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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맺음말
 필자는 최근 병계 선생의 흔적을 찾기 위해 예산군 추사고택 관계자, 예산문화원, 예산향토사학자 강희진씨, 덕산면사무소, 옥계리와 상가리 이장님, 봉산면사무소, 궁평리 이장님 등 예산군 지역 내 여러 사람을 통해서 선생의 직계 후손의 거소와 연락처를 알 수 있었다. 이러함은 선생의 직계 후손들이 번손되지 않아 지역에서 희귀하기 때문이었다.

윤봉구 선생 초상화.jpg

봉산면 궁평리에서 거주하는 선생의 직계 8대손 윤시현(1938년생)丈에게 연락하고 찾아가 후손 간의 연정(緣情)을 나누었다. 윤시현 후손은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퇴직 후 귀촌하여 시골 생활이 낯 설고 병계 선생과 파평윤씨 선대에 대해 정통하지 않았다. 필자는 안내를 받아 집 주변에 있는 선생의 신도비, 납골당 답사와 집안에 소장하고 있는 교지 47매, 사본 병계집을 확인하였다. 선생의 유품을 충남대학교, 예산문화원 등 협조를 통해 박물관 등에 기탁하여 선생의 유품을 관리하는 것이 선생을 알리면서 오래토록 보존하는 방법이라고 강력히 권유하였다. 현재 봉산면 궁평리, 덕산면 옥계리·상가리를 포함한 예산군 내에는 선생의 후손은 윤시현丈 외 거주자가 없다. 이밖에 가장 가까운 5대조 경조, 경유 계열의 후손 5가구가 당진시에 거주하고 있다.

병계 선생과 존재 선생의 큰 차이점은 후손의 역할에서 찾을 수 있다. 병계 선생은 당대 학문이 뛰어나면서 강직하여 세자를 교육하는 진선, 찬선과 대사헌, 공조판서 등 벼슬을 두루 지내 전국 여러 가문의 특출한 인재들이 찾아와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선생 이후 직계 후손들의 관직 출사가 없고 번손 되지 않아 사우 건립, 유고문집 국역 등 체계적인 후손 역할이 없었다. 근래 선생에 대한 학계의 학문 연구 내용은 금번에 확인하지 않아 기술을 생략한다.

이에 비교하면 존재 선생의 성관(姓貫)은 전라도 서남해안의 벽촌 장흥으로 당대 가문에서는 조정(朝政)에 출사한 관료가 미미하였다.

존재 선생 동상.jpg

선생은 1765년 생원시에 입격하여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당대 폐단으로 과거를 포기하고 향촌에서 강학하면서 실학저서 정현신보(政弦新報) 등 100여권을 저술하였다. 1796년 선생의 학문이 호남위유사 서영보(1759~1816)를 통해 정조대왕에게 알려져 거듭된 命에 의하여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리고 제117대 옥과현감에 제수되어 1년 4개월 재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이후 장원서별제(掌苑署別提), 경기전령(慶基殿令)에 임명되었으나 노환으로 취임하지 못하고 72세로 종(終)하였다. 선생의 학문은 대외적으로 오계(梧溪) 하성도(1736~?), 가걸재(可傑齋) 김규행(1770~?), 매산(梅山) 홍직필(1776~1852), 둔재(遯齋) 김광길(1789~1851) 등과 위문 내에서는 아우 성균생원 서계(書溪) 위백순(1737~1815), 족제 팔취당(八取堂) 위백훈(1738~1815), 족질 묵와(默窩) 위수택(1739~1796), 원취당(願醉堂) 위도순(1748~1816), 죽오(竹塢) 위도한(1763~1830), 삼회당(三悔堂) 위도임(1765~1838), 족손 옥와(玉窩) 위영백(1770~1789), 손 위영의(1788~1841) 등을 거쳐 계승 발전되었다.

 

이후에는 연암거사(蓮庵居士) 위영경(1797~1871)·운곡(雲谷) 위영서(1799~1868)~증손 위경곤(1812~1864)~지족헌(知足軒) 위상기(1822~1899)~다암(茶嵓) 위영복(1832~1884)~소석(小石) 김노현(1845~1915)~계사(桂史) 위택기(1858~1940)~홍의재(弘毅齋) 위봉(1863~?)~오헌(梧軒) 위계룡(1870~1948)~산음(山陰) 위근(1883~1971)~상은(觴隱) 위숙량(1887~1953)~원행(元行) 위효량(1897~1964)~다초(茶樵) 위복량(1897~1987) 등을 통해 장천재(長川齋)와 다산재(茶山齋)에서 신학문이 확산된 1975년까지 후손들에게 강학하여 학문과 사상이 이어져 왔다. 이러한 영향으로 후손들은 1398년 창건한 장흥향교에 앞장서 참여해오면서 1764년 이후부터 현재 간 교임록에 의하면 수장(首長)인 전교(典校)를 48명 배출하여 유도진흥에 기여하였다.

근래에는 이해준 목포대 교수, 김석회 인하대 교수, 하성래 안양대 교수, 이종출 중앙대 교수, 오항녕 전주대 교수, 위홍환 중등학교장, 김덕진 광주교대 교수, 김희태 문화재 전문위원 등 다수의 학자들이 선생의 학문을 연구하였다. 장흥위문 후손들은 1806년 죽천사(竹川祠), 1929년 합천군 옥계서원(玉溪書院), 1965년 곡성군 영귀서원(詠歸書院)에 선생을 배향하고 1984년 선생의 사우 다산사(茶山祠)를 창건하였다. 1985년 장흥군 내에 선생의 입상 동상과 2018년 좌상 동상을 세웠다. 1767년(丁亥) 선생이 창건한 묘각 다산재를 2003년 4차 중건(重建)하였다. 2013년 정부의 문화사업 추진 일환에서 예산 지원으로 전주대학교 고전학 연구소(변주승 교수)에서 주관하여 존재집을 국역(國譯)화 하였다. 2015년 한·중·일 실학학회에서 함께 선정한 동아시아 실학 사상가 99인에 포함되어 학문이 재조명 받고 있다. 2016년 존재기념사업회를 창립하고 선생이 탄생한 5월 15일을 "존재의 날"로 지정하여 장흥군의 성원(聲援)과 
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정기총회 및 학술발표회를 개최하여 선생의 실학적 학문과 사상을 기리고 있다.  2018년 존재고택에서 소장해온 유품 1,000여점을 한국학호남진흥원에 기탁하여 체계적인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선생이 말씀한 삼벽(三僻)은 지금도 진행형이어서 후손들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사료된다.

 

경남 합천군 봉산면 술곡리 370번지에 옥계서원 위치한다.

옥계서원.jpg

 

이곳에는 율곡(栗谷) 이 이(李 珥 1536~1584),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 1683~1767), 모려(茅廬) 최남두(崔南斗 1720~1777),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 1727~1798), 입암(立菴) 박준흠(朴俊欽 1719~1796), 몽관(夢關) 최유윤(崔惟允 1809~1877)선생 등의 도덕과 학행을 추모하기 위해 소원사(遡源祠)에 위폐를 봉안하고 매년 3월 中丁일 향사하였다. 본 향사에 장흥위문 안항공파 웅천종중에서는 매년 3~4명의 후손이 참여해왔다. 그러나 농촌사회의 고령화에 따른 제향문화 변화로 경주최씨 광과정파 주부공종중(대표 최영업)에서는 2018년부터 향사를 봉행하지 않음을 확인하였다.

 

필자는 금번 병계 선생의 행적을 찾으면서 파평윤씨 선대, 선생의 교지를 통한 관직, 후손, 가야산 일원 옥계리와 상가리 흔적 등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서남해안 벽촌에 머물고 있는 장흥위문을 위한 간암처사 선생의 통한(痛恨)과 존재 선생의 삼벽(三僻)의 말씀을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끝으로 금번 병계 선생의 흔적을 찾는 예산군 방문에서 협조를 아끼지 않은 예산향토사학자 강희진님, 내포문화숲길 예산센터 문순수 차장님, 옥계리 강태흥 이장님, 직계 후손 윤시현님, 파평윤씨 소정공파 사무국장 윤여신님, 파주시 거주 8대 방손 윤방현님 등께 깊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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