속수례(束脩禮)란 '속수지례의 준말로 수(脩)'는 말린 육포이며, '속(束)'은 다발로 열 개를 뜻하는데 직역하면, 묶은 육포의 예절이라는 말이다. 스승을 처음 만나 가르침을 청할 때, 작은 선물을 함으로써 배움에 임하는 진정한 마음가짐을 갖추는 것을 말한다.
논어의 술이편에 나와 있다. 自行束修之以上, 吾未嘗無誨焉(자행속수지이상 오미상무회언) 속수이상의 예를 행한 사람에서 내 일찍이 가르쳐 주지 않은 바가 없었다. 존재선생은 25세에야 비로소 간암 위세옥의 소개로 충청도 덕산에 있는 윤봉구 선생께 배움을 청하고 그에 대한 예로 스승께 선물을 하는 절차를 거쳤다. 존재선생은 병계선생이 별세하는 1744년까지 16년에 걸쳐 가르침을 받게 된다.
(2) 의문점을 묻고 혼천의를 제작하다.
1751년 선생 25세 가을 8월, 1753년 선생 27세 가을, 1754년 선생 28세 봄 '서경'과 ‘의례문답(疑禮問答)’의 뜻이 의심스럽고 불분명한 부분을 질문했다. 의례문답은 조선후기 윤증의 저서로 가례도(家禮圖), 상례, 제례 등 총 8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역총목을 질의하고 스승의 지도로 대나무로 기형을 제작해 보관했다. 주역은 총목 1권, 주역전의대전 4권, 주역언해 3권 총 8권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는 총목 1권만을 지칭한다.
(3) 서당학규를 명명하다.
1755년 선생 29세 때 방촌에 양정숙(養正塾)을 세웠는데, 학규(學規)가 이전에 비해 더욱 상세하였다. '양정(養正)’이라는 두 글자를 병계 선생이 써서 내려 준 것이다. 양정의 뜻은 정의로운 마음을 기르는 것이다. 숙은 서당으로 보면 되겠다.
2) 학문의 폭이 확장된 30代
존재의 30代는 학문의 폭이 넓어지는 시기였다. 또한 스승 병계에 대해 학문뿐만 아니라 인격에 반해 진심으로 존경하게 되었다. 스승 병계는 존재에게 호를 내려주고 책을 구해주었다. 존재는 스승의 여행을 맞이하기도 했다.
(1) 대안강구를 독려하다.
“1757년 선생 31세 가을 덕산(德山)으로 갔다.‘대학차의(大學箚義)’와 문답(問答)를 배웠다. 당시 정시(廷試)가 있었는데 병계 선생이 가서 시험을 보라고 말씀하셨다. 병계 선생은 존재 선생의 집안이 가난하여 오래 머물며 강습할 수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식량을 주어 열흘 동안만이라도 더 머물도록 하였다. 또한 주자대전(朱子大全)이 없는 것을 아시고, 맏아들 윤심위(尹心緯)에게 “위백규가 ‘주자대전’을 공부할 수 없으니 안타깝다. 전라감영에 협의하여 한 질을 구할 방법이 없겠느냐?”라고 하였다. 시폐(時弊) 10조를 열거하여 병계 선생에게 드렸다. 병계 선생이 “이는 정치를 담당한 사람에게 글 한 통을 써서 의견을 말할 수도 있지만, 초야에서 하는 말은 무익하다. 다만 선비도 폐단을 구제할 방법을 몰라서는 안 되므로, 폐단을 구제할 방법을 조목별로 개진하는 것은 좋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대학차의란 존재선생이 쓴 사서차의 또는 독서차의의 하나인 대학에 대한 재해석을 말한다. 여기에 대해 스승과 함께 묻고 답하는 형태의 학문지도가 있었다. 당시 시대의 폐단을 거론한 시폐는 후에 보완되어 13개조이며 학교, 인재천거와 등용, 군현, 관직, 전제, 노비, 군제, 무선, 조운, 조적, 궁둔전, 전결을 말한다. 이러한 폐단을 해결하는 방법을 학교, 공거, 무선, 인재등용, 군현, 관직, 전제, 노비, 군제, 조운,조적, 전결, 궁둔전, 인리, 벌열, 호창, 승니, 관복, 돈, 봉수, 금도, 제언, 목장, 포호, 시전, 해도, 여염, 우주, 송금, 묘지, 공물, 공장, 기술 32개조이다.
(2) 스승의 여행을 수행하다.
‘1758년 선생 32세, 병계 선생께서 천관산까지 포함해서 남쪽 지방 여행을 하겠다는 말씀이 있었는데, 이해 4월 금구(金溝) 관아로 오셨다. 당시 윤심위(尹心緯)는 병계선생의 장남으로 읍재(邑宰)였다. 감영 영저리가 보낸 편지가 늦게 도착했기 때문에 바로 노령(蘆嶺)으로 가서 병계 선생 일행과 만났다. 병계 선생이 전에 말씀하신 대로 여행하려고 했으나, 무더위가 점차 심해졌기 때문에 입암(笠巖)에서 되돌아갔다. 선생을 그대로 수행해서 다음 날 정오에 태인(泰仁) 피향정(披香亭)에 올랐다. 병계 선생이 선생에게 천관산을 그리라고 말씀하시고, 손가락으로 가리켜 형세가 빼어난 곳이 어딘지 물으면서 가 보지 못한 것을 매우 안타까워하였다. 금구 관아에 도착하여 이틀 밤을 묵은 뒤 돌아갔다.’라고 존재집에 전한다.
(3) 아호를 지어주고 저서를 보완하다.
1759년 선생 33세 봄, 1760년 선생 24세 가을, 1763년 선생 37세 가을, 1765년 선생 39세 봄,‘경사차의(經史箚義)’,‘경사문답(經史問答)’, ‘정몽(正蒙)’,‘의례문답’의 궁금증을 질문했다.‘정몽’은 9권으로 장자의 저서로 우주에 대해 기술했다. 병계 선생이‘존존재(存存齋)’라는 대자(大字) 세 글자를 써서 주었다. 복시합격을 스승께 아뢰었다. 존존재 세자는 현재 존재고택에 걸려있다. 野運 위이환 연구위원은 아마 한지에 써준 세 글자를 나무판지에 거꾸로 붙여 그대로 각인한 것으로 판독한다. 이로서 병계선생의 서재이름인 존존재가 존재선생의 아호가 된 셈이다.
3) 학문의 심도에 진력한 40~50代
스승 병계가 별세하기 직전에도 제자 존재는 가르침을 받았다. 마지막 과목은 기록으로 봐서는‘근사록’이다. 또한 홀연히 감기로 떠난 스승을 그리는 존재선생은 슬픈 마음을 시에 담고 있다. 존재선생의 40~50대는 그간 스승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홀로서는 독립의 시기로 학문의 깊이가 배가되는 시기였다.
(1) ‘근사록’을 질의하다.
1766년 선생 40세 가을에 병계 선생을 뵙고,‘근사록(近思錄)’중 의심나는 부분을 질문하였다.‘근사록’은 주희선생이 저자로 도체(道體), 논학(論學), 치지(致知), 존양(存養), 극치(克治), 가도(家道), 출처(出處), 치체(治體), 치법(治法), 정사(政事), 교학(敎學), 계경(戒警), 변별이단(辨別異端), 총론성현(總論聖賢) 총 1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2) 병계 선생 잠들다.
1767년 선생 41세인 12월 7일에 병계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 학통은 이이(李珥), 김장생(金長生), 송시열(宋時烈), 권상하(權尙夏), 윤봉구(尹鳳九), 위백규(魏伯珪), 홍직필(洪直弼)로 이어지는 가교역할을 했다.
◇병계선생 부고문
屛溪尹先生以感患不幸於今月初七日未時奄云來後學 謹訃
丁亥十一月十八日 護喪 趙鎭大 上
魏 生員 座前
襄禮正月二十二日 發靷二十六日定行於鴻山座下
병계(屛溪) 윤선생께서 감환(感患, 감기)으로 불행히 금월 초 칠일 미시(未時, 13~15시)경에 문득 별세하시었음을 후학(後學, 제자)들이 일러주었으므로 삼가 부고를 올립니다.
정해년 11월 18일 호상, 조진대 올리나이다.
위 생원 좌전
장례 정월(正月, 1월) 22일에 발인하였으며, 홍산에서 장의를 행함.
위 생원은 존재 선생이다. (해설 : 野雲 위이환)
▲병계 윤봉구 선생 부고문
(3) 사제의 정이 후손으로 이어지다.
1768년 선생 42세, 12월에 병계 선생의 영전에 달려가 곡을 하였다. 스승이 그리워 마침내 절구 한 수를 읊었다.
구슬피 길게 탄식하며 옥계를 나오는데 / 悵然長嘯出玉溪
북풍 부는 빈산에 눈 내리는 시절일세 / 北風空山雨雪時
지금 같은 때는 삼태기를 멘 사람 적으니 / 如今亦小荷蕢者
내 유심과 무심을 알까 두렵지 않네 / 有心無心不怕知
주자의 ‘홀로 요금을 품고 옥계를 지나다(獨抱瑤琴過玉溪)’시인데, 송시열, 권상하 및 병계로 전해지면서 차운한 시이다.
선생께서 회옹의 시에 차운한 시〔附 先師次晦翁詩〕
천고의 시냇물 이름은 똑같이 옥계이니 / 千古溪名同玉溪
밝은 달빛에 거문고 안고서 아득히 생각해 본다 / 月明遙想抱琴時
무심한 지 오래되었다지만 무심하기란 어려워 / 無心雖久無難盡
차마 모두 잊지 못했으니 누가 알까 두렵네 / 未忍全忘却怕知
그 후에도 존재선생은 스승의 후손과 줄곧 지속적으로 교우했다. 1778년 선생 52세 때 7월 덕산(德山)을 둘러보고 돌아가신 병계 선생의 맏아들 윤심위와 윤고령(尹高靈)을 만나기도 했다.
▲병계 윤봉구 선생 친필
4. 사제像의 특징
1) 연역적 질의 - 귀납적 응답
병계는 당시 노론의 핵심이었다. 존재를 제자로 맞은 때는 병계의 나이는 이미 68세였기에 그의 사상은 이미 정립된 상태였다. 그래서 제자인 존재에게 연역적인 질의를 한다. 바로 인물성이론이나 이기일원론에 대해 존재가 증명을 하라는 것이다. 연역이란 어떤 원리가 확고히 정해진 원칙을 말한다. 원리를 있게 하는 현상을 찾으라고 존재에게 질의했다. 제자 존재를 가르치면서 생각하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들을 알게 되고, 이해하지 못했던 것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병계집에 수록된 수많은 종류의 글은 명확한 논리의 전개로 나타난 산물이며 폭넓은 인간관계 또한 학문을 발전시키는 밑거름이 되었다. 아버지 윤명운의 스승 송시열과 자신의 스승 권상하를 거쳐 이론적으로 토대가 갖추어 졌다.
그러나 제자 존재선생의 귀납적 답변으로 일관했다. 스승에겐 이미 학문이 정립된 원리지만 아직 미성숙하고 진행과정에 있었던 존재였다. 그래서 고전의 사례나 일화를 들어 다양한 방법으로 스승이 요구하는 원리를 증명해야했기 때문이다. 자연 경전을 폭넓고도 심도 깊게 연구하지 않으면 않되었다. 이러한 학문에 대한 자세는 경전에 대한 존재선생만의 독창적인 연구와 해석이 이때 이루어 졌다. 스승 병계의 ‘사서차록’은 제자 존재에게 영향을 주어‘사서차의’로 발전했다. 그만큼 스승의 영향은 컸다고 보여 진다. 또한 시폐나 구폐도 스승의 영향이 강했다. 즉, 다양한 폐단을 찾아 잘못된 원리를 찾아가는 귀납적 방식의 일환이었다.
제자 존재는 스승을 존경하여 배움을 간절히 구하는 자세를 늘 견지했다. 쪽에서 나온 푸른색이 쪽빛보다 더 푸른데 제자가 스승보다 더 나음을 말한다. 존재선생은 스승의 학문을 더욱 발전시켜 독자적인 학문 체계를 세웠다. 더 나아가 문학, 천문, 철학, 지리 등에도 괄목할만한 진보가 있었다.
2) 고기를 가진 제자 - 야채를 건낸 스승
윤봉구 선생은 공조판서를 지냈고 존재선생은 현감에 그쳤다. 판서와 현감은 엄청난 직급의 차이다. 그만큼 어린 제자 존재의 필요에 스승 병계는 충분으로 채웠다. 경륜이 충분했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 수학의 필요충분조건을 두루 갖춘 스승이랄까!
존재는 25세부터 41세까지 16년간 주로 봄과 가을 2~3차례 충청도 덕산을 방문해 며칠 ~ 수십일 씩 수학했다. 당시 스승 병계는 68세부터 84세였다. 당연히 혈기왕성한 존재는 이상이 앞섰을 것이고 스승 병계는 현실을 냉철히 직시했을 것이 분명하다. 시폐 10개조의 글을 보고 병계는 현실 비판보다 미래를 향한 대안을 찾으라고 질책하고 편달한다. 스승의 질책을 받아 들인 존재는 시폐13개조를 해결하는 구폐를 32개조로 엮었다. 조목별 연구도 스승의 지도였다. 또한 주역을 공부하는 존재에게 실물을 대나무로 만들어 보라고 혼천의 제작방법을 알려 준다.
이는 고기를 가진 제자 존재에게 야채를 주는 스승의 진면목이다. 보완의 의미요, 문제를 제기하는 학문보다 실마리를 찾는 학문연구를 지향하라는 스승의 일침이었다. 참 스승의 모델이다. 참스승 병계의 지도로 존재선생의 연구방향은 일대 전환점을 맞았다. 이상에 치우쳐 현실비판에 골몰했던 자신을 버리고 미래를 향한 대안을 찾는 학자로 나아가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존재선생의 사상을 점진론적 개혁자요, 제도의 근본에서 오류를 찾기보다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깨달음에 초점을 맞춘 실학자로 조명한다. 대학자로 불리는 존재의 학문과 사상 속에는 스승 병계의 숨결이 살아 숨 쉬고 있다.
3) 그 스승의 그 제자
(1) 강직한 스승 병계
◇1709년 尹瀗을 대신해 崔錫鼎의 「禮記類編」을 비난하는 상소를 짓다.
◇1710년 監試 一所의 終場에서 수석을 차지하였으나 試文이 격식에 어긋난다 하여 탈락되다.
◇1714년 10월, 관학 유생을 대신해서 우암을 변호하는 상소를 짓다.
◇1716년 「家禮源流」 서문의 일로 스승 權尙夏가 배척을 당하자 〈門生疏〉를 지어 변무하다.
◇1723년 申致雲의 무고로 寒水齋의 관작이 추탈되자 辨誣疏에 대해 문인들과 논의하다.
◇1724년 스승을 변무하는 〈門生疏〉를 지었으나 올리지 못하다.
◇1726년 鄭澔, 兪拓基, 閔鎭遠 등에게 편지하여 老論의 의리에 앞장서기를 권하다.
◇1727년 松禾 繼開祠에 尤庵과 寒水齋의 影幀을 봉안하다.
◇1731년 상소하여 召命을 사양하다.
◇1733년 상소하여 사직하다.
◇1739년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고 傳位한다는 거조의 잘못을 아뢰다.
◇1741년 상소하여 春宮을 보도하라는 명을 사양하다.
◇1741년 관학 유생의 복색에 대해 헌의하다.
◇1741년 報恩縣 春秋祠 宋時烈의 影堂에 孔子와 朱子의 追奉을 주장했다 하여 삭탈관직되다.
◇1744년 상소하여 天理의 보존과 人慾을 막는 공부에 정진하기를 청하다.
상소하여 모든 일은 분수와 한계에 따라 처리할 것을 청하다. 종묘를 배알할 때 대전, 중궁전의 拜位, 拜禮에 대해 아뢰다.
◇1745년 御製常訓의 일로 소를 지었으나 올리지 않다.
◇1748년 道統을 栗谷, 尤庵, 寒水齋로 이어 沙溪 金長生의 자손들과 분쟁이 생기다.
◇1750년 상소하여 尹拯의 致祭를 반대하다.
◇1763년 병으로 인해 상소하여 체직되다.
◇1764년 사판에서 삭제되다.
◇1767년 「裕昆錄」 중 스승 권상하와 관련된 일로 신변하는 상소를 올리다.
(출처 병계집)
앞에서 나열했듯이 병계 선생에게 여러 번 환란의 시기가 찾아왔다. 아니 찾아왔다기보다 자초한 편이 맞다. 바로 학통으로 이어진 송시열에 대한 문제로 상소를 올려 반대파의 공격에 어려움을 겪었다. 심지어 아버지의 스승인 송시열과 본인의 스승 권상하를 변호하다가 삭탈관직을 당하는 수모를 당했고, 사(士)판에서 삭제되기까지 했다. 모두 자신의 사욕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라 대의명분으로 생각하여 옳은 길이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후 복직되어 판서까지 이르렀지만 그의 삶은 강직으로 인해 파란만장했다.
(2) 강직한 제자 존재
이런 스승의 성품을 이어받았고 선천적으로 제자 존재는 고지식할 정도로 강직했다. 타협할 줄 모르고 원칙만을 늘 고수했다. 당시 여러 폐단을 구하기위해서는 원시유학으로 돌아가 경전의 바른 해석에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스승의 사서차록을 모방해 독자적인 독서차의를 저술했다.
또한 존재선생은 학행으로 옥과현감에 제수되었다. 공납과 부역같은 세금정책, 군사분야 및 사회개선책에 이르기까지 그는 강직성으로 인해 옥과서원에 배향되었다. 또한 서원 경내에 세워진 거사비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결국 여러 무리가 겹쳐 갑자기 찾아온 질병으로 파직되었지만 존재선생의 개혁적 리더십은 스승에게 배운 강직함에서 기인한다.
5. 맺음말
‘그 스승의 그 제자’란 말을 자주 쓰곤 한다. 학덕높은 스승과 똑똑한 제자를 뜻하는 존대의 글귀이다. 윤봉구와 위백규의 사제관계도 '그 스승의 그 제자'라 불러도 억지는 아니다. 위백규 선생은 2015년 한중일 3개국을 대표하는 99인의 실학사상가 사전(事典)에 당당히 올랐다. 정조대왕과 다산 정약용도 함께 했다. 이런 영광 뒤에는 스승의 역할을 절대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 이 글을 쓰게 되었다. 지나고 보면 세상사 모든 일이 우연이 아니듯 윤봉구와 위백규의 사제 간의 만남도 어쩌면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리라.
역추보추라 했던가!
함께 내딛는 발걸음은 늘 좁고 험한 길을 향하고,
어느 누가 사제동행이라 불렀던가!
위대한 경륜은 문집에 나란히 남아 후세에 회자되네.
사엄도존이라 했던가!
사제의 위엄과 존귀는 사대부의 거울이었고,
그 누가 정문입설이라 불렀던가!
스승의 정 못잊어 후손과 교류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 지.
▲병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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