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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북장흥위씨 기록물, 월명송(月明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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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월명송 2집~11집까지 10권)

 

 

올해(2017) 월명송 창간 32주년이다.

성균생원공(諱 自恭) 관북이거 584주년(1434, 세종15기준), 관북장흥위씨종친회(회장 위성열) 창립 37주년(1981창립기준), 월명송 창간 32주년(1986창간기준)이다. 남북분단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이산가족이 된 남한거주 관북파 종친들은 세대 간의 단절을 극복하고 관북장흥위씨 역사를 문자로 남겨 후세에 전하려 하셨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관북장흥위씨 종보인월명송을 창간하게 되었다. 격년제로 발간되는 월명송은 1(1981.9)을 시작으로 11(2015.10) 발행까지 35년 동안 관북장흥위씨의 문화창달 정보매체로서 자리매김을 해왔다. 이에 대해‘1986년 장흥군 용산면 계산리 옛 사월방(沙月坊) 그 자리에 있는 사월재(沙月齋) 마당에 관북입조이신성균생원공 휘 자공(自恭) 유장비를 건수하면서 그 감격을 기록으로 담아놓기 위해 자청해서 관북종친회보月明頌을 제작한 이후 그 인연으로 작년(2010)까지 월명송 8,장흥 위씨 종보16호를 발행하였으니 어언 한 세대가 흐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살아 계시는 위씨의 기록이시다’(출처:원산 위정철 원로와의 대담2)라고 편집을 자처한 위재형 월명송 편집장과 월명송을 발간하게 된 동기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관북장흥위씨 역사의 보물창고(寶物倉庫)이다.

월명송은 1~11(1981~2015)에 이르기까지 게재자는 56명이며 글 수는 235편이다.(별첨)

게재자는 편집실(42), 위재형(27), 위성호(17), 위봉열(16), 위태선(7), 위기숙(6), 위보혁(6), 위원석(6), 위재균(6), 위정봉(6), 위정옥(5), 위정찬(5), 위대선(5), 위순환(4), 위우량(4), 위자형(4), 위정철(4), 최영숙(4), 기타 39(67)으로 분류된다. 27편을 기고한 松堂 위재형 월명송 편집장은 문중관련 글이 17편으로 가장 많고 일반논문, 수필, 여행기 등이다. 桂沙公(휘 성호)께서는 17편 중 수필 1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문중관련 글로 문중논문, 대종회, 종친회, 유물, 인물 등 다양하게 싣고 있다. 위 두 분과는 달리 위봉열 종친은 시와 수필을 주로 투고했다. 관북파가 아닌 대종회 소속에서도 , 대종회장(위자형, 위찬호), 도문회 임원(위정철, 위정우,위인환, 위황량), , 재경종친회장(위옥량, 위승렬)이 다수의 글을 게재했다.

 

월명송은 월명사에서 유래한다.

관북장흥위씨 종친회 초대감사를 역임한 松堂 위재형(38, 관북파, 1924년생, 함흥 반송리출신, 교육자) 관북종친회장이 작명한 종보 월명송(月明頌)의 유래는 월명사(月明祠)이다. 월명사의 소재지는 함경남도 신흥군 원평면 중상리로 월명산 기슭에 있다. 월명사는 성균생원공(成均生員公/ 16)을 주벽으로 병조참의(휘 세충/19), 중랑장 (휘 충신/19), 선략장군(휘 극명/20), 보공장군(휘 승서/25), 황해병사(휘 한량/25), 호조참판(휘 윤량/25), 보공장군(휘 승신/25), 군자감(휘 해남/26), 도승지(휘 정상/28)까지 모두 10분을 배향한 관북파의 성지요, 사우이다. 월명송 2집에 따르면 “1930년도 신흥군지의 통계에 의하면 군내 거주 위씨는 모두 338호였고, 우상리 3개 마을에 무려 200, 요중리에 30, 주양리에 20, 도상리에 30, 나머지 기타 면에 산재 거주했다는 것이다. 또 그해 도지에 따르면 도내 거주 위씨는 779호이고 평북 구성에 150호가 살았다라고 위씨 세거지와 가구 수를 구체적으로 밝혀 관북에서 차지하는 위씨 세력이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월명송 표지에는 관북장흥위씨의 염원이 담겨있다.

월명송 표지(11)를 분석해보면 관북파 후손들의 간절한 염원이 엿보인다. 망향비(3개 표지), 사월재(3개 표지), 족보(2개 표지), 관북자연(3개 표지)으로 구분된다. 먼저 관북장흥위씨 망향비(望鄕碑)(9~11집 표지)는 관북장흥위씨의 상징물이다. 관북장흥위씨는 사월재에 성균생원공의 관북입조비를 비롯 종기(宗旗), 종가(宗歌), 종보(宗報) 그리고 관북장흥위씨, 재각 경일사(敬日祠) 등 많은 상징물을 만들었다. 관북파 종친들이 수는 미미하나 그나마 이를 단합하여 여러 가지 소중한 작업이 이루어졌다. 종보월명송과 종가관북종인의 노래는 위재형 관북종친회장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2006년 제작된 종기와 강원도 철원군 갈말읍 강포리 388번지에 세워진 망향비(望鄕碑)와 경일사(敬日祠)는 위재균 관북종친회장이 주도하에 건립되었다.

다음으로 사월재(1, 7,8집 표지)장흥군 용산면 계산리에 위치한다. 관북(關北) 입북조 생원공과 수원白氏할머니 위패(位牌)를 모신 재각이다.

  또한 족보(4, 5집 표지)는 우리 문중 족보를 처음으로 만들고 1820년 작고하신 만암공을 기억하고자 하는 의도이다. 족보란 동일한 조상을 가진 혈족으로 부계(父系)의 계보이다. 멀리 본관 장흥과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근본만은 잊지 않으려는 혈정에 기초한 본심에서 나왔다. 만암공은 저서로 만암집(萬菴集)이 있고 보의설(譜疑設)의 주창자로 남유계항(南有桂巷)이요 북유만암(北有萬菴)으로 불리워진다. 그래서 만암공을 그리워하고 그 공로를 인정하려는 일환이다. 남북으로 갈라져 있어도 족보만큼은 꼭 간직하고 후세에 전하려는 거룩한 뜻에서이다.

마지막으로 관북자연(2, 3, 6집 표지)에 대한 그리움을 읊고 있다. 백두산 천지와 함경도 함흥의 만세교 그리고 고향을 그리는 해()와 산()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특히 제3집의 함흥 만세교 삽화는 대구에 거주하는 위성국 종친이 보내준 낡은 사진을 보고 위영준 종친이 직접 옮겨 그렸다.

 

월명송의 첫 번째 주제는 그리움과 단절, 그리고 새 희망이다.

그 리움과 단절의 아픔은 월명송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로 나타난다. 부모, 형제, 자식과 헤어져 수 십 년간을 가슴속에 품고 살아가는 원통함을 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분단 1세대(위재형, 위봉열, 위태선, 위재균, 위대선, 위광도, 위성열 등)에서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栢山 위대선 명예회장의우상동 가는 길(2)’에서는 지금은 가고파도 못가는 山河지만 눈에 선한 그 산하를 여기 글로나마 적어 두고자 함은 후세를 위하는 마음 때문이다.”‘위태선 대종회 사무국장의 望鄕(나는 우노라!)’에서는 정든 산천아! 그리운 사람이여, 지금 어디에서 몸부림 치느냐! 나는 영흥군 橫川面 下坪239번지에서 태어났다.”, 위재형 편집장의산수, 망향기(傘壽, 望鄕記)’에서저 하늘 떠돌아다니는 흰구름아, 형님 소식을 안다면 전해다오! 때가 되면 찾아오는 들아! 형님 소식을 너는 아느냐!”라고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또한 월명송에서 그리움과 단절을 넘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여 2세대, 3세대 후손에게 밝은 미래를 전수하고자 새 희망을 노래하고 있다. 더 나아가 남북이 통일되어 남북의 친족들이 만날 때를 대비하여 월명사의 위치와 고향주소, 후손에게 전하는 글 등을 자세히 기록으로 남겼다. 이는 분단의 역경을 극복하고 고귀한 혈정을 기반으로 미래로 전진하고자 하는 관북장흥위씨의 간절함의 표현이다.

 

월명송의 두 번째 주제는 관북장흥위씨의 우수성이다.

성 균생원공(成均生員公) 후손들의 우수성은 文鼎 위보혁 고문(37)오천엽의 애환이라는 글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남쪽에 장원봉의 주인공 원감국사 삼형제(원개, 문개, 신개)가 있다면 관북에는 북도능전지(北道陵殿誌)를 편찬한 호조참의공(諱 昌祖)을 비롯 훈도공(諱 榮祖), 서포공(諱 弘祖)이 있다. 삼형제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월명산 삼용(三龍)으로 불리며 관북장흥위씨와 정상파(定相派) 후손의 우수성을 싣고 있다.

圓山 위정철 씨족문화연구소장의 장흥위씨 요람의 내용을 보자. 조선왕조 503년 동안 조선전체 문과 합격자는 14,600(750개 씨족)으로 한해 29명꼴로 배출되었는데 장흥위씨 문중은 총 12명으로 그중 관북파인 함흥출신 급제자가 11명이다. 1664(魏定相)부터 1880(魏翼源)까지 216년간이나 이어졌다. 또한 생원시(진사시포함) 합격자는 장흥위씨 문중 27명중 63%17명이 1610(魏景業)부터 1888(魏楨軾)까지 278년간 이어졌다. 문과와 4명중 3명이 겹치지만 음직도 모두 관북파이다. 이런 일은 성균생원공 관북이거 기준년도인 1434년부터 1610, 1664년은 176, 230년 이후이다. , 본관은 남부지역인데 북쪽의 주요지파로 자리 잡은 대표적인 사례로 200년이 되어서야 관서지방 주요 세력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만큼 관북장흥위씨는 과거라는 제도를 통해 지배 엘리트를 배출해 씨족으로서 그 기반을 공고히 하여 지역의 중요세력으로 성장하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문중 세력을 집중하고 이를 유지하기위해 종족을 철저히 교육시켰고 조선시대 양반가로서의 본향 장흥의 생활양식(월명사 건립, 족보편찬, 세거지 정착, 후손교육 등)을 함흥에 구축하려고 노력하였다. 조선은 과거라는 개방성을 통해 서북지역을 안정화시키고 조선의 장기적 존속을 시도한 것이다. 관북파는 국가정책을 잘 활용하여 내적으로는 관북파를 단합시키고 대외적으로는 문중세력을 과시하는데 적극 활용했다고 보여 진다. 한마디로 관북장흥위씨는 양반계급으로서의 특권인 과거제도를 통해 지배계급으로 성장했고 관료제라는 틀 안에서 지배계급인 관료를 많이 배출한 문중으로 기록되어진다.

  이에 대해 좀 더 객관적인 자료인 서북지역 문과 급제자에 대해 에드워드 와그너(Edward w. wagner 1924~2001)가 쓴 저서조선왕조 사회의 성취와 귀속이라는 저서를 참조해 보자.‘장흥위씨 출신 급제자 12명 중 11명이 서북출신인 것이다. 이는 원래는 남부지역의 씨족인데 한반도 북쪽에 주요한 지파로서 자리 잡은 사례이다. 서북지역 출신 급제자들은 대부분 15세기에 조직적으로 삼남지방에서 서북지역으로 사민(徙民)시킨 삼남지방 사람들의 후손인 것으로 보인다.‘또한 서북지역 문과 급제자 일람표(1776~1875)에서 모두 함경도 함흥출신으로 1664년 처음으로 문과 급제자를 배출했다. 사마시 급제는 1610년 처음으로 합격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장흥에서 이거한 관북장흥위씨들이 서북지방인 함흥인근에서 토착세력으로 성장하는데 있어서 주요 핵심은 바로 과거제도였다.

碧泉 위윤기(35, 청장년회 총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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