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03 21:40
3.안항공(21세 德厚, 1556~1615) 묘소는 관산읍 농안리 천관산 자락 화운동 산 314-4번지, 配 공인 청주金氏와 합조다.
농안마을 입구에 소재한 묘각 운산재(雲山齋) 뒤 산 마루에 위치하고 서북방향으로 조성되어 전방에는 농안제(堤)가 조망된다.
1593년(선조26) 12월에 吏曹에서 왕명을 받들어 魏德厚에게 선교랑수제용감판관(宣敎郎守濟用監判官)으로 임명하면서 발급한 종5품 교지이다. 현재 방촌유물전시관에 소장 전시되어 있다.
현재의 오석(烏石) 묘갈명은 檀紀四千三百十日年 戊寅(1998년) 八月에 문학박사 이가원(진성人 1917~ 2000)이 근찬(謹撰)하다. 13대손 성모(1933~2013)가 근서(謹書)하다. 종유사 옥환(1929~2002), 준환(1933년생), 계흠(1933년생)이 동역(董役)하다. 안항종중에서 근수(謹竪)하였다.(지장록에 현재의 묘갈명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公은 配 청주김씨 사이에 아들 청금공(廷勳 1578~1662), 웅천현감공(廷烈1580~1656), 반계공(廷鳴 1586~1640) 3형제를 두어 장흥위문 내 21세 파조 기준 최고 많은 후손이 번손하였다. 公이 남긴 자식 훈육 자료인 계서(戒書)에는 아들의 인명이 정훈, 정렬, 정희(廷熙), 정도(廷燾)로 기록 되어 있다. 셋째 정희는 정명의 이명이며, 넷째 정도는 족보에 수록 되지 않아 소년시절 타계한 것으로 판단된다.
묘소 아래는 장자 청금공의 묘소가 위치한다. 묘소를 기준하여 바로 뒤에 配공인 영광金氏 묘소와 앞에는 配 공인 진원朴氏 묘소가 위치한다.
묘갈명은병계 윤봉구(1683~1767) 선생이 근찬(謹撰)하다. 1824년 4월 20일 세웠다. 묘갈명 말미에는 족손 죽오공(27세 道僩, 1765~1830)이 지(識)하였다.
1999년 편찬 기묘대동보 지장록 669p에
선무랑 의금부도사 청금선생 정훈 묘갈명 병서(宣武郞 義禁府都事 聽禽先生 廷勳 墓碣銘 並序)에는 통훈대부행사헌부집의겸 세자 시강원 진선 윤봉구가 찬(撰)한 묘갈명 원문과 국역문이 실려 있다.
※ 장흥위문 내 병계(윤봉구) 선생 찬(撰) 묘갈명에 대한 자료 해석
병계(윤봉구) 선생의 본관은 파평이며, 시호는 문헌(文獻)이다. 세자 시강원 진선, 공조판서 등 주요 관직을 역임하였다. 이이~송시열~ 권상하~윤봉구~위백규~홍직필로 이어지는 성리학의 대표적 노론계 학자다.
장흥위문과 인연은 상원군수공(23세 東峑, 1649~1713)의 삼자 간암공(24세 世鈺, 1689~1766)이 아버지의 고향 방촌에 낙향하여 한양생활 때 학문 지기인 병계 선생과 존재공(26세 伯珪, 1727~1798)을 연령 25세(1751년) 때 사제의 연을 맺게 주선하면서 부터다. 장흥위문 내 선조 묘갈명은 4번 찬(撰) 한 것으로 확인된다.
첫번째는 관산읍 죽교리 상잠산 자락에 위치한 청계공(德毅)묘소 묘갈명을 찬하였다.
1999년에 편찬한 기묘대동보 지장록 630p 묘갈명 원문과 국역문이 수록되어 있다. 정확한 찬(撰)의 시기는 표기되지 않아 알 수 없다.
두번째는 관산읍 농안리 천관산 자락 화운동에 위치한 청금공(廷勳) 묘소 묘갈명이다. 지장록 669p 원문과 국역문이 수록되어 있다. 묘소 앞에 세워진 묘갈명 후면 말미에 "崇禎四周甲申四月二十日 立"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1824년 4월 20일 세움이 확인된다. 또 옆면 말미에는 족손 도환이 지(識)함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근거로 하면 청금공의 묘갈명은 병계선생이 찬(撰)한 것을 종중(집안)에서 소장해오다가 70여년이 지난 후 죽오공(道僩) 때 주도로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세번째는 관산읍 옥당리 장천재 주변 승문습독공(18세 由亨)의 配 의인 평산申氏 묘소 주변 바위 위에 세워진 병조참판공(22세 廷喆, 1583~1657)의 묘갈명이다.
지장록 670p 원문과 국역문이 수록되어 있다.
네번째는 회진면 대리에 위치한 호조판서공(21세 德和, 1551~ 1598)묘소 묘갈명이다.
지장록 643p 수록된 묘갈명 내용의 서두는 "내가 위씨의 묘문을 쓴것이 많다. 대개 가히 쓸만 한것이 많으므로 쓰기는 썼으나 그 쓰기를 많이 한것은 公의 兄과 子與姪 때문이다." 라고 사작하였다.
세번째 병조참판공과 네번째 호조판서공의 묘갈명을 병계선생이 찬(撰)한 시기는 기록에 표기되지 않아 알 수 없으나, 존재공의 국역 존재집에 "간암처사공(세옥)행장" 내용 중에는 간암공이 연령 70세(1758년)때 "나이는 먹고 해놓은 일이 없다고 탄식하면서 조부 병조참판공과 증조부 호조판서공을 너무나 알리지 않았음을 후회하였다." 면서 충청도 예산 덕산에 거주하는 병계선생을 찾아가 두분의 묘갈명을 청(請)했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이러한 병계 선생이 찬(撰)한 4곳의 묘갈명에 대한 근거로 하면 1752~1757년 사이 청계공의 묘갈명을 짓고 종중에서는 묘소 앞에 세웠으며, 청금공은 70여년 후 1824년 묘소 앞에 세운 것으로 판단된다. 병조참판공과 호조판서공의 묘갈명은 1759년~1766년, 간암공의 주도로 타계 전에 각각 묘소 등 현 장소에 세운 것으로 추정한다.
※청금공 졸년에 대한 근거 확인 자료
기묘대동보 면주, 요람 등 후손이 쓴 공의 생년은 1578년, 졸년은 1652년으로 75세에 별세를 기록하고 있다. 생년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으나, 졸년 1652년은타당하지 않는다.
이에 대한 근거로는 1)병계 선생이 찬한 묘갈명에는 졸년을 1662년 1월 3일로 수록하고 있어 85세에 별세가 확인된다.
2)방촌유물전시관에 소장 전시된 선무랑 의금부도사(종6품 하) 제수 교지는 순치 16년(1659년 82세)에 효종이 내렸다. 부기(附記)에 의하면 위정훈은 나라가 위급하고 어려울 때 곡물을 모아 군량을 도와주는 공적이 있어 상을 내렸음이 확인되며, 사후 추증이 아닌 제수 되었다.
3)지장록 722p 상원군수공 묘표략 내용 서두 부분에 "일찍 부친을 잃어 종숙부 도사 정훈이 그 외로움을 불쌍히 여겨 공부 과정을 독촉하지 않았서도 성품이 심히 영오하여"...라고 수록되어 있다. 이는 상원군수공(東峑)이 1657년 9세 때 부친 병조참판공(廷喆)이 별세한 시기에 당숙 청금공이 계셨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자료 의하면 졸년은 1662년이 타당하다.
안항종중 소유 임야는 관산읍 농안리 314-4번지 31,565(9,565평), 농안리 314-5번지 1,154(349평), 농안리 425번지 436(132평), 농안리 426번지(48평), 농안리 429번지 284(86평) 등 총 33,598(10,181평)이다.
제위답(畓)은 관산읍 농안리 30-3번지 3.8두락, 남송리 19-1,2,3번지 4두락, 부평리 352-5 2두락 등 총 9.8두락이다. 매년 陰 9월 15일 묘전에서 안항공파종중 주관으로 제향을 봉행한다.
묘각 운산재(雲山齋)는 公의 묘소 아래인 농안마을 입구 농안제 둑 좌측 자락에 위치한다.
원래 1954년 10대손 졸헌공(啓本, 1907~1983 ), 11대손 후계공(質良, 1892~ 1979), 12대손 백당공(大煥, 1907~1979) 등의 주도로 창건하여 농안마을 용소동(龍沼洞)에 위치했었다. 1976년 마을에 농안제(堤)의 축조 계획에 따라 묘각이 수용되어 현재의 위치에 옮겨지었다.
2018년 봄 안항공파종중에서는 묘소 일대 임야의 수종(樹種)을 바꾸기 위해 벌채하고 편백나무를 새로 식수하였다. 묘각 내 낡은 관리사 건물을 철거하고 마당을 시멘트 포장을 하여 정비하였다.
자문 : 12대손 상천 진환(1937년생), 취산(수환 1944년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