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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소위치 :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산 95번지 장천재(長川齋) 뒤 횡결임좌(橫結壬坐)
◎ 묘갈명 내용 : 公의 諱는 廷烈이요 字는 士謙이다. 遠祖는 鏡이니 처음 당인으로 동방에 나와 신라에 벼슬하여 懷州君에 봉되니 회주는 지금의 장흥부로 자손이 본관을 삼고 대대로 살아왔다. 그 후에 수태보인 충렬공 繼廷이 고려 명신이 되어 예종 묘에 배향되었고 합문지후 种은 혁명 초를 당해 前朝를 위하여 회복을 도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杖配되었으며 오대손인 참봉 휘 晉賢에 이르니 공에게는 曾祖가 된다. 祖의 휘는 鯤이니 진사요 考의 휘는 德厚니 효우로 추천되어 제용감 판관에 임명되었으며, 비는 청주金氏니 忠信의 女다. 公은 어려서 준엄하고 지기가 범상치 아니하여 나이 14세 때 독신으로 왜구 수십 명을 쫒아가 노략질 한 것을 빼앗아 돌아오니 사람들이 모두 장하게 여기었다. 선조 계묘 1603년에 무과에 올라 처음 벼슬이 선전관으로 녹도만호로 나가게 되었는데 재상이 서신을 보내 귤을 찾으므로 公이 회답하기를 금년에는 귤이 적으니 請컨대 많이 열 때를 기다리소서 하였다. 만기가 되어 備邊司郎廳으로 들어왔는데 諸宰가 모여 앉아 말이 邊鎭事에 미치자 말하기를 鎭將이 오로지 자기만 살찌려 하고 戰具를 다스리지 아니한다고 하니 公이 나아가 말하기를 邊鎭에 常俸이 없고 大臣은 求함이 있으나 주지 못함을 근심하는데 어느 겨를에 자기가 살찌겠는가 하므로 一座가 실색하니 그 伉直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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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梧里 李公(李元翼)의 아는바가 되어 仁祖 丙寅 1626년에 李公의 부름으로 부임하여 體府의 幕僚로 있었으며 仁祖 丙子 1636년 9월에 材幹으로 熊川縣監에 임명되었다.
겨울에 오랑캐가 대거 침입하여 大駕(임금의 수레)가 남한산성에 머무를 때 성을 포위함이 심히 급하게 되자 公이 분발격려 하는데 諸邑鎭이 외축되어 감히 진군하지 못한지라 兵使 閔 泳에게 勤王하기를 재촉하자 민 영이 八營兵을 거느리고 啓行(앞장서서 길을 이끌어줌)하니 公이 本縣兵을 앞에 이끌고 竹山 雙橋에 이르렀을 때 적이 병사를 놓아 掩殺하며 오니 諸軍이 크게 패배하였다. 公이 홀로 칼을 휘두르면서 크게 소리치며 싸우면서 물러나므로 적이 싸움에 이긴 기세를 타고 멈추지 않고 끝까지 쫒으니 때는 밤이라 어둡기가 칠흑 같은데 앞에는 단안이 있는지라 公이 죽음을 決하려고 하므로 手下에 老吏가 있어 만류하기를 밤에 亂軍 속에서의 죽음은 개천에서 목을 매어 죽은 것과 다름이 없으니 脫身하여 뒤에 도모한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므로 公이 이에 남은 무리를 收合하니 무리가 이미 흩어져 없으므로 드디어 單騎로써 포위망을 무너뜨리고 縣으로 돌아왔다. 얼마 안 되어 御使가 縣에 이르러 公의 소홀함에 노여움을 품고 하찮은 일로 꾸짖으니 公이 抗言하여 조금도 굽히지 않으므로 御使가 더욱 성질을 발끈 내니 公이 드디어 그날로 벼슬을 버리고 二奴로 말을 끌게 하고 一婢로 옷상자를 이게 하여 行하였다. 이로부터 다시 벼슬하지 아니하고 孝宗 丙申 1656년 9월 22일에 沒하였으며 宣祖 庚辰 1580년 12월 2일에 출생하였으므로 壽는 76세요, 장천동 壬坐原에 葬하니 선영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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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판관공(德弘)이 公의 형제를 가르침에 法度를 두었고 죽음에 이르자 손수 글을 써서 심히 惓惓하게 하였으니 公의 兄은 都事인 廷勳이요, 동생은 廷鳴이니 모두 俊才가 있으므로 사람들이 三難(세분의 우열을 가릴 수가 없음.)이라고 일컬었다. 仁祖 甲子 1624년 이괄의 난을 당하여 公의 형제가 바야흐로 집에 있었는데 급히 同志 약간 인을 거느리고 義兵을 모집하고 북상하여 청주가까이 이르렀는데 亂이 이미 평정되어 그만두었으며 仁祖 丁卯 1627년 호란에 또한 義兵을 일으켜 沙溪(金長生)선생 號召使 격문에 응하였으나 화친이 성립됨을 듣고 물러났고 仁祖 丙子 1636년에 이르러서 公은 직위를 가지고 勤王하였다. 伯氏(廷勳)와 季氏(廷鳴) 二公은 또한 牛山 安邦俊과 함께 起義하여 행군한지 5일 만에 또 講和가 성립됨을 듣고 통곡하며 돌아오니 대개 家庭에서의 敎養과 磨勵가 하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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君父의 어려움을 만나 직책의 있고 없음에 관계하지 아니하고 솔선하여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士衆을 규합하여 남보다 앞서 급히 달려가 매같이 드날리고 급한 물이 둑을 깨뜨리듯이 함은 忠義가 奮激하여 사람을 감동시키지 아니하면 어찌 능히 이를 이루리오. 당시 邑鎭으로 하여금 사람들이 公의 士民처럼 힘을 다하고 사람들이 公의 형제처럼 힘을 다했다면 되놈이 비록 포악하나 어찌 우리를 汚辱하겠는가. 걸연히 公같은 분이 겨우 한두 사람 나타나 형세가 고단하고 힘이 다 되어 그 뜻을 펴지 못하고 마침내 늙어 버려 고향에서 죽으니 어찌 時運이며 命阨이겠는가? 애석하도다. 公이 歿한 뒤 100여년에 현손 伯珪가 학행으로 조정에 알려져 우리 寧考(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린 임금의 뜻)인 正祖大王이 특별히 소견하고 포상하여 玉果縣監에 특별히 임명하니 朝野에서 지금까지도 영광으로 여긴다. 公이 비록 자신에게는 괴로웠으나 능히 후손을 잘 두었다고 할 것이니 어찌 蔭德에 보답함이 아니리오. 이어서 銘하노니 저들이 달려와 다투니 脂와 韋같이 부드럽게 하였네. 나는 활의 시위처럼 곧으니 손을 거두고 물러갔네. 天冠山 아래 四尺의 높음이 있으니 이는 오직 어진 使君(지방관을 말함)의 무덤이니 지내는 자 반드시 공결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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崇政大夫原任 行吏曹判書兼判義禁府事知 經筵春秋館事同知成均館事弘文館提學世子左賓客 金魯敬 찬(撰)하다.
崇禎紀元後四 乙未 淸明日 立

웅천현감공 위정렬과 김노경 선생의 행장을 살편본다.

웅천현감공 위정렬(22세 1580~1656) : 제용감판관을 지낸 안항공 위덕후와 공인(恭人) 청주金氏의 둘째 아들이다. 1603년 완도 고금도에서 실시된 무과에서 종제 정철과 함께 급제하였다. 이후 녹도만호(鹿島萬戶)와 비변사낭청(備邊司郎廳)을 거쳐 1626년 도체찰사 오리(梧里) 이원익 부름으로 체부(體府)의 참모로 재임하였다. 조정은 호란 후 남해안 강화를 위해 公을 발탁하고 1636년 9월 웅천현감(熊川縣監)에 임명했다. 그해 12월 병자호란이 발발해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길에 올랐을 때 
전란의 진관(鎭管)체제에 따라  경상우도병마절도사의 휘하 제장인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로 참전하였다. 남한산성에서 40리(16km) 떨어진 경기도 광주의 쌍령(雙嶺)에 진(陣)을 친 근왕군, 병마절도사 민영(閔栐 ?~1637) 장군이 오랑캐 후금 군사에 포위되어 전사하고 휘하 부대가 군율을 잃자 公이 앞장서 지휘하여 포위망을 뚫어 웅천현으로 돌아왔다. 인조의 항복으로 병자호란이 끝난 후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서 여생을 마쳤다.
 

 

김노경(경주人 1766~1837) : 자는 가일(可一), 호는 유당(酉堂) 영의정 김흥경(金興慶)의 증손,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의 손, 형조판서 김이주(金頤柱)의 자이며, 秋史 김정희(金正喜)의 생부이다. 1801년(순조 1) 선공부정(繕工副正)을 지내고, 1805년 현감으로서 증광 문과에 급제하여 지평, 승지를 거쳤다. 1809년 동지겸 사은부사로 북경에 다녀왔다. 이후 이조참판 및 경상도와 평안도의 관찰사를 지냈다. 1819년 예조판서를 지낸 후 이조·공조·형조·병조판서를 지냈다.  이후 1822년 동지사로 북경에 다녀온 후 대사헌을 거쳐 1827년 판의금부사·광주부유수·지돈령부사 등의 요직을 거치고 익종이 대리청정을 할 때 김 로(金 鏴)·홍기섭(洪起燮) 등과 같이 중직에 있으면서 전권을 행사하고 이조원(李肇源)의 옥사를 밝히지 않았다는 이유로 1830년 지돈령부사 재직 중 삼사와 의정부의 탄핵을 받아 강진현의 고금도(古今島)에 유배 되었다가 1833년 풀려나 판의금부사를 지낸 뒤 1837년에 졸하였다. 1857년에 시원임대신(時原任大臣)의 연차(聯箚)로 신원되고 관직이 복구되었다. 글씨를 잘 써 아들인 김정희, 명희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신라경순왕전비> <신의왕후탄강구묘비> 등의 글씨가 전한다.

1.웅천현감공 위정렬의 관직에 대한 고증자료
- 公은 임란 후 24세 때 1603년(선조 36) 완도 고금도에서 실시된 무과에서 종제 정철(廷喆)과 합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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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과 급제 홍패가 현존하여 방촌유물전시관에 전시되고 있다.

 - 묘갈명에서 녹도만호(鹿島萬戶)에 대한 내용으로 ‘재상이 서신을 보내 귤을 찾으므로 公이 회답하기를 금년에는 귤이 적으니 請컨대 많이 열 때를 기다리소서 하였다.’ 는 내용으로 보아 재임을 기술하고 있다. 정확한 재임시기는 알 수 없으며, 당대 재상(宰相)은 조선조에서 영의정을 다섯번 지낸 오리(梧里) 이원익(1547~1634)으로 추정된다. 녹도진(鎭)은 전라좌수군절도사(정3품 上) 산하에 사도진, 여도진, 방답진, 발포진과 더불어 5포에 해당되며 책임군관은 만호(萬戶 종4품)이다. 이중 녹도진(鎭)은 현재의 전남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녹동이다.

필자는 위 내용을 근거로 고흥문화원(원장 송시종)에 의뢰하여 公의 녹도만호 역임에 대한 선생안 등 자료를 확인하였으나, 역임 관련 자료가 확인되지 않았다. 이는 조선시대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 지방관 즉 원님(사또)들의 선생안 자료는 전국 시·군·구(문화원)에서 대부분 정리되어 현존한다. 이에 반해 지금의 군 부대장이라 할 수 있는 첨사(僉使), 만호(萬戶)와 교통수단 역(驛)을 관리한 찰방(察訪)의 역대 선생안 등 체계적인 기록자료가 현존한 사례는 드물다. 고흥문화원에서도 같은 실정임을 확인하였다.

  - 비변사낭청(備邊司郎廳)에 재임하였다. 비변사는 조선 중·후기 때 비상시 최고 의결기구인 의정부를 대신해 국정 전반을 총괄한 최고의 관청이며, 낭청은 소속 종6품 관원이다. 정확한 재임시기는 알 수 없다.

  - 웅천현감 재임은 1636년 9월 임명되었다. 그해 12월 병자호란이 발발하여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 들어가 항전하다가 추위와 후금의 고립 작전으로 1637년 1월 30일 항복하고 삼전도에서 굴욕을 당하였다. 당대 진관(鎭管)체제는 성주, 선산, 금산, 개령, 지례, 고령, 문경, 함창 등 8지역은 상주진(尙州鎭)에 창원, 함안, 거제, 고성, 칠원, 진해, 웅천 7지역은 김해진(金海鎭)에 합천, 초계, 함양, 곤양, 남해, 거창, 사천, 삼가, 의령, 하동, 산음, 안음, 단성 등 13 지역은 진주진(晉州鎭)에 속하여 총 28 지역의 부사, 군수, 현령, 현감 등이 전란이 발발할 때에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의 산하 지휘 군관에 소속된다. 병자호란 때 경상우도병마절도사는 민 영(閔 栐 여흥人 1587~1637)으로 1637년 1월 3일 남한산성 근처 광주 쌍교전투에서 패하여 전사(戰死)한 내용과 公의 참전을 묘갈명에서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민 영 병마절도사의 행적은 국조방목(目)과 여흥민씨 대종회에 의뢰 확인하였다.(전자족보 담당 이사 민주백)

1987년 진해시에서 발간한「진해시사(鎭海市史)」와 1993년 진해문화원에서 간행한「웅천현읍지(熊川縣邑誌)」에는 웅천현감 역임사실에 대한 재임기간 등 상세한 기록은 없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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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현감 인명에서(6줄 처음) "위정렬 거장흥(魏廷烈 居長興)"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웅천현(熊川縣)은 지금의 경남 창원시진해구 웅천동이다.(진해문화원 사무국장 정남식)

2.묘갈명 중요 내용
장흥위문 내 묘갈명을 포함한 대부분의 비문 서두에 시조공(鏡), 충렬공(5세 繼廷), 합문판사공(14세 种)과 해당 파조(派祖), 고조(高祖), 증조(曾祖), 조(祖), 부(父)를 간략히 기술하고 비문의 주인 행적을 기술한다. 다음 子와 孫을 간략히 기술함은 찬(撰)의 통상적인 순이다. 웅천현감공 묘갈명에서도 이 같은 순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말미에 ‘公이 몰(歿)한 뒤 100여년에 현손 伯珪가 학행으로 조정에 알려져 우리 寧考(나라를 편안하게 다스린 임금의 뜻)인 正祖大王이 특별히 소견하고 포상하여 玉果縣監에 특별히 임명하니~’ 라고 기술하고 있다. 웅천현감공은 존재(伯珪)선생의 고조부가 된다. 다른 비문과 달리 특별하게 현손의 행적을 기술하고 있다.

어려서 公의 3형제는 伯父 판사공(德弘)과 仲父 청계(德毅)선생가르침을 받았다.
1624년 이괄의 난을 당하여 형제인 청금(聽禽) 정훈, 아우 반계(磻溪) 정명은 義兵을 모집하고 북상하여 청주까지 출전을 기술하고,
1627년 정묘호란 때 형 청금(聽禽) 정훈, 아우 반계(磻溪) 정명과 종형 정망(廷望), 정헌(廷獻)은 의병과 군량을 모아 양호호소사(兩湖號召使) 사계(沙溪) 김장생 격문에 응해 국난에 참여하고 난리가 수습된 후 귀향하였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 청금(聽禽) 정훈, 아우 반계(磻溪) 정명은 우산(牛山) 안방준의 격문에 응해 출전 등 국난 극복 참여를 기술하였다.

묘갈명을 세운지 184년이 지나 글자의 식별이 어려워 현감공의 子 동식(東寔), 동헌(東憲)의 인명은 확인되지 않고, 孫 삼족당공(世寶), 춘담공(世璘), 세영(世瑩)공, 세감(世瑊)공의 인명은 확인되었으나 지장록 묘갈명 원문과 국역문에는 子와 孫의 인명이 생략되었다.

묘갈명에 崇禎紀元後四 乙未 淸明日 立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는 명(明)의 연호 숭정기원(1628년), 뒤의 네 번째 을미, 즉 1835년(乙未) 청명일(4월 5일)에 세웠다.

3.발견경위
필자는 2016년 10월 15일 장천재 시제 때 현감공 묘갈명 사진을 채증했었다. 1999년 기묘대동보 지장록 p674 웅천현감공 묘갈명 원문 및 국역문 내용과 채증 사진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현손 존재선생의 행적을 기술한 사실을 확인하고 찬(撰)한 인물, 묘갈명 근수(謹竪) 시기 등에 의문이 생겼다. 비문을 지은 김노경 선생은 추사(秋史) 김정희 선생(충남 예산 태생)의 생부로 생은 1766년, 졸은 1837년이다. 묘갈명을 세운 사람은 기록되어 있지 않아 알 수 없었고, 말미에 존재선생을 기술하고 있어 선생의 아들 송오공(道立, 1748~1808), 양천공(道及, 1754 ~1821) 때 세웠을거라 추정하였으나, 두분은 묘갈명을 세우기 前에 별세하였음을 족보에서 확인하였다.

 

존재고택에서 거주하고 있는 웅천현감공의 12대 종손 위재현은 9대조 영이재공(文德)부터 선친 수암(守菴) 계환까지 9대간, 고택에서 소장해온 유품 1,000여점을 2018년 12월 광주광역시 광산구 소촌동에 위치한 재단법인 한국학호남진흥원에 연구 목적으로 기탁하였다. 이 유품중에 1830년~1833년 김노경 선생이 강진 고금도 유배 때 선생과 아들 김명희(1788~1856)가 존재선생의 손자 위영억(1788~1841)과 교류한 서간(書簡 편지)이 확인되었다. 이 시기에 6대조 현감공의 묘갈명 찬(撰)을 청(請)했을거라 사료된다.

4.서간 현황 및 내용
김노경 선생 서간은 1832년  3건, 1836년 서간 1건,  김명희 선생 서간은 1832년 1건 등 총 5건이 현존한다. 이중, 김노경 서간 2건과 김명희 서간 1건을 소개한다.

 1)1832년(壬辰 순조 32) 7월 12일 귀양살이 중인 김노경(金魯敬)이 위영의(魏榮嶷)에게 보낸 편지이다.

김노경 글 (1832년).jpg

자신은 머리가 닿는 좁은 집에서 무더위를 만나 감내하기 힘들다는 말과 정중하게 안부를 물어주시니 감사함을 말로 다할 수 없다는 말을 표현하였다.
 2)1832년(壬辰 순조 32) 12월 13일 김명희(金命喜) 선생이 위영억(魏榮嶷)에게 보낸 편지이다.
김명희 글 (1832년).jpg
자신의 부친께서는 근래 감기에 들어 여러 날을 편찮으셔서 가슴이 타들어간다는 말과 절해고도에서 세모를 맞으니 심정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는 말을 하였다. 당신 선친의 원고 1책을 그간에 찾아내어서 이에 돌려보내니 받아주시라는 말과 달력 4장을 보내드리니 두 장은 종씨(從氏)에게 나누어주라는 말도 표현하였다.
 
 3)1836년(丙申 헌종 2) 5월 10일 김노경(金魯敬) 선생이 위영억(魏榮嶷)에게 보낸 편지이다.
김노경 글 (1836년).jpg
가뭄 끝에 단비가 내려서 농사에 위로가 되었는데 온 나라가 균등하게 혜택을 입었는지는 모르겠다는 말과 자신은 그간에 선조 무덤을 이장하는 일을 하였는데 애통함이 새롭다는 말을 하고 마침 고금도로 가는 편이 있어서 편지를 보낸다는 말을 표현하였다.

5.병계 윤봉구 선생과 김노현 선생의 관계
병계 윤봉구 선생과 존재 위백규 선생 간의 사제(師弟)의 연은 1751년 존재 선생 25세 때 맺어진다. 집안 내 간암처사공 위세옥(1689~1766) 선생과 존재 선생은 10촌 종손(從孫)간 이다. 처사공은 상원군수공 위동전과 숙부인 금성羅氏의 자로, 아버지가 관직에 몸담고 있어 한양에서 태어나 고관대작의 자제들과 벗이 되어 생활하였다. 이들중에는 훗날 공조판서 문정공(文正公)공 이 재(李 縡 1680~1746), 공조판서 문헌공(文獻公)공 윤봉구(尹鳳九 1683~1767), 우의정 문헌공(文憲公)공 민응수(閔應洙 1684~1750), 호조참의 직암(直菴) 신경(申暻 1696~?) 등은 고위 관직에 오른 대표적 인물이다. 윤봉구와 신경은 매제(妹弟)간이며, 신경은 1759년 장흥위씨 기묘초보의 서문(序文)을 썼다. 처사공은 1721년 33세 때 한양생활을 청산하고 선친의 고향이자 두 형님이 살고 있는 관산읍 방촌리로 귀향한 후 여러 차례 한양과 방촌을 오가면서 관직에 몸담고 있는 지기들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처사공 63세 때 총명하고 영특한 존재 선생을 예산 덕산에서 거주하고 있는 지기 병계 선생에게 보내 문하에서 학문을 수학케 주선하였다. 훗날 병계선생은 존재선생의 실학적 학문과 사상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웅천현감공의 묘갈명을 김노경 선생이 찬(撰)한 배경은 존재 위백규 선생이 있다. 스승 병계선생은 1683년 생, 1767년 졸한다. 김노경 선생은 병계선생이 별세하기 1년 前 1766년 생, 1837년 졸한다. 두분의 공통점은 태생이 충청도 예산이며, 세자를 교육하는 시강원에서 병계선생은 찬선(정3품), 김노경 선생은 좌빈객(정2품)을 지냈다. 존재 선생의 손자 위영억이 6대조부 웅천현감공의 묘갈명을 세웠다. 이과정에서 병계선생과 김노경 선생과의 연결고리를 조명하려고 예산문화원(원장 김시운), 추사고택 관계자, 홍성군 거주 손세재 철학박사, 강희진 예산 토종 씨앗 박물관장 등 예산군 향토사 전문가들을 상대로 확인하였으나 확인되지 않는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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