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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학술자료

9) 남을 시기하는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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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서(秦誓)〉에 “남이 가지고 있는 기예(技藝)를 시기하여 미워하며, 남의 뛰어나고 거룩함을 어그러뜨려 통달하지 못하게 한다면 이는 포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의 자손과 백성들을 보호하지 못할 것이니, 또한 위태로울 것이다.〔秦誓曰 人之有技 媢嫉以惡之 人之彦聖 而違之 俾不達 寔不能容 以不能保我子孫黎民 亦曰殆哉〕”라고 하였다.
시샘과 미움은 온갖 악의 근원이다. 시샘과 미움이 있으면, 남이 선을 행하는 것을 인정하여 도와주지 못하고, 남이 선을 행하는 것을 인정하여 도와주지 못하면 여러 선을 모아 배울 수 없다. 그리하여 의지가 날로 고루하여 악행이 날로 익숙해지며, 덕성이 날로 소진되어 지혜가 날로 어두워진다. 비록 이사(李斯)의 재주와 장열(張說)의 문장과 왕안석(王安石)의 몸가짐과 자첨(子瞻) 소식(蘇軾))의 뛰어난 재주와 장준(張浚)의 충의가 있더라도 모두 완인(完人)이 되지는 못한다.
그 나머지 만고의 소인은 모두 ‘시기심〔猜〕’ 한 글자가 병통의 근본이 되었다. 만일 시기심이 있다면, 집에서는 집안을 보존하지 못하고, - 시기심의 지극히 은미한 곳은 ‘나 혼자만이 지혜롭다〔吾獨知〕’는 세 글자이다. 심한 경우는 부자ㆍ부부ㆍ형제간에도 이러한 뜻이 있기 때문에 가장(家長) 노릇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 마을에서는 마을을 보전할 수 없으니, 더구나 향당에서이겠는가. 더구나 조정에서이겠는가. 동한(東漢)의 당인(黨人)과 북송(北宋)과 남송(南宋)의 당고(黨錮)가 모두 한두 사람이 품었던 시기심에서 비롯되었으니,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위의 내용은 온갖 악의 병이다. 악의 명칭은 크고 작은 것이 천백 가지나 되지만, 그 병의 뿌리를 끝까지 캐 보면 모두 ‘시기심〔猜〕’ 한 글자이다. 이 때문에 “남을 해치지 않고 남의 것을 탐하지 않는다.〔不忮不求〕”라는 네 글자를 성인의 문하에서 귀하게 여겼다. 대체로 탐함은 또 해침의 근본이니, 해침과 탐함은 서로 표리관계가 된다. 탐함의 다른 명칭은 흠모함과 부러워함이니, 흠모하고 부러워하지 말아야 문왕 같은 사람이 된다. 해침의 다른 명칭은 과시함과 자랑함이니, 과시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아야 대우(大禹) 같은 사람이 된다.

10) 선한 인간이 되는 약
맹자가 말하기를 “대순은 이보다도 더 위대함이 있었으니, 남에게서 취하여 선(善)을 행함을 좋아하셨다. 남에게서 취하여 선을 행하는 이것은 남이 선을 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라고 했다.〔孟子曰 大舜有大焉 樂取於人以爲善 取諸人以爲善 是與人爲善者也〕
이는 바로 어진 사람의 일이다. 어진 사람의 마음은 공명정대해서 천리(天理)가 순수하고 온전하여 물아(物我)의 간격이 없어서 타인의 한 가지 선행만 보더라도 가상히 여기고 몹시 기뻐하여 참으로 내가 그보다 못하다는 뜻이 있기 때문에, 저 사람의 선을 바로 자기의 선으로 삼는다. 그래서 ‘취(取)’ 자는 오히려 군더더기 말이기 때문에 다시 ‘남에게서 취하여 선을 행하는 이것은 남이 선을 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했고, 이윤(伊尹)이 “덕(德)은 일정한 스승이 없고 선을 주장함이 스승이 되며, 선은 일정한 주장이 없고 능히 한결같음에 합한다.〔德無常師 主善爲師 善無常主 協于克一〕”라고 말했으니, 그 법도는 똑같은 것이다. 공력을 들이는 것은 사람을 대할 적에 모든 것이 완비되기를 요구하지 않는〔與人不求備〕 데에서 시작한 것이다.

위의 내용은 온갖 선(善)의 약이 된다. 세상 사람들은 모두 묻기를 좋아하지 않고 스승으로 섬기기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소인(小人)으로 생애를 마친다. 그 좋아하지 않는 것은 그보다 못함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다. 가령 공자의 문하에서 배우는 사람은 △덕행(德行)에 대해서는 안자(顔子)와 민자건(閔子騫)을 스승으로 삼고, △언어(言語)에 대해서는 자공(子貢)을 스승으로 삼고, △정사(政事)에 대해서는 염구(冉求)와 자로(子路)를 스승으로 삼고, △문학(文學)에 대해서는 자유(子游)와 자하(子夏)를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그들을 스승으로 삼을 때에는 그보다 못한 듯하지만, 합하여 성취함이 있을 경우에는 모든 것을 겸했던 공자와 같을 것이니, 어찌 위대하지 않겠는가. 삼천 명의 제자 가운데 유독 안회(顔回)만이 여기에 대해 터득함이 있었다. 그러므로 있어도 없는 것처럼 여기고, 가득해도 빈 것처럼 여기며, 학식이 많으면서 적은 이에게 묻고, 능하면서 능하지 못한 이에게 물었던 것이다. 만약 안회가 오래 살아 더 높은 경지로 변화했다면, 또한 순 임금처럼 되었을 것이다.
가령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갑(甲)에게 농사를 배우고, 을(乙)에게 공업을 배우며, 병(丙)에게 장사를 배우고, 정(丁)에게 의술을 배우며, 무(戊)에게 점술(占術)을 배우고, 계속 배워 겸하여 안다면 보통 사람보다 크게 뛰어난 점이 있을 것이다. 가령 지금 문사(文士)들은 갑에게 시(詩)를 배우고, 을에게 서(書)를 배우며, 병에게 사(詞)를 배우고, 정에게 근체(近體)를 배우며, 무에게 고체(古體)를 배우고, 계속 배워서 겸하여 안다면 어찌 문장을 성취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사람들은 한 가지 기예(技藝)를 터득하자마자 우쭐해서 스스로 기뻐하며 남들에게 묻기를 부끄럽게 여기니, 어찌 슬퍼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를 가지고 깊이 생각하고 자신을 절실히 돌이켜 살핀다면, 성인은 배워서 될 수 있다는 말은 진실로 빈말이 아니다. 위(衛) 무공武公)의 시에 “사람들이 자만하지 않으면 누가 일찍 알고 늦게 이루리오.〔人之靡盈 誰夙知而暮成〕”라고 했으니, ‘자만하지 않는다〔靡盈〕’는 말은 순 임금을 배우는 요결이다.

11) 사람과 귀신을 판별하는 약
(1) 《대학(大學)》에 성의(誠意)라고 했다.〔大學曰 誠意〕


(2) 《중용(中庸)》에 신독(愼獨)이라고 했다.〔中庸曰 愼獨〕
의(意)는 마음이 발동한 것이다. 사물이 형체와 접촉하면 성(性)이 움직여 정(情)이 된다. 정이 실마리를 이루어 조금이라도 이렇게 저렇게 헤아리는 것이 바로 ‘의’이다. 내 가슴속에서 발동했는데 아직 언어와 동작에 드러나지 않아서 곁에 있는 사람이 아직 모르고, 부자(父子)와 부부(夫婦) 사이라도 서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독(獨)이라고 했다.
보통 사람은 혼자만 안다고 여기기 때문에 삼가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비록 흉악하고 불선(不善)한 생각의 싹이 일어나더라도 행하지만 않으면 무방하다고 핑계 대어 맹렬히 반성해서 끊어 버리지 않는다. 그래서 이것이 하늘과 바다를 뒤집는 화근이라는 점을 절대로 모른다.
때문에 군자는 뜻이 싹트기 전에 계구(戒懼)하고 - 보이지 않을 때도 계구하고, 들리지 않을 때도 공구(恐懼)한다. - 의(意)가 발동되어 홀로 아는 상태에서 더욱 삼가서 불선의 생각을 끊는다. 한 번 끊고 두 번 끊으며 끊고 다시 끊으며 삼가고 또 삼가서 익숙한 경지에 이르면, 선을 여색처럼 좋아하여 마음에서 참으로 이를 좋아하니, 의에서 발동한 것은 실로 선하다. 그리고 불선을 악취처럼 싫어하여 참으로 이를 싫어하니, 의에서 발동하는 것은 실로 불선이 없다. 이것이 이른바 성의(誠意)이다.
이 경지에 이르면 상제(上帝)가 나의 영대(靈臺 마음)에 있고 귀신이 밝게 곁에 늘어서 있어서 육척의 몸이 허명(虛明)하고 광대(廣大)하여 우주와 통하고 만물을 통섭한다. 이렇게 되면 제왕이 그 존귀함을 잃고, 진초(晉楚)가 그 부유함을 잃고, 형벌이 그 위엄을 잃고, 서시(西施)와 남위(南威)가 그 아름다움을 잃을 것이니, 정명도(程明道)가 말한 호걸영웅이다. 어떤 사람은 한두 가지 의(意)를 애써 끊고서 자신이 이미 성의 했다고 여기니, 실패로 끝나지 않는 일이 드물다. - 공부가 아직 지극하지 않은데도 자부하는 자는 바로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기 때문에 매번 낭패를 본다. -

위의 내용은 사람과 귀신을 판별하는 약이다. 성의(誠意)하면 사람이고, 성의하지 못하면 귀신이다. 사람과 귀신의 구분은 단지 한 생각의 차이일 뿐이다. 세상 사람들이 이 말을 믿지 않기 때문에 일찍이 성의 공부에 힘을 쓰지 않았다. 성의에 힘을 쓰지 않는 자는 모두 형체를 드러낸 도깨비이다. 한두 사례를 말해 보면, 당(唐)나라 고종(高宗)이 부궁(父宮)에 들어가 마음속으로 무재인(武才人)을 좋아했으니, 그 누가 알았겠는가. 고종은 사람들이 모른다고 여겨 그런 뜻을 끊어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마침내 아버지의 첩을 처로 삼아 나라를 망하게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수(隋)나라 양광(楊廣)은 형을 참소하여 태자 자리를 빼앗았고, 일찍 천자의 자리에 올라 진부인(陳夫人)과 간통하겠다고 마음먹었으니 그 누가 알았겠는가. 양광은 사람들이 모른다고 여겨 그런 뜻을 끊어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마침내 제 아비를 구타해서 죽이고 밤에 간통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화흠(華歆)이 밖으로 나가서 관리의 행차를 구경할 때 마음속으로 몹시 부러워했으니, 그 누가 알았겠는가. 화흠은 사람들이 모른다고 여겨 그런 뜻을 끊어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마침내 조조(曹操)를 위해 손으로 황후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조비(曹丕)를 위해서 직접 손으로 천자의 옥새 인끈을 풀었다. 심지어 허리띠의 작은 쇠붙이 하나에 뜻을 두면 동릉(東陵)의 큰 도적인 도척이 되고, 밥 한 그릇에 뜻을 두면 동쪽 성곽 무덤가에서 천하게 구걸하는 제(齊)나라 사람이 된다. 의(意)를 두려워할 만한 것이 이와 같고, 홀로 있을 때를 두려워할 만한 것이 과연 이와 같다.
성의하지 못한 자는 매사에 모두 스스로를 속인다. 스스로를 속임이 익숙해지면, 의(意)와 의(意)가 계속 이어서 일어나고, 마음은 홀로 있을 때 의혹되는 바가 되고, 뱃가죽은 스스로를 위로하는 덮개가 되고, 망상은 걱정 없는 미아가 되어, 문득 대낮에 눈이 어두운 지경을 만나면 대번에 왕척직의 마음이 생긴다. 만고의 소인이 극악 대죄를 저지르고, 만고의 현인과 호걸이 중도에서 구덩이에 빠지는 상황이 모두 이 한 구절에서 연유하니, 어찌 우리 인간의 생사를 가르는 길머리가 아니겠는가.
시해(弑害)와 반역(叛逆)이 크나큰 흉악한 짓임을 세상 사람들 누가 모르겠는가. 양광과 화흠이 악한 의(意)가 몸속에 잠복되어 있음을 모두 두려워하지 않으니, 어찌 슬프지 않겠는가. 《시경》에 “네가 방에 있을 때를 살펴보건대 오히려 옥루에서도 부끄러움이 없다.〔相在爾室 尙不愧于屋漏〕”라고 했으니, 아, 이런 사람이 없다면 내가 누구와 돌아갈꼬.

12) 일하는 방도와 호연지기
맹자가 말하기를 “반드시 호연지기를 기름에 종사하고 효과를 미리 기대하지 말아서 마음에 잊지도 말며 억지로 조장하지도 말아야 한다.”라고 했다.〔孟子曰 必有事焉而勿正 心勿忘勿助長〕
위의 내용은 일을 해 나가는 약이다. 맹자가 호연지기를 기르는 방도를 말하여, 앞서의 성현이 미처 말씀하지 않은 의미를 밝혔다. 인간 세상의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어느 곳인들 마땅하지 않음이 없다. 반드시 호연지기를 기르면서 마음에 잊지 않을 것이고, 효과를 미리 기대하지 않으면 억지로 조장하지 않을 것이다. 종사하지 않거나 잊어버린다면 이루지 못하고, 효과를 미리 기대하고 억지로 조장한다면 도리어 해가 있을 것이다.
선비가 마음을 다스리고 수양하는 일, 문인이 문장을 짓고 과거 합격을 바라는 일, 문관ㆍ무관이 발신(發身)하여 관직을 바라는 일, 농부가 농사일로 부(富)를 추구하는 일, 공장(工匠)이 기술을 배우는 일, 상인이 물품을 파는 일, 여행객이 부지런히 길을 걷는 일, 환자가 오랜 병을 고치는 일, 목동이 마소를 기르는 일 등은 모두 이 방도로 행한 이후에야 이룰 수 있다. 호연지기는 미리 효과를 기대하고 억지로 조장하지 않아야 한다.
진실로 체험해서 터득할 수 있으니, 음식ㆍ언어ㆍ동정ㆍ걸음걸이 사이에 이러한 이치가 아닌 것이 없다. 참으로 실리(實理)를 알고자 한다면, 재채기를 하는 행동에서 시험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재채기를 하려고 할 적에 눈이 어질어질하고 코가 간질거려 기(氣)가 위로 오르려는 즈음에, 이를 잊으면 재채기가 나오지 않으니, 이는 밭을 내버려 두고 김매지 않는 격이다. 눈을 부릅뜨고 코를 찡그려 숨을 들이마셔서 돕는다면 재채기가 도리어 숨통을 막을 것이니, 이는 싹을 뽑아 올리는 격이다.
만사(萬事)에 적용해 봐도 똑같은 이치이다. 마음을 다스리려다 외도(外道 이단)에 빠지고, 문장을 짓다가 몸에 병이 생기며, 과거에 합격하려고 왜곡된 길을 찾고, 관직을 구하려고 권문세가에 빌붙으며, 부(富)를 구하려고 이익을 급히 추구하니, 모두 조장하는 폐해이다. 이는 벼이삭을 빨리 익게 하려고 이삭을 뽑은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결과를 조기에 성취하기 위해 벼이삭을 뽑은 어리석음을 반복한다.

13) 처세를 잘할 수 있는 약
맹자가 말하기를 “여기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자신을 횡역(橫逆)으로 대하면, 군자는 반드시 스스로 돌이켜서, 내 반드시 인(仁)하지 못하며 내 반드시 예(禮)가 없는가 보다. 이러한 일이 어찌 이를 수 있겠는가 한다. 그 스스로 돌이켜 인(仁)했으며, 스스로 돌이켜 예가 있었는데도 그 횡역이 전과 같으면 군자는 반드시 스스로 돌이켜, 내 반드시 성실하지 못한가 보다 한다. 스스로 돌이켜 성실했으되, 그 횡역이 전과 같으면 군자는 말하기를, ‘이 또한 망녕된 사람일 뿐이다.’라고 하니, 이와 같다면 금수(禽獸)와 어찌 구별되겠는가. 금수에게 또 무엇을 꾸지 질 수 것이 있겠는가.”라고 했다.〔孟子曰 有人於此 其待我以橫逆則君子必自反也 我必不仁也 必無禮也 比物奚宜至哉 自反而仁矣 自反而有禮矣 其橫逆由是也 君子必自反也 我必不忠也 自反而忠矣 其橫逆由是也 君子曰此亦妄人也已矣 如此則與禽獸奚擇哉 於禽獸 又何難焉〕
위의 내용은 처세(處世)하는 약이다. 사람들은 매양 횡역이 닥칠 것을 걱정하여 분노와 고뇌를 견디지 못한다. 만일 이를 통해 스스로 반성하여 더욱 인(仁)과 예(禮)에 힘쓴다면, 자신에게 유익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더라도 저들은 스스로 금수가 되는 꼴이니, 나에게 무슨 손해가 되겠는가. 만일 저들이 금수인데도 나를 횡역으로써 대하지 않으면, 내가 저들과 같은 부류가 되는 꼴이니, 어찌 참으로 걱정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는 공자가 이른 바 “마을 사람 중에 선한 자가 좋아하고, 선하지 못한 자가 미워한다.”라는 것이다. 사람이 제대로 이를 안다면 처세하는 데에 있어서 어찌 여유가 있지 않겠는가.

14) 다른 사람을 잘 대하는 약

〈곡례(曲禮)〉에 “군자는 남들에게 충성을 다하도록 바라지 않고, 호의를 남김없이 베풀도록 바라지 않는다.”라고 했다.〔君子不竭人之忠 不盡人之歡〕


위의 내용은 다른 사람을 대하는 약(藥)이다. 남들이 나를 받드는 것을 보고 끊임없이 요구하면, 이는 충성을 다하도록 바라는 것이다. 사람이 장차 감당하지 못하여 끝내는 망치게 될 것이다. 남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보고 끝없이 바라면, 이는 호의를 남김없이 다하도록 바라는 것이다. 결국 사람이 장차 감당하지 못하여 좋아했던 정(情)이 사라질 것이다. 군자는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지 않으며, 자신을 많이 책망하고 남은 적게 책망한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따르기가 쉬워서 처음부터 끝까지 온전할 수 있다.

15) 아랫사람을 다스리는 약

 《서경》에 말하기를 “아랫사람에게 간략함으로써 임하고, 대중을 너그러움으로써 부린다.〔書曰 臨下以簡 御衆以寬〕”라고 했다.
위의 내용은 아랫사람을 다스리는 약이다. 말은 간단하지만 이해하기는 매우 어렵다. 여기서 아랫사람이란 가까이는 자제(子弟)를 다스리고, 작게는 노복을 부릴 때를 가리킨다. 간략은 지나치게 많은 말은 되레 해가 된다는 말이다. 또한 크게는 정치지도자 즉, 왕이나 대통령을 부린다는 말은 너그러움으로 백성을 다스림을 말한다. 이 도리를 상실하면 모두 망친다. 심한 자는 제 몸을 망치고 집을 망치고 나라를 망친다.

16) 평생 마음에 새길 교훈
거백옥이 사람을 보내 공자에게 문안드리니, 공자가 그와 함께 앉고서 묻기를 “부자(夫子 거백옥)께서는 무엇을 하시는가?”라고 하자, 대답하기를 “부자께서는 허물을 적게 하려고 하지만 아직 능하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심부름꾼이 나가자, 공자가 말했다. “훌륭한 심부름꾼이구나, 훌륭한 심부름꾼이구나!”라고 했다〔蘧伯玉使人於孔子 孔子與之坐而問焉曰 夫子何爲 對曰 夫子欲寡其過而未能也 使者出 子曰 使乎使乎〕
위의 내용은 일생 동안 마음에 새길 방도이다. 사람의 병통으로는 내게 병이 없다고 여기는 것보다 큰 것이 없다. 심지어 병을 숨기고 의원을 꺼리는 지경에 이르면, 몸이 죽더라도 깨닫지 못한다. 매양 허물이 적게 할 것을 생각하면, 덕(德)이 날로 새로워지고 업(業)이 날로 커진다. 거백옥은 당시 나이 60세에 59년간의 잘못을 알았다. 거백옥이 어찌 젊어서부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었겠는가. 해마다 점검해서 금년에 작년보다 못한, 자신만이 홀로 아는 점이 있어 비록 은미한 한마디 말이나 한순간의 침묵일지라도 충분히 바르지 않고 조금이나마 부족하면 모두 이른바 잘못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나이 60세에 60번을 변화했다. 변화란 금년이 작년보다 더 낫다는 것을 말한다. 60년 동안 해마다 변화하여 60번 변화한 것이다. 지금 사람은 인생 백 년 동안에 한 번도 변화할 수 없으니, 또한 어찌하겠는가.

<결어> '자식을 바꿔 가르친다'
위의 36조목(8문 8답)은 사람이 되는 큰 법도임을 알 수 있다. 배우는 자가 글을 읽을 적에 구구절절 몸소 잘 인식해서 절실히 자신을 뒤돌아보고 심사숙고한다면, 경전의 천만 마디 말씀이 무엇인들 병증(病症)을 진단하는 처방과 병증에 들어맞는 약(藥)이 아니겠는가. 아, 사경(四經)이 충분한데도, 사서(四書)가 또 나왔고, 사서가 충분한데도, 주자(周子)ㆍ정자(程子)ㆍ장자(張子)ㆍ주자(朱子)가 또 훈석(訓釋)해서 부연 설명했다. 그래도 부족하게 여겨 《소학》, 《근사록》, 《심경》이 또 기술됐다.
황명(皇明 명나라)을 거쳐 동방의 여러 유학자에 이르러서 훈몽(訓蒙)이나 절요(節要)로 편집한 책자가 또다시 수백 편이나 나왔지만, 이를 읽을 적에 절실히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면, 다 같이 보탬이 없다. 아무리 절요에 또 절요를 했더라도 또한 무슨 보탬이 있겠는가. 이 36조목은 요점 가운데서 다시 뽑은 지극한 요체라고 말할 만하다.
그러나 《시경》, 《서경》, 《논어》, 《맹자》의 전체 책을 범범하게 보고서 이미 실효가 없는 통발이나 올무와 같은 말로만 치부해 버리니, 누가 이 요점을 뽑아 수록한 글에서 마음을 고치고 관점을 바꾸겠는가. 필시 무익할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다만 표현으로 담아내지 못했던 의미를 미루어 널리 설명하고 사방으로 곡진히 근거를 대어 그 취지를 극진히 하여 각 조목에 붙여 글을 읽는 모범으로 삼았으니, 부디 거병은 이 조목을 가지고 반성하고, 이런 방식으로 옛 책을 읽기를 바란다. 그렇게만 한다면 그 얼마나 마음과 몸을 선하게 할 수 있겠는가.
나는 8, 9세 때부터 경서는 사람다움을 만드는 신방(神方)이라는 점을 알았다. 그러므로 중요한 말을 초록하여 좌우(座右)에 놓아두거나 허리띠에 차고 다녔으며, 담장ㆍ벽ㆍ문에 쓴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20세 이후 의지가 나뉘고 게을러졌으며, 30세 이후에는 세속에 희망이 끊어져 나도 모르게 내 자신을 스스로 버렸다. 40세 이후에는 더욱 다시 분한 감정이 북받쳐 방랑하다가 드디어 평생을 그르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 63세에 처지가 곤궁해지고 나서야 근본으로 돌아가 회상해 보니 떨리고 슬퍼서 한밤중에 홀로 깨어 회한의 눈물을 쏟아 낸다.
12회(會)의 사이에 한 번 인간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이 되었고 남자가 되었으니, 그 얼마나 다행인가. 그런데 흰머리에 석양빛이 비추는데 금수와 같은 생존을 벗어나지 못했으니, 원망과 회한이 어찌 그 끝이 있겠는가. 숨이 끊어지기 전에 다시는 이 삶에 죄를 짓지 않기를 거듭하여 맹세했는데, 정신과 의지가 이미 피폐해져 기운을 통솔할 수 없고, 근력이 이미 고단하여 떨쳐 일어날 수 없다.
다만 성현의 가르침과 요결(要訣)을 마음에 간직하여 감히 소홀히 잊지 않아서, 잠깐 사이에 말이나 행동을 하자마자 곧장 그릇됨을 깨달았다. 낮에는 아침의 잘못을 깨달았고, 저녁에는 낮의 잘못을 깨달았으며, 새벽에는 잠자리에서의 잘못을 깨달았는데, 깨닫자마자 다시 생각해 보니, 모두 앎이 아직 참되지 못한 때문이었다.
비유하자면, 뜨거운 불길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화롯불에 피부를 데어 보고 알게 되는 참다운 앎만 같지 못했기 때문에, 끝내 맹렬히 끊어 버릴 수 없었다. 마치 웅장(熊掌)의 맛있는 맛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직접 씹어서 단맛을 삼켜 보고 알게 되는 참다운 앎만 같지 못하기 때문에, 끝내 용감하게 나아가 기필코 터득할 수 없었다. 이것이 《대학》의 가르침이 반드시 치지(致知)를 우선한 이유이다. 잘 읽지 못하는 자는, 비유하자면 불은 차가운 사물이 아니며 곰 발바닥은 먹을 수 있다고 입으로만 말할 뿐이다. 이와 같은 지식과 식견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정자가 “《논어》를 읽기 전에도 이런 사람이고, 《논어》를 다 읽은 뒤에도 또다시 이런 사람이라면 이것은 바로 읽지 않은 것과 같다”고 했다. 오늘날의 사람들은 열두 성인의 글을 다 읽어도 예전 그대로 동쪽 집 여느 선비이니 그 또한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경의(經義)를 깊이 연구하는 것이 과거 공부에 무익하다고 여기는데, 경의를 깊이 알지 못하면 문장 역시 제대로 짓지 못한다는 사실을 절대로 모르는 것이다. 대체로 세상 사람들은 군자의 수신(修身)에 대한 다른 사람의 말을 들으면 듣지 못한 듯이 하고, 심한 경우에는 졸기까지 한다. 어떤 사람이 행실이 좋다고 말하면 곧장 뒤이어 애써 흠을 찾아내려고 하고, 심한 경우에는 화까지 낸다. 문장에 대해 말할 경우에는 대충 응수하지만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근래의 과체(科文)에 대해 말하면, 부지런히 애쓰고 밥 먹는 것조차 잊으니, 만고의 성현과 군자는 좋은 문장이 없는 분이 없고, 만고의 문장에 능한 사람은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경우가 없음을 어찌 돌이켜 생각하지 않는가. 어찌 꼭 군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문장을 잘 짓는 것도 아니고 단지 근체(近體)를 배운 연후에야 과거에 합격한단 말인가. 옛글을 잘 읽어 나의 몸과 마음을 아름답게 한다면, 문장으로 드러내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아도 절로 아름다워지고, 문장이 이미 이루어지면 과거 합격을 바라지 않아도 절로 과거에 합격할 수 있다.
더구나 문장이 심오한 자는 마치 흰 바탕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아서 때에 따라 채색을 받아들일 수 있어 어디든지 적절하지 않는 때가 없다. 문장이 깊지 않은 자는 솜씨가 졸렬한 화공처럼 겨울에 물총새 그리기를 배워 담묵(淡墨)만을 준비하다가 오래지 않아 꾀꼬리 그림으로 바뀌면, 황색의 채색을 찾을 길 없어 붓을 내려놓고 탄식할 때에도 오히려 후회할 줄 모른다. 위 무공의 이른 바 “사람들이 각기 딴마음이 있도다〔人各有心〕”라는 경우가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내가 거병을 일깨우기 위해 이 문편(文編)을 썼기에 〈거병서(去病書)〉라고 이름했다. 그러나 실제로 ‘자식을 바꾸어 가르친다.’라는 의미이다. 만일 내 자식과 조카들이 이 책명을 가지고 핑계 대어 “이는 거병에 대한 글이지, 우리들에 대한 글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내가 한밤중에 흘리는 눈물을 어찌 샘처럼 더욱 계속 흘리지 않겠는가.
너희들은 농사도 짓지 않고 장사도 하지 않으며 앉아서 옛 책을 읽고 있으니, 누가 막기에 잘 읽지 못하고, 무슨 해가 있기에 절실하게 자신을 돌아보고 생각하지 않느냐. 만일 잘 읽어 스스로 문장을 성취한다면 이는 허리에 돈 10만 전을 두르는 격이고, 스스로 군자가 된다면 청전(靑田)의 학을 타는 격이다. 필경 과거 합격이 절로 될 것이니, 너희들이 어찌 양주(楊州) 고을의 원님이 아니겠는가. 만일 지극히 어리석은 자가 아니면 애쓰지 않아도 자연히 알 것이다.

5. 공교육 개혁방안
존재 선생은 22세부터 계당에 서당을 개설해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평생 동안 교육자의 길을 걸었다. 그래서 1756년(丁丑) 30세에 집필한 <정현신보> 시폐(時弊)에서 정부가 관장하는 공교육의 잘못된 점을 비판했다. 그리고 1777년(丁酉) 봉사(封事) 구폐(救弊)에서는 공교육혁신의 방안을 제시했다. 실학자 중 지역교육에 심혈을 기우린 교육자이다.

1) 정현신보(시폐)
고을의 학교인 향교에서 유생(儒生)을 모집할 때 단지 집안의 지위로만 선발하여 입학시키고 있다. 이 때문에 집안의 지위가 높은 자는 배운 것이 없고 도리에 어그러진 행동을 하더라도 모두 입학할 수 있는 특혜를 준다. 반면에 집안의 지위가 한미한 자는 학문과 행실이 모두 갖춰졌더라도 입학할 수 없다.
이른바 향교에 출입하는 유생들이 삼경(三經) 중 일경(一經)이나 사서(四書) 중 일서(一書)에도 능통하지 못함은 굳이 말할 것도 못 된다. 심한 자는 천자문조차 읽은 적이 없고, 더러 주색에 빠져 질탕하게 놀기도 하며, 더러 음란하고 요사스러운 짓을 하기도 한다. 과거 공부를 하는 사람일지라도, 그 방향을 대충이나마 아는 자는 열에 한 명도 안 된다. 학문과 덕행을 갖춘 자는 열 개 고을에 한 명도 없는 경우도 있다. 끝내는 심지어 집강(執綱)마저 뇌물을 받아 사욕을 채운다. 비속한 사람들 가운데 출세를 엿보며 바라는 자들이 마침내 소매를 걷어붙이고 뛰어들고 있으니, 집안의 지위로 선발하는 풍토마저 이미 없어졌다.
이 때문에 시골구석에서는 완고하고 어리석으며 염치없고 소란 피우기 좋아하고 탐욕스럽고 비루한 사람들이 마침내 학교를 제 늪이나 소굴로 삼는다. 그리하여 동료들을 끌어 모아 서로 이끌어 주거나 눈짓으로 위협하여 따르게 하고, 이를 통해 입과 배의 욕구를 채우고 사적인 은혜나 원한을 갚는다. 오늘은 향교에 들어갔다가 내일은 서원으로 달려가고, 열 명씩 댓 명씩 무리지어 앞 다퉈 쏘다니고, 길가에서 읍(揖)하고 여론을 꾸미면서 마치 그만둘 수 없는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하고, 향교의 하인들을 못살게 굴면서 억지로 권위나 내세운다.
오늘 아침에는 닭과 개를 삶아 먹으며, 내일은 떡을 해 먹고 생선회를 떠먹느라, 비린내와 쉰내가 풀풀 나는 제기가 재방(齋房 재실(齋室))에 어지럽다. 술에 취해 농지거리를 하고 음란한 짓을 하면서, 인륜을 밝히고 본성을 회복하는 건물에서 시끄럽게 떠들어 댄다. 마침내 서로 밀치며 알력을 부리기도 하고 시기하며 싸우기도 하고 처벌할 죄목을 만들어 통문을 돌리면서 하루도 거르는 때가 없으니, 마치 매가 꿩을 노리고 개가 토끼를 쫓는 꼴이다. 이 때문에 사대부 집안으로서 자신을 아낄 줄 아는 사람은 부끄럽게 여겨 어울리지 않고, 재주 있는 젊은이나 스스로 학문을 닦는 사람은 아예 가지도 않는다.
석전제(釋奠祭)를 지낼 적에 고개 숙여 엎드리고 일어나 절하는 방법이 예절에 맞지 않고, 희생·감주·기장·과일이 모두 깨끗하지 않은데도 이상하게 여긴 적이 없다. 단지 익힌 고기를 구해서 채소만 먹어 허한 장을 다스리고, 초의 밑동을 훔쳐 자녀를 아름답게 꾸미는 것만을 능사로 삼는다. 다섯 성인의 위패 앞에 총총걸음으로 달려가 술을 올리는 자 또한 문선왕(文宣王)이 공자인지를 안 적이 없다.
존경각(尊經閣)에 올려놓은 경서와 역사서의 경우 비가 새서 젖고 벌레들이 구멍을 내는데도 무슨 물건인지 까마득히 모른 채 방이 차가우면 깔아서 자리로 삼고, 몸이 피곤하면 머리를 괴어 베개로 삼으며, 태반은 향교의 하인들이 고기 싸는 종이로 사용하기도 한다. 심한 자는 향교 안에서 도박을 하거나 투전을 하고, 재방(齋坊)에 기생을 들이기도 하며, 저들끼리 싸움을 격렬하게 벌이는 곳으로 삼으니, 마침내 명륜당은 들어가서는 안 되는 곳으로 의논하게 되어 뜰에는 가을 풀만 가득하고 아무도 없는 적막한 곳이 되어 버렸다.
위로는 태학(성균관)으로부터 아래로는 여러 고을의 향교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모두 그러한데도 관리들은 모두 그러려니 하며 괴이하게 여기지 않는다. 아, 국가에서 선(善)을 제일로 삼아 선비를 양성하는 곳이 이처럼 무너지고 어지럽혀져, 이른바 겉만 꾸미는 문장조차 갖출 수 없게 되었으니, 어떻게 교화를 이루고 풍속을 도닥거려 나라의 교화를 드날리기를 바랄 수나 있겠는가.

2) 봉사(구폐)
각 고을에 향교를 건립, 고을 안의 조관(朝官)으로 있다가 물러난 자와 생원·진사 중에서 덕행과 학문이 출중한 사람 한 명을 선발하여 교수(敎授)로 삼아 학생들을 가르치게 하여, 매월 1일에 강(講)을 시행한다. 큰 고을은 매월 1일에 30명씩, 다음으로 큰 고을은 20명씩, 작은 고을은 10명씩 윤번으로 돌아가게 해서 각기 3개월 만에 강을 두루 마치게 하여, 사람마다 1년에 4번 강을 치르게 한다.
학규는 주자의 〈백록동규〉와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은병학규〉를 사용하는데, 서원의 학규도 이와 같이 한다. 학생 중에 향교 안에 항상 머물며 공부하기를 원하는 자는 허락하는데, 큰 고을은 15명, 다음으로 큰 고을은 10명, 작은 고을은 7명을 초과하는 일이 없게 하고, 또한 윤번으로 혜택이 고루 돌아가게 한다.
향교를 수호(守護)하는 민호(民戶)는 큰 고을은 70호, 다음으로 큰 고을은 50호, 작은 고을은 30호로 정하여 호역(戶役)과 군역(軍役)을 모두 면제해 주고 있다. 교수에게는 면세된 3결의 결세(結稅)를 지급하고 있는데, 그의 집에서 내는 결세로 대신 충당하지 않고, 모두 공전(公田)에서 수납(收納)한 세금을 취하여 교수의 1년 녹봉으로 삼는다. 매달 별도로 봉전(俸錢 녹봉으로 주는 돈)을 지급하고, 10월 1일 아침에 학생들은 각기 세폐(歲幣)로 무명 반 필씩을 바친다.
교수는 수령이 빈례(賓禮 예의를 갖추어 손님으로 예우함)로 대우하고, 관찰사가 순찰하러 방문해도 환영하거나 환송하지 않도록 하며, 덕행에 잘못이 있거나 스스로 그만두는 경우가 아니라면 쉽게 교체하지 못한다. 대략 교수 한 사람의 임기는 10년으로 한정하고, 만약 대신할 인물이 없으면 30년이 되더라도 바꾸지 않는다.
여러 고을의 각 면(面)에 서원(書院)을 설치하고, 해당 면에 거주하는 사람인 생원과 진사 및 공사(貢士) 중에서 덕행이 있는 사람 1명을 골라 훈장으로 삼아 - 만일 해당 면에 적임자가 없을 경우에는 다른 면 사람을 선발하여 기용한다. - 학생들을 가르치게 한다.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강(講)을 하고, 서원에 항상 머물러 공부하는 자는, 큰 서원은 10명, 작은 서원은 7명으로 한정하여 향교와 같이 윤번으로 한다. 서원을 수호하는 민호는, 큰 서원은 40호, 다음으로 큰 서원은 30호로 정하여 호역(戶役)과 군역(軍役)을 모두 면제해 준다.
훈장에게는 면세된 1결 50부의 결세를 지급하여 1년 녹봉으로 삼고, 매 1일에 별도의 봉전(俸錢)을 주며, 원생들은 10월 1일에 세폐로 무명 10자와 백지(白紙) 1속(束)을 바친다. 훈장의 경우, 수령이 공적인 임무에 차출하지 못하고, 덕행에 잘못이 있거나 스스로 그만두는 경우가 아니라면 쉽게 교체하지 못한다. 임기는 10년으로 한정하며, 대신할 인물이 없으면 30년이 되더라도 역시 가능하다.
수재(秀才)로서 서원에 입학하는 자와 원생으로서 향교에 입학하는 자는 모두 폐백을 지참하고 스승을 뵙는다. - 폐백으로는 꿩고기나 포개어 묶은 육포〔束脩〕, 혹은 백면지(白綿紙) 1속(束), 혹은 명주 20자, 혹은 모시나 무명을 사용한다. -
각 서원에는 사당(祠堂)을 세우고, 해당 면 출신 선배 가운데 덕행으로 나라 안에 이름이 난 인물, 대현(大賢)에는 미치지 못하더라도 한 도(道)의 존숭할 만한 유학자, 나라에서 포상하는 은전(恩典)을 받은 적이 있는 인물, 효행이 특별히 뛰어나 정문(旌門)의 표창을 받은 인물, 절개를 지켜 죽은 것이 명백하여 포상을 받은 인물 - 이 밖에는 가볍게 허락해서는 안 된다. - 을 제사 지낸다.
이때 반드시 조정에 보고하고, 도내 선비와 고을 선비들의 의견을 수렴한 뒤에야 제사 지낼 수 있다. 해당 인물이 없으면 굳이 사당을 세울 필요가 없다. 대현이라도 그의 발자취가 남은 고을 외에는 제사를 허가하지 않으며, 문묘(文廟)에 배향한 인물 외에는 사액하지 않는다. - 다만 절개를 지켜 죽은 것이 명백한 인물 또한 순절한 지역에 사당을 세우는데, 그의 본향과 중복하여 사액해도 무방하다. -
사당에 제사 지낼 때 차리는 반찬은 날고기·희생·향·폐백 외에는 모두 서원에서 스스로 준비한다. 위패를 모시는 차례는 한 사당 안에 모실 경우에는 서쪽에 무반(武班)의 위패를, 동쪽에 문반(文班)의 위패를 모신다. 혹 사당을 별도로 세워 모실 경우에는 동쪽 사당에 문반의 위패를, 서쪽 사당에 무반의 위패를 모신다.
향교와 서원 옆에 무학(武學)을 세운다. 무학 학생들의 활쏘기를 차례로 시험하는 일은 문사(文士)의 규정과 같이 교수(敎授)와 훈장(訓長)에게 예속시킨다. 처음 무학에 입학한 자들은 모두 유사(儒士)처럼 폐백을 지참하고 스승을 뵙는다. 그리고 매년 섣달 하순에 족제비 꼬리털로 맨 붓이나 먹〔墨丁〕이나 종이의 묶음〔紙束〕이나 선물(膳物)을 세폐로 바치는데, 많고 적음에 구애받지 않는다.
교수를 선발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고을의 수령이 우선 합당한 인물을 살펴 찾아내 몇 사람을 후보로 추천(推薦)한다. 그런 다음 향교에 나가 문묘에 참배한 뒤, 고을 사람 가운데 조관(朝官)·생원(生員)·진사(進士)·공사(貢士) 이상의 신분을 지닌 50명 이상을 - 만약 50명을 다 채우지 못하면 고을 사람 가운데 노성(老成)한 자들을 모아 반드시 50명 이상을 채운다. - 향교에 모아 놓는다.
이때 수령이 후보로 추천한 한 사람의 이름을 써서 좌중에 전해 보여 준 뒤 흑백의 바둑돌을 각각 1개씩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그런 다음 조사(曹司 말단 직책)로 하여금 작은 합(盒)을 가지고 다니면서 바둑돌을 거두어다 탁자 위에 쏟아 놓고 헤아린다. 이때 하얀 바둑돌이 많은 사람을 합격자로 선발한다. 나머지 후보도 차례로 이와 같이 선발한다. - 가령 세 사람 중에서 선발할 경우에는 세 사람 가운데 하얀 바둑돌이 많은 사람을 합격자로 선발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 훈장을 선발할 경우에는 수령이 서원에 나아가 사당에 참배한 뒤에 한 면의 사람들을 모아 놓고 가부(可否)의 바둑돌을 받아 교수의 경우와 같이 합격자를 선발한다. - 흑백의 바둑돌 수가 서로 같을 때는 하얀 바둑돌을 따라 선발한다. -
흑백의 바둑돌로 가부를 결정하는 방식은 고상하지 않고 의리가 매우 천박(淺薄)하다. 그렇지만 요·순과 성왕(成王)·강왕(康王) 시대 이전이 아니면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선비를 선발할 때 더욱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오히려 과거 시험장에서 시권(試券)을 제출할 적에 봉명(封名)하거나 심지어는 봉한 부분을 잘라 이름을 확인하고 다시 봉하기까지 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더 낫다.
만약 풍속이 전한(前漢) 초기와 같거나, 수령의 자질이 공수(龔遂)와 황패(黃覇) 이상이거나, 교육을 담당하는 관리〔學官〕가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같은 대현(大賢)이라면 어찌 이런 속된 제도를 쓰겠으며, 사람을 이렇게 야박하게 대우하겠는가. 아, 애석하도다.
또한 일종의 의리가 있어서, 차라리 선(善)을 다하지 못한 잘못을 저지를지언정 이런 구차한 짓은 하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 뜻은 좋다. 그러나 위에 있는 사람이 만일 세상을 맑게 하고 교화를 이룩하는 데 성심(誠心)이 없다면, 흑·백의 바둑돌로 교수와 훈장을 선발하더라도 이 또한 결국 형식에 그치고 말 것이니, 또한 어찌하겠는가, 어찌하겠는가.
교수와 훈장은 비록 공적인 죄를 범하더라도 죄인을 신문하는 관리가 잡아들일 수 없으니, 죽일 수는 있어도 욕되게 할 수 없는 의리로 대우한다. 그들이 성취시킨 학생들 가운데 재주와 덕망이 현저한 자들이 많은 경우에는 교수와 훈장을 상직(賞職 상으로 내리는 벼슬)으로 발탁하여 등용한다. 그중 관직에서 물러나 벼슬길에 나가기 어려운 사람은 품계를 더 높여 주고 이어 품록(品祿 품계에 해당하는 녹봉)을 내려 준다.
그들 중 도덕이 융숭하여 온 나라의 본보기로 삼을 만한 사람은 품계가 1, 2품에 이르게 해도 괜찮다. 또한 옛날부터 큰 도회지에서는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으니, 산읍(山邑)과 해읍(海邑)의 궁벽하고 누추한 시골에서 배출되는 것과 차이가 있다. 가령 조주(潮州)에서 학문적 성과를 이룬 조덕(趙德) 같은 인물은 한두 사람을 배출하더라도 또한 교수와 훈장으로 응당 표창해야 하니, 적절히 참작하여 결정할 수 있다.
향교의 재화와 곡식은 관가에서 책정해 준 본전(本錢)과 관둔전이다. 이 두 재원으로 선비를 양성하는 비용과 교수의 월급을 조달한다. 서원의 재화와 곡식은 각 면에서 본전을 거두어 마련한 것, 혹 대출하여 이자를 불리거나 혹 토지를 사서 적절하게 활용한 것, 각 면의 정원 외 정전(丁錢)을 거두어 서원에 비치한 것 등이다. 서원의 재화와 곡식은 매년 말 관아에 보고, 마감할 뿐이며, 수령이 쓸 수 없다. 실무자나 하인 또한 面 사람 중에서 가부를 결정하여 선정하며, 아전들이 간여할 수 없다.

3) 결론
존재 선생이 진사에 머문 원인은 복합적이다. 삼벽도 원인이기도하지만, 어릴 때부터 "내가 갈 길이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린 뒤 소극적으로 대응한 결과이기도 하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나라를 경영하는 고관대작의 반열에 오르면 화려해 보인다. 그렇다고 벼슬이 높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 선생의 생애도 출사를 기준으로 보면 실패했다고 볼 수 있지만 학문적인 면을 놓고 보면 결코 실패한 삶이라고 볼 수 없다.
사람들은 타계하면 대개 몇 해 지나면 잊기 마련이다. 고관대작을 지낸 인물도 역시 마찬가지다. 그러나 선생은 200년이 넘도록 스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학자들은 학문적 업적을 연구해 조명하고 있으며, 자치단체는 동상을 세워 기리고 있다. 게다가 유력인사로 구성된 「기념사업회」가 연중행사를 거행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는 방대한 저서를 남긴 업적 때문이다. 그의 ‘교육’을 중시하는 경세관은 이론과 실천 즉, 지행합일의 모범을 보였다는 점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학자들은 자신의 이론을 실천한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선생은 달랐다. 그는 시폐를 지적할 때나 구폐의 방안을 제시할 때도 항상 ‘교육’을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운 일을 최우선 과제”로 지적했다.
그리고 제시한 방안을 몸소 실행했다. 이미 살핀 바와 같이 선생은 젊어서부터 타계할 때까지 교육자의 길을 벗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일꾼들과 함께 논과 밭에까지도 지필묵을 챙겨 ‘교육’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것이 ‘사강회’이다. 이 땅의 지식인 중 누가 이처럼 치열하게 살았는가. 그래서 그를 ‘참다운 교육자’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독특한 독경(讀耕)의 리더십은 주옥같은 문학작품을 생산했다. 사강회를 이끌면서 농군들과 함께 어울리지 않았다면 과연 <농가구장>과 같은 작품이 산출됐을까. 김석회 교수는 이 작품의 특징을 그 언어적 자질에 있다고 평가했다. 이외에도 사강회 시절에 제작된 <죄맥, 맥대, 청맥행>, <년년행 一 二 三>등의 연시조도 귀중한 작품이다.
특히 각 서원의 교수선발에 민주적 방안을 제시한 점이다. 즉, 고을 수령은 합당한 후보를 추천한다. 그리고 고을에 거주한 조관, 생원, 진사, 공사 50명으로 선거인들을 위촉, 구성한다. 이들이 향교에 모여 미리 나눠준 흑백의 바둑알로 마땅한 후보자에게 투표한다. 만일 바둑알이 같을 경우에는 흰 바둑알이 많은 후보를 당선자로 뽑은 것이다.
물론 이런 교수 선발방식은 직접민주주의는 아니다. 하지만 왕조국가에서 비록 서원의 교수를 뽑는데 간접선거 방식을 제시한 사실은 신선하다고 볼 수 있다. 게다가 서원 교수의 신분을 특별하게 대우하는 것도 교육입국의 바탕을 다지려는 것으로 보인다. 선생이 만언봉사에서 왕에게 立聖志 明聖學을 진언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같은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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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그 의를…않는다 : 董仲舒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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