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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나라의 歷史와 遺跡/圓山위정철

운영자 2015.12.26 20:28 조회 수 : 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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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장년 밴드멤버 여러분!
우리 위나라 공부합시다
.
나는 요즘 청장년밴드를 보고 든든한 마음을 가진다. 과연 다른 성씨도 밴드를 통해 우리만큼 소통하고 있을까? 아마 미안한 말이지만 없을 것으로 단정한다. 왜 근거도 없이 단정하느냐고 반문할 수 있다. 2년 지켜보니까 그렇게 단정해도 되겠다 싶어서 말한 것이다. 그렇다. 우리 청장년들은 누구보다 애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

우선 밴드가 건전하게 운영되고 있다. 한두 번 일탈이 있었지만 지금은 너무도 건전하다. 게시한 사연마다 금과옥조 인생에 도움을 주고 있다. 문중현안에 대해서도 사려 깊은 의견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단지 기성세대로 이루어진 시스템이 더디게 작동하는 문제점이 없는 건 아니다. 그런데 뒤이을 세대가 곧 그들이니까 괜찮다
.

특히 본촌 중국과도 이제 소통이 가능해졌다. 두 번째 방문으로 트인 소통은 지금 뜻 있게 진행되고 있다. 본촌의 종친들은 아직 전국적인 조직이 없다. 모택동의 홍위병혁명은 값진 문화유산을 파괴했다. 조상들의 유적도 상당부분 파괴된 사실이 이번 방문을 통해 확인됐다. 그러기에 우리는 역사를 알고 발전시켜야 할 필요가 있다
.

고사나 역사의 일화도 오죽이나 많은가. 수천 개의 고사성어 가운데
결초보은은 우리 조상과 얽힌 일화임을 알면 더욱 새롭지 않는가. 이외에도 부지기수로 많다. 또한 우리 조상이신 신능군(信凌君)이 매죽 상징의 한분일 줄 누가 얼마나 알았으랴. 개봉의 대상국사(大相國寺) 자리가 바로 신능군의 저택이란 사실도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위씨의 창성에서부터 우리 성씨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알아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물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도 결코 얕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필만 시조의 식읍에서부터 제후국과 위나라가 멸망하기까지의 과정을 아는 종씨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그 역사를 몇 차례에 걸쳐서 게재하고자 한다.<
圓山>

[
나라의 歷史 遺跡]

1.
封土 大夫
위씨는 은()을 멸망시키고 주()나라 건국의 토대를 마련한 문왕(文王) ()의 후예이다. 무왕 발()은 문왕의 장남이며, 희고(姬高)는 열다섯째 아들이다. 고는 형인 발을 수행해서 은의 주왕(紂王)을 멸한 공으로 BC 1046 대부의 작위와 필지(畢地)를 봉토(封土) 받았다. 이로 인해 희고의 성은 희()에서 필()로 바꿔지게 된다.  그래서 희고의 후손들은 이후 희()에서 필()씨를 성으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필고(
畢高)의 후예들은 선조의 봉토를 지키지 못하고 서민으로 전락, 흩어졌다. 그러다 후손 필만(畢萬)이 주나라 혜왕(BC 661)때 당진국(唐晉國) 헌공(獻公676651)이 위지(魏地)를 정벌할 때 참승(驂乘)으로 참전해 공을 세웠다. 헌공이 BC661년에 필만을「위지」의 대부로 봉하니 그가 곧 위씨의 시조「위필만」이다. 섬서성 예성에 있던 위지는 제후국과 위국으로 발전한다. 시경의 위풍(魏風)은 이곳이다.
閔公元年,晉侯作二軍公將上軍大子申生將下軍趙夙御戎畢萬為右以滅耿滅霍滅魏為大子城曲沃賜趙夙耿賜畢萬魏為大夫士蔿曰大子不得立矣分之都城而位以卿為之極又焉得立不如逃之無使罪至為吳大伯不亦可乎猶有令名與其及也且諺曰心苟無瑕何恤乎無家天若祚大子其無晉乎卜偃曰畢萬之後必大盈數也大名也以是始賞啟之矣天子曰兆民諸侯曰萬民今名之大以從盈數其必有眾畢萬筮仕於晉遇屯之比辛廖占之曰屯固比入吉孰大焉其必蕃昌為土車從馬足居之兄長之母覆之眾歸之六體不易合而能固安而能殺公侯之卦也公侯之子孫(畢萬 本來 畢公高 子孫)必復其始[참조] 大有之乾
安邑古城遺址 : BC 446文侯 築城(산서성 인민정부 重占文物保護單位)

「국풍(
國風)
주남(
周南) · 소남(召南)을 정풍(正風)이라 하고, 패풍(邶風) · 용풍(鄘風) · 위풍(衛風) · 왕풍(王風) · 정풍(鄭風) · 제풍(齊風) · 위풍(魏風) · 당풍(唐風) · 진풍(秦風) · 회풍(檜風) · 조풍(曹風) · 빈풍(豳風)을 변풍(變風)이라 한다. 시경에는 모두 15국풍, 160편이 실려 있다. 15국풍이란 황하 유역에 있는 15개국의 가요라는 뜻인데, 사용된 시구에는 방언이 거의 없다. 이것은 『시경』이 성립될 무렵에 공통어로 다시 썼기 때문이다. 그 내용을 보면 연애와 혼인에 관한 것이 많고, 다음으로 생활고와 전쟁, 농촌 제사, 수렵 등에 관한 것인데 대부분 시구가 단순하게 반복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백과사전>

2.
諸侯國 魏國 隆盛
BC 661년 시조(필만)의 대부(大夫)의 작위와 식읍봉토가 제후국과 위국의 바탕을 이룬다. 제후국 1대는 武子(), 昭子(魏絳), 獻子(魏茶), 簡子(魏取), 襄子(魏侈), 桓子(魏駒)에 이르기까지 6대를 이어왔다. 환자의 아들 文侯(魏斯)는 국력을 크게 키웠다. 그래서 BC 453년 조()()과 분진(分晉)했다. 결국 208년 전 위지를 식읍으로 주었던 주군(主君)인 당진국을 멸망시켜 그 땅을 나눠가진 것이다. 정치에는 영원한 적도 동지도 없다는 말이 적나라하게 확인되는 장면이다. 나라를 나눠 차지한 武侯(魏擊)는 천자인 주()나라 위열왕(威列王) 23(BC 403) 왕호를 쓰라는 재가를 받았다. 그래서 문후 이후 가왕(假王) 위표(魏杓까지 8대에 걸친 위국 228년의 부침사는 다음과 같다.

1)
나라를 擊破
문후(
魏斯) 33(BC 413), 위나라는 오기(吳起)는 군대를 이끌고, 서하 전장에서 진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위하평원의 요충지 으로 진격했다. 나라는 위나라의 갑작스런 공격으로 공황상태에 빠진다. 위의 태자 격()은 진나라의 주력부대가 오기를 막는 틈을 타서, 군대를 이끌고 황하를 넘어 진나라의 군사거점 번방(繁龐)을 격파한다.

곧이어 오기의 위나라 군대는 임진(
臨晉), 왕성, 원리, 낙읍, 함양, 음진 등 진나라 영토를 대거 점령한다. 문후 38(BC 398)에는 서하지구를 완전히 점거하고, 상군(上郡)을 설치한다. 이렇게 하여 위나라는 서부와 중원의 황금통로를 확실히 장악한다. 문후는 낙수의 동안에 장성을 구축하여, 관동의 이익을 독점하는 부국의 기틀을 다진다.

무후 3(BC 393)에 오기는 다시 진나라와
나라를 공격하여, 진나라 군대를 주성(主城)에서 격파한다. 무후 7(BC 398)에는 오기가 5만의 군대를 이끌고 양진성 밖에서 진나라의 50만 군대를 궤멸시킨다. 이것이 그 유명한양진지전(陽晉之戰)”이다. 그리고 관중평원으로 쳐들어  간다. 무후 9(BC 387) 오기가 무하(武下)에서 다시 진나라의 잔여군대를 대파한다. 이로써 진나라는 전적으로 항거할 힘을 잃어버린다.

2)
나라를 分割
문후 41(BC 405), 제나라는 조나라를 공격한다. 조열후의 지원요청을 받고, 위나라는 병력을 일으켜 구해준다. 조나라, 한나라의 군대와 연합해 상대방을 격파하고, 제나라 군대 3만명을 궤멸하고 전략문자를 대거 획득한다. 문후 42(BC 404), , , 한의 삼진연합군은 제나라 장성을 격파하고, 국토의 할양을 요구한다. 문후는 제나라 토지를 이전에 점령한 하내(河內)지구와 연결시키기 위해, 나라와 연합, 제나라를 토벌한다. 위나라 군대는 박릉(博陵)까지 밀고 들어가니, 그 기세를 막을 수가 없었다.

3)
나라의 降伏
문후 때, 자주 나라와 나라를 공격하면서, 위나라와 초나라는 이해로 인해 충돌한다. 그러나 초나라 군대가 연속 패배했다. 무후 5(BC 395) 문후로부터 강대한 국력을 물려받아 삼진연합군을 이끌고, 초나라 군대를 대량(大梁), 유관(楡關)에서 패배시키고, 양릉을 차지한다. 초나라의 조야는 공포에 휩싸인다. 초도왕은 연속해 사신을 파견하여 강화를 요청한다. 무후는 20(BC 374) 선제공격을 감행하여, 초나라 군대를 다시 유관에서 격파한다. 이로써 초나라가 세력을 확장하려는 기도는 저지당한다.

4)
나라의 屈伏
삼진연합군의 기치를 내걸고, 문후는 위나라를 중심으로 비교적 약한 한나라를 끌어들이고, 이 기회를 틈타 조나라를 압박할 전략적인 공간을 확보한다. 문후 38(BC 365), 위나라는 송나라를 격파한 후, 조열후의 요청을 받아, 날로 강해지는 중산국을 공격한다. 문후 40(BC 365) 중산국을 격파하고, 진군하는 도중에 적지 않은 조나라 땅을 점령한다. 문후는 또한 나라의 제나라 세력을 몰아내는 것을 명분으로 하여, 제나라와 조나라가 계속 다투던 장수와 남안을 영토로 편입시킨다. 그리고 업현(鄴縣)을 설치, 운영한다. 이렇게 하여 조나라가 중원으로 남진하는 길을 막아버렸다.

무후 13(BC 382), 조나라는
나라를 공격한다. ()나라 신공(愼公)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여  출병하여 토대(兎臺)에서 조나라 군대를 격파한다. 위나라와 조나라는 한 때 사이가 악화된다. 무후 23BC 372), 조나라는 다시 나라에 손을 뻗는다. 그러자 위나라는 다시 조나라 군대를 린()에서 격파해서 굴복시키는데 성공한다. 왕업의 기초를 튼튼히 다져놨던 것이다. 그러나 무후의 뒤를 이어 즉위한 혜왕은 날로 융성한 진()나라의 남진정책으로 항상 위험에 노출돼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더구나 공손좌가 상앙을 중용하지 않으려면 죽이라고 부탁했어도 흘려 넘겨버렸다.  

3.
自慢 부른 必然    
1)
遷都 最後 水攻  
나라 효공(孝公)은 위()나라 상앙(商鞅)을 등용, 부국강병책을 추진하면서 위()나라 하서(河西)를 점령했다. 혜왕(惠王)의 이름은 영()이나 《전국책》에는 영()으로 기록됐다. 그는 BC370년 무후(武侯)의 뒤를 이어 즉위했다. 그리고 9(BC 361)되던 해에 안읍(安邑, 산서 하현(夏縣)에서 대량으로 천도했다. 진나라와의 거리가 멀어져야 안심됐기 때문이다. 이후 양왕(襄王 魏嗣), 소왕(昭王 ), 안희(安釐 魏圉), 경민왕(景閔王 魏增), 왕가(王假 魏豹) 5대가 94년 동안 나라를 유지했다.

천도 이후 진(
) BC 275년과 273년 포위, 위나라가 남양(南陽)을 헌납 받고 강화를 맺었다. 268년에도 양() 땅을 점령하고, 266년에는 형구(刑丘)를 점령했다. 소양왕(昭襄王)은 위나라에서 누명을 쓰고 형벌을 받고 있는 범수(范睢)를 구출, 승상으로 발탁했다. 범수는 장의(張儀)의 연횡책을 폐기하고 遠交近攻策으로 멀리 떨어진 제, , 연과는 우호관계를 맺고, 가까운 한, , 조를 공격했다. 예언가는 대량성을 보고 진나라가 공격할 때 강물을 끌어들여 성을 수몰시킬 것이라 예언했다.

진왕 정(
) BC 225년 왕분(王賁, 王剪 )을 대장군으로 삼아 위나라를 치게 했다. 그는 개봉 서남을 포위하고 병사들에게 삽으로 서북쪽에 저수지를 파 황하와 홍구(鴻溝)의 물길을 댔다. 만수가 되자 수문을 열어 개봉을 물바다로 만들었다. 3개월이나 물이 빠지지 않자 성벽이 무너져 위왕은 버티지 못하고 항복했다. 홍구는 BC 361년 혜왕이 천도한 후 수리를 위해 운하를 팠는데, 그 운하가 위나라를 멸망시키는 무기로 변한 것이다. 대량은 6번의 대홍수와 40여회나 수해를 입었다.

결국 소진의 합종책을 버리고 장의의 연횡책을 받아들인 6웅 가운데 한은 BC 230, 조는 228, 위는 225, 초는 223, 연은 222, 제는 221년 멸망하면서 진나라가 천하를 차지하게 했다. 다만 당시 40만대군 등 수백만명의 군병을 동원했다 하나 과장이다. BC 2000년 중국의 인구는 390만명에서 1370만명, 전후한 때 5000-6000만명, 송 때 7600만명, 청 강희 때 26000-4 130만명, 1949 51천만명 정도라고 추계되고 있다
.

2)
秦帝國 略史
非子에게 孝王 땅과()자를 으로 준다. 嬴公 BC 771 平王 도운 공으로 기산 서쪽 땅 제후국 秦公 된다. 천자로부터 제후국이 됐다는 점에서 위나라와 출발이 다르다. 文公 2(714) 위수와 견수의 합류지점으로 옮긴다. 武公 10(BC 688) 규와 기(), 쳐서 만든다. 德公으로 도읍을 옮겼다. 穆公 서쪽에서 由余, 동쪽에서 百里奚 등용했다. 그것도 부족해서 나라에서 蹇叔, 나라에서 公孫文 초대해서 나라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켰다. 獻公 BC403 등이 분점하자 자극받아 도읍을 岳陽으로 이전, 동방정책을 폈다.

孝公 등용한 商鞅 위나라 영토부터 점령한 것으로 능력을 발휘했다. 惠王 張儀 발탁, 연횡책을 펴서 파촉과 초나라 漢中 차지했다. 昭王 위나라 范睢 등용, 위나라의 하서를 점령, 西東周 멸망시켰다. 子楚 나라에 잡혀 있자 呂不韋 거액을 주고 구해낸다. 子楚 250년에 등극하니 莊襄王이며 그는 여불위를 재상으로 등용, 文信侯 봉했다. 장양왕의 아들 李斯 재상으로 등용, BC 221년 천하를 통일하나 죽고 2胡亥 유방에게 옥새를 바치며 15년만인 BC 206년 멸망한다. 곧 이들 인재들에 의해 제국의 기초를 튼튼하게 을 만들어서 천하를 통일하는 위업을 이뤘다.

4.
나라 패망의 교훈
전국 6웅의 멸망 중에서 주의 깊게 봐야 할 것은 우리 선조들이 경영했던 위나라의 멸망이다. 칠웅 중에서 중앙에 위치하고, 군사전략가, 정치가를 가장 많이 배출했던 위나라가 강국으로 부상하지 못하고 멸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통치자들이 인재를 보는 눈이 없어 활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배척하거나 국외로 유출시켰기 때문이다.
武侯 오기(吳起)를 배척하고, 혜왕()이 공숙좌(公叔座)의 청을 건성으로 들어넘긴 경우가 대표적이다. 혜왕은 공손앙(公孫鞅)의 지략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

또한 맹자(
孟子, 372~289)가 유세(遊說)의 첫 대상으로 혜왕을 찾아가 「왕도정치」를 권유해도 우리나라에 이로움이 있겠습니까(有以利吾國乎)하며 당장의 성과에만 집착했다. 왕도정치로 국민들을 잘 살게 하면 나라가 저절로 흥해짐을 알지 못하자 맹자는 무엇 문에 이로움을 말씀하십니까(何必曰利)하며 역정을 내고 떠났던 것이다. 오기, 상앙, 범수, 손빈 등이 위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주인공들인 것이다. 만일 吳起, 商鞅, 孫臏, 范雎, 信陵君 등의 건의와 간을 제대로 청청했다면 천하를 도모했을지도 모른다. <필자 주>

1)
오기(
吳起)
명장이자 군사전략가 겸 정치가 오기(
吳起)는 원래 위()나라 출신으로, 평소 병법을 좋아했으며, 일찍이 노()나라에서 증자(曾子)에게 학문을 배웠다. 그 뒤 노나라 장군이 되어 제나라를 치는 전공을 세웠으나, 모략을 받고 실각했다. 오기는 다시 위()나라로 망명하여 문후(BC445∼BC396)를 섬기면서, 진나라를 공격, 5개 성을 함락하고 서하태수(西河太守)에 임명돼 정치가로서도 혁혁한 치적을 쌓았다. 오기는 문후가 죽은 후, 무후(武侯, BC396∼BC370)에게 배척당해 초나라로 망명, 재상으로 발탁되어 도왕(悼王, BC402∼BC381)을 섬기면서 개혁을 단행했으나, 수구파들의 쿠데타로 인해 죽었다. 오기와 그와 관련된 고사성어는 다음과 같다. 살처구장(殺妻求將), 재덕부재험(在德不在險) 연저지인(吮疽之仁)

殺妻求將 : 오기는 위()나라 노()나라 임금을 섬긴 적이 있다. 그 당시 제()나라가 노나라를 공격했다. 노나라에서는 오기를 대장으로 기용하려고 했으나, 오기가 제나라 여자를 아내로 맞이했으므로 노나라에서는 그를 의심했다. 오기는 공명심에 불탄 나머지 자기 아내를 죽여 제나라와 관계가 없음을 이런 방법으로 입증했다. 입신을 위해 아내도 죽인 것이다. 노나라는 오기를 장군으로 삼아 제나라를 쳐 크게 깨뜨렸다.(吳起者, 衛人也, 好用兵. 嘗學於曾子, 事魯君. 齊人攻魯, 魯辱將吳起. 吳起取齊女爲妻, 而魯衣之. 吳起於是欲就名, 遂殺其妻而明不與齊也. 魯卒以爲將. 將而攻齊, 大破之.)

在德不在險 : 나라의 안전은 임금의 덕에 있고, (지형의) 험준한 데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한 나라의 안전과 국민의 단결은 임금의 덕에 달려 있는 것이지, 변방의 지리가 험준하다고 해서 지켜지는 것은 아니다.

吮疽之仁 : 위문후가 재상 이극(李克)에게 물었다. “오기는 어떤 사람이오?” 이극이 대답했다. “오기는 탐욕스럽고 호색하지만 병법에 있어서는 사마양저(司馬穰苴)도 그를 따를 수가 없습니다.” 문후는 오기를 장군으로 임명해서 진()을 쳐 성 다섯 개를 빼앗는데 성공했다. 장군으로서의 오기는 신분이 가장 낮은 사졸과 의식을 함께하고, 잘 때도 자리를 깔지 않고, 행군할 때도 말이나 수레를 타지 않고 식량을 손수 짊어지는 등 사졸들과 노고를 함께했다. 솔선과 동고동락을 실천한 장군인 것이다.병졸의 어머니가 통곡을 하자 어떤 사람이 그 까닭을 물었다. “병졸인 당신 아들의 고름을 장군이 빨아 주었다는데 어찌하여 그리 우시오?” 어머니가 대답했다. “그게 아닙니다. 지난날에 장군이 저 아이 아버지의 종기를 빨아 주었습니다. 저 아이 아버지가 전쟁에서 뒤로 물러설 줄을 모르더니 적에게 죽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는 장군이 또 아들의 종기를 빨아 주니 나는 저 애도 언제 죽을지 몰라서 우는 것입니다.”(卒有病疽者, 起爲吮之. 卒母聞而哭之. 人曰, 子卒也, 而將軍自吮其疽, 何哭爲. 母曰, 非然也. 往年吳公吮其父, 其父戰不旋踵, 遂死於敵. 吳公今又吮其子, 妾不知其死所矣. 是以哭之.)

2)
상앙(
商鞅)
상앙(
商鞅)나라 公族출신이자 나라의 재상 公叔座 식객인 公孫鞅이다. 공숙자가 죽기 전에 위혜왕(惠王)에게만약 중용하지 않으려면 반드시 죽이십시오.”라며 강력히 권유했지만, 중용하지도, 죽이지도 않았다. 상앙은 진나라 재상으로 등용돼 농업의 실적과 전투의 결과에 따라 작위를 주고 작위를 가진 사람만이 평가받는 분명한 상벌의 신분제사회를 만들었다. 그리고 인()=오가(伍家)이라는 공동체(小宗族的) 단위를 기초로 국가에 협력하는 체제인 십오제(什伍制)를 시행, 중앙집권적 통제시스템을 강화했다.

이것은 군주가 <
>를 파악하는 것으로서, 중간 세력을 억제하고 가부장적 권력의 신장을 꾀한 것이다. <오>를 단위로 취()를 만들고 그 위에 향()과 현()의 행정단위로서 성립됐다. 천맥제(阡陌制)를 시행했는데, 이것은 소단위가족의 창설정책인 <분이법(分異法)>에 의해서 나왔다. 들을 농토로 개척하기 위해서 설치한 동서토지구획선으로 추측되지만 정설은 없다. 상앙의 변법은 1·2차에 걸쳐서 시행되었으며 제 2차 변법은 도읍을 센양[咸陽]으로 옮긴 뒤에 시행했다. 센양은 진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였다.

이런 공로로 상앙은 열후(
列侯)로 봉해져 상군(商君)으로 칭해지고, 옛날 위나라 영토였던 하남성 상읍(商邑)을 비롯한 15개의 읍을 봉토로 받았다. 그가 각종 개혁을 엄히 집행하면서 진나라의 정치는 점점 궤도에 올랐으나, 반대로 그의 개혁에 의해 피해자들의 원한을 샀다. 법집행이 지나치게 가혹했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그의 천성이 각박하여 복이 적다"고 평했다. BC 338년 효공이 죽자 태자가 혜왕으로 즉위했다. 그러자 변법으로 피해를 입은 많은 왕족과 귀족 대신들은 일제히 상앙이 반란을 꾀한다라고 고발했다. 혜왕도 태자 시절 사부의 코를 벤 상앙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터라 바로 파면했다.

그가 상읍으로 돌아갔는데 혜왕이 체포령을 내리자 재빨리 국외로 탈출을 꾀했다. 국경 함곡관(
函谷關)에 닿아 여인숙에 들어갔다. 주인은 상대방이 누구인지 몰랐지만, "상앙 어른께서 정하신 법률에 따라 증명서가 없는 사람을 재울 수가 없습니다. 저까지 죄를 면할 수 없습니다."라고 거절했다. 상앙은 자신이 제정한 법률이 가혹함을 알게 됐다. 상앙은 위나라로 도망갔으나, 위나라 사람들은 그가 공자 앙을 속임수로 격파한 앙심과 진나라에 대한 후환이 두려워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상앙은 자신의 봉토인 상()으로 가서 세력을 규합하여 재기하려 했으나 뒤를 추격해온 공손가에게 사로잡혔다. 혜왕은 상앙을 그가 정한 법률에 따라 거리에서 사지를 찢는 거열(車裂)이라는 극형에 처하고 구족(九族)을 멸했다.  (이목지신(移木之信), 위약조로(危若朝露), 일사악악(一士諤諤), 작법자폐(作法自斃)

移木之信 : 상앙은 백성이 신임을 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법을 공포하기 전에 국가가 신임을 먼저 보여 주는 작업을 했다. 높이가 세 발 되는 나무를 남문에 세우고 이를 북문에 옮겨 놓는 사람에게 10금을 상으로 준다고 공시했다. 하지만 모두들 이상히 여기기만 할 뿐 옮기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상금을 50금으로 올려 공시했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옮기자 약속대로 50금을 주었다. 이처럼 나라가 백성을 속이지 않는다는 것을 밝혀 알린 다음, 마침내 법령을 공포했다.(令旣具, 未布, 恐民之不信. 已乃立三丈之木於國都市南門, 募民有能徙置北門者予十金. 民怪之, 莫敢徙. 復曰能徙者予五十金. 有一人徙之, 輒予五十金, 以明不欺. 卒下令.)

危若朝露 : 위태로움이 아침 이슬과 같다. 아주 큰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을 비유하는 말

一士諤諤 : 상앙이 효공에게 지금이 위()나라를 칠 호기라고 건의하자, 효공은 상앙을 대장군으로 삼아 위나라를 치게 했다. 진군과 위군이 대치한 상황에서 상앙이 위나라 장수 공자 앙()에게 만나서 맹약을 맺자는 편지를 보냈다. 앙이 동의하여 만나 맹약을 맺고 나서 술을 마셨는데, 상앙이 복병을 시켜 공자 앙을 덮쳐 사로잡고 위군을 모조리 쳐부쉈다. 위혜왕(惠王)은 황하 서쪽 땅을 진나라에 바치고 강화를 맺었다. 이로 인해 혜왕은 도읍을 안읍(安邑)에서 대량(大梁)으로 옮겼던 것이다. 위혜왕이 말했다. “과인이 일찍이 공숙좌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후회스럽다.” 상앙이 위나라 치고 돌아오자 진나라에서는 상앙을 상오(商於) 15개 읍을 봉토로 주고, 상군이라 불렀다. 소리장도(笑裏藏刀)

作法自斃 : 자기가 만든 법에 자기가 죽다. 자기가 한 일로 인하여 자기가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笑裏藏刀 : 웃음 속에 칼을 숨기다. 겉으로는 웃으면서 속으로는 음험한 생각을 품고 남을 해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고대 중국의 병법인 《三十六計秘本兵法》의 10번째 계책이기도 하다.

3)
손빈(
孫臏)
불세출의 군사전략가 손빈은 위나라 출신은 아니지만, 동문수학한 친구인 위나라 장군 방연(
龐涓)에 의해 위나라에 초빙됐다. 하지만 그의 재능을 질시한 방연에 의해 다리가 잘리고 이마에 묵()을 넣는 형벌을 당한 뒤 제나라로 망명하여 위나라를 위태롭게 만들고, 결국 방연을 죽였다. 혜왕은 자기 당대에서 상앙과 손빈이라는 불세출의 정치가와 탁월한 군사전략가를 두 눈 뻔히 뜨고 놓치고 말았다. (손방투지(孫龐鬪智), 위위구조(圍魏救趙)

孫龐鬪智 : 손빈(孫臏)과 방연(龐涓)이 지혜를 다퉜다. 대등한 재능을 지닌 사람들이 지모를 다하여 경쟁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圍魏救趙 : 조나라는 위나라에게 마구 밀려 수도인 한단을 포위당했다. 조나라는 동맹국인 제나라에 원군을 요청했고, 제 위왕은 곧바로 장군 전기와 모사 손빈을 파견하여 조나라를 구원하도록 했다. 그런데 손빈은 한단으로 향하는 전기를 중간에 붙잡고 이리 말했다. 손빈과 전기는 위나라의 수도인 대량을 포위하여 위나라 군을 조나라에서 철수시켰다. 그리고 제군은 위나라 군을 계릉 전투에서 대파하고 조나라를 구원했다. 이렇게 적을 한 곳에 집중시키지 않고 분주(分駐)하고 피로하게 만든 뒤 격파하는 전술이 위위구조이다.

4)
범수(
范雎)
범수는 위나라의 대부 수가(
須賈)의 문객으로, 수가를 따라 제()나라로 가서 수상했다. 누구 못지않게 인재를 존중했던 제나라 양왕(襄王, BC284∼BC265)은 범수의 뛰어난 재능을 알아보고 상을 내렸다. 수가는 별 소득도 없이 출사를 마치고 귀국하게 되자 양왕으로부터 재능을 평가받은 범수가 미워졌다. 그래서 상국인 위제(魏齊)에게 범수가 제양왕과 사적으로 교류한 사실을 고해바치고, 실패의 책임을 뒤집어 씌웠다.

위제는 범수를 상부(
相府)로 끌어다 반죽음이 되도록 두들겨 패고, 측간 옆에 내버렸다. 술 취한 손님들이 거적에 쓰러져 있는 범수의 몸뚱이에 소변을 보았다. 얼마 후 정신을 차린 범수는 병졸에게 자신을 구해 달라고 애원했다. 그를 가엽게 여겼던 병졸은 술에 취해 있는 위제에게 그가 죽었다고 거짓 보고 했고, 위제는 시체를 성 밖에 버리도록 했다. 다음 날 위제는 범수의 시체가 없음을 알고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범수는 절친한 이웃인 정안평(
鄭安平)의 집에 숨어 살면서, 장록(張祿)이란 이름으로 바꾸고 탈출할 기회를 노렸다. 정안평은 마침 진()나라 소왕(昭王, BC306∼BC251)의 사신으로 위나라에 온 왕계(王稽)에게 범수를 소개했고, 그의 재능에 감복한 왕계는 범수를 데리고 대량을 빠져나와 진나라로 들어갔다. 소왕은 범수를 중용했고, 그의 계책을 채택하여 외척인 양후(穰侯)와 화양군(華陽君)을 몰아내고 왕실을 튼튼히 했다.

특히 그의 제안에 의해 제후들을 통제해 나라의 기틀을 튼튼하게 세웠다. 이후에 진나라가 옆에 붙어 있는 위
한 등 삼진(三晉) 땅의 나라를 가장 먼저 멸망시킨 것은 바로 범수의 원교근공(遠交近攻)책에 의한 것이다. 두구과족(杜口裹足), 애자필보(睚眦必報), 일한여차(一寒如此), 제포지의(綈袍之義), 탁발난수(擢髮難數)

杜口裹足 : 입을 닫고 발을 싸매다. 의견을 말하지도 않고 무슨 일에 함께하려고도 하지 않는 태도나, 시류에 따라 바뀌는 세상 사람들의 각박한 마음을 비유하여 일컫는 말이다.

䝽眦必報 : 남이 눈을 한 번 흘긴 것도 잊지 않고 기억했다가 나중에 원수를 갚는다는 뜻으로, 도량이 좁은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一寒如此 : 지독하게 가난함을 이르는 말이다.

綈袍之義 : 네가 나에게 한 짓을 생각하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지만, 옛날 어린 시절 내가 배가 고팠을 때 종종 밥을 먹여 주고 네가 입던 옷을 나누어 준제포지의를 생각해서 이번 일은 없는 것으로 해 주겠다.

擢髮難數 : 머리카락을 뽑아도 다 헤아리기 어렵다. 지은 죄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5)
四君子 信陵君 魏無忌
사군자는 예부터
文人들이 餘暇 一筆法으로 사군자를 즐겨 그렸는데, 四君子 춘추전국시대에 학문과 덕망이 높았던 제나라 孟嘗君, 조나라 平原君, 초나라 春申君, 위나라(大梁) 信陵君 지칭하며 이를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로 상징한 것이다.

신능군은
魏公子 無忌 일컫는다. 그는 위나라 5대 소왕(昭王) 위속()의 아들로 선비들을 잘 대접하였기 때문에 모여든 선비가 삼천 명이나 되었다. 한나라를 창업한 高祖 뒷날 신능군의 거처를 지날 때는 그곳 백성들로 하여금 제사를 지내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答武陵田太守 - 少伯 王昌齡
仗劍行千里 칼을 지팡이 삼아 천리를 가면서
微軀敢一言 천한 몸이 감히 한 말씀하나이다
曾爲大梁客 일찍이 대량 신능군의 손이 되어
不負信陵恩 신능군의 은혜를 저버리자 않으리

사군자는 이러한 상징성 때문에 문인화의 기본적 화제(
畵題)로 오랫동안 그려져 왔다. 繪畵 한 장르로 사군자라는 명칭이 사용된 것은 명대의 화가인 진계유(陳繼儒)가 지은 梅蘭菊竹 사보(四譜)에서 처음 사용되었고, 이 사군자에 연꽃(), 모란(牧丹), 목련(木蓮), 포도(葡萄), 파초(芭蕉), 소나무를 더하여 十君子 한다. 文人들이 사군자를 많이 그린 이유는 이 식물들이 의미하는 상징성뿐만 아니라 종이, , , 벼루 등 최소한의 도구로 쉽게 그림을 그릴 수 있기 때문에 인기를 누릴 수 있었다.

사군자는
水墨畵 배우는 기초적인 수련 과정에 속한다. 그 까닭은 잎에서 變化, 대나무 줄기에서 筆力 매화 가지에서 構成, 菊花 꽃잎에서 먹 濃淡 能力 배울 수 있는 適切 素材이기 때문이다. 기법의 습득 단계는 가장 단순하고 기초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 난초에서 시작하여 대나무, 매화, 국화의 순서로 진행된다.

四君子 水墨 發展과정
사군자 중에서 대나무 그림이 먼저 출현하는데, 그 기원을 唐代라고 하나, 본격적으로 그려진 것은 北宋 문동(文同, 1019∼1079)과 소동파(蘇東坡, 1036∼1101) 이후로 보는 게 타당하다. 이미 시경(詩經)에서 군왕의 높은 덕망에 비유되어 칭송된 바 있으며, 대숲을 은거지로 자적했던 竹林七賢이나 대나무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다고 한 왕희지의 아들 왕휘지(王徽之)의 이야기를 통해 군자의 동반자로 입지를 굳혔다.

한국적 묵죽도의 화풍은 이정(
李霆, 1541∼1622)에 이르러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의 그림은 탄탄한 구성과 꼿꼿한 필력을 바탕으로, 형사(形寫)와 사의(寫意)가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매화도 대나무 그림과 비슷한 시기에 선승(禪僧) 중인(仲仁)이 그리기 시작하였고, 그의 뒤를 이어 양무구(揚无咎, 1097∼1169)가 본격적으로 매화를 주재로 그리기 시작하여 묵매(墨梅)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매화는 눈 속에서 꽃을 피우는 강인한 생명력 때문에 선비의 절개와 불굴의 정신을 뜻하게 되었다. 특히 북송 때의 시인 임포(
林逋)가 매화를 아내로 삼고 학을 자식 삼아 평생 은거한 이후 그 상징성이 더욱 유행하여 선비들이 그림 소재로 즐겼다. 19세기에는 매화그림의 대가 조희룡(趙熙龍, 1789∼1866)이 매화를 지극히 사랑하여 매화병풍을 둘러치고 매화 벼루에 매화 먹을 갈아 매화시를 쓰고 매화차를 마셨다고 한다.

난초와 국화는 대나무와 매화보다는 한참 후에 문인화의 소재로 등장하기 시작한다.
南宋 조맹견(趙孟堅, 1199∼1267)이 묵란을 잘 그렸다는 기록이 있으나, 난초가 군자의 상징으로 각광받게 된 것은 元初 정사초(鄭思肖, 1239∼1310)부터였다. 난초는 예로부터 아름다움과 향기가 귀하게 여겨 초나라 시인 굴원(屈原)의 시에서는 충절의 대명사로 등장하고 공자는 군자와 동일시되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묵란도는 난초 그림과 서예의 관련성을 더욱 강조한 김정희(金正喜) 이후 본격적으로 성행하게 되었다.
 

조선말기 난초그림의 쌍벽인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과 민영익(閔泳翊, 1860∼1914)은 각각 물기 많은 춘란(春蘭)과 난 잎의 끝을 뭉툭하게 뽑아내는 건란(乾蘭)으로 일세를 풍미하였다. 사군자의 중에서 가장 먼저 접하는 것이 바로 난인데, 난을 그린다 하지 않고 친다라고 했다. 이 말은 한 번에 난의 잎을 쳐 올리지 않으면 난의 잎을 표현하는데 자연스럽지 못하고 화선지에 번지기 때문에 비롯된 것이다.

국화는 가장 늦게 유행하였다. 심사정(
沈師正, 1707~1769)의 자는 이숙(頤叔), 호는 현재(玄齋) 또는 묵선(墨禪)이다. 겸재(謙齋) 정선(鄭敾)에게 그림을 배워 묵국도(墨菊圖)가 그려지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심사정은 부드럽고 밝은 화훼초충도(花卉草蟲圖)의 분위기를 내는 담채화를 즐겨 그렸다. 김홍도는 담백한 필치의 수묵화 외에도 계절감이 느껴지는 자연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국화의 모습을 서정적으로 묘사 하였다.

5.
開封 遺跡
1) 龍亭
개봉 서북쪽
龍臺公園 楊二湖(楊家湖 潘家湖 淸濁)가 있다. 용정은 황제의 後御苑인데 나라 康熙皇帝 여기에 萬湖亭 짓고 황제 만세비를 세웠다. 殿 계단은 72개이다.(소림사 영화 촬영지의 한곳)

2)
龍塔
개봉시내 동북방 철탑공원에 있다. 1049년 송나라 때
開寶寺 불렀다. 탑의 높이는 54,65m로 팔각지붕에 13층 탑신의 외부가 30종이 넘은 여러 조형의 갈색유리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50종의 동물 문양이 그려져 있다.

3)
禹王臺(古吹臺)
우왕의 치수사업을 기리기 위해
禹王廟 또는 大禹라고도 한다. 우왕대는 춘추시대 나라에서 피리를 잘 부는 사람이 자주 이곳에 찾아와서 피리를 불렀다 해서 고취대라고도 한다.

4)
翰園碑林
1985년 서화애호가인 李公濤 용정공원 서쪽 6만㎥에 西安 비림과 어깨를 겨룰 정도의 비림을 조성해서 국가에 기증했다.

5)
淸明上河圖
개봉 서북쪽 용정 5호에 위치한 34㏊의 면적에
北宋시대 화가 張擇瑞 그린 청명상하도를 본떠 공원으로 조성했다.

6)
大相國寺 信陵君 邸宅
개봉 대상국사는 황실사원이다. 전설에 지상천국은
蘇州, 杭州, 汴州 등인데 변주가 開封이다. 사찰은 위나라 5昭王()의 아들이자 6安釐王(魏圉)의 이복동생 信陵君(魏無忌) 3천명의 식객과 생활한 저택이라는 사실이다. 北齊 555년 이곳에 建國寺 세웠으며, 당나라 睿宗 712년 대상국사라는 편액을 걸면서 개칭했다. 北宋 때는 日本 등 외국 승려들을 맞아들인 곳으로 쓰였다. 나라 말기에 홍수로 훼멸됐다. 특히 중국 4대 명작으로 꼽히는 水滸傳 힘센 장수 魯智深 버드나무를 통째로 뽑은 곳이다. 1766년 청나라 建隆황제 때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했다. 은행나무로 만든 四面千手眼 유명하다.
중국 백도백화사전에서 확인되고 있다.
大相国寺传为战国时魏公子信陵君故宅齐天保六年555), 在此国寺后遭水火两灾而毁已有一千四百多年历史

위 글은 圓山 위정철 所長께서 장흥위씨BAND에 게재한 글입니다. 춘추전국시대 나라 硏究 귀중한 자료입니다. 국내에서 머물렀던 위씨에 대한 역사 및 유적연구가 중국 춘추전국시대까지 넓혀진 것에 대해 가치를 부여합니다.(벽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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