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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백규 옥과현감의 리더십 연구 2-2

벽천 2019.06.17 15:16 조회 수 : 194

 

 

3. 리더십의 특징과 재임연보
 존재선생의 리더십의 목적은 백성의 행복한 삶을 위함이며, 그 개혁의 최종목표는 성리학적 유교국가 건설에 있었다. 이를 실현하려는 방법으로 자신보다는 국가를, 사욕보다는 공익을 우선했다.
 7旬에 이르러 현실정치에 참여한 것은 존재선생이 죽음에 이르도록 건강을 악화시켰다. 학문과 현실의 행정 사이에는 괴리감이 늘 도사리고 있었지만 현감에 제수되어 옥과현 백성들을 위해 선정을 펼쳤다. 그러면 존재선생 리더십의 특징은 무엇일까?

 

 

1) 애민정신
*. 自身은 곤궁하고 民間은 살찌우게 한 것이다.(행록),
*. 자신을 희생하여 백성을 잘살게 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았다.(행장)
*. 모두 자신을 희생하여 백성들을 잘살게 하는 것을 법도로 삼았다.(묘지명).

 

  존재선생의 애민사상은 성리학에 철학적 기반을 두고 있다. 민본을 핵심가치로 삼은 성리학은 공자, 맹자사상으로 사람이 핵심가치이다. 존재선생도 인간존중 사상을 위해 고전으로 돌아가 참뜻을 되새기기 위해 존재집의 많은 부분을 할애한 사서(독서)차의로 경전을 재해석했다. 사단칠정에서 사람의 본성은 선악의 구별이라기보다 선한지, 덜 선한지로, 인물성 동이론에서는 사람과 사물의 성은 다르다고 주장해 인간의 본질을 밝혔다. 또한 사람의 본질을 우주의 원리인 이(理)로 보고 이기일원론의 편에 섰다.
 먼저, 존재선생은 애민정신을 현장에서 찾았다. 농민의 어려움을 느끼기 위해 직접 농사를 지어보고 글씨를 모르는 백성을 위해 한문과 함께 국문, 국한문 혼용을 선호했다. 백성의 공물과 부역을 없애거나 경감하고 세금은 최소로 징수했다. 하층민에 대한 법적, 제도적인 실질적 배려는 현대의 인권사상과 흡사하다. 기술자에 대한 실효적 정책은 오늘날의 기술 중시풍조의 선구자인 셈이다. 심지어 기생, 승려, 노비 등 천민에 이르기까지 정책적으로 배려했다.
 다음으론, 관리들의 횡포를 징벌하고 부조리를 타파하는 이유 또한 백성들의 편안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백성을 아끼고 실질적으로 유익하게 해주는 정책을 펴는 것이 목민관의 기본책무라 여겼다. 관리가 백성위에 군림해 지시하고 다스리는 자세보다 백성과 동고동락하는 것을 즐겨했다
 마지막으로, 존재선생의 두 글에는 애절한 백성사랑이 나타나 있다. "임금께 아뢰어 제 관직을 파직시킴으로써 흉년이 든 고을 백성들의 목숨을 살려 주시고"는 존재집 제4권의 “벼슬을 사양하는 글(辭職狀)”에 절절하게 나타나 있다.
 백성을 사랑의 백미는 “읍사제문”이다. 현감 재임 시 겨울엔 눈, 봄과 여름엔 비가 오지 않아 논밭은 타들어 가고 마침내 샘물마저 마르는 극심한 가뭄이 이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전염병이 사방에서 발생했고 메뚜기와 벼멸구의 병충해까지 겹쳐 옥과에 소재한 설산에서 기우제를 지냈다. 속히 비가 내려 땅을 흡족히 적셔 주도록 기원하며 옥과군민을 위해서가 아니라 왕의 소중한 백성임을 강조했다.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며 '애닯은 농부들이여, 이 재앙은 누구의 책임인가, 담당자 낯이 부끄러우니 수령이라 감히 부르지 말라'고 백성의 고통을 자신의 책임이라 자책하고 있다.

 

 

2) 공익사상
*. 私慾을 버리고 公益을 위함이요.(행록)
*. 공은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공공의 이익을 추구했고(행장)

 

 존재선생의 공익사상에 대한 철학은 존재집 "맹자 양혜왕"편에서 소상하게 밝히고 있다. 사욕은 공익의 반대개념으로 나를 우선하는 개념에서 출발한다고 정의한다.
 왕이 자신의 사욕을 먼저 추구한다면 고관대작, 선비 심지어 서민까지 사욕을 앞세우게 되어 온 나라는 욕심으로 가득 찰 것이라 예견했다. 사람을 이루는 신체의 각 지체의 예를 들어 더 자세히 다룬다. 만약 사람의 머리, 배, 손, 다리가 각자 자신의 몸만 위한다면 갈기갈기 찢겨져 결국 죽음에 이른다고 경고했다. 사욕은 바로 나(我)와 이(利)를 먼저 내세우는 소인(小人)들의 그릇된 가치로 패도정치를 낳게 한다.
 천하를 이롭게, 백성을 이롭게 하는 공명정대한 의의 길로 나아갈 때 천하가 나를 이롭게 하여 백성도 내 몸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바로 우선순위의 문제이다. 공익은 바로 의로 군자요, 왕도정치의 근원으로 보았다. 국가를 바로 세우게 하는 근본에서 출발한다고 여겼다.  왜 존재선생은 좁은 길을 걸었을까?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바로 자신보다는 국가를, 사욕보다는 공익을 우선했기 때문이다. 선생의 관심은 늘 국가의 안위가 최우선 순위였다. 그래서 현감으로 재임시절 공익을 우선한 정책을 실행했고 이를 자신의 삶에도 철저히 적용해 자신을 희생해 스스로 곤궁에 처하게 했다.
 존재선생은 옥과현의 관청 내“연청(鍊廳)”에 아래와 같은 교훈(箴)이 적힌 글을 게시하고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자신의 안위보다 백성, 국가, 타인, 만물이 우선하는 공익에 대한 개념을 늘 가슴에 새기도록 했다.

 

백성이 없으면 나라가 없고 / 無民無國
나라가 없으면 내 몸이 없으니 / 無國無身
타인이 있어야 내가 있고 / 有他有我
만물이 있어야 사람이 있다네 / 有物有人

 

3) 유교이념구현
 앞의 애민정신과 공익우선주의는 유교이념을 추구하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 정책실현의 근본 목적은 유교의 이념 구현에 있다. 어느 한 쪽이 제 역할을 못하면 국가와 사회와 개인은 불행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그런 차원에서 존재선생이 추구한 옥과현의 지역질서도 유교의 이념구현에 있었다. 이는 왕도정치로 하, 은, 주(夏殷周) 세 나라를 모델로 인의에 의한 통치를 말한다. 국가는 요순시대를, 개인에게는 성인으로서의 학문과 삶의 목표를 제시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제도의 허점을 이용 관리들의 횡포와 착취, 점차 사람들의 욕심으로 많은 폐단이 나타났다.
 선생은 성리학의 경전에 입각한 옥과현의 지역개선과 오랫동안 쌓인 구습타파를 위해 향약의 시행을 서둘렀다. 또한 교육을 통해 향촌사회를 개혁할 수 있다고 확신해 성리학에서 추구하는 군자인 성인(聖人)을 키우기 위해 덕성함양에 치중했다.
 
4) 옥과현감 재임전후 연보(1794.8~1798.11)

△1794년 8월  해일피해로 위유사 서영보 장흥도착
△1794년 10월 서영보 위유사 임금에게 계목 올려 위백규 등용 추천
△1795년 11월 27일 임금 부사용 제수 및 환영지 등 상달하명
△1795년 12월 07일 환영지 등 저술 몇 권 봉송
△1795년 12월 23일 임금 다른 저술 봉송, 위백규 내년 봄 입궐 하명
△1796년 01월 06일 예설수록 등 저술 24권 봉송
△1796년 01월 25일 선공감부봉사 제수, 입궐 독촉, 늦으면 이조문책
△1796년 02월 09일 임금 입궐 늑장 미심쩍고 답답하다
△1796년 02월 16일 선생 차남 도급과 조카 도전 대동 상경
△1796년 03월 03일 한양 도착, 여관투숙
△1796년 03월 06일 승정원에 도착 신고, 밤새 소문 작성 지시
△1796년 03월 07일 승정원에 만언봉사 제출, 저녁 들고 오라 지시
△1796년 03월 08일 비답내리며, 9일자로 옥과 현감 제수 당일 출발 지시
△1796년 03월 20일 옥과현 치소 부임
△1796년 04월초 성균관과 4학 유생권당, 윤숙과 한흥유 백도지인 성토
△1796년 04월 10일 조보보고 태학의 유생 권당확인, 사직장 제출
△1796년 05원 01일 두 번째 사직장 제출
△1796년 06월 15일 1차 포폄
△1796년 12월 15일 2차 포폄
                   丙辰秋冬等殿最題司 玉果 何必求備取貴願治上
                (너무 잘 다스려 더 완비하도록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1797년 02월 15일 피로누적 중풍이환
△1797년 06월 15일 3차 포폄 下(久病)
                   丁巳春夏等殿最題司 玉果 久病廢務警盜敬聽下
                   (지병으로 몸이 상해 방어업무와 경청을 할 수 없다)
△1798년 02월 귀가         
△1798년 11월 25일 영면

 
  위정철 존재기념사업회 이사가 저술한“신편 존재집 5권 외로운 구도자”편에 수록된 내용을 원문 그대로 실었다. 연보는 몇 가지 면에서 가치가 있다.
 우선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어 당시 국가가 처한 현실, 왕과 관리 및 주변인의 처신 등 연구에 핵심자료를 제공한다. 또한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여 역추적 하는데 더욱 유용하다. 마지막으로, 위백규 선생 옥과현감 전후 연보는 마지막 생애 5년이란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위 이사는 위백규 선생이 노년에 관직을 제수 받아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무리한 입궐과 만언봉사 작성, 권당과 백도지인 비난, 제수 당일 한양출발지시, 5회에 이르는 사직서 제출 등으로 체력이 급격히 떨어져 면역력 약화로 중풍이 와 영면에 이르렀다고 진단했다. 한마디로 부모보다 짧은 생애를 향수한 것은 관직으로 인해 수명이 단축된 셈이다. 마지막 5년을 저술에 몰두했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1798.11.25 72세, 호남의 참 지식인으로 외로운 구도자였던 관산의 샛별은 사라졌다. 
 그러면 지병에 대해 좀 더 자세한 기록을 알아보자. 한자해설은 野雲 위이환 장흥위씨 씨족문화연구소 연구위원이 담당했음을 밝혀둔다.
 우선 전라관찰사는 1797년 12월 15일 상부에 보고한 포폄단자에 지병을간략히 기술했다.“丁巳春夏等殿最題司 玉果 久病廢務警盜敬聽下(정사춘하등전최제사 옥과 구병폐무경도경청하)”이다. “지병으로 몸이 상해 방어업무와 경청을 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1767년 초에 심한 감기와 피로누적이 풍이 오게 된 원인임을 위정철 이사는 진단했다고 밝힌 바 있다. 요즘 칠십은 음식과 병원의 발달로 젊은 축에 속하지만 조선후기 18세기 때는 상당히 나이가 많은 노년에 속했다. 병으로 존재선생은 관직을 더 이상 수행하기가 사실상 어려웠다.
 앞서 1796년 6월 15일 전라관찰사의 포폄단자에는“丙辰秋冬等殿最題司 玉果 何必求備取貴願治上(병진추동등전최제사 옥과 하필구비취귀원치상)”을 통해 “너무 잘 다스려 더 완비하도록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감부임 초기의 유용한 정책을 펴 선정을 베푼 단적인 증거이다.

 

 

  ▼위백규 옥과현감 포폄단자(褒貶單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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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진년 추동 (上), 정사년 춘하 (下, 久病)         
      
   ※조선시대 포폄단자 인사규정 
 회수(연 2회), 고과자(관찰사가 절대평가), 평가일(매년 6월15일, 12      월15일), 결과(연속 10회 上이면 승급, 낮으면 파직)

 

 
4. 리더십 평가

 후세들은 리더로서의 위백규 선생 현감 봉직에 대한 업무평가를 어떻게 할까? 존재선생 옥과현감 재임시절 업적에 대한 평가를 관할지역, 후세, 문중으로 나누어 함으로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먼저 옥과지역의 유림들의 생각과 묘지명을 기록한 梅山 홍직필의 의견이다. 장흥위씨 문중 내 松堂 위재형(1924~2017.06.21)公에 의해 문보(門寶)라고 불리던 위정철 존재기념사업회 이사의“신존재집(新存齋集)”에서 밝힌 견해를 원문 그대로 싣는다,

 

1) 옥과지역 유림
 옥과지역 유림들이 1564년 세운 영귀서원(詠歸書院)에서 존재선생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있다. 추배된 인물 중 현감으로 재임했던 김인후(金麟厚, 1510~1560) 다음으로 존재선생이 존경받고 있다. 존경을 넘어 목민관으로 칭송되고 있고 청백리로 찬양받고 있다. 또한 위의 사진에서 보듯 서원 입구에 거사비(去思碑)를 세워 존재선생의 선정을 생각하고 후세에 전하고자 했다. 칠십 평생 몸소 체득하고 정립시킨 학문을 바탕으로 백성행복과 국가번영을 목표로 옥과현에서 네 분야 12 정책에 대한 선정을 기리고 있다.

 

 

2) 梅山 홍직필

잠시나마 고을 수령을 맡아 / 薄試牛刀
순량한 관리의 모습만 대략 보였지 / 粗跡循良
어찌 경륜을 다 펼칠 수 있으리 / 用何能究
덕을 받들어 행할 뿐이니 / 惟德之將
온축된 재능을 펼쳤다면 / 苟展厥蘊
무엇을 행한들 못했으리오 / 何施不臧

남기신 풍모와 운치 / 遺風餘韻
준수한 선비 흥기시키네 / 竦動髦士
우뚝 솟은 천관산이여 / 天冠峨峨
호남 유림이 우러러보고 / 一路仰止
울창한 다산이여 / 有欝茶山
가을 잣나무 시들지 않으리라 / 秋栢不死 (존재선생 묘지명
)

 

 묘지명(墓誌銘)을 쓴 梅山 홍직필(洪直弼)은 말미에 한시를 남겼다. 리더 위백규 선생이 베푼 지역백성을 위한 정책 미완성되어 안타깝게 여기면서 호남유림이 영원히 흠모할 대상이라고 읊고 있다.


 3) 장흥위씨 문보(門寶) 위정철 

 원산(圓山)은 저서 신존재집5권에 {정조는 다시 이렇게 말했다.‘조정에서 위백규에 대해 진정을 다하는 것이 어찌 위백규에 대한 사사로운 마음이 있어서 그랬겠는가. 결코 이대로 벼슬을 그만두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라고 했다. 전라감사와 이조에서는그가 중풍으로 인해 더 이상 공무를 수행할 수 없다라고 아뢰었으나 왕은 한사코 관직에 앉히고 싶었다. 정조로서는 선생만큼 행실이 갖추어진 인재를 찾기 어려워 본보기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임금의 존재 위백규 선생을 아끼는 마음이 다산 정약용에 못지않다.}고 기술하고 있다.

더 나아가 {실질적으로 현감의 직무를 수행한 기간은 1796320일부터 17972월 중순쯤으로 보인다. 기간은 모두 합해도 11개월 정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짧은 기간 동안 숱한 적폐를 혁파하는 업적을 세웠다. 준비된 현감의 진면목이다.}라고 존재선생의 직무에 대해 평가했다.

 

 

5. 맺음말

존재선생의 리더십은 성공한 리더나 행정의 달인이라기보다 실학적 대안,시대와 현장에 대한 냉철한 분석력, 창의적 정책실현 의지에다 애민정신과 공익사상을 종합해 볼 때 '철저히 준비된 리더(tightly prepared leader)'로 규정한다.

 

 

가뭄에 전염병 병충해마저 해를 거듭하니,

설산에 무릎 꿇고 백성위해 비는 맘,

제읍사문(祭邑社文)에 전하네.

 

70년 준비된 경륜 옥과의 홍복(弘福)일세.

어민 승려 기생 중인 시정의 환호,

행장과 행록, 묘지명에 전하네.

 

울력 공납 균역 학문장려

인의로 충만한 수령칠사의 표상이었거늘

1798.11.25 ! 관산의 샛별이여!

 

2019.06.17

 

--圓山 위정철 존재기념사업회 이사의 신존재집 제5권 '외로운 구도자'를 읽고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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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감 위백규 거사비 (곡성군 옥과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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