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4 17:03
안녕하세요, 저는 위규성(魏揆聖) 이라고 합니다.
종친회 어르신, 회원 여러분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다름이 아니라 전남 완도군 청산면의 세거지가 언제 어떻게 조성되었는지가 알고 싶어 문의 드립니다. 할아버지(석량) 께서는 청산면 읍리에서 태어나신 것 같은데.. 청산으로의 이주 1세대가 아니신데.. 어느분께서 언제 처음 청산으로 가셨는지, 그리고 왜 이주하셨는지 얘기가 궁금한데 알길이 없어 문의 드립니다.
웹사이트내 세거지 탐방에 보면 행원파 - 부장공파 조상중 한분께서 완도로 가신것으로 나오는데, 자세히 알고 계시는 분이 계시면 설명 좀 부탁드립니다.
그럼 또 인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5.12.04 17:05
2015.12.04 17:06
위규성 (2013/01/24 06:47) |
답변 정말 감사드립니다. 말씀대로라면 18세기 초 춘발(春發)공의 이주이후, 저희 할아버지께서 상경하시기 전까지 7대(약 200년)가 청산에서 거주했었나봅니다.. 그분들의 生에 관한 기록이 너무 궁금한데 알길이 없으니, 참 슬프네요... |
2015.12.04 17:06
위상복 (2013/01/24 08:25) |
22세 추남(樞南)공 부터 24세 춘발(春發)공 까지는 부산이나 경상도에 거주하셨을 것으로 추측되고, 공의 아들인 25세 명만(命萬)공이 완도군 청산면 국화리에 보금자리를 잡은 것으로 대종회 홈피에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조상들의 업적이나 활동 등에 대한 사실들은 전� |
위규성 종친의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21세 부장(大洪)공은 장흥 평화리에서 노년을 보낸 것으로 확인되나, 22세 추남(樞南)공부터 23세 사징(師徵)공, 그리고 그 아들인 24세 춘발(春發),춘환(春桓)공 때 까지는 부산 송방리 일대에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모르나 부장공의 4대손인 25대에 전남 완도와 경북 김천으로 나뉘어 정착합니다. 그 시기는 18세기 초에 해당되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300여년전쯤 됩니다.
부장공의 적손인 24세 춘발(春發)공의 아들 명만(命萬)공은 완도군 청산면 국화리에 보금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리고 공은 사귀(師貴)와 사중(師重) 두 아들을 두게 됩니다. 이후 청산의 일가 중 일부는 인근 소안도(所安島)나 약산도(藥山島)에 정착한 경우도 있습니다. 또한 26세 사귀(師貴)공의 현손인 계춘(啓椿)은 해남군 북평면 남안리서 살고 있으며, 사중(師重)공의 증손인 동조(東祚)는 섬에서 나와 장흥군 대덕읍 산정리로 상륙해서 살았습니다.
한편 경북 김천에 정착한 부장공의 차손인 24세 춘환(春桓)공 부터 25세 명방(命邦)공 때까지는 김천 적현면 원동에 살다가 26세 경숙(慶淑)공 대에 인근의 남면 운곡으로 이거하였습니다. 그리고 경숙(慶淑)공의 아우인 경휘(慶輝)공 후손들은 공의 손자인 28세 영정(榮政)공 때에 남면 동영으로 이거하였습니다. 한때 남면 운곡리(장손 : 35세 적복)는 장흥위씨가 150여호에 달하는 거대 집성촌이었으나, 현재는 다른 성씨들이 많이 섞여서 부장공 후손은 60여호만이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20여호에 달했던 동영마을도 현재 4가구만이 남아있습니다.
24세 춘환(春桓)공과 아들 명방(命邦)공이 부산에서 김천 운곡으로 이거한 이유는 임진왜란 당시 부장공이 큰 공을 세우고 명당으로 점지했던 지역을 찾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24세 춘발(春發)공의 아들 명만(命萬)공이 완도로 이거한 이유는 확실치 않지만 제나름대로 추측해 보건데, 완도는 부산에 비해 본관인 장흥에 가깝고 또 임진왜란 이후 전라도가 비교적 해안 방어가 안정되었던 점 등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암튼 부장공의 후손들은 완도와 김천을 중심으로 크게 번창하여 현재 2000여명 이상의 후손들이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완도와 김천간에 소통이 원활하지 못해 선조를 함께 모시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대종회 홈피에 탑재된 부장공 후손의 세거지에 대한 자료와 족보를 근거로 미흡하나마 답변을 올려보았습니다. 혹시 부족하면 연락주세요.(부장공 14대손 위상복, 010-5655-26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