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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백규 옥과현감의 리더십 연구 2-1

벽천 2019.06.17 15:00 조회 수 : 249

 

 

                      위백규 옥과현감의 리더십 연구
                         (3대 행장을 중심으로)


                                                                                        碧泉 위윤기(35世, 씨족문화연구위원


 

 

  위백규 선생의 동상 좌상(坐像)은 장흥 존재공원 경내에, 기존의 입상(立像)은 장흥 회주공원 경내에 자리 잡고 있다. 한 지역에 두 기의 동상이 우뚝 서있는 것은 그만큼 이 지역을 대표하는 핵심인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단적인 증거이다. 장흥이 문향(文鄕)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것 또한 존재선생의 높은 학덕이 천관산을 넘어 멀리 한양에 이르기까지 조선전체에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리라.
 요즘 존재기념사업회와 장흥위씨 도문회 사업계획의 일환으로 위백규 선생의 학덕을 선양하고  있지만 옥과현감 재임시절 선생의 구체적인 업적에 대한 연구물은 그리 많지 않다. 존재선생은 7旬이 넘어서도 늘 학문을 체계화하고 정립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런 그의 학문이 남쪽 옥과라는 향촌지역에도 유용(有用)한 정책으로 적용이 되었을까? 어떤 종류의 정책이 시행되었고 일련의 진행과정은 어떠했을까? 정책시행의 결과는 성공, 아니면 실패였을까? 개혁의 언저리에는 늘 기득권 세력의 반발도 만만치 않았을 텐데! 결국 후세들의 평가는 후(厚)할까, 아니면 박(薄)할까? 등등 궁금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어떻든 이론과 실제는 다르고, 학문과 현장은 간극이 크기에, 이상과 현실 사이에는 상수보다 변수가 늘 상존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래서 학행(學行)으로 벼슬길에 오른 존재선생이 이론, 학문, 이상을 실제, 현장, 현실에 접목시킨 리더십을 살펴보고자 한다.


 1. 존재선생 행장(행록, 묘지명)
 행장, 행록, 묘지명은 기록목적에 따라 미미한 차이점이 있다. 먼저 행장이란 제자, 친구, 후손이 죽은 사람의 족보, 성명, 아호, 관직, 생졸년, 후손들, 생전언행 등을 기록한다. 유고집 등을 제작하는데 쓰인다.
 행록은 사람이 살아 있을 때 언행과 업적을 기록한 글이다. 행장에 비해 그 범위가 비교적 단순하다.
묘지명은 묘지에 대한 명문(銘文)으로 죽은 이의 공적을 글로 새기어 후세에 전한다. 성씨, 관직, 고향 등을 기록하는 것을‘지(誌)’라 하고, 찬양하는 것을‘명(銘)’이라 한다. 돌에 새겨 무덤 속에 넣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 기록은 무덤 속에 있어야 할 기록이다.
 존재선생 1798년 사후 4년 뒤 위백순이 기록한 행록을 비롯 송치규의 행장, 홍직필이 쓴 묘지명에 기록한 옥과현감 재직 시 수행한 업무를 분석했다. 세 행장은 내용, 순서 면에서 거의 흡사하나 위백순은 존재선생의 친동생으로 누구보다 선생을 잘 알고 있었다는 점, 시대적으로 다른 두 기록자보다 앞섰다는 것에 더 비중을 두어 연구했다.
 위백순의 행록은 송치규의 행장보다 35년, 홍직필의 묘지명보다 46년이나 앞선 기록으로 1837년 송치규의 행장과 1848년 찬한 홍직필 묘지명의 기초자료로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 결국 행록을 근거로 행장과 묘지명이 작성되게 되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옥과현감 재임시절 기록만을 부분적으로 발췌하여 분석했다.

 

 

1) 위백순의 존재선생 행록(1802년)
 ◇{政事를 한지 五百餘日동안에 花粟紙를 革罷하고 官用朔紙를 半으로 絶減하여 僧侶의 弊端을 들어주며 朔望魚(초하루 보름에 바치는 고기)와 日次魚(날마다 바치는 고기)의 바침을 除去하여 漁村의 곤혹을 解消시키고 軍丁을 넉넉하게 하여 六月달이면 生銀魚 진상으로 오랫동안 痼弊가 되었던 것을 代金으로 納付하여 편안케 하고 鐵匠과 鍮工과 錫冶와 木手가 恒時 官에 가서 머물러 살았던 것을 없애며 금三품과 徭役(울력) 五分의 四를 덜고 人吏 各廳 契房의 革罷라든지 四色錢 八百의 蕩減은 軍丁을 넉넉히 하여 私慾을 채우지 못하게 한 것이다. 그밖에 東園머리에 있는 妓生과 奴婢들과 市井의 租稅등 자질구레한 것을 除弊한것은 모두가 다 私慾을 버리고 公益을 위함이요 自身은 곤궁하고 民間은 살찌우게 한것이다. 그리고 將校의 鍊武와 兵器의 修繕과 官廳의 修理와 鄕約의 設行과 勸學의 規約과 糶糴法 따위는 다 깨끗이 잘되었고 또 衙供은 官廚의 하나인데 가난한 선비의 子弟가 집에 往來할때 감히 말을 타고 다니지 못하게 한 것등은 아무리 옛날 淸白吏라 할지라도 이보다는 더하지 못했을 것이다. 存齋先生行錄 壬戌 一八0二年 正月下旬 家弟 生員 伯純은 謹狀하다.}

 

 서계 위백순(書溪 魏伯純 1737~1815)의 본관은 장흥으로 現 관산읍 방촌리 태생이다. 위문덕(魏文德)과 평해오씨 사이에는 다섯 아들이 있었는데 위백규(魏伯珪), 위백호(魏伯昊), 위백신(魏伯紳), 위백순(魏伯純), 위백헌(魏伯獻)으로 서계는 네 째이다. 장형인 위백규의 학문에 커다란 영향을 받아 성리학과 세금, 토지제도 등에 조예가 깊었다.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 산 2번지 다산등(嶝)에 위치한 다산사(茶山祠)에 배향되었고 저서로는 서계유고(書溪遺稿)가 있다.

 

 

2) 송치규의 존재선생 행장(1837년)
 ◇{공이 옥과현에 도착하여 향약을 설치하고, 지역(紙役)을 혁파하여 승려의 폐해를 덜어 주었으며, 어공(魚供)을 제거하여 어호(漁戶)를 소생시켰다. 옥과현이 관례에 따라 생은어(生銀魚)를 공물로 바치는 일이 읍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어 있었으므로 공이 감영에 보고하여 돈으로 대신 납부하게 했다. 관에 머물면서 일하고 있던 잡장(雜匠)들을 보내 주고 각 청(廳)의 계방(契防)과 사색보(四色保)를 혁파하여 군역(軍役)을 덜어 주었다. 학문을 권장하고 군사훈련에 힘썼으며, 평조법(平糶法)을 공평하게 하고 요역(徭役)을 덜어 주었다. 관아 건물을 수리할 때에도 백성의 힘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공은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공공의 이익을 추구했고, 자신을 희생하여 백성을 잘살게 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았다.
行狀 숭정(崇禎) 네 번째 정유년(1837, 헌종3) 1월 일, 은진(恩津) 송치규(宋穉圭) 짓다.}

 

 강재 송치규(剛齋 宋穉圭, 1759~1838)는 조선후기 학자로 본관은 은진이다. 시호는‘문간(文簡)’이며 송시열의 6대손이며 아버지는 송환명이다. 율곡 이이와 김장생, 송시열의 학통을 계승한 성리학자로서 벼슬은 대부분 사양하고 학문연구에 진력투구했다. 노년에 이르러 시강원찬선, 대사헌, 이조 참판, 정헌대부에 올랐다. 충북 옥천군 영국사에 부인과 함께 합장되었다. 옥천 용문영당에 배향되었고 저서로는 강재집(剛齋集)이 있다

 

 

3) 홍직필의 존재선생 묘지명(1848년)
 ◇{관직에 임하여 제일 먼저 향약을 설치하고, 지역(紙役)을 제거하여 승려의 폐해를 덜어 주었으며, 어공(魚供)을 견감하여 어호(漁戶)를 소생시켰다. 으레 공납했던 생은어(生銀魚)가 옥과현의 고질적인 폐해였는데 돈으로 대신 납부하게 했다. 관에 납부하는 여러 세금 및 각 청(廳)의 계방(契防)을 혁파하여 군역을 여유롭게 했다. 교육을 진흥시키고 군사훈련을 행하며, 조적(糶糴)을 공평하게 하고 요역을 감소시켰고, 관아 건물을 수리할 때 백성의 힘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모두 자신을 희생하여 백성들을 잘살게 하는 것을 법도로 삼았다.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네 번째 무신년 (1848, 헌종14) 당성(唐城) 홍직필(洪直弼) 지음}

 

 매산 홍직필(梅山 洪直弼, 1776~1852년)은 조선후기 학자로 본관은 남양이며 서울태생이다. 시호는 문경(文敬)으로 사마시에 불합격한 뒤 성리학 연구에 몰두해 1814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세자익위사세마, 장흥고봉사, 지평, 부사직, 대사헌 자리에 올랐다. 개천의 경현사(景賢祠)에 제향되었고 저서로는 매산집(梅山集) 52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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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입상(장흥 회주공원 경내)

 

  

2. 분야별 추진정책
 세 행장을 중심으로 존재선생께서 옥과현감으로 재임할 때 직무를 분석했다. 옥과현에서 현감으로 수행한 정책 12가지를 공통되는 항목끼리 모았다.
 '경국대전'에 실린 조선시대 지방 수령의 7대 업무인 ∇농상을 성하게 함(農桑盛), ∇호구를 증대시킴(戶口增), ∇학교를 부흥시킴(學校興), ∇군정을 닦음(軍政修), ∇부역은 균등하게 함(賦役均), ∇소송은 간명하게 함(詞訟簡), ∇교활하고 간사를 불식시킴(奸猾息)을 기준으로 삼았다.
 경제부분인 부역 등의 노동정책, 공물 등 세금정책에다 군사부분과 사회개선책을 더해 총 네 부분으로 대분류했다.


1) 경제 - 세금 공물정책
 세금은 백성의 삶의 질과 밀접해 존재선생은 세금정책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세종실록에는 "전(田)이 있으면 조(租)를, 신(身)이 있으면 역(役)을 징수하고 호(戶)단위로는 공물을 징수하니 이것이 옛 조용조의 법에 부합하는 것이다" 고 실려 있다. 조선은 중국전통 조세제도인 조용조를 그대로 도입해 국가를 운영했다. 세금징수는 관리의 가장 큰 업무였다. 옥과, 지금의 곡성에서 현감으로 재직했기에 섬진강을 낀 강촌이라 토지를 기준한 쌀, 콩보다 노동과 공물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세금의 일종인 공물에 대한 존재선생의 견해는 율곡 선생이 만언봉사에서 제시한 내용과 궤를 같이 한다. 이에 대해 존재집 제19권에 수록되어 있다.“공물(貢物)을 모두 토산물로 상납하게 하고 방납(防納), 봉여(封餘), 정채(情債) 등의 사안을 혁파한 뒤에야 가능하다.”를 전제로 한다.  세 가지 혁파분야인 방납은 상인이나 관리가 백성 대신 공물을 납부하고 이자를 더해서 받는 것, 봉여는 왕에게 특산물을 바치고 남은 것을 관리들이 가져가는 물건, 정채는 관리가 선혜청이나 호조의 서리에게 청탁하고 답례로 주는 금전이다.


(1) 승려와 지공업(紙工業)의 전문화
◇花粟紙를 革罷하고 官用朔紙를 半으로 絶減하여 僧侶의 弊端을 들어주며(행록)
◇지역(紙役)을 혁파하여 승려의 폐해를 덜어 주었으며(행장)
◇지역(紙役)을 제거하여 승려의 폐해를 덜어 주었으며(묘지명)

 

 억불숭유정책을 국시로 삼은 조선의 승려는 천민계급에 속했다. 그래서 승려는 국가나 관청에 정기, 비정기적으로 노동력을 제공해야 했고 활쏘기시험을 치러 그 결과로 사찰 내의 인사에 반영되었다. 이는 전쟁 시 승병으로 활용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종이산업과 승려는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 승려는 종이 생산업무에 전문성을 지니고 있었다. 국가나 관청에서는 책 발간이나 공문서 등으로 많은 양의 종이가 필요했고 이에 대한 공급은 승려의 몫이었다. 점차 조선후기에 이르러서는 민간의 수요도 폭발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관리들의 승려에 대한 착취는 도를 넘도록 심해졌다. 공물의 징수량도 법으로 정해진 것보다 훨씬 늘어났고 납품시기도 아무 때나 요구했다. 이를 직시한 존재선생은 관리들의 침탈로 규정하고 승려들의 종이생산 전문성이 사라지는 것을 막고자 이에 개입된 관리들을 뇌물죄를 적용 엄하게 다스렸다. 종이산업은 국가를 지탱하는 근간이기 때문에 업종의 지속적인 유지는 국가의 사활이 걸린 것으로 여겼다.
 이에 존재선생은 승려들이 종이납품 중 화속지는 폐지하고 관청에 무료 납품하는 현편 양도 절반으로 줄여 승려들을 배려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승려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종이생산의 전문성 유지를 지속하려는 의도였다.
더 나아가 국가나 관청에서는 추가로 종이를 구매할 때는 시가로 하라고 가격을 명시했고 공급량과 유통시기, 품종도 지물, 보잔, 간지 등으로 통제했다.
 존재집 '시전(市廛)'에서 상품의 최고가와 최저가 구간을 미리 정하고 이 사이에서 시가가 결정되도록 했다. 공급자나 수요자에게 지나친 이익, 과도한 손실을 금해 시장이 예측가능 하도록 했다. 존재선생의 시가 가격제, 유통구조와 출하 시기조절, 업종별 전문화 등에 대한 견해는 오늘날 시장경제이론에 상당히 근접한 모습이다.

 

 

(2) 어업과 화폐제
◇朔望魚(초하루 보름에 바치는 고기)와 日次魚(날마다 바치는 고기)의 바침을 除去하여 漁村의 곤혹을 解消시키고 軍丁을 넉넉하게 하여 六月달이면 生銀魚 진상으로 오랫동안 痼弊가 되었던 것을 代金으로 納付하여 편안케 하고(행록)
◇어공(魚供)을 제거하여 어호(漁戶)를 소생시켰다. 옥과현이 관례에 따라 생은어(生銀魚)를 공물로 바치는 일이 읍의 고질적인 폐단이 되어 있었으므로 공이 감영에 보고하여 돈으로 대신 납부하게 했다.(행장)
◇어공(魚供)을 경감하여 어호(漁戶)를 소생시켰다. 으레 공납했던 생은어(生銀魚)가 옥과현의 고질적인 폐해였는데 돈으로 대신 납부하게 했다.(묘지명)

 

 옥과현은 섬진강을 끼고 있어 고을이라서 고기를 잡는 어업이 발달했다. 농사보다 고기잡이가 주력산업이라 공물로 어류를 국가나 관청에 세금조로 납품해 왔다. 통상 매일, 초하루나 보름에 정기적으로 납품해야 할 시기가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과거에 잘 잡히던 고기가 자연조건의 변화에 따라 거의 잡히지 않았고 해에 따라 들쑥날쑥 하기가 다반사였다. 백성들의 어류 생산상황과 현실을 전혀 감안하지 않고 으레 관청에서는 관례대로 공납을 독촉했다. 때론 완전히 어류가 고갈된 것을 알면서도 노골적으로 요구해 관례를 넘어 제도화되었다. 이에 참다못한 어민들은 고기를 사다가 납품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소위 법으로 금한 방납이다.
 존재집 19권 '어염(魚鹽)'편에서 관리 1명이 늘어나면 좀 한 마리가 더 생기는 셈이라고 혹평하고 있다. 좀 벌레와 관리를 동일시했다. 좀 벌레같은 관리들은 공물이라는 세금납부제를 악용 강촌민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다. 고기잡이는 강촌민들의 생업수단이라 그만큼 어부들에게는 생존의 문제였다. 존재선생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솔로몬의 혜안이 필요했다. 밤낮으로 고민을 거듭하다 상부에 이런 폐단과 현실을 자세히 보고하고 결제를 득해 현물 공납제를 화폐로 납부하도록 방법과 공물의 근본제도를 통째로 바꾸었다. 또한 그 이면에는 어류공납을 매개로 강촌민들을 착취하는 관리들의 횡포를 사전에 방지하고 연결고리를 끊자는 의도가 강했다. 이전 현감들이 강촌민들을 괴롭히는 악습을 끊지 못하고 적당히 시간만 끌었으나 존재선생은 전임 현감들이 주저한 정책을 주변의 엄청난 저항을 뿌리치고 과감하게 실행에 옮겼다.
 여기서 하나 주목해야 하는 것이 화폐제도에 대한 존재선생의 견해이다. 화폐는 중성이요, 무생물이라 사용자의 의지에 따라 다르다고 피력한 사실이다. 현물을 화폐를 통해 납부하도록 바꾼 제도의 혁신에는 존재선생이 실학자로서의 면목이 돋보이게 하는 점이라 할 수 있다.

 

 

(3) 취약계층 세제혜택
◇東園머리에 있는 妓生과 奴婢들과 市井의 租稅등 자질구레한 것을 除弊(행록)
◇관에 납부하는 여러 세금을 혁파(묘지명)

 

 조선시대 3대 소송 중 하나가 바로 노비소송이다. 하층민은 의무는 있으나 권리가 매우 제한적이라 상류층의 하층민에 대한 착취와 횡포는 제도적으로나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었다,
 기생(妓生)은 관기로 공식적인 국가의 통제를 받았다. 남녀 종을 뜻하는 노비 및 그외 市井으로 불리는 관청 내의 많은 하층민들에게 거두어들이는 다양한 세금을 폐지했다. 이에 대해 행장에서는“그밖에 東園머리에 있는 妓生과 奴婢들과 市井의 租稅 등 자질구레한 것을 除弊한 것은 ”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노비의 곤욕스런 삶에 대해 존재집 제19권 “노비(奴婢)”편에서“공노비(公奴婢)의 경우는 그 정책이 더욱 어지럽다. 매번 추쇄할 때마다 형벌을 가혹하게 하고 백성들을 잔인하고 포학하게 다뤄 함부로 양민의 집에까지 미친다. 또한 사노비(私奴婢)를 추쇄하여 속전(贖錢)을 받을 때, 양민을 억압해서 강제로 노비로 삼는 폐단은 이미 말할 것도 없다. 관청의 세력을 끼고 노비 명단에서 누락된 노비라고 핑계를 대며 속전을 거듭 징수하고, 선물한다고 핑계를 대며 별도로 비용을 징수한다. 또 옛 주인이라고 핑계를 대며 마구 침탈하고, 노비의 이름이 다르고 생년(生年)이 틀리다고 핑계를 대며 누차 소송을 제기한다. 명목을 교묘하게 만들어 온갖 방법으로 침탈하고 참혹하게 닦달하기를 한없이 하니, 한번 천안(賤案)에 들어가면 재앙이 백대(百代)까지 미친다.”라고 그 폐단을 지적하고 있다.
 이는 사회적으로 신분이 낮고 경제적인 약자에 대해 다양한 세금을 폐지한 것은 하층민들은 신분이 낮아 항시 사회에서 억울한 일을 당하기가 십상이었다. 이는 하층민에 대한 정책적 배려를 의미한다. 오늘날의 차세대 계층이나 소외계층에 대한 세제혜택으로 따뜻한 금융정책과 비슷한 정책으로 평가된다.

 


2) 경제 - 세금 노동정책
노동 분야에 대한 현실개혁은 존재선생이 가장 치중한 분야 중 하나이다. 노동은 예나 지금이나 그야말로 백성들의 삶의 질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다양한 신분제로 국가통치체제를 유지한 조선시대 인력관리정책은 부역, 울력이라 불리는 노동정책과 밀접한 관계를 지녔다. 특히 중인계급에 해당하는 장인에 대한 정책적 배려와 우대는 실학사상의 백미로 기술의 진보를 낳았다.

 

(4) 기술자들의 근무제 조정
◇鐵匠과 鍮工과 錫冶와 木手가 恒時 官에 가서 머물러 살았던 것을 없애며(행록)
◇관에 머물면서 일하고 있던 잡장(雜匠)들을 보내 주고(행장)

 

 당시 장인이라 불리던 기술자들은 관청에 거주하면서 국가나 관청의 필요에 따라 물건을 만드는 일에 종사했다. 바로 쇠로 여러 물건을 제작하는 철공, 유기그릇을 만드는 유공, 목재로 집이나 가구를 만드는 목수, 석공, 도공 등 매우 다양했다.
 존재선생이 옥과현에 부임해서 기술자들의 직무를 분석해보니 항시 관청에 거주하면서 노동력을 제공하는 기존의 근무제도에 대해 의구심이 들었다. 하루 종일 몇 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허비하는 등 관청에 굳이 거주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평상시 집에서 일을 해 소득을 증대시키고 당번제를 정해 며칠 관청으로 출근해 근무하거나 필요시 관청에 모여 노동력을 제공하도록 했다. 마치 오늘날의 시간근무제와 탄력근무제의 혼합개념의 노동형태를 도입했다.
 또한 기술자에 대한 견해를 존재집 제19권“공장(工匠)”기술자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곧 기술자 우대방안과 관청 내 기술자 관리규정이다. 전자는 기술자에 대한 인간적 대우를 위해 식량을 비롯해 물품을 적정하게 급여형태로 지급하도록 했다. 후자는 관리들의 횡포를 근절하기 위해 철저한 당번제와 순번제를 도입해 기술자들 사이에 발생하는 다툼을 방지했다. 또한 물품에 대한 장부 기록제도를 실시해 물품의 유실을 막는 책임제이다. 선생은 당시 관청의 관리들에 의해 물건이 침탈당하는 일이 많았다고 여러 번 지적하고 있다. 이 두 가지 규정의 정착은 기술자들이 본업에 충실하면서 기술이 사장되지 않고 영속적으로 전문기술의 발전과 유지를 이끌어 국가산업에 이바지하도록 하려는 의도였다.
 기술자에 대한 근무형태 변경 및 근무시간 단축과 더불어 관청에 와서 근무를 하지 않을 때는 집에서 일을 해 소득을 증대시키려는 현장 중시형, 민생 중시형 정책의 일환이었다. 이러한 존재선생의 기술자에 대한 정책적 배려는 기술보국이라는 근대적 실사구시정신과 맥을 같이하며 실학자로서의 단면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례이다.

 

 

(5) 부역 대폭 경감
◇금三품과 徭役(울력) 五分의 四를 덜고(행록)
◇요역(徭役)을 덜어 주었다.(행장)
◇요역을 감소시켰고(묘지명)

 

 관청이 백성의 노동을 이용하는 것을 부역이라 한다. 조선의 부역에는 개별로 지정한 신역(身役)과 세대를 기준한 요역이 있었다. 그 중 요역은 관청의 지시에 따라 백성의 노동력을 이용하는 세금의 한 형태이다. 요역은 공역과 일반 요역으로 구분되고 공역은 공납품을 운송하는 것이고 일반 요역은 관청의 수리 등에 노동력을 사용하는 것이다.
 존재선생은 하층계급에 대해 법의 엄격한 적용보다 원시유교의 경전에 입각한 덕성을 중시했다. 그래서 백성들이 법의 보호를 받는 풀뿌리 정치를 과감하게 시행했다. 이러한 애민정신의 일환으로 실행한 정책이 바로 불필요한 노동을 없애거나 시간을 단축하는 것이었다. 백성들이 제공하는 울력의 80%를 단축했다. 돈으로 대신할 경우도 동일하게 적용했다. “금三품과 徭役(울력) 五分의 四를 덜고”라는 행장에서 노동정책의 거시적인 방향은 큰 폭의 노동시간 단축임을 바로 인식할 수 있다.
부역의 대폭경감은 백성들의 큰 환영을 받았다. 사실 백성들에게 부여된 부역의무는 노동력 착취에 가까웠다. 계절에 따라 다양한 토공사, 제방 등의 수리, 국가가 소유한 토지의 경작 등은 백성들에게 크나큰 부담이었다. 선생은 옥과현에 부임 후 백성들의 어려움을 감안 이전에 비해 20% 정도의 부역만을 제공하도록 조치했고 꼭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백성들을 동원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는 백성들을 아끼는 애민정신을 바탕으로 목민관으로서의 존재 선생을 참 모습을 부각시키는 정책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관청의 지시나 정책이 얼마나 백성의 실생활에 도움이 되느냐? 백성들의 삶에 뿌리를 내리느냐? 는 중요한 문제이다. 존재 선생은 형식적인 정책을 탈피하여 비교적 단순하고 백성들의 실제 생활과 밀접한 정책을 실시했다. 백성들이 몸소 느낄 수 있는 정책개발에 집중했다. 실효성과 실현 가능성에 늘 고민해왔던 존재 선생의 모습이 퍽이나 인상적이다. 백성들의 요역을 무려 80% 가량이나 파격적으로 경감시킨 정책은 과감한 리더의 결단이 없다면 어려운 것이었다.

 

 

(6) 백성동원 지침
◇官廳의 修理와(행록)
◇관아 건물을 수리할 때에도 백성의 힘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행장)
◇관아 건물을 수리할 때 백성의 힘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묘지명)

 

 관청의 수리에 대해 존재선생은 지침을 마련했다. 으레 백성들을 동원하여 관청을 수리하는 것은 당시 관례였으나 존재선생은 일체 백성들을 동원하지 않고 수리했다. 백성들을 동원하는 것은 특별한 경우에 한한다는 선례를 만들었다. 여러 부역과 농사일, 균역 등으로 바쁜 백성들의 노동을 덜어주고자 한 목민관의 덕치가 빛나는 부분이다. 후세들의 평가는 후했다. 송치규는 이에 대해“관아 건물을 수리할 때에도 백성의 힘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공은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공공의 이익을 추구했고, 자신을 희생하여 백성을 잘살게 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았다.”라고 기록하여 선생의 덕치를 칭송했다.
 1796년 봄에 옥과관청 건물인 연무청 중건을 완료하고 그해 9월에 낙성식을 거행했다. 관청의 수리는 관리를 비롯해 관청에 소속된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했다. 이에 백성을 동원하지 않고 자신들만 고생한다고 불평불만이 팽배했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존재선생의 깊은 뜻을 깨달아 마음을 고쳐먹고 리더 존재선생을 진심으로 흠모했다. 존재선생의 백성에 대한 극진한 사랑은 정책을 통해 실현되었고 이는 유교식 인의를 실천하는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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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좌상(장흥 존재공원 경내)

 

            

3) 군사정책
 임진, 병자 양란을 치룬 조선후기는 불안한 시대였다. 중국과 일본이라는 강대국에 낀 조선은 생존의 위기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고을의 수령은 지금과는 달라 군사를 관리하고 있었다. 특히 곡성은 섬진강을 끼고 있어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였다.
 이에 대한 존재선생의 군사정책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먼저 군복무를 면제받는 것을 최소화시켜 군의 자금 확충에 주력했다. 더 나아가 군 입대를 매개로 관리들의 고질적인 피해를 없앴다. 군인에 대해서는 실전과 같은 훈련을 실시했고, 전투장비는 언제든 사용 가능하도록 정비했다. 존재선생은 병가(兵家)에도 조예가 깊었다고 ‘읍의 제생을 깨우치는 글’에 기록하고 있다.

 

 

(7) 군비확충
◇四色錢 八百의 蕩減은 軍丁을 넉넉히 하여 私慾을 채우지 못하게 한 것이다.(행록)
◇사색보(四色保)를 혁파하여 군역(軍役)을 덜어 주었다.(행장)
◇군역을 여유롭게 했다.(묘지명)

 

 16~60세 사이의 남자는 국가나 관청에서 군복무나 노역을 감당했다. 농민에게는 군역이 의무로 군정(軍丁)이 되어 농민들 일부는 징발되었고, 나머지는 징발된 자의 후방에서 물자를 공급했다. 존재선생은 여기서 후방에서 물자를 공급하는 과정에서 관리들의 횡포를 제거하고자 생은어 진상을 철폐하고 돈으로 납부하는 정책을 실행했다.
“軍丁을 넉넉하게 하여 六月달이면 生銀魚 진상으로 오랫동안 痼弊가 되었던 것을 現金으로 納付하여 편안케 하고”한 행장 내용은 바로 물고기로 공납을 받던 것을 돈으로 대신 받아 국방을 튼튼히 하자는 의도였다. 또한 강촌민과 관리 사이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이권관계와 부패의 고리를 끊어버리려는 비책이었다. 군대는 유사시 전쟁을 대비해 존재하는 집단으로 전쟁을 치루기 위해서는 군인의 의식주를 보급해야 한다. 보급물자는 모두 국방비용으로 조달해야 한다. 군비확충은 전쟁승리의 선결조건인 것이다. 곡성은 강촌이라 관청에서는 생은어 납부를 공물로 받아 관리의 착취와 횡령으로 이어졌다. 은어란 생물이라 해에 따라 많이 잡히고 적게 잡히고 어떤 해는 아예 잡히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도 관리들의 닦달에 백성들은 다른 지역에서 구입해 납품하는 경우도 있었다. 존재선생은 이런 폐단을 직시하여 돈으로 납부케 해서 재원을 마련 군비 확충에 진력했다. 결과적으로 군정을 넉넉히 하고 강촌민들을 오랫동안 괴롭게 하던 고질적인 폐단을 없앴다. 현장을 중시한 존재선생의 정책에 백성들은 환호했고 편안한 생업을 유지할 수 있었다.

 

 

(8) 이익단체 계방 해산과 군 세금 탕감
◇人吏 各廳 契房의 革罷라든지(행록)
◇각 청(廳)의 계방(契防)을 혁파하여(행장)
◇각 청(廳)의 계방(契防)을 혁파하여(묘지명)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이익단체는 존재한다. 군과 관련해서 발생하는 업무를 매개로 오가는 금전은 부의 축적에 매력적인 것이었다. 백성과 관청의 중간에서 이익을 추구하는 중간 매개체가 바로 계방이었다. 오늘날 무수히 많은 협회나 단체와 비슷했다. 주로 관리들과 결탁해 군 관련 편의를 봐주고 그 대가로 금전을 수수하는 형태이다. 人吏는 조선시대 관청 소속 하급 관리를 말하고, 契房은 조선후기 백성들이 하급관리들과 결탁하여 돈을 내고 군역이나 잡역을 경감 받거나 불법행위를 묵인 받던 이익집단을 말한다. 사색보전(四色保錢)은 조선시대 거두어 들였던 세금의 일종으로 군대에서 복무하는 것을 면제받으려고 바치는 무명베나 곡식이다.
  존재집 제19권의“군제(軍制)”에 따르면 당시 국방관련 군인충원 관련 11가지의 폐단을 열거하고 있다. 입영 대상자가 100%라면 음직, 족보매입, 도첩제, 서원이나 사우 등록, 공신후예 자청, 뇌물수수 등으로 20% 정도가 입영했다고 전한다. 그나마 입대한 20%도 태반이 유랑인, 거지, 도망자, 노약자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폐단의 연결고리를 계방으로 판단, 해산하게 했다. 또한 후방에서 입대한 군인을 지원하는 백성들의 세금을 일부 탕감했다.

 

 

(9) 전투태세유지
◇將校의 鍊武와 兵器의 修繕 (행록)
◇군사훈련에 힘썼으며 (행장)
◇군사훈련을 행하며 (묘지명)

 

 존재선생은 군의 전투태세 유지를 위해 두 가지에 대해 진력했다. 먼저 군사훈련에 대한 것이다. 존재집 제19권의 “군제(軍制)”에 따르면 “將校의 鍊武, 兵器의 修繕”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훈련 때 땀 한 방울은 전쟁 때 피 한 방울이라는 말이 있는데 당시의 상황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안이했다. 훈련 시 병사들은 활을 들고 겨눌 줄도 모르고 힘이 없어 창을 들 수도 없다고 기록하고 있다. 군사들의 명단이 허위로 작성되어 소집 때나 훈련 때 본인은 없고 숫자만 채우기 위해 돈으로 다른 사람을 사서 세우거나 서리들이 옷을 바꿔 입기도 했다. 심지어 한 사람이 네다섯 명의 몫을 대신했다. 이를 관장하는 자들은 이를 알면서도 대충 처리를 했는데 군의 속성상 위급한 일이 발생 시 백전백패라고 한탄하고 있다.
 이러한 군정의 혼란은 도성 안의 훈련도감에서 양성하는 군졸이나 변방의 진과 보의 상황도 같았다. 이를 위해 존재선생은 병사확충부터 명단관리, 병사훈련을 강화하여 항시 전투태세를 유지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훈련 때 지급하는 떡, 술, 고기 등을 세밀히 관리했고 군사들에게 음식물 대신 돈으로 지급하는 것을 엄격히 통제했다. 불가피하게 돈으로 지급할 때는 정상적인 액수로 대신했다.
다음으로, 고을의 병기관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절도사나 수령의 무관심으로 감관이나 색리들이 훔치고 농간을 부렸다. 활, 화살, 조총, 화약, 총알, 칼, 창 등의 관리가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활쏘기 시합 때는 상으로 주는 무명을 도둑질하고 최고 지휘관은 병법을 몰랐다. 전쟁을 치룰 말도 대부분 팔아먹어 점검이 있는 날에는 빌려 오거나 야생마로 채웠다. 존재선생은 훈련과 병기에 대한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이를 철저히 개혁했다. 특히 깃발을 휘날리며 백성들에게 길을 비키라고 외치는 한심한 무관들을 향해 책망할 가치조차도 없다고 경멸하고 있다.

 


4) 사회개선책
 존재선생은 일찍이 사회개선에 앞장섰다. 체제의 극단적 부정보다는 점진적 개혁에 무게를 둔 중농주의적 선비였기 때문이다. 보수와 진보의 스펙트럼 상 선생은 진보의 초기단계에 위치하고 중앙집권과 지방자치의 위치는 부분적으로 지방자치에 무게를 두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존재선생의 사회개선책은 가장 먼저 향약의 설행에 있었다. 또한 여러 학규를 만들어 옥과지역에 만연하고 있는구습을 타파하여 미풍양속을 장려했다. 수차례 폐단과 대안을 제시한 백성들에 대한 식량 대여제도인 조적법은 0순위 관심대상이었다.

 

 

(10) 향약실시와 구습타파
◇鄕約의 設行, 또 衙供은 官廚의 하나인데 가난한 선비의 子弟가 집에 往來할때 감히 말을 타고 다니지 못하게 한 것 등은 아무리 옛날 淸白吏라 할지라도 이보다는 더하지 못했을 것이다. (행록)
◇향약을 설치하고(행장)
◇관직에 임하여 제일 먼저 향약을 설치하고(묘지명)

 

 옥과현감에 부임해 첫 번째 사회개선을 위한 조치는 향약의 실시였다. 중국 남전여씨 향약과 이이선생과 퇴계선생의 향약을 근간으로 옥과에서 향약을 시행했다. 시행의 목적은 지역의 풍속순화였다.
 존재집 제20권“옥과향약 서”와 존재집 제19권“군현(郡縣)”편에서 요순시대 백성의 행복과 사회의 풍속 함양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다.“향약을 협력해 시행하여 서로 함께 풍속을 이룬다면 모두 태평성대의 풍속이 되고 장수하는 지역의 사람이 될 것이나 도리어 아름답지 않겠는가. 변변치 못한 사람이 외람되이 임금의 은총을 입어 이 고을에 수령으로 임명되었으니 고을이 작더라도 모두 삼대의 바꿀 수 없는 법으로 다스려야 하는 것이다.”고 하고 있다. 여기서 법을 눈여겨봐야 한다.
 법이란 공(恭), 근(謹), 충(忠), 서(恕)를 말하는데 공과 근은 성리학에서 으뜸으로 여기는 요순시대를 뜻하고 충과 서는 공자의 도를 표현한 덕목이다. 성리학에서 추구하는 이상국가 건설과 군자의 길을 목표로 하고 있다. 세부적으로 율곡 이이의 향약에 근거하여 옥과현에 맞도록 가감하여 절목과 조항을 만들어 옥과의 여섯 마을에 적용했다. 향약을 설행하는 고을의 규모를 호수를 기준으로 5,000세대에서 15,000세대로 규정했고 향선생과 각 면에는 훈장을 면도정으로 삼도록 인사규정도 시행했다.
 구습타파는“또 衙供은 官廚의 하나인데 가난한 선비의 子弟가 집에 往來할때 감히 말을 타고 다니지 못하게 한 것 등은 아무리 옛날 淸白吏라 할지라도 이보다는 더하지 못했을 것이다.”고 행장에서 밝힌 것은 조선후기 때 관리들의 업무태도나 생활모습을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여기서 衙供은 고을 수령(守令)의 음식을 만드는 곳으로 관위란 여기서 일하는 관리를 말한다. 이런 말단 관리가 말을 타고 다니는 것이 존재선생은 몹시 화가 났던 것이다. 이런 구습을 일삼는 관리들의 권위주의를 철저히 타파했다. 관리는 자고로 겸손과 청렴으로 무장해야 하며 관리의 횡포를 차단하고 특혜를 없애는 일에 몰두했다.

 

 

(11) 학문장려
◇勸學의 規約과 (행록)
◇학문을 권장하고 (행장)
◇교육을 진흥시키고 (묘지명)

 

 옥과현의 미래는 젊은 청소년의 어깨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앞서 22세 계당에 서당개설, 29세 양정숙 운영, 30세 정현신보 시폐에서 공교육 비판, 40세 사강회 운영, 51세 봉사 구폐에서 공교육혁신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출처 : 위정철, 신편 존재집 5권 외로운 구도자편)
 평생을 교육자로 살아온 존재선생은 현감으로 재직시절 쓴 몇몇 글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옥과향약 서'와 '제읍사문(祭邑社文)'은 이 글 다른 곳에서 소개해서 제외하고 나머지를 소개한다. 교육과 다소 동떨어져 보이나 내용면에서 청소년교육에 도움이 되는 글이라 옮겨본다.

'읍의 제생을 깨우치는 글'은 장문으로 70년간 정립한 학문에 대한 경륜을 진솔하게 나열했는데 선비가 글공부를 하는 자세와 방법, 과정별 교과목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특히 과거합격을 위한 형식화된 문장 암기식 공부를 지양하고 문장의 뜻과 자구의 깊은 의미를 연구하라고 교훈한다.
◇‘옥과현 유생들을 깨우치는 잠'에서는 옥과현 관청 내 건물에 게시할 교훈(箴)을 시형태로 간결하게 표현했다. 양사재(글공부의 근본), 향청(경외), 작청(부끄러움), 통인청(시간), 연무청(문무겸비), 연청(국가와 백성)이다.
◇‘윤음의 큰 뜻을 판목에 게시하는 글’은 왕이 내린 6조목을 매달 1일 훈장이 강론할 것과 목판에 새겨 사람이 많이 다니는 시장과 성문에 게시하라고 했다.
'옥과현 연무청 중건기' 는 1796년 봄에 재건하고 동년 9월 낙성식이 있었는데 여기서 선비의 도와 군인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 군인에 대한 도리를 선비에 비교해 잘 설명하고 있다.
'영귀사우 옥과 중수기'에서는 1797년 2월 김윤후 등 옥과현감을 역임한 선현을 기리는 영귀사우의 수리를 마친 정필수, 김득해, 이영백, 김성대에게 공납을 면제하고 자식과 손자의 요역을 면제하는 내용이다.
 
 위의 다섯 개의 글은 존재선생이 노년에 쓴 글이다. 그만큼 경험과 경륜(經綸)이 축적된 명문(名文)이다. 그중에서도 '읍의 제생을 깨우치는 글'은 백미중의 으뜸으로 꼽힌다. 옥과현감 재임 중 다양한 행사나 또 다른 목적으로 작성되었지만 공통주제는 옥과지역에 사는 청소년들에게 사람의 참모습이란 어떠한가, 70 평생 살아온 학문에 대한 경험담을 진솔하고 겸손하게 고백하고 있다. 대부분 간결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전통을, 내용면에서는 현장과 시대의 흐름을 직시한 창의성을 담았다. 옥과현을 이루는 구성원들의 공통기준을 정하고 이를 실천함으로써 공동체 번영과 유지를 지속하고자 하려는 의도였다. 특히 배우는 학생들에게 가정이 확대된 사회의 이상을 마음에 심어주고자 했다. 결국 성리학에서 추구하는 범인보다 현인을, 현인보다 성인을 향한 덕성교육을 강조했다.
 '경국대전'에 실린 조선시대 지방관리의 일곱 가지 업무 중 일부분을 차지하는“학교를 부흥시킴(學校興)”에 대해 옥과현에서 베푼 존재선생의 학덕의 흔적은 몇 백 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다. 결국 서영보가 존재선생의 학덕을 일컬어“문장이 우장(優長)하여 성경현전(聖經賢傳)에 넓게 통하고”라고 정조대왕에게 올린 보고가 적중한 셈이다.

 


(12) 조적법 개선
◇糶糴法 따위는 다 깨끗이 잘되었고 (행록)
◇평조법(平糶法)을 공평하게 하고 (행장)
◇조적(糶糴)을 공평하게 하고 (묘지명)

 

 조적법이란 봄에 백성들에게 나라의 곡식을 빌려 주는 것을 조(糶)라 하고, 가을에 백성에게서 봄에 빌려 주었던 곡식에다 10%의 이자를 덧붙여 거둬들이는 것을 적(糴)이라 하는 조선시대 법이다. 이상적인 제도이나 실제로는 이를 악용해 백성들을 괴롭히고 부를 축척하는 관리와 지배층이 많았다.
 존재집 제19권“조적(糶糴)”두 편의 글에서 이상적인 조적제도에 대해 그 뜻과 취지를 펼치고 있다. 먼저 국가에서 운영하는 관창과 각 면에서 운영하는 사창으로 구분하고 곡식을 빌려주고 거두는 세부적인 시행법과 인력운용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흉년, 대풍년, 평년 등으로 구분하고 빈부의 차이에 따른 운영방침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이를 운영하고 시행하는 관리와 지배층의 적폐에 대해 보다 세밀하고 적나라하게 비판하고 있다. 도량형 속임수, 과다거수, 벼 마대에서 대통으로 도적질, 모래혼합, 쭉정이 혼합, 썩은 곡식 대여, 알곡과 쭉정이 곡식 바꿔치기, 돈으로 대신 갚는 방납, 장부위조, 곡식 거짓대여, 구제대상 삭제, 교활한 아전들에 의한 현명한 수령 파직시도, 세금포탈, 원거리 백성들의 비용증가, 수탈, 과소대여 등으로 나열하고 있다.
 그 결과는 ‘백성들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원망하고 탄식하는 것이 태반이 이 때문이다. 말세의 폐해가 이처럼 심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라고 백성들의 고통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더 나아가‘기호지방의 빈한한 사대부 집들이 세력을 등에 업고 청탁하여 규정 밖의 환곡을 함부로 마구 먹고 여러 해 갚지 않으니 그 폐해가 교활한 아전보다 심한 데가 있다. 수령이 혹 바치라고 독촉하기라도 하면 수령을 파직시키려는 논의가 뒤따르니 이것은 놀고먹으면서 사치만을 좋게 여기다가 남은 습속이다.’고 한탄하고 있다.
 1796년 5월 동생 위백순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당시 옥과현의 어려운 상황을 잘 알 수 있다. 관직 생활이 갈수록 더욱 어려워지는 이유는 흉년이 들어 갈수록 참혹해지고 전염병(傳染病)까지 사방에서 발생해 백성들에게 곡식을 독촉해 받아 내기가 힘들다고 토로한다. 옥과현의 규모가 작아 여유가 없고, 연이어 흉년을 만나 온갖 일이 구차하고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백성들의 먹을거리를 안정시키기 위해 조적법을 제대로 운영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조적법의 핵심은 깨끗함, 공평함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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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좌상(장흥 존재공원 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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