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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공 위계정

 

충렬공 위계정(魏繼廷)은 고려 문종 때 등제하여 선종, 헌종, 숙종, 예종 등 4조에 걸쳐 역임하고 관이 수태보문하시중태사(守太保門下侍中太師)에 이르러 예종 2년에 돌아가시니 충렬(忠烈)이라 시호를 내렸다. 예종 묘정에 배향됐는데 묘지는 장흥 제암산 자락의 연하동에 있으며, 음 10월 9일 묘전에서 시제를 올린다. 공은 문장으로써 이름이 높았으며, 작품으로 《동문선》에 하천안절표(賀天安節表)가 전한다. 당시 당나라에 보내는 국서를 초안하기도 했으며, 특히 청백리로서도 청사에 빛나고 있다. 

 

장동면 하산리 연하동 제암산 자락에 위치한 충렬공 묘소는 1740년 관북파 함흥 종인 위정진이 관북보를 본향으로 가지고와서 현 묘소 위치를 알게 되었다. 성재공(휘 동환, 청계공파 12대종손)의 주도로 1963년 묘소 상석과 동자석을 교체 하였다. 또한 1999년 하산도문중에서 묘소 둘레석을 하였다.

 

충렬공 묘소의 좌향은 북동~남서향이고 제암산을 주산으로 수인산을 조산, 그리고 거개마을 뒷산을 안산으로 하는 지세이며, 하산리와 감나무재에서 흘러나온 하천들이 합류하는 지점의 혈처에 위치하여 왕릉터로서 전혀 손색이 없어 보인다. 만약 고려나 조선시대의 도읍지 근처에 위치했다면 왕릉이 자리잡았을 것이다. 단 화강암 지대의 완경사지 능선에 자리잡았기 때문에 이런 지형은 침식에 약하여 축대 등의 관리에는 많은 신경이 쓰일 것 같았다. 

 

묘비가 묘지의 측면이 아닌 전면에 위치한 것이 특이하고, 묘지 석물은 망주석만 있던 것을 뒤에 동자석과 문인석을 세운 것 같았다. 일반적으로 1품 이상은 왕릉처럼 망주석, 동자석, 문인석의 순으로 배치되는데 공의 묘소에는 동자석, 문인석, 망주석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암튼 고려와 조선조를 통틀어 1000년간 호남에서 배출한 최고의 인물로 평가받는 훌륭한 인물이며, 500년 이상이나 실묘했던 공의 묘소를 다시 찾아 잘 관리해온 후손들의 노력이 돋보였다. 

 

장흥위씨 종친회는 2000년 4월 모임을 갖고 충렬공 묘소를 알리는 표지석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묘소 앞에 순천~목포간 4차선 도로가 개통되면 홍보 효과와 성묘하려는 종원들을 안내하자는 뜻이다. 높이 14척의 자연석을 충남 웅천에서 위성숙의 헌성금(700만원)으로 구입하여, 2002년 10월에 세웠다. 이로써 충열공 묘소의 성역화 사업은 어느 정도 마무리되기에 이른 것이다.

 

한편 충렬공 묘소에 차량이 진입하게 폭 5m 가량의 산길과 묘소 앞에 주차 공간을 마련했다. 이는 송계공(경량, 1934년생, 판서공파 11대손)이 장흥군 산림조합장 재임시 앞장서 정비하여 차량이 묘전 앞까지 진입할 수 있게 헌신적 노고가 있었다.

 

하지만 묘소 앞 목포~순천간 외곽도로가 개통되면서 성묘하는데 어려움이 발생했다. 도로변에 쉼터 등이 갖춰지기 전에는, 임시 방편이지만 미리 장흥경찰서에 협조를 요청하여 버스를 1시간 정도 지키도록 하고 버스를 도로변에 주차하면, 하계수련회 등 평소에도 단체 참배가 가능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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