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장흥 위씨는 대종가가 없다. 대종가는 문중의 뿌리인 종가를 말한다. 문중의 근원이 튼튼하다는 것은 씨족의 튼실함을 증명한다. 우리는 문중의 대종가는 물론 차상위(次上位) 종가도 없다. 고작 파별 종가가 있을 뿐이다. 대종가가 없다는 것은 자랑거리가 못된다. 후손이 귀한 집안은 문중의 종가도 보존하기 어렵다.
대종가 건재여부는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다. 우리 위씨는 시조공이 중국 당나라에서 신라 선덕여왕의 요청으로 동래(東來)한 이른바 귀화한 성씨다. 그러나 시조께서 이 땅에 오신 638년(戊戌) 이후 298년간 선조의 세계가 없다. 30년 주기의 대수(代數)로 치면 꼭 10대의 계보가 끊긴 셈이다. 그 기간에 어떤 선조들이 살다 갔는지 모른다.
또 하나 기묘한 사실은 15대까지 외줄로 이어온 점이다. 실계로 인해 고려 초 대각관(大覺官) 시중(侍中) 휘 창주(菖珠)로 중시조를 삼았다. 공교롭게도 동생(蕃珠)이 있었지만 손이 없었다. 5세도 충렬공의 형(繼令)은 아들(緝)을 거쳐 손자(仁凱·孝凱· 忠凱)대에 대가 끊긴다. 작은 집도 원개(元凱)는 출가하고, 막내 신개(信凱)는 손이 없다.
자손이 늘어난 것은 15대에 이르러서다. 8세 때 큰집 쪽에 효원(效元)이라는 이름이 나오지만 그로 끝난다. 작은 집에서 7세 문개(文凱)·8세 극겸(克謙)·9세 경효(景孝)·10세 온(溫)·11세 인감(仁鑑)·12세 수(脩)·13세 윤기(潤綺)·14세 충(种)·15세 덕용(悳龍)에 이르기까지 모두 외아들이다. 간신히 대(代)만 끊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외줄타기 종식과 상계분파
외줄타기는 16세에서 막을 내린다. 15세조 통선랑공은 휘 자온(自溫)·자량(自良)·자공(自恭)·자검(自儉) 등 4형제를 낳았기 때문이다. 후손들은 이분들을 기준으로 자온의 후손을 능주파(綾州派), 자량의 후손을 관산·행원·여천파(冠山·杏園·麗川), 자공의 후손을 사월파(沙月派)로 분류했다. 막내 자겸은 현손대에 손이 끊겨 문을 닫았다.
분파의 주인공들은 어느 때 어디에서 낳고 자란 인물들일까. 정확한 기록이 없으니 알 수 없다. 전후 사정으로 미루어보면 출생시점은 고려 말과 조선건국 초기로 짐작된다. 출생 장소는 현재 장흥읍 동동리 장원봉 밑에서 거주할 때로 여겨진다. 그리고 결혼 시기는 장원봉 밑과 평화로 이사 가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시대상황과 집안사정을 살펴보자. 고려왕조는 이성계 세력에 의해 몰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우리 14세조 판사공(判事公)은 쓰러져가는 왕조를 일으키기 위해 시중 김종연 등과 역성혁명을 뒤엎으려 기도했다. 그러나 함께 모의한 윤귀택의 밀고로 적발돼 오히려 반역도당으로 몰려 곤장 백대를 맞고 귀향하게 됐다.
설상가상으로 살던 집을 비워줘야 했다. 왜구의 침입을 피해 1379년 나주군 봉황면 철천리 철야현(鐵冶縣)으로 갔던 장흥부가 조선의 건국(1392년)에 맞춰 현재 장흥읍 죽녕산 부근으로 이전했다. 그런데 22년(1414년) 후 도호부로 승격되면서 자리가 비좁다는 이유로 선조들의 보금자리를 치소로 쓰겠다고 해서 비워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엎친대 덮친격이라는 말은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까. 대대로 큰 벼슬을 했던 고려의 갑을족은 하루아침에 역적의 집안으로 전락한다. 아마 판사공은 곤장여독과 화병으로 얼마 살지 못했을 것이다. 게다가 집까지 빼앗긴 통선랑공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는가. 아들들은 이런 사태를 온몸으로 부대끼며 성장했을 게 분명하다.
우리의 분파개념은 1759년 기묘족보를 만들 때 도입됐을 것이다. 그러니까 자온·자량·자공·자검 4형제분이 태어난 시기로 보면 거의 400여년 후에 이루어진 일이다. 그러면 어떤 기준으로 파명(派名)을 붙였을까. 아무래도 16세 할아버지 가운데 자공 할아버지를 제외하고 그 후손들의 거주지를 파명으로 했다고 여겨진다.
근거는 이렀다. 자온의 능주파는 18세 휘 석중(碩重) 때부터 능주와 청풍에서 살았다. 자량의 관산파는 19세 진현(晉賢)이 관산으로 장가들면서 인연을 맺는다. 그리고 18세 휘 유정(由貞)의 행원파(杏園派), 18세 휘 용(庸)의 여천파(麗川派)의 이름도 거주지명이다. 자공의 사월파(沙月派)는 사월방에 거주했기에 붙여진 파명이다.
청양공의 문과급제와 활동상
장흥 위씨의 대종가는 적손(嫡孫)인 휘 자온의 후손이다. 즉 능주파이다. 능주파는 손자인 석중이 그곳으로 이사가 살았기에 능주파가 됐다. 그의 후손은 19세 공필(公弼), 20세 인걸(仁傑)로 이어지다 21세에서 두 파로 갈린다. 장자인 천우(天佑)의 후손은 청양현감파(靑陽縣監派), 차남 천보(天保)의 후손은 유사공파(儒士公派)가 된다.
청양공파는 17세 이후 위씨 여러 파 가운데서도 명문이었다. 18세 석중과 19세 공필 부자가 낮은 벼슬이지만 참봉(參奉)을 지냈다. 20세 인걸도 무과에 급제해서 충무위(忠武尉)에 올랐다. 그리고 21세 천우는 남쪽의 위씨 중 조선시대에 문과에 급제한 유일한 인물이다. 4대에 걸쳐 벼슬한 집안은 드물기에 주위의 부러움을 샀을 것이다.
청양공의 이력은 매우 화려하다. 그는 1556년(丙辰·明宗 11)에 태어났다. 자는 길보(吉甫), 호는 정재(靜齋)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했던 그는 1573년(癸酉) 진사에 급제하고, 1582년(壬午)에 문과복시(覆試)에 급제했다. 급제 후 홍문정자저작박사(弘文正字著作博士),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 사헌부 감찰과 지평장령(持平掌令)을 역임했다.
그뿐인가. 외직도 두루 섭렵했다. 첫 외직은 청양현감을 지냈다. 이어 경상도와 전라도의 도사(都事)를 지내고, 담양부사(潭陽府使)로 재직할 때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난다. 그는 백척간두의 나라를 구하고자 김천일(金千鎰)의병장과 함께 창의(倡義) 한다. 곧 바로 개령(開寧)전투에 참전, 왜적을 쳐서 크게 전공을 세운다.
해전에도 참전했다. 그는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노량해전(露梁海戰)에 나가 일본의 수군장수를 사살하는 전과를 세웠다. 이를 지켜본 충무공은 공을 가리키며 “위씨는 홍면비장(紅面飛將) 위대기만 있는 줄 알았는데 백면비장(白面飛將) 위천우도 있다”며 격찬하며, 즉시 포계(襃啓)하니 조정은 정3품 벼슬인 통정대부(通政大夫)을 승작했다.
이쯤 되면 그의 인물됨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관북을 제외하고 남쪽의 위씨로는 조선시대 문과급제도 유일할 뿐 아니라 증직이 아닌 정3품의 벼슬도 문관에서는 유일하다. 그러나 그는 임란(壬亂)후에 벼슬을 않고 귀가한다. 큰 전공을 세웠는데 무슨 연유로 다시 부사로 복귀하지 않았는지 알 수 없다.
족보의 기록으로 보면 그는 자식을 아주 늦게 둔다. 장남은 당신의 연치 만 42세(1598·戊戌)에, 차남은 만 48세(1604년·甲辰)에 낳았다. 20세 이전에 혼인하던 당시의 사회풍조로 보아 이해되지 않은 대목이다. 아들들의 나이로 보면 공은 왜란 이전에 결혼했다기보다 전쟁 이후에 결혼해서 두 아들을 둔 것으로 추정된다.
유산과 후손들의 고달픈 생활
청양공은 왜란이 끝나자 귀가한 것으로 짐작된다. 전쟁 이후 그의 관직은 어디에도 찾을 길이 없다. 청양공 후손의 가계는 이렇다. 청양공의 장남 쪽은 22세 홍원(弘源)·23세 구(傴)·24세 정두(廷斗)·25세 은징(殷徵)·26세 치린(致麟)·27세 도우(道佑)·28세 영려(榮呂)·29세 만조(萬祚)·30세 희환(晞桓)·31세 계섭(啓燮)·32세 양규(襄奎)·33세 주환(柱煥)·준호(俊縞)로 이어진다. 또 32세 완규(完奎)·33세 호영(乎永)이다.(종가 직계)
대종가의 또 다른 갈래는 25세 주징(周徵)·26세 치룡(致龍)·27세 도박(道璞)· 28세 영석(榮碩)·29세 경조(敬祚)계열은 미단(未單)이다. 29세 의조(義祚)계열은 30세 태환(台桓)·31세 계진(啓眞)·32세 장량(長良), 31세 계준(啓準)·32세 상량(尙良), 31세 계송(啓宋)이다. 계자항렬이 1955년생 이후 출생자니 자손이 아주 귀한 집안이다.
청양공의 차남집안을 보자. 22세 장원(長源)·23세 건(健)·24세 정려(廷礪)·25세 상징(相徵)·26세 백진(伯晋)·27세 도윤(道允)·28세 영모(榮謨)·29세 행조(幸祚)·30세 문환(文桓)·31세 계옥(啓沃)·32세 윤규(潤奎)·33세 대환(大煥)이다. 24세 정대(廷大) 계열은 25세 계징(啓徵)·26세 치당(致唐)문두(文斗) 28세 영취(榮就)·29세 한조(漢祚)·30세 송(松)·31세 계원(啓源)·32세 학량(鶴良)·33세 기환(基煥)· 34세 성명(聖明)이다.
자손이 귀한 사실은 족보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청양공 큰 아들 집안은 1999년에 발행한 대동보에서 고작 19면을, 작은 집은 41면을 차지하고 있다. 관북파가 벌써 40세 이후 세대까지 출생한데 비하면 거의 정지상태에 머물러 있는 셈이다. 그렇지 않아도 수가 많지 않은 데 미단(未單)하는 경우도 있으니 더욱 적은 것이다.
후손들의 활동무대는 자주 바뀐다. 청양공은 임진왜란 이후 언제인지 모르나 능주를 떠나 청풍(淸風)으로 옮긴 듯 하다. 왜냐하면 당신의 유택이 청풍 어리(魚里)에 있기 때문이다. 만일 능주에서 살았다면 증조부터 그곳에 선산이 있으니 능주에 유택이 있어야 한다. 물론 능주에서 청풍까지는 운구할 수 있지만 거리상으로 어렵다.
특히 장남의 거주지는 흥양(興陽)이다. 그가 지금 고흥인 흥양에서 살게 된 동기는 병자호란 때 의병으로 활동하다 훈도(訓導)가 된데 있다. 그러나 26세 치린(致麟)·27세 도우(道佑)·28세 영려(榮礪)까지 살다가 29세 만조(萬祚)는 보성군 회천면 삼장리에 유택이 있다. 그리고 30세 희환(晞桓)은 작은 집 쪽에서 입양해 청풍에서 거주한다.
작은 집(長源)의 거주지는 주로 청풍이다. 25세 이상의 선조유택은 청풍의 지동이다. 그러나 28세(榮謨) 이후부터는 장흥 유치, 이양 쌍봉, 장흥 장평 운곡·우산 등지로 산재돼 있다. 실제로 지금 청풍에는 위씨가 한 집만 살고 있다. 후손에 따르면 청풍에는 선산 13정보와 10두락 남짓의 제위답이 있을 뿐 친척은 살지 않는다고 한다.
대종가 복원을 위한 방안
위씨의 대종가는 사실상 없었다. 과거에도 없었고 오늘도 없었다. 후손들의 뜻도 아니고 문중의 뜻도 아니다. 그저 자연스런 결과일 뿐이다.“옛말에 가난은 나라님도 해결하지 못 한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더구나 후손이 불어나지 않은 현상을 문중이라고 해서 어쩔 도리가 있겠는가. 그러니 종가의 현실은 어찌 보면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
분명한 것은 대종가가 건재 하면 문중을 위해 좋다. 명문거족들은 수 백 년 동안 전통을 지닌 대종가가 있다. 경상북도 안동에만 있는 게 아니다. 전남에도 장성의 울산 김씨 집안, 광산 김씨 집안 등 여러 곳이 있다. 가서보면 부럽기도 하고, 질투심이 솟기도 하는 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왜 우리는 대종가가 없는지 짜증이 나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대종가문제에 대해 생각해볼 시간을 가져보자. 우선 종가 쪽 인사들의 무성의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도대체 무슨 자구(自求)노력을 했는지 의아스럽게 여길 수 있다. 가령 시제에 참제(參祭)한 일이나 아니면 위선사업의 기여도 같은 것이다. 종손으로서 기본적인 본분도 망각하면서 무슨 할 말이 있느냐고 힐난할 수 있다.
그러나 여러 정황을 보면 도무지 문중에 종손의 도리를 할 수 없는 처지였던 것 같다. 그 증좌는 파조인 청양공의 장남 휘 홍원이 흥양으로 가서 훈도로 살았다는 사실에서 나타난다. 그가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를 한 것은 호구지책을 위해서가 아닌가 싶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종손 노릇이 아니라 더 한 것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위씨의 본산지를 떠나 사는 것도 또 다른 변수다. 즉 장흥을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성씨에 대한 집단성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여기다 능주·청풍을 거쳐 흥양에서 여러 대를 살았으니 종가에 대한 의식이 식어졌을 게 분명하다. 특히 임진왜란 전후는 우리 위씨가 종가의식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기임을 감안하면 그렇다.
이제 문중 쪽으로 눈을 돌려보자. 위씨들의 문중개념은 아마 18세기 초에야 단초가 열린 것으로 볼 수 있다. 영이재공(詠而齋公) 등 어른들은 족보편찬과 충렬공 묘소를 찾기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그런데 관북의 종인들은 휘 정진(挺桭)을 장흥으로 보내 남쪽의 종원들을 만나보게 한다. 그 후에도 휘 창빈(昌彬)이 또 관산을 다녀갔다.
영이재공이 충렬공 묘소를 찾은 것은 관북의 족보 덕이다. 정진께서 남쪽에 올 때 1689년에 발행한 기사보(己巳譜)를 가져왔다. 그 족보에 실린 충렬공 면주의 기록을 보고 묘소를 찾았던 것이다. 문중의 어른들은 이 때부터 기초적인 도문중 개념으로 묘전제사를 드린다. 그리고 1759년 기묘초보를 편찬 할 때 파(派)를 도입하고, 1975년 하산사를 신축할 때 정립된다.
문제는 대종가에 대한 문중의 일반적 정서다. 어느 누구도 도문중 시제나 대종회 모임 때 대종가에 대해 관심을 가진 종원이 있었던가. 개인적으로 문중과 관련해서 대화를 나눠도 종가에 대한 문제를 지적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의 소파(小派)문중에 대해서는 열심히 챙기고 관심을 가진 사례만 볼 수 있다.
사실 위씨에게 도문중이 없다고 해서 불편할 것은 없다. 그러나 문중이 문중다우려면 대종가에 대한 예우를 갖춰야한다. 우리의 능력으로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일부터 해보자고 제의하고 싶다. 첫째는 대종가 후손들의 행방을 찾는 것이다. 둘째는 하산사 대제 등에 참여시키는 것이다. 셋째는 파조의 시제에 참여해서 관심을 표하는 것이다.
청양공 종중은 매년 음력 10월 첫째 일요일에 15세 통덕랑 휘 덕룡을 주벽으로 42위의 합동제향을 공의 묘소 근처에서 모시고 있다. 지난해의 경우 경향 각지에서 젊은 후손 30여명이 참제하여 오붓하게 제사를 드렸다. 더구나 다른 선조들의 경우와는 달리 젊은층의 참여가 늘어난 추세여서 어느 종중보다 발전할 가능성을 보이고 있다.
여기다 간이제실이 비좁아 다시 확장할 계획까지 추진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후손들이 자신들의 몫을 앞장서 지겠다고 나선 사실이다. 흔히 조상을 위한 일이면 부담을 외면하려 하는데 청양공 후손들은 기쁘게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 흐뭇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라 아니할 없다. 어쨌든 참제할 의사가 있는 종원들은 당일 오전 9; 30까지 이양면 농협 앞으로 오면 승용차로 모실 준비가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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