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액(扁額)이란 일상에서 널빤지나 종이‧비단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 문 위에 거는 액자를 말하며 흔히 현판(懸板)으로 통칭되고 있다. 장흥위문 내 백산재(栢山齋)등 22개소의 주요 사우(祠宇)와 존재(存齋) 고택(古宅) 등 6개소 고택(古宅)의 역사적(歷史的) 가치(價値) 및 편액 글씨를 쓴 서예가들이 확인되어 종원들의 관심(觀心)과 판단(判斷)을 구(求)하고 이해(理解)를 돕고자 한다.
1. 편액(扁額)글씨를 동일인(同一人)이 쓴 사우(祠宇)
<백산재 액호>
<백산재 전경>
1)백산재(栢山齋) : 장흥위문의 성지(聖地) 하산사(霞山祠)의 강당으로 장흥군 장흥읍 평화리 69번지에 위치한다. 1934(甲戌)년 회은공(휘 원량, 1882~1945, 운암공 11대손)의 헌재(獻財)로 이축(移築)하였다.
<다산재각 중수 상량문>
(1)다산재각(하산사 강당급백산재)중수 상량문(茶山齋閣(霞山祠 講堂及栢山齋)重修 上樑文은 1936(丙子)년 춘헌공(휘 계반, 1848~1939, 청계공 10대손)이 기술(記述)하다.
<다산묘각 중건記>
(2)다산묘각중건기(茶山墓閣重建記)는 1936(丙子)년 오헌공(휘 계룡, 1870~1948, 안항공 10대손)이 기술(記述)하다.
<하산사 記>
(3)하산사기(霞山祠記)는 1977(丁巳) 백당공(휘 대환, 1907~1979, 안항공 12대손 )이 기술(記述)하다.
<하산사 신실 상량문>
(4)하산사 신실 상량문(霞山祠 神室 上樑文)은 1977(丁巳)년 의재공(휘 석한, 1900~1982, 청계공 9대손)이 기술(記述)하다. 원래 조선후기 장흥부의 관아 건물을 이건을 통해 현재의 위치로 옮겨온 것으로 조선시대 행정관아의 건물이 거의 없는 터에 보존이 잘 되어 있어서 관아 건물 연구 자료에 도움이 되고 장흥부 관아의 복원 측면, 공공기관 건물이 장소와 시간의 변화에 따라 용도가 변화되는 점을 알 수 있는 측면 등에서 건축 및 역사적 가치가 있어 2009(己丑)년 03월 20일자로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 272호로 지정되었다. 회주도문중 소유다.
<장천재 액호>
<상위 : 18세 습독공 諱 由亨 配 宜人 평산申氏 동위 : 19세 통선랑공 諱 晉秀 配 宜人
광산金氏 서위 : 19세 강릉참봉공 諱 晉賢, 配 宜人 탐진崔氏 雙兆>
<22세 웅천현감공 諱 廷烈, 配 淑人 영광丁氏 雙兆 >
2)장천재(長川齋) :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산 92번지에 위치한다. 습독공(휘 유형, ~ ?)의 배(配) 의인(宜人) 평산申氏 묘각이다. 웅천현감공(휘 정렬, 1580~1656)이 타계하자 효자 휘 동식, 휘 동헌 형제분이 초가삼간을 지어 3년간 시묘(侍墓)하시다 상(喪)을 마친 후 문중에서 주변 영은암의 승사(僧舍)를 철거하고 구조와 규모를 확대해 짓고 기와를 이어 재각을 장천재라 재호(齋號)하였다.
<장천재 전경>
천관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장흥위씨의 상징적 제각(祭閣)이라고 할 수 있다. 울창한 숲과 천년의 신비를 간직한 듯 우람한 태고송(太古松) 그리고 사시사철 흐르는 계곡 등 주변의 풍광과 어울러 있 는 제각은 우리와는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기록상의 1차 보수는 1705(乙酉)년 휘 세함공(1674~1716, 안항공 증손), 송와공(휘 세기, 1675~ 1747, 판서공 증손)의 주도로 堂을 넓혀 재실을 중수하였다. 이후 유림들이 학문을 탐구하고 기량을 연마하여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그 중에는 존재공(휘 백규)도 이곳에서 수학(修學)하고 학규(學規)를 지어 후세에 전(傳)하였다.
2차는 1724(甲辰)년 춘담공(휘 세린, 1673~1741, 안항공 증손), 쌍백당공(휘 명익, 1679~ 1767, 안항공 현손) 등의 주도로 규모를 새롭게 했다. 3차는 1747(丁卯)년 낙호공(휘 명래, 1693~1768, 판서공 현손), 명호공(1696~1773, 안항공 현손), 영이재공(휘 문덕, 1704~1784, 안항공 현손), 덕암공(휘 상겸, 1705~ ?, 청계공 5대孫), 등의 주도로 중수공사를 했다.
현 건물은 4차 중수로 1873(癸酉)년 다암공(휘 영복, 1832~1884, 안항공 7대孫), 행백당공(휘 석홍, 1818 ~1886, 청계공 9대손), 농포공(휘 송, 1832~1875, 판서공 9대종손) 주관으로 연인원 1만 명을 동원하여 ‘工’자 형태로 신축하였다. 대부분의 제각은 ‘ㄱ’자, ‘ㄷ’자, ‘ㅁ’자 형태로 지어졌다. 그러나 장천재는 한문의 ‘工’자 형태다. 이는 어느 공간에서도 주변의 자연과 풍광을 조망할 수 있게 하는 구조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을 찾는 시인묵객이 많았던 모양이다.
1978(戊午)년 9월 21일자로 전라남도 지방유형문화재 제 72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장천재는 제각이자 강학(講學)과 시회(詩會) 등 다양한 장소로 이용되어 왔다. 문중 어른들이 여름 한가한 때 피서를 겸해 시회를 연다. 시기는 유두, 칠석, 백중인데 농사에 장원한 집이 주관한다. 더구나 외지에서 다른 성씨의 선비들이 찾아오면 시회를 열어 접대한다. 이것이 외지의 선비를 접대하는 위씨들의 손님 접대방식이다.
<부계당>
<추원루>
<열락헌>
<즉휴루>
<청뢰문>
<풍호대>
<육각정>
장천재(長川齋) 당호(堂號) 편액을 비롯하여 부계당(俯溪堂), 추원루(追遠樓), 열락헌(說樂軒), 즉휴루(則休樓), 외문인 청뢰문(聽雷門), 풍호대(風乎臺), 풍호대의 별호(別號)인 육각정(六角亭) 등 8개의 액호(額號) 편액이 있다. 경내에는
(1)俯溪堂上樑文(부계당상량문)은 1873(癸酉)년 11월에 다암공(휘 영복)이 근서(謹書)하여 낙성일(落成日) 후 걸었다.
(2)부계당중건기사(俯溪堂重建記事)는 1873(癸酉)년 지월(至月) 10일 근기(謹記)하다. 1935(乙亥)년 옥호공(휘 명성, 1662~1723) 6대손 죽헌공(휘 계창)이 삼가 새긴다.
(3)즉휴루기(則休樓記)는 1883(癸未)년 다암공(휘 영복)이 기(記)하다. 1935(乙亥)년 옥호공 6대손 죽헌공(휘 계창)이 삼가 새기다.
(4)부계당판상서급운(俯溪堂板上序及韻)은 1793(癸丑)년 묵와공(휘 수택, 1739~1796, 판서공 6대손)이 경차(敬次)하다.
(5)근제부계당기(謹題俯溪堂記)는 1914(甲寅)년 가을 죽암공(휘 계문, 1865~1951, 판서공 10대종손)이 읍혈근고(泣血謹稿)하다.
(6)부계당중수기(俯溪堂重修記)는 1873(癸酉)년 호산공(휘 하조, 1809~1881, 안항공 8대손)이 근기(謹記)하다.
(7)부계당추기(俯溪堂追記)는 1898(戊戌)년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행주人, 1846~1916)이 근서(謹書)하다.
(8)계은당위대량모선사실기(桂隱堂魏大良慕先事實記)는 1949(己丑)년 중와공(휘 홍량, 1881~1961, 청계공 11대손)이 근서(謹記)하다. (9)부(附) 계은당(桂隱堂) 봉정문(奉呈文)은 1946(丙戌)년 습독공(휘 유형) 14대손 대량이 근정(謹呈)하다.
<제일 : 청풍벽 제팔 : 와룡홍>
<제이 : 도화량>
<제삼 : 월영담 (운영기)>
<제사 : 세이천 (담)>
<제오 : 명봉암>
<제육 : 추월담>
<제칠 : 탁영대>
(10)장천재(長川齋) 팔절서(八絶序)는 제일(第一) 청풍벽(淸風壁), 제이(第二) 도화량(桃花梁), 제삼(第三) 운영기(雲影磯), 제사(第四) 세이담(洗耳潭), 제오(第五) 명봉암(鳴鳳巖), 제육(第六) 추월담(秋月潭), 제칠(第七) 탁영대(濯纓臺), 제팔(第八) 와룡홍(臥龍泓)이다. 1792(壬子)년 가을 계항운민(휘 백규, 1727~1798, 안항공 5대손)이 식(識)하고, 사락산인(휘 백침, 1732 ~1797, 판서공 5대손)이 서(書)하다.
(11)팔영(八詠)은 팔경(八景)을 詩로 읊은 것으로 낭서과객이 근서(謹書)하다.
(12)존재선생 학규(存齋先生 學規)는 1874(甲戌)년 다암공(휘 영복)이 근서(謹書)하다.
(13)장천(長川) 팔경판상운(八景板上韻)은 지부(知府) 민치준(閔致駿 여흥人, 1839~ ?, 장흥부사 역임)이 고(稿)하다.
(14)열락헌운(說樂軒韻)은 부백(府伯) 서상조(徐相祖 대구人, 1830 ~1905, 판돈녕원사 등 역임)이 고(稿)하였다.
①차장천재운(次長川齋韻)은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은진人, 1836~1905)이 근서(謹書)하다.
②부계당근차잉여옹운(俯溪堂謹次剩餘翁韻)은 도천자(휘 세옥, 호(號) 간암, 1689~ 1766, 판서공 증손)경제(敬題))하다.
③근차장천재운(謹次長川齋韻)은 경수(耕叟) 기량연(奇亮衍 행주人, 1771~ ?)이 고(稿)하다.
④제부계당중수벽상(題俯溪堂重修壁上)은 잉여옹공(휘 명덕, 1683~1756, 판서공 현손)이 고(稿)하며, 불초고 행와공(휘 사급, 1717 ~1776, 판서공 5대손)이 추게(追揭)하다.
⑤근차장천재운배정(謹次長川齋韻拜呈)은 도곡(道谷) 송종운(宋鍾雲 은진人, 1852~1885)이 찬(撰)하다.
⑥장천재열락헌운(長川齋說樂軒韻)은 지부(知府) 송기로(宋綺老 은진人, 1830~ 1898 장흥부사 등 역임)가 고(稿)하다.
⑦장천재운(長川齋韻)은 1887(丁亥)년 지부(知府) 송기로가 고(稿)하다.
⑧근차장천재판상운(謹次長川齋板上韻)은 1881(辛巳)년 진사(進士) 이상구(李相九 인천人, ~ ?)가 찬(撰)하다.
⑨경차장천재판상운(敬次長川齋板上韻)은 신호(莘湖) 김록휴(金祿休 울산人, 1827~ 1899, 儒生)가 찬(撰)하다.
⑩즉휴루운(則休樓韻)은 1887(丁亥)년 지부(知府) 송기로가 고(稿)하다.
⑪장천재운(長川齋韻)은 1903(癸卯)년 이강재(연안人, ~ ?)가 고(稿)하다.
⑫무술춘배종연재선생유람천관산경차장천재운(戊戌春陪從淵齋先生遊覽天冠山敬次長川齋韻)은 눌와(訥窩) 윤자현(尹滋鉉 파평人, 1844 ~1909, 학자)이 찬(撰)하다.
(15)남유천관귀로낭음증위수재(南遊天冠歸路浪吟贈魏秀才) : 남으로 와 천관산에 놀다가 돌아오는 길에 부질없이 읊어서 위수재(魏秀才)에게 줌. ①우장천재(右長川齋), ②우상봉(右上峰), ③우구룡봉(右九龍峯), ④우포봉(右蒲峯), ⑤우석범(右石帆), ⑥우금수굴(右金水窟), ⑦우연대(右烟坮)를 관산과객(冠山過客) 죽농(竹農) 송철용(宋喆用)이 찬(撰)하다. 1884(甲申正月)년 계양공(휘 혁기, 1866~ 1944, 안항공 8대손)이 경지(敬識)하다.
(16)기재종형세연구화(奇再從兄世璉求和)와 (17)삼족당유고(三足堂遺稿)는 영이재공(휘 문덕, 1704~1784, 안항공 현손)이 읍혈서(泣血書) 병기(倂記)하다.
(18)장천재운(長川齋韻)은 원취당공(휘 도순, 1748~ 1816, 안항공 6대손)이 찬(撰)하고, 현손(玄孫) 계룡은 감읍서(感泣書)하다.
(19)부계당경차선고호산부군판상운(俯溪堂敬次先考壺山府君板上韻)은 춘파공(휘 관식, 1843~1910, 안항공 9대손)이 찬(撰)하다.
(20)부계당경차선자판상운(俯溪堂敬次先子板上韻)은 오헌공(휘 계룡, 1870~1948, 안항공 10대손)이 근고(謹稿)하다.
(21)부계당재중수후근차판상운(俯溪堂再重修後謹次板上韻)은 오헌산인(계룡)이 찬(撰)하다.
(22)제장천당(題長川堂)은 정헌공(휘 계후, 1905~1982, 안항공 10대손)이 근고(謹稿)하다.
(23)장천동세덕운(長川洞世德韻)은 낙청헌공(휘 형권, 1819~ 1899, 판서공 9대손, 유치면 단산리 태생)이 읍혈근고(泣血謹稿)하다.
(24)부계당근차연재선생판상운(俯溪堂謹次淵齋先生板上韻)은 춘헌공(휘 계반, 1848 ~1939, 청계공 10대손)이 근고(謹稿)하다.
(25)차부계당판상시급기(次俯溪堂板上詩及記)는 춘파공(휘 관식)이 찬(撰)하고, 1931(辛未)년 오헌공(휘 계룡)이 읍혈간(泣血刊)하다.
(26)근차장천재판상운삼족당공판상운(謹次長川齋板上韻三足堂公板上韻)은 계은공(휘 대량, 1884~1951, 청계공11대손)이 근고(謹稿)하다.
<장천재 경내 시운 편액 글>
장천재 경내에는 액호 편액 8점, 시운 편액 36점 등 총 44점 편액 글이 걸려 있어 선대(先代)의 진한 흔적이 남아 있는 등 장흥위문을 대표하는 사우이다. 매년 陰 10. 15일 의인(宜人) 평산申氏, 통선랑공(휘 진수, 1480 ~1564), 강릉참봉공(휘 진현, 1483~1564), 웅천현감공(휘 정렬, 1580~1656)등에 대해 제향 한다. 장천문중 소유다.
<운곡재 액호>
3)운곡재(雲谷齋) : 19세 통선랑공(휘 진수, 1480~1564)의 묘각으로 용산면 운주리 봉황동에 있었다. 公은 관산파를 있게 한 분이다. 公의 아들 경(鯨), 곤(鯤), 태(鮐), 전(鱣), 방(魴)등 5형제 중 당곡 진사공(휘 곤, 1515~1582)은 휘 진현(晉賢)의 양자로 들어가 오덕(五德)을 낳았기 때문이다. 公의 둘째 아들을 동생에게 보내지 않았다면 오늘의 관산파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참의공(參議公), 종사랑공(從仕郞公), 주부공(主簿公)는 물론 관산파의 진짜 할아버님이다.
<운곡재 상량문>
1937(丁丑)년 장천문중 산하 종중의 참여로 신축하였다. 상량문(上樑文)은 오헌공(휘 계룡, 1870 ~1948, 안항공 10대손)이 근찬(謹撰)하다. 액호 편액 글씨는 극암(이기윤)이 썼다. 1994년까지 묘전(墓前)에서 제향 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이후 매년 음력 10월 15일 장천재 시제 때 별도의 단소를 마련 합제(合祭)하고 있다. 장천문중 소유였으나 2005년 타인에게 매매하여 편액은 방촌유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추원재 액호, 극암 이기윤 낙관>
4)추원재(追遠齋) : 당곡 진사공(휘 곤, 1515~1582), 호조판서공(휘 덕화, 1551~1598)의 묘각으로 장흥군 회진면 대리에 위치한다. 창건 기록은 없다. 죽암공(휘 계문, 1865 ~1951, 호조판서공 10대종손)이 진사공 묘소(39,437㎡ 11,929평), 호조판서공 묘소(25,190㎡ 7,620평)주변 임야와 제위답(祭位畓) 3두락을 장천문중에 헌재(獻財)하시고 주도로 창건(創建)하였음이 추정(1940~1950년)된다. 1990년도까지 재각으로 활용하였으나 현재는 폐가이며 陰 10. 01 진사공, 호조판서공 묘전(墓前)에서 제향 한다. 편액은 방촌유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장천문중 소유다.
<당곡진사공 묘소 配 광주李氏 합조>
<호조판서공 묘소 配 정부인 죽산安氏 합조>
<호조판서공 신도비 1938년 謹竪>
<1612년 판서공 配 죽산安氏 정부인 교지, 1631년 호조판서 추증 교지>
☞ 호조판서공(휘 덕화) : 1551∼1598, 진사공(휘 곤, 1515~1582)과 광주李氏 사이에서 사자(四子)로 태어났다. 1585(乙酉)년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선조(宣祖)를 의주(義州)까지 호종(扈從)하였으며, 언양현감(彦陽縣監)에 제수(除授)되어 부임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웠다. 1596년 군자훈련원도정(軍資訓練院都正)으로 있을 때에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체포 소식을 듣고 비분(悲憤)하여 병을 얻어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그 후 1598(戊戌)년 公께서 타계하자 조정(朝廷)에서는 1609년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으로 증통정대부형조참의(贈通政大夫刑曹參議), 1612년 증가선대부형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형조참판(贈嘉善大夫刑曹參判兼同知義禁府使)을 추증(追贈)하였다. 1626년 공(公)의 아들 병조참판공(兵曹參判公, 휘 정철)의 정사훈(靖社勳, 인조반정 功)을 감안 증자헌대부한성판윤겸의금부사(贈資憲大夫漢城判尹兼義禁府使)에 1631년 아들 병조참판공의 진무훈(振武勳, 이괄의 난 功)과 청(후금) 심양 회답별사 사행(使行) 등의 功을 감안하여 증자헌대부호조판서겸지의금부사(贈資憲大夫戶曹判書兼義禁府使)에 추증(追贈)했다. 묘소(墓所)는 회진면 대리이다. 1806(丙寅)년 죽천사(竹川祠)와 2015(乙未)년 울산(蔚山) 충의사(忠義祠)에 배향(配享)되었다.
<운산재 액호>
5)운산재(雲山齋) : 장흥군 관산읍 농안리 화운동에 위치한다. 이 사우에는 안항공(휘 덕후, 1556~1615)과 장자(長子) 청금공(휘 정훈, 1578~ 1662)의 묘각이다. 1955년(乙未)에 여러 방안을 모색한 끝에 청금종중(聽禽宗中), 웅천종중(熊川宗中), 반계종중(磻溪宗中) 후손 3개 종중에서 제각 건축비를 고루 부담키 하고 소요비용을 분담해서 지금의 운산재를 마련했다. 안항파(顔巷派)는 장흥위문 내 종원수가 제일 많다. 1999년 편찬한 기묘대동보에 한 파(派)가 한 권(제3권)을 차지하고 있는 파(派)는 안항공파 뿐이다.
(1)중건기(重建記)는 1964(甲辰)년 후계공(휘 질량, 1892~1972, 안항공 11대손)이 근지(謹識)하다.
(2)이건기(移建記)는 1977(丁巳)년 졸헌공(휘 계본, 1907~1993, 안항공 10대손)이 근기(謹記)하다.
(3)중건상량문(重建上樑文)은 1955년(乙未)년 백당공(휘 대환, 1907 ~1979, 안항공 12대손)이 근술(謹述)하다.
(4)묘각중건기는 1971(辛亥)년 상남공(휘 광량, 1917~1998, 안항공 11대손)이 근기(謹記)하다. 액호 편액 글씨는 극암(이기윤)이 썼다. 매년 陰 9. 15 제향 한다. 안항공파종중 소유다.
<舊 다산재 전경, 액호>
6)다산재(茶山齋) :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 다산嶝에 위치한다. 삼족당 위세보(1669~1707)선생 묘 아래 아들 영이재 위문덕(1704~ 1784)선생께서 시묘(侍墓)하면서 초건(初建)하고 석류(錫類)라 하여 효자석류(孝子錫類)의 뜻을 실천하였다. 이후 1784년(甲辰) 존재(伯珪)선생께서 네분의 동생과 같이 묘우(墓右)에 간곤(艮坤)의 자리를 정하여 재당을 짓고 지명을 따라 다산재(茶山齋)라 하고 후학을 강학하였다. 그후 선생의 증손 경곤(1812~1864)이 종원들과 의론하여 현재의 자리로 옮겨 지었다. 1902년(壬寅) 장흥의 사림들은 존재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서재 위쪽에 단비(壇碑)를 세워 향사하였다. 이후 1950년(庚寅) 3월 선생의 6대손 담헌(淡軒) 필량(1895~1964)이 중건하여 서재를 재실로 변경하고 묘각으로 사용하면서 한편으로는 1970초년까지 다초(茶樵) 위복량(1897~1975)선생 등이 후손 강학 장소로 사용해왔다.
1)상량문(上樑文)은 1784년(甲辰) 존재 위백규 선생이 찬(撰)하다.
2)중건상량문(重建上樑文)은 1950년(庚寅) 3월 상순 담헌(淡軒) 위필량이 존재선생 상량문을 경서(敬書)하고 후기(後記)하다.
3)중건상량문(重建上樑文)은 1951년(辛卯) 산음(山陰) 위 근(1883~1971) 기지(記誌)하다. 4)다산팔경(茶山八景)은 ①관사모종(冠寺暮鍾), ②소산제월(蘇山霽月), ③상잠초적(觴岑樵笛), ④덕호귀범(德湖歸帆), ⑤석실숙운(石室宿雲), ⑥석정모연(石亭暮煙), ⑦연화청풍(蓮花淸風), ⑧우산반조(雨山返照) 1959년(己亥) 10월 김준식(영광人 1888~ 1969) 찬(撰)하다.
5)화증(和贈) 위사문(魏斯文)자화(子華)귀천관산(歸天冠山)은 1938년(戊寅) 경해(絅海) 송상휘가 근고(謹稿)하다.
6)봉화(奉和) 위사문(魏斯文) 행헌(行軒)은 1938년(戊寅) 홍장해 찬(撰)하다. 부화(附和)는 1947(丁亥)년 산음 위 근 재배근서(再拜謹書)하다. 위 편액 기록물은 2002년 화재로 전소되어 아쉽게도 현존하지 않는다.
<現 다산재 전경>
2002(壬午)년 관리사의 과실로 재당(齋堂)이 전소(全燒)된 후 후손들의 헌성(獻誠) 참여와 장흥군청의 재정 지원을 받아 2003(癸未)년 상산(성탁, 1926~ , 안항공 13대손)의 주도로 신축하고 경내에 묘정비(廟庭碑)를 근수(謹竪)하였다. 2003년 재당 신축시 (7)상량문(上樑文)은 운사공(성모, 1933~2013, 안항공 13대손)이 근서(謹書)하다. (8)외삼문인 계연문(桂蓮門) 상량문(上樑文)은 유헌(계현, 1929~, 안항공 10대손)이 근서(謹書)하다.
※ 다산재 전경 사진은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구(舊)·현(現) 사진을 게재함.
<음통덕랑공 휘 동식 등 38 神位>
<제향 행사>
23세 음통덕랑공(휘 동식, 1640~1708), 음통덕랑공(휘 동헌, 1645~1706), 24세삼족당공(휘 세보, 1669~1707), 춘담공(휘 세린, 1673~1741), 25세 영이재공(휘 문덕, 1704~1784), 26세 존재공(휘 백규, 1727~1798), 상암공(휘 백호, 1734 ~1810), 동산공(휘 백신, 1736~ 1820), 서계공(휘 백순, 1737~1815), 죽서재공(휘 백헌, 1742~1783), 27세 송오공(휘 도립, 1748~1808), 양천공(휘 도급, 1754 ~1821), 호산공(휘 도운, 1759~1815), 휘 도전공(1759~1861), 수재공(휘 도흡 1760~1815), 죽오공(휘 도한, 1763~1830), 휘 도영공(1767~1840) 등 배(配) 포함 38位에 대해 매년 陰 10. 2일에 제향 한다.
<계연문>
<첨추헌>
<석류헌>
다산재 액호, 첨추헌(瞻楸軒), 외삼문인 계연문(桂蓮門) 편액이 있었다. 이중 화재 전(前) 첨추헌, 계연문 편액 글씨는 누가 썼는지를 알 수 없으며, 현재의 다산재와 첨추헌 편액 글씨는 2003년 중건 후 전(前) 편액의 사진을 재현하였고, 석류헌(錫類軒) 편액 글씨는 학정(鶴亭) 이돈흥(영천人, 1946~ )이 썼다.
<다산사 전경>
<다산사 액호>
<존상문>
1984(甲子)년 다산사(茶山祠, 향사우)를 경내에 건립하여 존재공을 주벽으로 배향했다. 2003년(癸未) 서계공(휘 백순, 1737~1815 ), 죽오공(휘 도한, 1763~ 1830), 다암공(휘 영복, 1832~1884)을 추배하여 위패(位牌)를 봉안(奉安) 매년 陰 3. 15 제향한다. 액호(額號)편액 글씨와 내삼문인 존상문(尊尙門) 글씨를 덕운(황량)이 썼다. 안항공파 웅천종중 소유다.
<존재공 동상, 장흥읍 남외리 소재 충렬공원 내>
☞ 존재공(휘 백규) : 1727~1798, 영이재공(휘 문덕)과 평해吳氏 사이에서 장자(長子)로 태어났다. 자(字) 자화(子華), 호(號) 존재(存齋)‧계항(桂巷), 천문(天文)·지리·율력(律曆)·복서(卜筮)·산수 등에 통달하고 특히 역(易)에 정통하였다. 정조(正祖)때 공(公)이 68세 되던 해 호남 위유사(慰諭使)로 내려온 서영보(徐榮輔, 달성人, 1759~1816)의 천거로 사용(司勇)에 제수된 후 선공감부봉사(繕工監副奉事)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명(命)이 거듭되어 입궐하여 정조께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리고 옥과현감(玉果縣監)을 제수 받아 1년4개월 재임하였다. 그 후 장원서별제(掌苑署別堤)와 경기전령(慶基殿令) 등에 임명되었으나, 노병(老病)으로 취임하지 못하고 72세로 종(終)하였다. 묘소(墓所)는 관산읍 방촌리 다산嶝이다. 1806년 죽천사, 1984년 다산사(主壁), 1965년 곡성군 영귀서원(詠歸書院), 1929년 합천군 옥계서원(玉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문집에 존재집(存齋集), 저서에 지제지(支提誌), 환영지(寰瀛誌), 정현신보(政弦新譜), 예설(禮說), 경서조대(經書條對), 경서차록(經書箚錄), 고금(古琴) 시소전기서설(詩疏傳記序說) 등 총 90여권의 저서(著書)를 남겼다.
<이필재 액호>
7)이필재(二必齋 ) : 강진군 군동면 평덕리에 위치한다. 괴봉공의 아우인 입향조 직장공(휘 大方, 1550~1617)의 위패를 모신 재각이다. 그의 아들 전겸사복장(前兼司僕將) 순정(舜廷)은 임진왜란 때 명량·노량진해전에서 공을 세워 선무원종 이등훈록되고, 장기현감에 제수됐다.
1954(甲午)년 경보공(휘 삼량, 1911~1991, 직장공 11대손)의 주도와 후손들의 참여로 이축하였다. 800여평의 대지에 4간 겹집의 제실을 중심으로 왼쪽에 제기창고와 오른 쪽에 주방을 갖추고, 앞에는 외삼문이 들어서 주변의 풍광과 함께 매우 단아하게 보인다.
<상량문 축시>
재호(齋號) 및 상량문(上樑文) 축시(祝詩)와 액호(額號) 편액 글씨를 1962(壬寅)년 극암(성산人, 이기윤, 1891~1971)이 근찬(謹撰)하다. 제례문화 변화에 맞춰 매년 陰 11월 둘째 주 일요일에 직장공 이하 선조 156位에 대해 합제(合祭) 제향 한다. 직장공파종중 소유다.
2. 의문점 발견 경위 및 확인
필자는 지난 1990년대 초반부터 회진 대리 진사공, 판서공 묘소를 정기적으로 찾으면서 마을 내에 위치한 추원재를 둘러보았다. 그 때만 하여도 추원재는 마을 아낙들의 쉼터로 이용되었고 방 한쪽에는 제기(祭器)가 있었으나 2000년도로 접어들면서 아낙들의 출입이 끊어져 폐가로 방치된 추원재를 장서공(휘 삼량, 1946~2010, 판서공 11대손)과 함께 2006(丙戌)년 이른 봄철에 찾았는데 추원재 편액이 큰방 문 위에 대못으로 단단히 고정되어 있어 떼지 못하였다. 장서 대부는 편액이 극암(克菴) 선생의 서체라고 하여 처음 "극암(克菴)"이라는 호(號)를 들어 머리에 새겨 두었다. 다음 해 판서공파 13대종손 향산(성렬, 1928~)이 편액을 떼어 두어 현재는 방촌유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후 필자는 본향 여러 선대의 제향 등 행사에 참여해 오면서 재각을 사진 촬영해 왔다. 특히 스마트폰 출시로 휴대폰과 카메라 기능이 복합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카톡, 밴드 등 종친들과 교류를 통해 필요한 사진을 상호 제공하다보니 백산재 등 7곳 사우의 편액 작성 서체가 동일하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또한 혜암(환, 강진 평덕 거주) 도문회장에게 “이필재(二必齋)”에 대해 궁금한 사항을 문의하니 재각을 극암 재호(齋號)하고 편액 글씨를 썼다고 하여 1999(己卯)년 대동보 편제록과 2005(乙酉)년 장흥위씨요람(원산 정철 編著)에서 이를 확인하였다. 백산재, 장천재, 운곡재, 추원재, 운산재, 다산재, 이필재 등의 모든 액호((額號))편액 글씨가 동일 서체로 극암(克菴)이란 호(號)와 낙관(落款)이 확인되었다. 또한 방촌유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운곡재와 추원재의 편액을 다존(성) 명예유물관장에게 의뢰, 사진을 요청하여 편액 글씨가 극암이 쓴 것으로 확인되었다.
<극암 영정 >
☞ 극암의 이력(履歷)
성명 : 이기윤(李基允), 생졸년 : 1891~1971, 본관 : 성산(星山) 자(字) 집중(執中), 호(號) 극암(克菴), 거(居) 성주(星州) 대포(大浦), 정현(廷賢)의 후손, 익희(益熙)의 자(子)로 장석영(張錫英)의 문인으로 독립운동가•유학자이다. 어려서 영민(英敏)하여 16세 성균관 박사가 되어 독서(讀書)하였고 스승의 항일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왜정의 모든 행위에 대항하여 불굴의 뜻을 지켰다. 자질(子姪)의 유계에 규모의근졸(規模宜謹拙) 지기필각력(志氣必刻曆)하라 하였으며 서법(書法)이 경건(勁健)하여 초년(初年)에 청천(晴川), 회연서당(檜淵書堂) 편액을 수서(手書)하였고 이외의 당(堂), 루정(樓亭) 헌각(軒閣)의 글씨를 많이 남겼다. 문집 17卷이 전한다.
3. 견해
1)혜암(환) 도문회장 : 극암은 경북 대구사람으로 정확한 년도와 연유는 알 수 없지만 광복(1945년) 전‧후에 강진군 칠량면 송산리에 정착 거주하고 자가 주변에서 글방(서당)을 운영하여 선친 경보공(휘 삼량, 1911~1991, 직장공 11대손)이 이웃에 거주하는 김정석씨와 함께 서당에 나가셨다고 한다. 선친께서는 극암을 잘 따라 각별한 연(緣)이 되어 이필재 이축에 깊게 관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혜암 회장님께서 10세가 넘은 때 경북 대구 수성동에서 딸, 아들이 와서 고향으로 모시고 갔다고 한다. 혜암 회장은 17~18세쯤 되어 극암의 대구 집을 방문하여 2개월간 기거한 일을 소개하면서 극암의 아들이 4명이 있었는데 장자(長子)는 인석(1914년생)이며 이 중 삼자(三子)인 대석(1924년 생존)이 대구에서 큰 규모의 “애안당(愛眼堂)”이란 상호의 안경점을 경영하였다고 한다. 또한 극암의 장손자는 혜암 본인과 연령이 비슷한 "이일영"으로 젊은 시절 서울에서 판사를 역임하였고, 청‧장년시절 서울에서 뵈었다고 하면서 극암선생 집안과의 관련 지난 일을 소회(所懷)하였다.
2)덕운(황량) 고문 : 젊은 시절이라서 극암 선생을 접하지 못하셨다고 한다. 또한 정확한 때는 알 수 없지만 졸헌공(휘 계본, 1907~1993, 안항공 10대손, 웅천종중)이 다산재 편액과 다른 1곳의 편액을 가지러 경상도로 가서 편액 글씨를 받아왔다고 하면서 극암이 쓴 편액이 틀림없다고 하였다.
3)원산(정철) 씨족문화연구소장 : 사진을 보고 동일인의 서체가 맞다고 하였다. 특히 “집 재(齋)자 끝마무리의 세 개의 점이 다 같이 동일함을 지적”하였고, 극암의 작품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4)야운(이환) 씨족문화연구위원 : 극암이 장흥위문의 중요 여러 사우의 편액을 썼다는 것에 매우 놀랍다면서 “뫼 산(山)자 가로획을 살집 있게 두껍게 처리 한 것”은 극암의 개성이라고 견해를 밝혔다. 특히 추원재의 편액 낙관은 정말 특별한 게 많다면서 “보통 위가 성명 인이고 아래가 아호 인이다. 아호 인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배자가 되고 성명 인은 오른쪽 귀퉁이에서 반시계방향으로 배자가 된다. 그런데 본 낙관은 위에 아호 낙관이고 아래가 성명 낙관이다. 가장 특이했던 게 성명 낙관의 배자로 성명 낙관은 오른쪽 귀 쪽부터 시작해서 시계방향으로 李基印允(원래는 李基允印)으로 배자하였다. 즉 李와 印을 ‘대각선’으로 배자하는 특이한 형태다. 아호는 극암(克菴 또는 克庵)으로 보인다. 따라서 본 추원재 편액은 극암(克菴) 이기윤(李基允) 친필이 틀림없다. 글씨는 사람마다 성향에 따른 습관이 있고 기교를 내는 방법도 각각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글씨만 보더라도 누가 썼는지를 알 수 있다. 더욱이 본 편액들은 낙관 도서를 남겼다. 판독만 하면 누가 썼는지 자명해진다. 본 편액은 재(齋)자의 하단부분 처리에 있어 示를 세 점( ''' )으로 처리하였다. 이 기교가 일관되며 개성으로 보인다. 또亅갈고리하는 방법인데 안진경체의 특유의 글체로 일관된 기교로 하고 있다. 乀파임도 기교가 같다. 전체적으로 살집 있게 잘 썼다. 필세가 당당하고 기운미가 대단하다. 현판 글씨로는 최고라고 볼 정도이다. 중국 최고의 명필가 안진경의 필체가 전체적으로 있다.”고 했다.
<소천 김천두>
5)소천(광산人, 김천두 本名 석중, 1928~ ) : 방촌리 인근에 위치한 평촌리 태생으로 양춘재 편액 글씨를 쓴 소석(광산人, 김노현, 1841~1915)의 후손이다. 시(詩), 서(書), 화(畵)를 하였다. 특히 젊은 시절에 방촌 다산재와 평촌 유천재(柳川齋)에서 다초공(휘 복량, 1897~1979, 안항공 11대손)과 잠계(수원人, 백형기, ~ ?, 용산면 상금리 태생)문하에서 글을 익혔다. “다산재에서 극암을 여러 번 뵈었다”고 하면서 평촌리 유천재의 편액 글씨도 극암이 썼다고 한다. 당대 장흥 등 주변 지역 내의 편액 글씨는 이름 있는 서예가들이 많이 썼다면서 그중 극암의 서체(書體)는 어느 누가 보아도 최고라면서 높게 평가하였다. 또한 소천은 “소석(김노현)은 연암공(휘 영경, 1797~1871, 안항공 7대손)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고 다산재와 유천재에서 칠순이 넘도록 후생을 가르침에 전념하여 오헌 위계룡(魏啓龍), 송포 정노수(丁魯壽), 김기찬(金箕贊), 임두석(任斗錫), 백수인(白守寅) 등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였다고 한다. 이중 수제자(首弟子)는 방촌 출신 오헌공(휘 계룡, 1870~1948)이었다고 한다. 1946(丙戌)년 장흥향교 직원(현 典校) 위경규(號 단강, 1887~1947, 판서공 11대손, 유치 단산 태생)의 주도로 각 고을 향교의 답통(答通)을 받아 유천재 내에 단(壇)을 세우고 예(禮)를 갖춰 이후 계속해서 유림(儒林)들이 향사(鄕祠)하고 있다.”면서 선조들이 장흥위문과의 因緣이 각별하였음을 강조하였다.
☞ 평촌리의 광산金氏는 원래 1515(乙亥)년에 광산人 김 훤이 함평군 학교면 도화동에서 방촌리 세터(신기)마을의 남동쪽 방향으로 300미터 가다(송촌3구 대평마을 방향)보면 돌정지 비래嶝 주변에 입향(入鄕)하여 터를 잡고 살았었다.
후손들은 근거리에 위치한 다산재에서 강학을 받은 경우도 있었다. 그 후 방촌(장흥위문)의 세(勢)에 밀려 1906(丙午)년에 현재 장소로 이주하면서 평촌 마을이 조성되었다. 2000년 후손들은 비래嶝 느티나무 보호수 아래 광산金氏 유허비(遺虛碑)를 근수(謹竪)하였다.
6)이일영 : 극암의 손자이다. 1940(庚辰)년생,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를 역임하고 현재 변호사이다. 조부님 극암은 4남1녀를 두신 독립운동가·유학자이다. 장석영(張錫英)의 문인으로 1919(己未)년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보낼 "파리 장서"의 문안(文案)을 작성할 때 초안(草案) 작성과 필역(筆役) 등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대구형무소에 1개월 수감되어 기소유예(起訴猶豫) 처분을 받아 석방(釋放)되었다고 한다.
1943(癸未)년에 전남 강진군에 정착하게 된 사유는 당시 부친(이인석, 호(號) 임재(臨齋), 1914~1999)은 강진읍 내 있었던 일본 회사인 “큐슈(九州)중공업 강진농장”에서 근무한 관계로 가족들이 강진군 칠량면 송산리에서 거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1945(乙酉)년 광복(光復)되어 일본인 땅이 국가에 귀속되어 국유화 되면서 부친이 농지관리국 강진사무소장을 맡아 강진읍 내 관사(옛 강진경찰서 근처)에서 살았고 조부는 칠량면 송산리에서 거주하면서 명성(名聲)을 듣고 찾아온 유생(儒生)들을 대상으로 집 근처 초옥(草屋)에서 강학(講學)을 하였다고 한다. 이 중 평덕 출신 경보공(휘 삼량), 김정석, 마상덕 등이 조부님으로부터 학문을 배운 대표적 유생들이라고 한다. 그 후 정부에서 농지 분배가 시작되는 시점에 부친이 경북 경주로 전근(轉勤)하게 되어 1950(庚寅)년 3월경 가족 모두가 경북 대구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 후 장흥‧강진지역 유생들과는 서신(書信)을 통해 유대를 유지하였고 왕래(往來)는 없었다고 한다.
조부는 전국의 사우 150개소의 편액 글씨를 썼다고 추정하며 다수의 비문(碑文)을 찬(撰)하였다고 한다. 1971(辛亥)년 81세로 타계 시 장흥‧강진에서 도포를 입고 머리에 갓을 쓴 5~6명이 대구 집에 조문(弔問)을 왔다고 한다. 묘소(墓所)는 경북 성주군 선남면 마현리에 위치한다.
<극암 묘소>
1980(庚申)년 부친이 극암문집(克菴文集)을 간행하였고, 2012(壬辰)년 본인이 부친과 조부에 관련된 임재여적 부 극암편액서(臨齋餘滴 附 克菴扁額書)를 간행하였다.
<극암문집 上>
<극암문집 下>
<임재여적 부 극암편액서>
☞ 임재여적 부 극암편액서(臨齋餘滴 附 克菴扁額書)는 부친 임재(臨齋)와 조부 극암(克菴)의 행적에 대한 내용이다. 이 중 극암과 관련하여 장흥‧강진지역 내 백산재 등 15개소 사우 및 경북지역 내 다수의 사우 편액 칼라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 이일영 변호사의 언동은 부친이 타계(他界) 前인 1997~1998년경 강진을 방문하여 조부께서 편액 글씨를 남기신 사우 소유 문중(門中) 사람들에게 협조를 요청하여 사진을 우편으로 받았다고 한다. 또한 장흥지역 위씨문중 내 정통한 종친 어른을 수소문하여 협조 서신을 보내 사진 촬영을 요청하였다고 한다. 이에 불상의 종친 어른은 백산재 등의 사진을 보내왔다고 하며 영남지역 사우 편액 확인 등 자료를 수집하던 중 갑자기 부친의 타계로 책을 간행(刊行)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후 이일영 변호사는 과거 자라오면서 견문(見聞), 생전(生前)의 부친이 수집한 자료와 가족들의 언동(言動), 극암문집 등을 자료로 하여 2012년 책을 간행하였다고 한다. 부친 타계 후 13년이 지나 책을 간행(刊行)하다 보니 협조한 장흥‧강진지역 문중 어른에게 답례(答禮)로 책을 보내드리지 못해 매우 송구하였다면서 이번 기회로 재차 장흥위씨 문중에 감사 말씀을 전하면서 책 1권을 답례(答禮)로 송부(送付)해 왔다.
7)필자 백강(성록) 상임위원 겸 씨족문화연구위원 : 극암의 서체(書體)는 무게감이 있고 웅장하면서 부드러움이 느껴져 편액 글씨의 진수(珍秀)라 할 수 있다.
백산재는 1934(甲戌)년에 운곡재는 1937(丁丑)년에 창건하였다. 추원재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각 상량(上樑)하여 편액을 건 후 극암이 본향과 강진에서 활동한 시기에 맞춰 현재 편액으로 교체하였을 거라 추정된다. 장천재는 4차 중수로 1873(癸酉)년 신축하여 현재까지 143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중간에 편액이 낡아 보수 필요성 제기와 극암이 장흥위문 문사에 참여한 시기에 현재의 편액으로 교체되었을 거라고 추정된다. 운산재, 다산재, 이필재의 편액 글씨도 비슷한 시기에 극암의 작품으로 이 중 운산재와 이필재는 극암이 강진에서 경북 대구 집으로 돌아간 후에 재각이 건립되어 당시 다산재 편액 글씨와 함께 극암이 거주하는 대구 집에 방문하여 편액 글씨를 받아 온 것으로 사료된다.
또한 극암은 1919(己未)년 장석영(인동人, 1851~1929, 號 회당(晦堂), 독립운동가‧유학자, 경북 칠곡 출신)이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보낼 "파리장서"의 문안(文案)을 작성할 때 초안(草案) 작성과 필역(筆役)에 직접 참여하여 스승의 항일투쟁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전국의 유림(儒林)을 규합하여 파리장서에 서명활동을 펼쳤으나, 70세 노모를 봉양(奉養)하고 있던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장석영의 만류로 서명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며 직접적인 연루자로 지목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獄苦)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6(丙子)년에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대통령 표창을 추서(追書)하고 독립유공자로 공훈록(功勳錄) 됨이 국가보훈처에서 확인되었다.
2012(壬辰)년 손자 이일영이 간행한 "임재여적 부 극암편액서(臨齋餘滴 附 克菴扁額書)"에서는 장흥위문의 백산재 등 7개소 사우 편액 외 관산읍 평촌리 광산金氏 소유 유천재(柳川齋), 관산읍 용전리 영광丁氏 소유 사성당(思成堂), 관산읍 삼산리 경주李氏 소유 관덕재(冠德齋), 용산면 당산리 李氏 소유 영사재(永思齋), 용산면 어산리 인천李氏 소유 당곡사(唐谷祠), 군동면 안풍리 여산 宋氏 소유 성사재(城思齋), 칠양면 영풍동 청주金氏 소유 칠오당(七吾堂), 강진군 창녕曺氏 소유 비천사(棐泉祠) 등 장흥‧강진지역의 15개소 사우에서 극암이 쓴 편액 글씨를 확인하였다.
<졸헌공 영정>
☞ 극암이 강진군 칠량면 송산리에서 거주(1943~1950.3월경)하면서 장흥위문과 인연(因緣)이 되어 사우 편액 글씨를 남겼다. 이 시기에 극암과 깊은 연(緣)이 있는 졸헌공(휘 계본, 1907~1993, 안항공 10대손)의 졸헌유고(拙軒遺稿, 2010년 제(弟) 관포 계천 간행)에서 극암과 유대 서신 내용 등 7개 목록(目錄)이 있어 이 중 하나를 소개한다.
-過克菴李丈松山舊居(과극암이장송산구거) : 극암(克菴) 이장(李丈)의 송산(松山) 옛집을 지남-
路過松山暫住車(로과송산잠주차) : 송산(松山) 길을 지나다가 잠시 수레 멈추니
爲言曾我丈人居(위언증아장인거) : 일찍이 우리 어른께서 살았다고 말을 하네
空梁賀鷰語述苦(공량하연어술고) : 빈 들보에 제비가 하례한 말 괴롭게 이어가고
白雪步鴻痕獨餘(백설보홍흔독여) : 백설(白雪)에 기러기 거닌 흔적만 홀로 남았구나
城上雲歸腸欲斷(성상운귀장욕단) : 성상(城上)에 돌아간 구름 애를 끊은 듯 하고
門前苔結客來踈(문전태결객래소) : 문전(門前)에 이끼 끼여 오신 손님 드물구나
天涯南北相難見(천애남북상난견) : 하늘과 남북으로 서로 보기 어려우니
怊悵徘徊憶舊書(초창배회억구서) : 처량하게 서성거리며 옛 글을 생각하네.
극암이 대구 집으로 귀향한 후 졸헌공이 극암의 송산 옛집을 들러 극암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한 한시(漢詩)이다.
4. 본향 내 기타 장흥위문 사우(祠宇) 역사(歷史)와 편액(扁額)
<죽천사 액호>
1)죽천사(竹川祠, 향사우) : 죽천사 양춘재(陽春齋)는 장흥군 관산읍 죽교리 418번지에 위치한다. 장흥 위씨 향사우(鄕祠宇) 세 곳 중 하나이다. 향사우의 임원은 다른 성씨이며 이들의 주관으로 제사를 지내므로 문중에서 드리는 문사우(門祠宇)보다 영예로운 것이다.
1688(戊辰)년에 지역유림 100명의 발의로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임진왜란의 전초전이라 할 달량진사변(達梁津事變) 때 순절한 장흥부사 한 온(청주人, 1511~1555)과 임진왜란 때 피난 간 선조를 90일간 걸어서 의주로 찾아가 배알한 청계공을 주벽으로 배향한 사우이다. 당시에는 솔치재 아래에 세웠고 명칭도 충렬사였다. 1689(己巳)년에 후손들과 장흥의 유림들이 장흥읍 충렬리에 충렬사를 건립한 후 한 온의 신위(神位)를 옮겨감에 따라 청계공만 독향(獨享) 하게 되면서 "죽천사" 라고 했다. 그 후 1797(丁巳)년에 관암공(휘 상정, 1753~1799, 청계공 5대손)이 헌성금을 들여 대대적인 중수공사를 하였다. 1806(丙寅)년에 청계공(휘 덕의, 1540~1613)을 주벽으로 임진왜란 때 功이 큰 공조참의공(휘 덕원, 1549~1616), 판서공(휘 덕화, 1551~1598)과 갑자·정묘·병자호란 때 功을 세운 청금공(휘 정훈, 1578~1662), 병조참판공(휘 정철, 1583~1657), 반계공(휘 정명, 1589~1640)과 호남유학의 거목 존재공(휘 백규, 1727~1798)등 6顯祖를 추배(追配)하였다. 1868(戊辰)년에 사원 훼철령으로 철거된 후 1898(戊戌)년에 옛터에 설단(設壇)하여 제향 하였다. 1927(丁卯)년에 관산과 용산 간의 솔치재 도로가 나게 되자 춘헌공(휘 계반, 1848~1939, 청계공 10대손)의 주도로 7현(顯) 각 종중(宗中)에서 기금을 마련하여 현 위치에 신축하였다.
< 경의문>
(1)죽천서원중수기(竹川書院重修記)는 1797(丁巳)년 5대 족손 존재공(휘 백규)이 근서(謹書)하다.
1974(甲寅)년 의재공(휘 석한, 1900~1982, 청계공 9대손)이 근지(槿識)하다.
(2)양춘재중수상량문(陽春齋重修上樑文)은 1917(丁巳)년 춘헌공(휘 계반)이 근서(謹書)하다.
(3)양춘재중수기(陽春齋重修記)는 1917(丁巳)년 죽헌공(휘 계창, 1861~1943, 청계공 10대손)이 근서(謹書)하다.
(4)증 위진사정헌호국천(贈 魏進士廷獻號菊泉)은 1630(庚午)년 김우급(金友伋 광산人, 호(號) 추담(秋潭), 1574~1643, 병조참판 追贈)이 찬(撰)하여 추게(追揭)하였다.
(5)대명참군(大明參軍) 여응종(呂應鍾) 동정기략(東征記略)은 1930(庚午)년 추게(追揭)하였다.
(6)죽천사연혁실기(竹川祠沿革實記)는 1964(甲辰)년 관초공(휘 정량, 1895~1968, 청계공 11대손)이 기술(記述)하다.
<양춘재 경내 시운 편액 글>
양춘재 경내에는 총 8점의 시운 편액 글이 소장(所藏)되어 있다. 한편 죽천원지(竹川院誌)는 1984(甲子)년 무송공(휘 계호, 1905~1987, 청계공 10대손)이 간행했다. 2009(己丑)년 묘정비(廟庭碑)를 근수(謹竪)했다. 매년 陰 9월 上丁日에 제향 한다. 액호(額號) 편액 글씨는 역수헌(윤용구)이 썼고, 내삼문 경의문(景義門) 편액 글씨는 낙관을 남기지 않아 글쓴이를 알 수 없다.
<양춘재 액호>
<요월문>
강당인 양춘재(陽春齋)는 1917(丁巳)년 춘헌공(휘 계반)의 주도로 신축하였다. 액호(額號) 편액 글씨는 소석(광산人, 김노현)이 썼고, 외삼문 요월문(邀月門)은 석촌(윤용구)이 썼다. 주변 청계공의 墓前 제향은 매년 陰 10. 5일이다. 청계공파종중 소유다.
<청계공 묘소 中位>
<1614년 청계공 병조참의 추증 교지>
☞ 청계공(휘 덕의) : 1540∼1613년, 진사공(휘 곤)과 배(配) 광주李氏 사이에서 차자(次子)로 태어났다. 반곡((盤谷) 정경달 등과 천방(天放) 유호인(劉好仁)의 문인이며, 1573년(癸酉)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임진왜란 때에 장흥(長興)에서 선조(宣祖) 임금이 계신 의주(義州)까지 90일간 걸어와 배알(拜謁)하였다고 전(傳)한다. 선조께서 귀경한 후 공(公)에게 영남(嶺南) 운향관(運餉官)을 제수 받아 소임을 다하였다. 전란이 끝난 후에는 진원현감(珍原縣監)에 제수(除授)하였으나 취임하지 못하자 호종원종훈(扈從原從勳)에 록(錄)하고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추증(追贈)됐다. 묘소(墓所)는 관산읍 죽교리 양춘재 옆 상잠산 자락이다. 죽천사(竹川祠) 주벽(主壁)으로 배향(配享)과 광산 대촌 황산사(黃山祠)에 배향(配享)되었다.
☞ 윤용구(尹用求) 이력 : 1853~1939, 본관 해평(海平), 자 주빈(周賓), 號 역수헌(亦垂軒)‧석촌(石村)·해관(海觀)·장위산인(獐位山人), 1871년(고종 8) 정시문과(文科)에 급제, 검열(檢閱)에 임명되었고, 예조(禮曹)·이조(吏曹) 판서(判書)를 지냈다. 법부·탁지부·내무대신에 10여 차례 임명되나 모두 사절하고 서울 성북구 장위산(獐位山) 밑에 은거와 유랑하였다. 글씨와 그림에 뛰어나 해서(楷書)·행서(行書)·금석문(金石文)을 많이 썼으며, 죽란(竹蘭)도 잘 그렸다. 국권피탈(國權被奪) 뒤 일본정부가 남작(男爵)을 수여하려하자 이를 거절하였다. 글씨에 문간공한장석 신도비(文簡公 韓章錫 神道碑), 선성군 무생 이공 신도비(宣城君 茂生 李公 神道碑), 그림에 묵죽(墨竹) 등이 있다.
☞ 김노현(金魯鉉) 이력 : 1841~1915, 본관 광산(光山), 자는 공범(孔範), 號는 소석(小石)이다. 대사성(大司成) 김성옥(聲玉)의 후손으로 화오 김최엽의 아들로 1841년(헌종 7년)에 태어났다. 연암공(휘 영경, 1797~1871)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으며 연재(淵齋) 송병준에 집찬(執贊)하여 성취하였다. 사서(四書) 오경(五經)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두루 섭렵하고 특히 증자(曾子) 자사(子思)의 지은 책을 힘써 익히고 이를 늙어서도 강독(講讀)하였다. 칠순(七旬)이 넘도록 후생을 가르침에 전념하였으며 오직 영민(英敏)하고 빼어난 제자를 길러 내는데 즐거움을 삼으니 공의 문하에서 위계룡(魏啓龍), 정노수(丁魯壽), 김기찬(金箕贊), 임두석(任斗錫), 백수인(白守寅) 등 크게 대성한 선비가 많이 배출되었다. 만년에 다산재(茶山齋)에서 거처하면서 항상 존재공(휘 백규)을 우러러 그리워한 나머지 단(壇)을 쌓고 2월 보름이면 창주(滄州) 고사(故事)에 따라 제사를 모시면서 부시(賦詩) 윤강(輪講)하는 규례(規例)를 정하고 이를 실행하였다.
<석천사 액호>
2)석천사(石川祠, 향사우) : 장흥군 장흥읍 행원리에 위치한다. 1822(壬午)년에 유림(儒林)들의 발의로 마을 앞에 사우를 건립하고 처음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功을 세운 주벽 괴봉공(휘 대용, 1530~1610), 수사공(휘 대기, 1559~ ?), 병자호란 때 功을 세운 문화현령공(휘 산보, 1593~1656), 이 괄의 난 때 功을 세운 남포현감공(휘 정보, 1596~1644)과 삼수부사공(휘 천회, 1629~1669), 해남현감공(휘 천상, 1635~ 1683) 등 6位를 배향했다. 그 후 1843년괴봉공 문하에서 수학하고 임진왜란 때 功을 세운 휘 신용호(1568~1598), 휘 신용준(1573~1598) 형제와 1865년 영장공(휘 대경, 1555~ 1623), 장기현감공(휘 순정, 1572~1620), 절충장군공(휘 수징, 1688~1739) 등을 순차로 추배(追配)하고 11位에 대해 매년 陰 3. 9일에 제향 한다.
1868(戊辰)년에 사원 훼철령으로 철폐 후 1887(丁亥)년에 모암재공(휘 계철, 1840~1913, 괴봉공 10대손) 등 후손들이 사우를 재건하고 사방재(射榜齋)로 명명하였다고 하나 기록은 없다. 그러다가 1908년에 유허비를 세웠고, 1933(癸酉)년에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각지붕의 강단(석천서원)과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의 사우(석천사)를 세웠다. 석천사(石川祠) 편액 글씨는 중수(重修)를 거치면서 새롭게 한 것으로 추정된다. 현 액호(額號)편액 글씨는 낙관(落款)이 없어 필자는 알 수 없다.
(1)석천재기(石川齋記)는 1914(갑인)년 계당공(휘 태환, 1869~1918, 괴봉공 12대종손)이 근서(謹書)하다.
(2)석천재중수기(石川齋重修記)는 1914(甲寅)년 계암공(휘 희량, 1888~1953, 괴봉공 11대손)이 근기(謹記)하다.
(3)석천재기(石川齋記)는 1924(甲子)년 계사공(휘 택기, 1858~1940, 안항공 8대손)이 찬(撰)하다.
(4)석천강당중건기(石川講堂重建記)는 1963년(癸卯)년 춘포공(휘 재환, 1902~1989, 괴봉공 12대손)이 근지(謹識)하다.
(5)석천서원 중건기(石川書院重建記)는 2003년 광종(1944~, 괴봉공 15대손)이 근찬(謹撰)하다.
(6)석천재팔경(石川齋八景)은 ①사악제월(獅岳齊月), ②예강어적(汭江漁笛), ③억불잔설(億佛殘雪), ④사산비폭(射山飛瀑), ⑤우암귀운(牛巖歸雲), ⑥인사모종(仁寺暮鐘), ⑦벽사흔연(碧沙炘烟), ⑧안곡청풍(鞍谷淸風)이다.
<석천서원 액호>
강당인 석천서원은 괴봉공(魁峰公)께서 석천재(石川齋)라는 이름을 내걸고 후학을 강학하던 곳이다. 그 석천재는 한동안 사격재(射檄齋)로 이름이 바꿨으나 1933년 중건 이후부터 본래의 이름대로 석천재 또는 석천서원으로 불리고 있다. 석천서원의 편액 글씨는 고종 때 예조‧이조판서를 역임한 장위산인(윤용구)이 썼다. 괴봉공파종중 소유다.
☞ 괴봉공(휘 대용, 1530~1610) : 농암공(휘 억문, 1508~1570)과 숙인(淑人) 진주鄭氏 사이에서 장자(長子)로 태어났다. 명종(明宗) 1555년(乙卯)에 진사(進士) 합격했으나 출사하지 않은 가문(家門)의 전통에 따라 벼슬길에 나아가기를 포기한다. 진사시험에 함께 합격한 문정공 윤두수(尹斗壽, 해평人, 1533~1601)와 친구간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 63세로 와병 중에 있으면서 전장에 나가지 못함을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호남모곡도유사(湖南募穀都有司)로 “나라를 위해 나서라”고 격문(檄文)을 돌리고 수사공(휘 대기, 1559~ ?) 등 재종제(再從弟) 형제들의 참전(參戰)을 독려(督勵)했다. 나라에서는 난리 후에 창의사(倡義士) 김천일(金千鎰, 1537~1593), 우의장(右義將) 임계영(任啓英, 1528~1597)의 포계(褒啓)로 형조좌랑(刑曹佐郞)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어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제수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묘소(墓所)는 장흥읍 평화리 개손嶝이다. 석천사(石川祠)에 주벽(主壁)으로 배향(配享)되었다.
<영귀정 액호 동계 이우명 作>
<영귀정 액호 석촌 윤용구 作>
3)영귀정(詠歸亭) : 원래 장흥군 유치면 단산리 마을 앞 예양강변 산속에 위치했었다. 정자(詠歸亭)와 재각(鳳德齋)의 의미를 갖고 있다. 단산(丹山)의 입향조(入鄕祖)인 계은공(휘 사갑, 1704~1756, 판서공 5대손)의 5대손인 복재공(휘 계민, 1855~1923, 판서공 10대손)이 할아버님이신 만포공(휘 필조, 1797~1875, 1869년 장흥향교 재장 역임)과 아버님이신 손암공(휘 준권, 1831~1900, 1893년 장흥향교 재장 역임)의 제각과 후학들의 강학소(講學所)로 사용키 위해 1887(丁亥)년에 창건했다.
<백세관산 진사 김채규 作>
<복재 재당 액호>
(1)봉덕재상량문(鳳德齋上樑文)은 1915(乙卯)년에 복재공(휘 계민)이 찬(撰)하다.
(2)영귀정상량문(詠歸亭上樑文)은 1921(辛酉)년 복재공이 찬(撰)하다.
(3)영귀정기(詠歸亭記)는 1923(癸亥)년 전 가선대부규장각부제학(前 嘉善大夫奎章閣副提學) 무정(茂亭) 정만조(동래人, 1858~1936)가 근서(謹書)하다.
(4)영귀정기(詠歸亭記)는 1922(壬戌)년 복재공(휘 계민)이 찬(撰)하다.
(5)복재기(復齋記)는 1903(癸卯)년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1846 ~1916)이 근서(謹書)하다.
(6)봉덕재원운(鳳德齋原韻)은 1916(丙辰)년 복재공(휘 계민)이 근고(謹稿)하다.
①영귀정원운(詠歸亭原韻)은 1922(壬戌)년 복재공(휘 계민)이 고(稿)하다.
②근차영귀정운(謹次詠歸亭韻)은 1922(壬戌)년 후은(後隱) 이학로(李學魯 벽진人, 1867~1933, 의병장‧독립운동가)가 근고(謹稿)하다.
③보운기제영귀정(步韻寄題詠歸亭)은 1923(癸亥)년 전자헌대부성균관장(前資憲大夫成均館長) 초원(初園) 서상훈(徐相勛 대구人, 1858~1943, 친일인)이 근고(謹稿)하다.
④근차영귀정운(謹次詠歸亭韻)은 1922(壬戌)년 봉강공(휘 계래, 1860~1941, 판서공 10대손)이 근고(謹稿)하다.
⑤근추차(謹追次)는 1925(乙丑)년 동강공(휘 헌규, 1890~1960, 판서공 11대손)이 찬(撰)하다.
(7)영귀정십경(詠歸亭十景)은 ①두륜낙조(斗輪落照), ②교봉제월(轎峯霽月), ⓷단산취연(丹山炊煙), ④청소어화(淸沼漁火), ⑤죽등농가(竹嶝農歌), ⑥동막초적(桐幕樵笛), ⑦마암청풍(馬岩淸風) ⑧증봉낙하(甑峯落霞), ⑨강시주기(江市酒旗) ⑩산사반종(山寺飯鍾)으로 1949(己丑)년 청호(靑湖) 문병상(文炳常)이 근서(謹書)하다. 특히 주변 경관이 수려하여 구한말 때 관북 함흥종친들이 본향에 내왕 시 영접(迎接)과 수창(酬唱) 장소로 이용되었다. 이때 본향에서 참여한 인물은 춘헌공(휘 계반, 1848~1939, 청계공 10대손), 복재공, 계사공(휘 택기, 1858~1940, 안항공 8대손), 죽암공(휘 계문, 1865~1951, 판서공 10대종손), 오헌공(휘 계룡, 1870 ~1948, 안항공 10대손)등이 있다. 영귀정 경내에는 12점 시운 편액 글이 걸려 있어 단산마을 선대(先代)의 흔적을 볼 수 있었으나, 현 위치로 이전 후 도난 우려 때문에 복재공의 현손인 승철 종원이 자가에서 소장(所藏)하고 있다. 현재 경내에는 4점 액호(額號) 편액이 있다. 이중 액호(額號) 편액 글씨는 동계(이우명, ~ ?)와 전숭록대부판돈녕원사(前崇祿大夫判敦寧院事) 석촌(윤용구)이 썼다. 경내 백세관산(百世冠山)은 진사(進士)를 한 청사(김채규, ~ ?)가 필자이며, 복재 재당(齋堂) 편액이 있다. 판서공 14대손이자 복재공의 현손(玄孫) 승철 소유다.
<단산리 연혁>
단산마을은 계은공(휘 사갑)께서 입향(入鄕)한 후 250여년 후손들이 거주하여 한때는 50호 이상의 집성촌(集姓村)을 이루었다. 또한 1850~1950년 간에는 본향(本鄕) 내 유림사회를 이끌었던 인물들이 많이 배출(輩出)되어 장흥부사에 임명(任命)되면 부임(赴任) 전(前)에 인사차 먼저 단산을 찾아갔을 정도였다고 한다. 당대 인물로는 농암공(휘 찬조, 1797~1870, 1859년 재장), 만포공(휘 필조, 1797 ~1875, 1869년 재장), 낙청헌공(휘 형권, 1819~1899, 1883년 재장), 담은공(휘 윤권, 1829~1906, 1891년 재장), 손암공(휘 준권, 1831~1900, 1893년 재장), 단계공(휘 계홍, 1838~1914, 1899년 재장), 단강공(휘 경규, 1887~1947, 1937년, 1946년 직원)등 6분께서 7번 장흥향교의 총 책임자인 지금의 전교(典校)를 각각 역임하였다. 또한 월곡공(휘 계채, 1849~1892)이 경남 단성현감 역임 등으로 단산의 문세(門勢)를 짐작케 한다. 이 중 단강공은 1938(戊寅)년 판서공(휘 덕화) 신도비(神道碑, 방촌 유물관 앞에 위치) 근수(謹竪) 시 치성보조(致誠補助)하였다.
<단산 망향비>
그 후 2006(丙戌)년에 정부의 주도로 전남 목포 등 서남권 9개 시‧군의 상수문제를 해결키 위해 장흥댐이 준공되어 단산마을은 수몰(水沒)되었다. 영귀정을 보존키 위해 장흥읍에서 유치면 신소재지로 가는 새로운 도로변 산자락인 유치면 송정리 산 90-9번지로 이전했다.
☞ 정만조(鄭萬朝) 이력 : 동래人, 1858~1936, 자(字) 대경(大卿), 호(號) 무정(茂亭) 한말 식민지 시대의 한학자로 서울 출신이다. 강위(姜瑋, 진주人, 1820~1884, 학자·개화사상가)의 문인으로 1889년 알성문과(謁聖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1894년 내부참의(內部參議)가 되었다. 1896년 무고(誣告)를 받아 진도(珍島)에 유배(流配)되었다가 12년만에 풀려났다. 한일합방 후 이왕직전사관(李王職典祀官), 조선총독부중추원(朝鮮總督府中樞院)의 촉탁(囑託), 조선사편수회위원(朝鮮史編修會委員)을 지냈다. 1926년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강사가 되었다. 1926년 경학원대제학이 되어 명륜학원총재를 겸임했고 이왕가실록편찬위원이 되어 편찬 사무를 맡았다. 저서(著書)로 무정전고(茂亭全稿)가 있다.
<하산재 액호>
4)하산재(霞山齋) : 장흥군 장동면 하산리 연하동에 위치했다. 재각의 전신은 충렬재 (忠烈齋)이다. 모암재공(휘 계철, 1840~1913, 괴봉공 10대손)이 1910(庚戌)년에 중수하였음이 장흥군 경술지(庚戌誌)에 확인되나 대동보(大同譜) 등에 기록이 없다. 1925(乙丑)년에 재각 동편에 설단하고 시조공(휘 경)과 판사공(휘 충)의 제사를 지내면서 재각의 명칭을 지명(地名)을 따라 하산재(霞山齋)라 하였다.
1953(癸巳)년에 시설이 낡아 2차 중수하기로 결정하고 안양면 비동리 吉氏 재각을 구입 해체해서 이축하였다. 그 후 1971(辛亥)년에도 시설 보수공사를 하였다. 1975(乙卯)년 평화에 하산사(霞山祠)를 신축한 후 1990년 前까지 제향에 사용되다가 2005년 타인에게 매매되어 철거되었다. 하산재 중건기(霞山齋 重建記)는 1971(辛亥)년 백당공(휘 대환, 1907~1979, 안항공 12대손)이 기술(記述)하다.
충렬공 묘전(墓前)에서 매년 陰 10. 9날 제향 한다. 액호(額號)편액 글씨는 1962(壬寅)년에 설주(송운회)가 썼다.
<충렬공 묘소>
<충렬공 묘소 입로석>
☞ 충렬공(휘 계정, 1038~1107) : 중조공(中祖公)의 사세손(四世孫)으로 고려(高麗) 문종조(文宗朝)때 등제(登第)하여 순종(順宗), 선종(宣宗), 헌종(獻宗), 숙종(肅宗), 예종(睿宗) 등 여섯 임금 때 관직에 몸담아 섬기고, 관(官)이 수태보문하시중태사 (守太保門下侍中太師)에 이르러 예종(睿宗) 4년 졸하니 충렬(忠烈)이라 증시(贈諡)하였다. 인종조(仁宗祖) 때 예종묘정(睿宗廟廷)에 배향(配享) 되셨다. 묘소(墓소)는 장흥(長興) 제암산하(帝岩山下 : 옛 기록은 사자산(獅子山)으로 되어있음.) 연하동(煙霞洞)에 있다. 묘전(墓前) 제향(祭享)은 陰 10. 9이며, 장흥읍 평화리 소재 하산사(霞山祠)에서는 5월 첫째 일요일에 거행된다. 公은 문장(文章)으로써 이름이 높으셨으며, 당시(當時) 송(宋)나라에 보내는 국서(國書)를 초안(草案)하셨다. 특히 청백리(淸白吏)로서도 청사(靑史)에 빛나면서 前·現 모든 장흥위씨 중 최고 벼슬을 역임하였다.
☞ 송운회(宋運會) 이력 : 여산人, 1874~1965, 號 설주(雪舟), 보성군 율어면 금천리에서 출생하였다. 한말의 혼돈기, 일제의 강점기와 민족의 비극 6.25를 체험하면서도 글씨 외에 한순간도 눈을 팔지 않았으며, 1965년 임종 때까지도 붓으로 예도(藝道)를 실천했던 탈속웅필(脫俗雄筆)의 대가였다. 어려서부터 영재 이건창(李建昌, 전주人, 1852~1898, 조선말기 학자·문장가)의 문하(門下)에서 형(兄) 명회(號 小波, 문장가‧시인)와 함께 학문과 서예를 익혔고, 이때부터 中國과 우리나라 명인들의 필법을 두루 섭렵하는 한편 明나라 문인 동기창(董基昌)의 필법에 심취했다. 설주는 5체에 모두 능했으나 주로 해, 행, 초서를 썼으며 그의 진초는 『仙의 경지에 이른 神筆』이라고 평 받았다. 또한 광복 전의 선전(鮮展), 그 후의 국전(國展) 등에서 그의 작품을 인정받을 기회가 많았지만 서력이나 나이에서 후진들에게 평가 받을 수 없다는 자존심과 강직한 성품으로 野人으로 남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선비이다. 말년에 이르러서도 『글씨를 쓸 수 없는 날이 바로 내생명이 다하는 날』이라는 생각으로 일관했고, 주위로부터는 『보성 강물이 온통 설주 선생의 붓 행구는 먹물』이다. 라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설주의 예술 세계는 아들 槿庵(작고), 손자 雪岡, 조카 雪坡, 종손 小汀, 春舫에 이어지면서 보성 설주의 예술 혼(魂)을 밝게 하고 있다.
<경호정 액호>
5)경호정(鏡湖亭) : 1912(壬子)년 행은공(휘 계훈, 1866~1942, 운암공 10대손)이 창건(創建)하였다. 그 후 1964(甲辰)년에 운암공파종중에서는 장흥군 부산면 자미마을 수인산 병풍바위 아래 있었던 회은공(휘 원량, 1882~1945)의 개인 별장 영이루(詠而樓)를 매입하여 헐어 현 위치인 장흥군 부산면 기동리에 이축하고 주변 예양강 경관과 정자(亭子)가 조화되어 “경호정(鏡湖亭)”이란 글귀가 맞아 떨어져 편액을 현 경호정에 옮겨 걸었다.
(1)상량문(上樑文)은 1912(壬子)년 만회공(휘 국채, 1846~1921, 운암공 9대손)이 근기(謹記)하다.
(2)중건상량문(重建上樑文)은 1964(甲辰)년 죽파공(휘 인환, 1901~ 1985, 운암공 12대손)이 기술(記述)하다.
(3)경호정기(鏡湖亭記)는 1914(甲寅)년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근서(謹書)하다.
(4)경호정중건기(鏡湖亭重建記)는 1964(甲辰)년 경암공(휘 계렴, 1898~1977, 운암공 10대손)이 근기(謹記)하다.
(5)경호정중건원운(鏡湖亭重建原韻)은 1912(壬子)년 주인 행은공(휘 계훈)이 찬(撰)하다.
①근차중건운(謹次重建韻)은 1935(乙亥)년 모계(慕溪) 강신황(姜信晃, 진주人, 1878~ ?)이 찬(撰)하다.
②근차경호정중건운(謹次鏡湖亭重建韻)은 동계(東溪) 이상철(李相轍, ~ ?)이 근차(謹次)하다.
③근차경호정중건운(謹次鏡湖亭重建韻)은 만은공(휘 계창, 1886~1948, 운암공 10대손)이 찬(撰)하다.
④근차경호정중건운(謹次鏡湖亭重建韻)은 1912(壬子)년 만회공(휘 국채)이 찬(撰)하다.
⑤근차경호정중건운(謹次鏡湖亭重建韻)은 1964(甲辰)년 죽파공(휘 인환)이 근고(謹稿)하다.
⑥근차경호정중건운(謹次鏡湖亭重建韻)은 1964(甲辰)년 경암공(휘 계렴)이 근고(謹稿)하다
⑦근차경호정중건운(謹次鏡湖亭重建韻)은 1964(甲辰)년 인당공(휘 영환, 1906~ 1989, 운암공 12대손)이 근고(謹稿)하다.
⑧근차경호정중건운(謹次鏡湖亭重建韻)은 1930(庚午)년 운곡초부(雲谷樵夫) 김익한(金益翰 청풍人, ~ ? 조선말 장흥 선비로 추정됨)이 찬(撰)하다.
⑨ 근차경호정중건운(謹次鏡湖亭重建韻)은 춘산초수(春山樵叟) 김익검(金益儉 청풍人, ~?, 조선말 장흥 선비로 추정됨)이 찬(撰)하다.
(6)경호정십경차무이구곡가운(鏡湖亭十景次武夷九曲歌韻)은 ①연봉제월(連峯霽月), ②동강청풍(桐江淸風), ③용산낙조(蓉山落照), ④송정어화(松汀漁火), ⑤선암명사(船巖明沙), ⑥용호명탄(龍湖鳴灘), ⑦인사만종(仁寺晩鍾), ⑧가정목적(稼亭牧笛), ⑨기암귀운(麒巖歸雲), ⑩귀야부운(龜野浮雲)으로 1912(壬子)년 만회공(휘 국채)이 근고(謹稿)하다.
<경호정 경내 시운 편액 글>
경호정에는 운암유장(雲巖遺庄), 영이루(詠而樓), 경호정(鏡湖亭) 3점 액호(額號) 편액과 15점의 시운 편액 글이 소장되어 있어 선대의 묵은 흔적을 볼 수 있다.
이 중 경호정 액호(額號) 편액 글씨는 전라도관찰사,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김성근(안동人)이 썼으며, 운암공파종중과의 연(緣)은 알 수 없다. 한편 본래의 경호정 건물은 부산면 호계리(월만)에 재각을 이축하여 괴헌재(槐軒齋)로 사용하고 있다.
☞ 김성근(金聲根) 이력 : 안동人, 1835∼1919, 조선말기의 문신·서예가, 자는 중원(仲遠), 호(號) 해로당(海鹵堂)‧해사(海士), 판서 온순(蘊淳)의 아들이다. 1862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예문관검열에서 홍문관제학 등을 거쳐 1883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다. 1888년 이후 공조·형조·이조·예조 등 각 판서(判書)직을 두루 거치고 이후 일본정부에서 수여한 남작(男爵)을 받는 등 친일인(親日人)의 한사람이다.
☞ 기우만(奇宇萬) 이력 : 행주人, 1846~1916, 자(字) 회일(會一), 호(號) 송사(松沙), 학자 기정진의 손자로 전남 장성군 태생이다. 1881년(고종 18) 참봉(參奉)의 직분으로 중암(重庵) 김평묵(청풍人, 1819~1891) 등과 함께 유생(儒生)을 이끌고 조정에 행정개혁을 요구하는 만인소(萬人疏)를 올려 호남소수(湖南疏首) 로 불리었으며, 1895(乙未)년 명성황후가 시해(弑害)되자 의병을 일으켜 장성· 나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싸웠다. 그 후 의병활동을 계속하다가 1906년 체포되어 광주·영광·목포·서울 등지 감옥에서 복역하였으며, 1908년 순천에서 재 거사(巨事)를 꾀하던 중 고종이 강제로 퇴위(退位) 당하자 해산하고 은둔생활을 하였다. 유서로 송사집(松沙集)이 있다. 1980(庚申)년 건국훈장(建國勳章) 독립장(獨立章)이 추서(追書)되었다.
<사월재 액호>
6)사월재(沙月齋) : 장흥군 용산면 계산리에 위치한다. 관북(關北) 입북조(入北祖) 생원공(휘 자공)과 配 수원白氏의 위패(位牌)를 모신 재각이다. 우리 족보는 公께서 조선 세종 때(1419~1450)에 천리타향 함흥으로 가셔서 관북에 위씨의 보금자리를 만드셨다고 관북 초보(1689)의 서문에는 적고 있다. 세종은 북방정책을 강력히 추진키 위해 김종서(1390~1453)를 함길도 도절제사로 임명하여 6鎭을 개척하고 그 진에 남방의 민호(民戶)를 이주 시켰다. 公 또한 조정의 이주정책에 따라 사고무친의 낯선 땅으로 이주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후손들은 월명사(月明祠)를 지어 주벽으로 위패를 봉안해 제향을 드려왔다. 그러다가 6. 25사변으로 인해 국토가 남북으로 갈리면서 제향을 올릴 길이 없었다. 사월문중 후손들은 수가 적고 門財가 빈약한 여건에서 갖은 노력과 장흥향교(長興鄕校) 전교(典校)를 역임한 계암공(휘 성재, 1905~1980, 사월 덕원부사공 13대손)의 주도로 1966(丙午)년에 이곳에 재각을 건립하고 남북 후손들이 제사를 드리고 있다.
<사월재 상량문>
(1)상량문(上樑文)은 1966(丙午)년 백당공(휘 대환, 1907~1979, 안항공 12대손)이 찬(撰)하다.
<사월재 記>
(2)사월재기(沙月齋記)는 1977(丁巳)년 청헌공(휘 성인, 1904~1977, 사월 덕원부사공 13대손)이 근술(謹述)하다.
<사월재 記>
(3)사월재기(沙月齋記)는 1977(丁巳)년 계암공(휘 성재, 1905~1980, 사월 덕원부사공 13대손)이 기록(記錄)하다.
<사월재 팔경>
(4)사월재팔경(沙月齋八景)은 ①사월초가(沙月樵歌), ②율리청풍(栗里淸風), ③계산제월(桂山霽月), ④억불봉화(億佛烽火), ⑤연암귀운(連巖歸雲), ⑥용강어적(龍江漁笛), ⑦침향귀범(沉香歸帆), ⑧부용낙조(芙蓉落照)이며, 1978(戊午)년 백당공(휘 대환)이 고(稿)하다.
1985(乙丑)년 남북(南北) 후손들이 참여하여 경내에 생원공의 유장비(遺莊碑)를 근수(謹竪)하고 매년 陰 10월 첫 일요일에 제향 한다. 편액 글씨는 벽강(광산人, 김 호)이 장천재 육각정(六角亭)과 같이 썼다. 사월문중 덕원부사공파종중 소유다.
☞ 김 호(金 灝) 이력 : 1922~1988, 호(號) 벽강(碧岡), 서예가, 효당(김문옥)의 자(子)다. 1922년 경남 합천 출생하고 전남 화순에서 성장하였다. 유당 정현복 사사, 1965년 국전 특선1회 및 입선 13회(1977년까지), 1988년 별세, 전남 미술대전 심사위원, KBS 순천방송국 자문위원, 경남미술대전 심사위원 및 운영위원 등
<< 작품발표 >>
-개인전 : 1965년 개인전11회(부산 로타리 전시관, 1983년까지)
-단체전 : 1977년 현대미술 초대작가(국립현대미술관)
중화민국 국립정치대학 초청강의 및 작품전람회, 1980년 화조서법학회 초대전 (타이페이, 일본), 1982년 현대미술초대전 (국립현대미술관, 1985년까지)
<화운재 액호>
7)화운재(畵雲齋) : 장흥군 관산읍 농안리 화운동에 위치한다. 이 사우에는 22세 정양재공(휘 정혁)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오은공(휘 계행 , 1906~1973, 판서공 10대손)등 후손들은 종중의 숙원을 해결하기 위해 1972년(壬子) 시제 때 신축과 기존 와가(瓦家)의 이전 개축하는 방법을 논의 끝에 자금사정을 고려해서 이전개축으로 결정하였다. 종중 임원들은 대상 가옥을 장동에 있는 개인 집을 선정한 후 이 기와집을 구입해서 옮겨 짓기 위한 절차를 밟았다. 헌집을 뜯어서 다시 짓는 것은 어려움이 많았다. 부족한 목재를 보충해서 1973년(癸丑)에 완공하고 제향을 모시고 있다.
<여재실>
중건기(重建記)는 1973 (癸丑)년 (휘 계용, 1902~1988, 정양재공 9대손)이 근서(謹書)하다. 정양재공(휘 정혁, 1588~1627), 청우당공(휘 동익, 1622~1687), 수우옹공(휘 세직, 1655~1721), 운곡공(휘 세설, 1657~1687), 잉여옹공(휘 명덕, 1683~1756) 등에 대해 陰 10. 13일 제향한다. 여재실(如在室) 편액 글씨는 오은공(휘 계행)이 썼고, 액호 편액 글씨는 추범(보성人, 선종석, ~ ?)이 썼다. 판서공파 정양재종중 소유다.
<회주사 액호>
8)회주사(懷州祠) : 장흥위문의 성지(聖地) 장흥군 장흥읍 평화리에 위치한다. 1975(乙卯)년에 덕운(황량, 1927~ , 청계공 11대손)이 신실 신축비 230여만 원 자담하고 신축하였다. 또한 종원 606명으로부터 모은 8백12만원을 들여 부대공사를 하였다. 신실이 완료된 후 경남공(휘 계상, 1916~1995, 안항공 10대손)과 경독재공(휘 성기, 1924~2011, 청계공 13대종손)이 제위답(祭位畓) 각 3두락을 헌답(獻畓)하여 제향을 원만히 치를 수 있게 하였다. 1976(丙辰)년 문중회의를 거쳐 제향일을 陰 3. 29일로 확정하고 첫 제향을 드렸다. 이어서 1977(丁巳)년 사우 건립의 연비와 독지가 3인의 공적비를 근수(謹竪)했다. 이후 1992(壬申)년부터 陽 5월 첫 일요일로 변경하여 제향하고 있다.
☞ 하산사(霞山祠)는 장동면 하산리에 충렬공을 주벽으로 모시는 사당의 사호이다. 오현조 신실은 시조공이신 회주군을 주벽으로 모시는 사당임으로 2016년 5월 오현대제에서 참석 종원들의 만장일치로 "懷州祠"로 개호하기로 결정하였다.
<모선문>
<경지문>
1977(丁巳)년 신실상량문(神室上樑文)을 의재공(휘 석한, 1900~1982, 청계공 9대손)이 근술(謹述)하다. 하산사기(霞山祠記)는 1977(丁巳)년 백당공(휘 대환, 1907~1979, 안항공 12대손)이 기록(記錄)하다. 액호(額號), 내삼문인 모선문(慕先門)의 편액 글씨는 벽강(광산人, 김 호, 1922 ~1988)이 썼으며, 외삼문인 경지문(敬止門)은 후손 덕운(황량)이 썼다. 매년 5월 첫째주 일요일에 시조공(휘 경, ~ ?), 중시조공(휘 창주, ~ ?), 충렬공(휘 계정, ~ 1107), 합문 판사공(휘 충, ~ ?), 통선랑공(휘 덕룡, ~ ?) 등 오현조(五顯祖)께 제향 한다. 하산도문중 소유다.
<계양재 액호>
9)계양재(桂陽齋) :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 탑동 마을 뒷 계양산 자락에 위치한다. 반계공(磻溪公)의 유덕을 기르기 위한 사우이다. 공은 정묘재란(丁卯再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나라를 위해 의병과 양곡을 모으는 한편 의병을 데리고 청주까지 갔다가 왕의 항복소식을 듣고 귀향하는 등 나라를 위해 功을 세웠다. 후손들은 그런 선조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1978년 마을 서편 계양산 자락에 사우를 세웠다.
<숭상문>
천관공(휘 민환, 1922~1997, 안항공 12대손), 상산(성탁, 1926~ , 안항공 13대손)의 주도로 신축하였다. 상량문(上樑文) 1939(己卯)년 오헌공(휘 계룡, 1870~1948, 안항공 10대손)이 근서(謹書)하다. 상량문부기(上樑文附記)는 1982(壬戌)년 상산(성탁)이 기록하다. 매년 4월 첫째주 일요일에 반계공(휘 정명, 1589~1640)등 35位에 대해 제향 한다. 편액 글씨는 송곡(죽산人, 안규동)이 장천재 풍호대(風乎臺)와 같이 썼다. 안항공파 반계종중 소유다.
☞ 반계유고(磻溪遺稿) : 조선 중기의 학자 반계공(휘 정명, 1589~1640)의 시문집으로 1933(癸酉)년 9대손 오헌공(휘 계룡)께서 간행했다. 1권 1책, 목활자 본으로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부(賦) 2편, 의(疑) 1편, 시 26수, 서(書) 5편, 잡저 5편, 부록에 발(跋) 6편, 녹(錄) 6편, 문(文) 6편, 홀기(笏記)·유사·행장·묘갈명·서(書)·가장(家狀) 각 1편, 추록(追錄)에 기(記) 4편, 문(文) 2편, 발 1편, 사(辭) 1편, 품목(品目) 2편, 서(書)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詩)는 경물시(景物詩)가 많다. 그 중 음국(吟菊)·음송(吟松)·음죽(吟竹)·영월(詠月) 등은 오언절구로서 시상(詩想)이 청아하고 시의(詩義)가 정결하다. 서(書)의 「부아서(付兒書)」는 아들을 훈시하는 내용의 편지로서 학문을 함에 있어서 『소학』과 『논어』를 중심으로 할 것을 말했다. 설(說)의 「경세설(經世說)」에서는 부모형제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였다. 부록의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과 「병자창의록(丙子倡義錄)」은 저자가 병자호란 때 창의(創意)한 사실을 기록한 것이다.
☞ 안규동(安圭東) 이력 : 죽산人, 1907~1987, 號 송곡(松谷), 보성군 복내면 반석리 태생이다. 8세에 사헌 김윤기로부터 학문을 익히기 시작, 13세에 한학자 이낙천의 문하에 입문했다. 18세에는 설주(宋運會)와 효봉(許 炤)에게 서예를 배워 한학과 글씨에 대한 자질을 일찍이 키운 그는 한때 정치에도 뜻을 두었으나 1950년 이후 고향에 돌아와 한학과 서예에 정진하여 1964년부터는 국전을 통해 서예계에 입지를 굳혔다. 송곡의 글씨는 「부드럽고 우아하며 덕스럽고 다사로운 모습의 행서, 순탄하고 홀가분하며 질기고 거침없는 멋 갈의 초서, 새롭고 고우며 고르고 둥그러움이 바램으로 나타난 전서, 바르고 아름다우며 어엿하고 꾸밈없이 알찬 한글로서 이것이 곧 "송곡체"라 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저존각 액호>
10)저존각(著存閣) : 장흥군 부산면 기동리에 위치한다. 입향조인 21세 운암공(휘 덕관, 1547~1628)은 관산 당동에서 태어나 부산면 내안리(內安) 김귀명의 딸과 혼인했다. 기동에 보금자리를 잡은 것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이듬해인 1593년부터다.
<운암공 휘 德寬 등 529 神位>
기동에 터를 정한 이후 운암공 후손들의 생활은 비교적 무난했다. 그런 여유로 인해 오손도손하는문풍(門風 을 만들어 내었다. 이러한 화목의 문풍은 모든 선조들의 제사를 한꺼번에 모시기 위한 "저존각" 건설로 이어졌다. 같은 조상의 후손이라도 직계조상의 제사만 모시다 보면 일가 후손들이 만날 기회가 없고, 시제마저 제관이 부족해 지내기 어렵다.
또한 저마다 지내는 제수비용은 엄청난 문재(門財)를 축낸다. 이런 부작용을 해결하기 위해 종중은 제각을 짓기로 하였다. 한 위(位)에 30만원씩 7천만원의 기금을 조성하는 등 운암공파종중 후손들의 혼연일체(渾然一體) 단합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재각을 1994(甲戌)년 10월에 신축하였다. 당시 운암공을 비롯 그 후손 183주(柱) 391위의 위패를 모셨다.
<저존각 記>
<갱장문>
저존각기(著存閣記)는 계사공(휘 성호, 1927~2013, 사월 덕원부사 13대손)이 근찬(謹撰)하다. 제례문화 변화에 맞춰 매년 4월 첫째 주 일요일에 운암공(휘 덕관, 1547~1628)이하 선조 240位(配 포함 529位) 합제(合祭) 제향 한다. 액호(額號)편액 글씨와 외삼문인 갱장문(羹牆門)은 만운공(휘 중환, 1929~1998, 운암공 12대손)이 썼다. 운암공파종중 소유다.
<추원각 액호>
11)추원각(追遠閣) : 장흥군 관산읍 당동마을 오덕(五德) 태생 생가(生家) 터에 위치한다. 2013(癸巳)년에 덕운(황량, 1927~ , 청계공 11대손), 송곡(경량, 1937~ , 청계공 11대손)등 후손의 주도로 건립하였다. 제례문화 변화에 맞춰 매년 4월 둘째 주 일요일에 주벽 초헌공(휘 윤조, 1841~1916) 등 49位에 대해 제향 한다. 편액 글씨는 후손 덕운(황량)이 썼다. 청계공파 초헌종중 소유다.
☞ 죽천사, 양춘재 요월문, 석천서원, 영귀정, 양춘재, 경호정 등의 편액 글은 극암이 강진군 칠량 송산에서 귀거 한참 前에 명인(名人)들의 작품이며, 하산재, 사월재, 화운재, 계양재, 저존각, 추원각은 극암께서 고향 경북 대구로 귀향(歸鄕) 및 타계(他界)하신 후로 각각 서로 다른 시대의 명인(名人)과 후손들이 편액 글씨를 쓴 것이 확인된다. (현) 다산재의 편액은 전소(全燒)되기 前에 사진을 재현 해 놓은 극암 이기윤이 쓴 편액이다.)
5. 방촌리 고택(古宅) 역사(歷史)와 편액(扁額)
<존재고택 전경>
1)존재고택 :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 476번지에 위치한다. 1984. 1. 14 국가 중요민속문화재 제 161호로 지정되었다. 안항공파 웅천종중의 종갓집으로 계춘동(桂春洞)마을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으며, 주위의 경치가 아름다워 특히 여름철을 시원하게 보내기에 적당한 집이다. 바깥마당에는 연못이 있으며 집 뒤로 대나무 숲이 우거져 있고 그 앞에 1937(丁丑)년에 신축한 안채가 높이 자리하고 있다.
<안채>
<사랑채>
맞은편으로 대문간이 있으며 안마당 북쪽에 헛간채가 있고, 남쪽으로는 250여년 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랑채인 영이재공(휘 문덕, 1704~1784), 존재공(휘 백규, 1727~1798)의 서재(書齋)가 있다. 안채 동쪽에는 여러 단의 계단을 올라서서 사당(祠堂)이 있다. 지정 당시 명칭은 "장흥 위계환 가옥"이었으나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존재공(휘 백규)의 고택(古宅)으로 장흥위씨의 집성촌에 위치하고 있어 그 호(號)를 따라 2007. 1. 29 "장흥 존재 고택"으로 지정, 명칭을 변경하였다.
<영이재>
<존재>
<영이재 당호 해설>
서재 문(門) 위에 걸려 있는 영이재공(휘 문덕)의 당호(堂號) 편액, 당호 해설 편액, 존재공의 당호(堂號) 편액 글씨는 병계 윤봉구가 썼다. 안항공 13대손이자 존재공의 8대장손 재현 종친의 소유다.
☞ 윤봉구(尹鳳九) 이력 : 존재공의 스승이다. 파평人, 1683~1767, 호(號) 병계(屛溪)·구암(久菴), 시호 문헌(文獻), 1714년(숙종 40) 진사시에 급제, 1725년(영조 1년) 청도군수, 1738년 집의(執義)를 지냈다. 1741년 주자(朱子)를 송시열(宋時烈, 은진人, 1607~1689)의 영당(影堂)에 추봉(追奉)하게 하여 삭직되었다가 재 등용되어 자의(諮議) ·찬선(贊善) 등을 거쳐 공조판서가 되었다. 한원진(韓元震, 청주人, 1682~1751)과 함께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호론(湖論)을 주장하였다. 강문8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이다. 문집에 병계집(屛溪集), 저서에 화양존주록(華陽尊周錄)이 있다.
<오헌고택 전경>
2)오헌고택 :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 679번지에 위치한다. 1986. 2. 7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 7호 위성탁 가옥으로 지정된 후 2012. 4. 13 국가 중요 민속문화재 제 270호 "장흥 오헌 고택"으로 지정되었다. 조선후기 원취당공(휘 도순, 1748~1816년)께서 처음으로 집터를 잡고 오헌공(휘 계룡, 1870~1948년)에 의해 완성되었다. 1918(戊午)년에 안채와 사당이 축조되었고 사랑채는 1923(癸亥)년에 지어졌으며 그 이외의 건물은 그 보다 후대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남도 대농(大農) 반가(班家)의 대표적 고택이다. 방촌마을의 대표적인 상류주택으로 안채‧사랑채‧사당‧문간‧연못 등 축조 당시 공간 구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다양한 민속생활사 관련 유물과 자료를 소장하고 있어 지역 양반문화와 향촌 생활사 등의 연구 자료로서 역사적, 민속적 가치가 높다. 특히 12代가 연속해서 문집(文集)을 남긴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안채>
<사랑채>
<원취>
<소암>
<호정>
<춘파>
<일오헌>
<후계>
<호곡>
<상산>
사랑채에 (1)원취(願醉), (2)소암(小庵), (3)호정(壺亭), (4)춘파(春坡), (5)일오헌(一梧軒), (6)후계(後溪), (7)호곡(壺谷), (8)상산(觴山) 등 당호(堂號) 편액 8점이 소장되어 있다. 이 중 원취당공(휘 도순)과 호산공(휘 하조, 1809~1881)의 당호(堂號) 편액은 낙관(落款)이 없어 글쓴이를 알 수 없다. 소암공(휘 영우, 1786~1857)의 당호(堂號) 편액 글씨는 석촌(윤용구)가 썼다. 춘파공(휘 관식, 1843~1910)의 당호(堂號) 편액 글씨는 일신재(광산人, 정의림)이 썼다. 일오헌의 당호(堂號) 편액 글씨는 오헌공의 스승 소석(광산人, 김노현)이 썼다. 후계공(휘 질량, 1892~1972)의 당호(堂號) 편액 글씨는 송천(영광人, 김태경, 前 장흥문화원장 김기홍의 부친)이 썼다. 호곡공(휘 일환, 1910 ~1977)의 당호(堂號) 편액 글씨는 고당(서흥人, 김규태)이 썼다. 상산(성탁, 1926~ )의 당호(堂號) 편액 글씨는 송천(김태경)이 썼다. 안항공 13대손이자 오헌공 증손 성탁 종친의 소유다.
☞ 김규태(金奎泰) 이력 : 서흥人, 1902~1966, 호(號) 고당(顧堂), 구례 태생이다. 정 기(鄭 琦, 선산人, 1879~1950)의 문인으로 화이론(華夷論)에 입각한 그의 세계관은 저술에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아울러 서학(西學) 등 이단(異端)을 배척하고 성리학적 정통을 수립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는 학문과 더불어 산행을 매우 좋아하여 산행기(山行記)를 남겨 놓기도 하였다. 특히 가례(家禮)에 밝았다. 문집에는 《고당집》이 있다. 그의 자녀 9남1녀 중 7남인 김창동이 서예가로 활동하고 있다.
<죽헌고택 전경>
3)죽헌고택 : 관산읍 방촌리 477번지에 위치한다. 1986. 2. 7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 6호 위성룡 가옥으로 지정되었다. 안채는 1949년에 신축한 一字형 6칸 전후 툇집이며 겹집의 형태이다. 간살이는 북쪽 앞 2칸은 부엌이며 뒤 2칸은 좌우 방이다. 다음이 큰방이고 중앙은 2칸 대청, 맨 끝이 작은방이며 우퇴가 놓여 있다.
<안채>
<사랑채>
사랑채는 1919(己未)년에 지어졌다. 4칸 전후 툇집으로 간살이 북쪽으로부터 앞 칸은 방이고 뒤 칸은 헛간으로 되어 있고 다음 2칸의 앞 칸에는 크게 방을 두고 뒤 칸에도 좌우로 방을 두었다. 맨 끝 칸은 대청으로 되어 있으며 각 툇칸에는 창고 방이 시설되어 있다.
<죽헌>
<계은>
<상산재 記 일신재 정의림>
<상산재 記 송사 기우만>
<죽헌 원운>
<경차 죽헌 위옹 회갑운 석담 이종문>
사랑채에 걸려있는 (1)죽헌공(휘 계창, 1861~1943)의 당호(堂號) 편액 글씨는 설주의 형(兄) 소파(송명회, 1872~1953)이 썼고, (2)계은공(휘 대량, 1884~1951)의 당호(堂號) 편액 글씨는 설주(송운회)의 작품으로 확인되었다. (3)심석(心石) 정의림(鄭義林 광산人, 1845~1910)과 (4)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행주人, 1846~1916)이 찬(撰)한 "상산재기(觴山齋記)"가 있다. (5)죽헌공(휘 계창)이 쓴 죽헌원운(竹憲原韻) 및 (6)석담 이종문이 쓴 경차죽헌위옹회갑운(敬次竹軒魏翁回甲韻) 등 6점의 편액이 소장되어 있다. 청계공 13대손이자 죽헌공 증손 성룡 종친의 소유다.
☞ 정의림(鄭義林) 이력 : 광산人, 1845~1910 자(子)는 계방(季方), 호(號) 일신재(日新齋)‧심석(心石), 응교(應敎) 정태(鄭態)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제현(濟玄)이고, 어머니는 진원 박씨(珍原朴氏) 치성(致聖)의 딸이다.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행주人, 1798~1876, 성리학자)의 3대 제자 중 1인으로, 노사학파의 인물 중 비교적 큰 규모의 문인 집단을 형성한 사람이다. 또한 나라가 일제에 의해 잠식되어 가자 호남대의소에서 의병 활동을 하였다. 정의림의 문인 수는 『일신재집』의 문인록에는 265명으로 수록되어 있고, 『노사 선생 연원록』에는 재전제자까지 합쳐 879명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정의림은 1893년에 화순군 춘양면 칠송리 마을에 영귀정(詠歸亭)을 축조하고 9성(聖)의 진영을 봉안하고 후학을 가르쳤다. 유고집으로 1927년에 간행한 『일신재집(日新齋集)』 21권 10책과 1967년에 간행한 『일신재 선생 연원록(日新齋先生淵源錄)』 3권 2책이 있다. 『일신재집(日新齋集)』이 전한다.
☞ 송명회(宋明會) 이력 : 여산人, 1872∼1953, 호(號) 소파(小波), 자(字) 남일(南一) 보성군 율어면 금천리 태생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기가 남보다 뛰어나 5세에 글을 읽었다. 7세에 연정(蓮亭) 이기선(李基善) 문하에 나아가 배웠다.
연정공이 시재(詩才)가 있다고 여기고 관해(觀海)라는 시제(詩題)를 주니 거뜬히 지어 내므로 천재라고 경탄하였다. 1893(癸巳)년에 영재(이건창, 1852~1898)로부터 사사하였다. 그의 문장은 대개 영재공으로부터 나왔다고 보았으나, 사람들이 그를 칭찬하기를 절묘하기가 청어람(靑於藍)이라고 하였다. 1898(戊戌)년에 연재(송병선, 1836~1905)를 배알하였는데 그 재주를 보고, 자기 제자처럼 아꼈다. 1900(庚子)년에 면암(최익현, 1834~1907) 다음해 매천(황 현, 1855~1910)을 찾았는데 매천과는 며칠을 함께 시를 논하며 시문을 지어 서로 주고받았다. 동강(東江) 김영한(金寧漢)은 “호남의 시가(詩家)로서 매천 이후에 소파(小波)가 제일이다.”라고 하였다. 묘지는 율어면(栗於面) 율변촌(栗邊村) 후 임좌지원(壬坐之原)이다. 시문집으로 『소파선생문집(小波先生文集)』이 있다.
<신와고택 전경>
4)신와고택 :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 461번지에 위치한다. 2002. 11. 27 전라남도민속자료 제 39호로 지정, 장흥 위봉환 가옥으로 되었다가 2012. 4. 13 국가 중요민속문화재 제 269호로 지정되면서 명칭도 장흥 신와고택으로 변경되었다.
1800년 대 중엽에 동곡공(휘 봉환, 1930~2004)의 5대 조부인 휘 영형공(1808~1855)이 터를 잡아 조성한 가옥으로 세터(신기) 마을에 있다. 향은 서향이며 건물로는 사당, 안채, 사랑채, 행랑채, 헛간채, 문간채 등이 들어서 있다. 안채는 1950(庚寅)년에 구옥을 헐고 약간 앞쪽에 새로 지은 건물이고, 옛 건물은 현재보다 규모가 작은 ‘一’자형 4칸 초가였다고 하는데, 신기마을 입향 당시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사랑채는 본래 3칸 초가였으나 현재는 5칸 규모의 건물이다. 입향 당시에 지은 3칸 기본구조로 1895(乙未)년에 증축하였다.
안채는 정면 6칸 규모로 건물 왼쪽과 앞면에 퇴를 설치하였다. 내부에는 정지, 큰방, 마루(대청), 작은방이 일렬로 나란히 들어서 있는데, 이중 정지와 대청은 각 2칸 규모이다. 정지와 작은방 뒤쪽에는 각각 정지방과 고방 등을 설치해놓았다. 건물 구조는 막돌로 쌓은 높은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네모진 기둥을 세운 납도리집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에 기와를 올렸다.
사랑채는 1895(乙未)년에 축조되었다. 정면 5칸 규모로 오른쪽 1칸은 앞쪽에 마루, 뒤로는 방을 들였다. 이어진 2칸은 모두 방을 들였고 그 다음으로는 정지칸과 외양간을 두었다. 구조는 안채와 같이 막돌초석 위에 네모진 기둥을 세운 납도리집이다. 사당은 정면 1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 지붕집으로 되어 있다. 가옥의 역사와 내력, 반가(班家)로서의 건물구성, 각 건물의 건축내용 등에서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인정된다. 문화재명칭은 중건자인 신와공(휘 준식 1870~1947)의 호(號)를 따서 장흥 신와고택으로 명명하였다. 훈도공 14대손이자 신와공 현손 재경 종친의 소유다.
<판서공파 종택 안채 전경>
5) 판서공파 종택 :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 492번지에 위치한다. 2002. 11. 27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 38호로 지정되었다. 장흥위씨 판서공파 종갓집으로 방촌리 내동(內洞)마을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고려 정안현·장흥부·회주목·장흥부의 262년간 치소 동헌 표지석>
<400여년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철륭단지>
고려 1130년~1379년(249년)간 정안현(定安懸)·장흥부(長興府)·회주목(懷州牧)·장흥부(長興府)의 치소 동헌(東軒)이 있던 터였으나 판서공(휘 덕화, 1551∼1598)의 장남 병조참판공(휘 정철, 1583∼1657)이 1623년(天啓 3) 당동에서 방촌으로 옮겨오면서 집터로 조성하였으며, 전체적 건축 분위기가 사대부가(士大夫家)의 느낌을 주고 있다. 가옥(家屋)은 서향이며 사당, 안채, 사랑채, 헛간채가 들어서 있다. 안채는 원래 위에 있던 건물을 현 위치인 아래로 내려 1945(乙酉)년에 신축하였다.
<호조판서(正二品) 추증 3칸 사당, 380여년 前 건립>
특히 사당(祠堂)은 장흥위문 내 유일한 판서(判書, 正二品) 추증(追贈)의 3칸으로 380여년 前 병조참판공(휘 정철)이 건립하여 장자(長子)인 상원군수공(휘 동전, 1649 ~1713)에게 전해진 것이 확인되고 2004(갑신)년 4차 중수(重修)를 하였다. 방촌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물이면서 원형대로 보존(保存)되어 있어 역사적인 가치가 크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며 측면 반 칸은 툇간으로 개방되어 있다. 구조는 막돌초석 위에 네모진 기둥을 놓은 3량 구조이며 뒷면과 양 옆면 벽은 흙벽 위에 판자로 마감하였다. 건물 내부에는 길이 3m, 높이 60㎝, 너비 65㎝ 규모의 영여(靈輿 : 장례 때 사용하는 가마 형태의 목 구조물)가 보관되어 있다. 대문 앞에는 회주목(장흥부) 동헌 관아를 짐작케 하는 하마석(下馬石) 여러 기가 있다. 판서공 13대종손 성렬 종친의 소유다.
<1616년 판서공 配 정부인 죽산安氏 分財記>
<1636년 병조참판공의 영흥대도호부사 교지>
<1631년 병조참판공께서 청나라 회답별사 사행시 청나라 태종으로부터 하사 받은 철피리, 옥피리 등 유품>
<병조참판공의 천관산 감시봉 묘소 配 정부인 진원朴氏 합조, 묘갈비>
☞ 병조참판공(22세 휘 정철) : 1583~1657, 호(號) 만회재(晩悔齋), 판서공(諱 德和)과 정부인(貞夫人) 죽산 安氏의 長子로 태어났다. 1603년 무과급제, 1612년 宣傳官, 1614년 사헌부감찰. 함평현감, 1619년 통정대부. 절충장군용양위부사직, 1621년 곤양군수, 1623년 인조반정 참여 정사원종일등공신(靖社原從一等功臣), 1624년 李适(이괄)의 亂 참여 진무원종일등공신(振武原從一等功臣), 1628년 영유수령. 안주진관병마절제도위, 1631년 병조참판 후금 회답별사로 심양 사행, 1632년 절충장군행충무위사과겸오위장, 1633년 가리포첨사, 1636년 영흥대도호부사겸함경남도 방어사, 1638년 숙천도호부사, 1642년 갑산도호부사. 갑산진병마첨사절제사, 1643년 절충장군행만포진병마절제사 1644년 관직에서 물러나 귀향(방촌)후 1657년에 終하였다. 묘소(墓所) 천관산 감시봉(550m 고지)이다. 죽천사(竹川祠)에 배향(配享)되었다.
<1713년 상원군수공의 교지>
☞ 상원군수공(23세 東峑, 1649~1713) : 父는 후금 회답사를 사행한 병조참판공 정철(廷喆)이며, 祖는 임진왜란 때 언양현감을 지내고 호성·선무공신으로 호조판서에 추증된 덕화(德和)이다. 1676년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1688년 12월 정략장군행의흥위우부장(종4품 상), 1689년 2월 소위장군행용양위우부장(정4품 하), 1689년 12월 진위장군행용양위우부장(정4품 상), 1690년 2월 보공장군행용양위우부장(종3품 하)을 거쳤다. 이후 1693년 6월 23일 정3품 하의 통훈대부행거제현령(巨濟縣令)에 임명되었다. 그후 1696년 병조판서에 봉직(奉職)하던 민진장(閔鎭長)의 추천으로 그 휘하에서 근무하다가 1697년 충청감사 민진후(閔鎭厚)를 수행하였다. 1698년 충청도감진어사 민진원(閔鎭遠)를 수행해 섬 지방 주민들을 진휼(賑恤)하였다. 이때의 公의 공로를 숙종(肅宗) 임금에게 알리자 조정에서는 통훈대부행상원군수(祥原郡守)로 제수되어 수령으로 있으면서 주민을 크게 교화시켰다. 1699년 사헌부감찰을 지낸 후 1702년(숙종 28) 4월 16일 통훈대부행진도군수(珍島郡守)로 임명되어 9월 28일까지 제158대 진도군수로 재임하다가 문충공(閔鎭遠)이 전라도관찰사 임무를 맡게 되자 진도군수 직을 포기하고 그를 수행했다. 1710년 4월 28일 통훈대부행남해현령(南海縣令)으로 임명되었다. 다수의 사람 목숨을 구하고 선정을 베풀어 그 功으로 1713년 1월 16일 절충장군(折衝將軍 정3품 上)에 승계했다. 1713년(숙종 39) 4월 절충장군용양위부호군에 제수되어 그해 7월 타계하였다. 배(配)는 숙부인 문화류씨, 숙부인 금성나씨, 숙부인 남양홍씨 이다. 묘소는 고흥군 도화면 천등산 300고지이다. 公의 교지 8매가 현존한다.
<근암고택 전경>
6) 근암고택 :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 504번지에 위치한다. 2010. 8. 27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46호로 지정되어 있다. 장흥 방촌리는 선사시대 유적이 다수 분포해 있고 백제시대 이래 고려시대까지 정안현(定安縣)-장흥부(長興府)-회주목(懷州牧)-장흥부(長興府)로 이어지는 관청(東軒)이 있던 곳(현 판서공파 종택)이다. 고려시대 말기에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인해 치소(治所)를 수령현(遂寧縣, 현 장흥읍) 쪽으로 옮긴 뒤 고읍(古邑)으 로 불리게 되며, 1600초년경에 장흥위씨가 입향(入鄕)하여 집성촌(集成村)을 이룬다. 이러한 역사 전통을 가진 방촌리의 입향(入鄕) 선조이신 청금공(휘 정훈, 1578~1662)이 초기에 정착한 현 근암(휘 계상, 1879~1948) 고택의 터는 역사 공간으로서도 의미가 있다.
안채는 110년 전(前)에 위에 있던 건물을 현 위치인 아래로 내려지은 것으로, 방촌에 소재한 현존 안채 가옥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점에서도 역사적 가치가 있다. 사당은 관리되지 않아 1998년경에 철거되어 아쉬움이 크다. 방촌마을의 독특한 경관 속에 자리 잡은 근암고택은 조선 후기 혹은 근대 초기의 방촌 지역의 주택 유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반가 건물로서의 위상도 있다. 청금공 11대손이자 근암공 손자 성환 종친의 소유다.
<1659년 청금공 의금부도사 교지>
☞ 청금공(22세 휘 정훈) : 1578~1662, 안항공(휘 덕후)과 배(配) 청주金氏 사이에서 장자(長子)로 태어났다. 광해(光海) 1612년(壬子) 진사에 합격했으나 조정의 혼란(昏亂)을 개탄하며 출사(出仕)를 단념했다. 그는 1624년 갑자란(甲子亂) 때 의사(義士)와 군량미(軍糧米)를 모집해 도왔으며, 1627년 정묘란(丁卯亂) 때도 호소사 김문원(號召使, 金文元)의 격문(檄文)에 응해 공(公)께서는 중제(仲弟) 웅천현감공(휘 정열, 1580~1656), 계제(季弟) 반계공(휘 정명, 1589~1640)과 종형(從兄) 정망공(1558~1591), 종형(從兄) 국천공(휘 정헌, 1570~1643) 등과 의병·의곡을 모집하고 전쟁터에 나가 도적들을 물리치고 귀향한바 있다. 호란(胡亂)으로 인조(仁祖)가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오랑캐에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격분했다. 이때 은봉(隱峰) 안방준(安邦俊, 1573~1654)의 의병 모집 격문(檄文)을 접하고 의병을 모아 청주까지 올라가다 5일 만에 왕이 항복(降伏)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향했다. 公은 청금(聽禽)이라 자호(自號)하고 종제(從弟) 병조참판공(휘 정철)과 학문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조정(朝廷)에서는 공(公)에게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제수하나 취임하지 않았다. 묘소(墓所)는 관산읍 농안리 화운동이다. 죽천사(竹川祠)에 배향(配享) 되었다.
6. 본향 밖 장흥위문 사우(祠宇) 역사(歷史)와 편액(扁額)
<경모재 액호>
1)경모재(敬慕齋) : 여수시 율촌면 봉두리에 위치한다. 임진왜란 때 상주영장(尙州營將)을 제수 받은 영장공(휘 대경, 1555~1623)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건립한 제각이다. 公께서는 임진왜란 때 종제(從弟) 수사공(휘 대기)과 더불어 적진, 옥포, 웅치, 상주전에 참전해서 功을 세우고 정유재란 때 상주영장을 제수받았다.
1928(戊辰)년 봉은공(휘 태량, 1861~1945, 영장공 11대종손), 죽산공(휘 재량, 1871~1947), 무은공(휘 정량, 1874~1949), 지천공(휘 계중, 1867~1932), 석근공(1869~1953), 계현공(1886~1965) 등의 주도로 제실과 학습장을 겸한 강당 등 9칸의 재각을 건립하였다. 1945년까지 경산공(휘 찬국, 1883~1949, 영장공 12대종손)이 후손들의 강학소로 이용하였다. 묘각기(墓閣記)는 1928(戊辰)년 규장각(奎章閣) 학사(學士) 청우(聽雨) 민경호(閔京鎬)가 기록(記錄)하다.
후손과 봉두와의 인연(因緣)은 임란 전후에 公께서 “영장으로 재직 중 전사하자 配 숙부인 완산崔氏께서 아들 남은공(휘 효징, 1603~1674)을 데리고 봉두에 들어와 亂을 피하고 아들이 성장하여 김명운(광산人)의 딸과 혼인하면서 이루어졌다”고 1998(戊寅)년에 발행된 율촌면지에 적고 있다. 특히 17대 혈손(血孫)으로 이어져 남다른 자긍심을 갖고 있다. 매년 陰 10. 15일 21세 영장공 이하 27세손까지 제향 한다. 편액 글씨는 경산공(휘 찬국)이 썼다. 영장공파종중 소유다.
<관산재 액호>
2)관산재(冠山齋) : 김천시 남면 운곡리에 위치한다. 임진왜란 때 功을 세운 부장공(휘 대홍, 1564~1593)의 유덕을 기리고 제향을 모시기기 위해 운곡의 명당 420평의 부지에 후손 성량공(1863~1938)의 주도로 1935(乙亥)년에 건립했다. 2002년 6월에는 허술한 외삼문도 개축했다.
公께서는 장흥 평화에서 1564년(甲子, 明宗 9년) 태어나 29세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친형 수사공, 從兄 영장공 등과 함께 참전한다. 公께서 戰亂중에 운곡에 들러 “비룡상천형인 운남산을 마주 본 마을의 지형을 보았다. 마치 구름골짜기를 지나 하늘로 올라가는 용의 형국(形局)같다”며 터를 잡았다고 傳해지고 있다. 公의 예측은 맞았다. 산골짜기라 농경지는 풍부하지 않지만 후손들의 부지런으로 이겨냈다. 후손들은 한때 100여 가구의 집성촌(集成村)을 이뤄 위문 내 단일 종파로는 최대 번손 지역으로 자랑할 만하다.
매년 陰 10. 10일 21세 부장공, 22세 추남공, 23세 사징공, 24세 춘환공, 25세 명방공, 26세 경숙공, 경휘공 등 7位에 대해 제향 한다. 편액에 낙관(落款)을 하지 않아 필자는 알 수 없다. 부장공파 운곡종중 소유다.
<흥문재 액호>
3)흥문재(興文齋) : 청송군 현서면 천천리에 위치한다. 천천리에 터를 잡은 관북 31세 휘 대수公(1712~1803)부터 39세손까지 제사를 모신 곳이다. 관북문중 봉규공파 27세 휘 이환公께서 차자(次子) 휘 인천公을 데리고 함경남도 신흥면 원평에서 경북 의성군 사곡면 노매촌으로 이거(移居) 후 31세 대수公께서 천천리에 입향 정착하여 한때는 50여 가구의 집성촌을 형성했다.
1983(癸亥)년에 후손 죽범공(38세, 휘 치운, 1914~1996)의 주도로 2층 콘크리트 재각을 건립했다. 2층에는 위패를 모시고, 1층에는 강당으로 화합과 놀이 공간 등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흥문재기(興門齋記)는 1983(癸亥)년 성균관(成均館) 곡학 양태열이 기록(記錄)하고, 1998(戊寅)년 영남대학교 철학박사 이원재(李元栽)가 근역(謹譯)하다. 매년 陰 10월 셋째 주 일요일에 31세 대수공 이하 39세손까지 250位에 대해 제향 한다. 편액의 낙관을 분석 못하여 필자는 미상이다. 봉규공파 청송종중 소유다.
<선선사 액호>
4)선산사(仙山祠) : 전남 완도군 청산면 국화리는 21세 부장공(諱 大洪)의 증손(曾孫) 諱 春發公의 아들인 諱 命萬公이 입향조(入鄕祖이)다. 24세 諱 春發公이 입향조 라고도 하나 후손들은 諱 命萬公을 입향조로 모시고 있다. 국화리는 지형(地形)이 험준하여 農地(농지)는 협소하지만 마을 앞에 멸치어장이 형성되어 청산도 19개 자연부락 중에서 소득이 가장 높은 마을이다. 따라서 후손들도 번창하여 한때 80여 가구가 살았으나, 현재는 대부분 도시로 떠나고 20여 가구만이 국화리를 중심으로 세거지를 형성하고 있다.
후손들은 마을 인근에 선대(先代) 묘원(墓園)을 조성하여 지키고 있지만 제각이 없어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마을의 대표 33세 영환, 수환 등이 중심이 되어 서울에서 사업을 성공한 33세 일남 종친의 헌성(獻誠)과 마을 종친들을 규합하여 제각을 마련한 것이다. 현재 25세 命萬公을 주벽(主壁)으로 29세까지 48位를 모시고 매년 陰 10월 15일 이곳에서 제향(祭享)을 봉행(奉行)하고 있다. 마을 앞 언덕위에 자리잡은 선산사(仙山祠)는 2001년 10월 현대식 붉은벽 돌로 지은 사우(祠宇)이다. 액호 편액은 유청(唯靑) 영환이 썼다. 선산사(仙山祠)라고 지은 이유는 청산도의 옛 지명이 선산도이기 때문이다. 대종회(위찬호 회장)에서는 당시 사우 신축을 축하하기 위해 100여명의 종친들이 찾기도 했었다. 부장공파 청산종중 소유다.
<용모재 액호>
<자연장지>
<봉안당>
5)용모재(庸慕齋) : 여수시 율촌면 산수리에 위치한다. 17세 종사랑공(휘 종로)이하 선조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후손 계우(1933~ ), 계작(1942~ ), 중량(1935~ ), 우량(1946~ )등의 주도와 후손들의 단합으로 2008(戊子)년에 재각을 건립했다.
상량문(上樑文)은 정하(계전)께서 근서(謹書)하다. 특히 재각 건립 시 자연장지(自然葬地)와 봉안당(납골 묘)을 함께 하는 공간인 숭조원(崇祖園)을 조성하여 종사랑문중 후손 중 사전(事前)에 고인(故人)이 원하면 누구나 들어갈 수 있게 하여 후손들의 단합과 변화되어 가는 장례문화에 대처하는 선진 모델이라고 찬사를 받고 있다.
매년 11월 첫째 주 토요일 17세 종사랑공부터 28세손까지 148位에 대해 제향 한다. 재각 액호(額號) 편액 글씨는 후손 정하(계전, 1933~ )가 썼다. 종사랑문중 소유다.
☞ 경모재, 관산재, 흥문재, 선산사, 용모재는 본향 밖에 위치한 장흥위문의 중요 사우이다. 후손들의 번손으로 집성촌 형성과 단합을 통해 선조에 대한 제향 공간을 건립한 것에 대해 큰 의미가 있다.
7. 맺음말
우리 후손들은 여태까지 門財인 사우(祠宇)를 보면서 선조님께서 창건(創建)하였다고 생각만 하고 세심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우를 신축(新築), 이축(移築) 등 중수(重修)기록에서도 주도 역할을 한 선조의 휘자(諱字)를 기록하여 남겼으나 편액 글씨를 쓴 사람은 편액에서 호(號)와 낙관(落款)만 남겼을 뿐 기록에서는 일체 언급되지 않았다. 백산재를 비롯한 22곳의 사우와 존재고택 등 문화재 지정 고택(古宅) 6곳을 현장 답사하여 편액 확인과 해당 소유자 및 종중의 관계자, 원로의 실존 언동, 1999(己卯)년 대동보와 2005(乙酉)년 장흥위씨요람 등 장흥위문 내 고증(考證) 기록물, 1989(己巳)년 장흥문화원 발행 장흥원사록, 2009(己丑)년 관산읍지, 1994(甲戌)년 장흥군 발행 전통문화마을 장흥 방촌 등 책자와 인터넷상에서 고택(古宅) 역사, 인물(人物) 이력(履歷) 등 기초자료를 수집하였다.
이중 극암 (이기윤)이 장흥위문 문사에 참여하여 백산재 등 7곳과 기타 장흥‧강진지역 8곳 등 총 15개소 사우 편액 글씨를 써 극암의 진가(眞價)를 확인하였다. 또한 국가보훈처 기록에서 1919(己未)년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보낼 [파리장서]의 문안 초안 작성과 필역(筆役)에 직접 참여하고 전국의 유림을 규합하여 파리장서에 서명 활동을 하는 등 독립운동에 가담한 극암의 애국(愛國) 의지(意志)도 확인하였다. 그리고 역수헌(윤용구)은 국권 피탈 후 내부대신 등 고위 관료 임명(任命)과 친일정부에서 남작을 수여(授與)하여도 이를 거절하고 은거(隱居)와 유랑(流浪)하면서 서(書), 화(畵)를 남겨 인물과 편액 글씨의 가치를 높게 평가할 수 있었다.
장흥위문 사우의 편액 글씨는 극암(이기윤)을 비롯하여 역수헌(윤용구), 동계(이우명), 청사(김채규), 무정(정만조), 송사(기우만), 소석(김노현), 해로당(김성근), 설주(송운회), 벽강(김 호), 송곡(안규동), 추범(선종석) 등 당대 고위 관료 출신의 서예인, 학자, 서예가 등 명인(名人)들의 글씨와 존재공 등 다수의 선조들과 학자, 시객(詩客)들께서 시운(詩韻) 편액 글씨를 남겼다.
고택 편액에서는 존재공의 스승이신 병계(윤봉구)를 비롯하여 석촌(윤용구), 심석(정의림), 소석(김노현), 소파(송명회), 설주(송운회), 송천(김태경), 고당(김규태) 등 당대 학자, 지역유림, 서예가 등 명인(名人)들께서 편액 글씨와 송사(기우만), 심석(정의림), 석담(이종문), 죽헌공(휘 계창) 등이 시운(詩韻) 편액 글씨를 남겨 가문(家門)의 위상(位相)을 높이고 널리 알림 역할을 하였다. 또한 사우(祠宇) 창건(創建)과 중수(重修) 등에서 소유 종‧문중(宗․門中) 내 학문(學文)과 식견(識見)을 겸비(兼備)한 당대 후손들께서 상량문(上樑文), 중건기(重建記), 중수상량문(重修上樑文), 중수기(重修記), 경관(景觀) 등에 대해 편액 글씨로 남겨 후대(後代)에 전(傳)해지고 있어 후손으로서 자긍심을 갖게 된다. 아울러 근래에는 시대변화에 따라 종중(宗中) 내 필체(筆體)가 뛰어난 경산공(휘 찬국), 덕운(황량), 만운공(휘 중환), 정하(계전), 유청(영환) 등 후손이 편액 글씨를 직접 쓴 경우를 볼 수 있었다.
덕운(황량)과 소천(광산人, 김천두)을 통해 존재공(휘 백규, 1727~1798) 타계 후에도 후손들에 대한 강학(講學)이 계속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주요 강학장소인 장천재에서는 잉여옹공(휘 명덕, 1683~1756, 판서공 현손)이 후손들에게 강학을 시작한 후 존재공(휘 백규)과 연암공(휘 영경, 1797~1871, 안항공 7대손, 1869년 장흥향교 齋長 역임)을 거쳐 홍의재공(휘 봉(棒), 1863~ ?, 안항공 9대손)과 잠계(수원人, 백형기 ~ ?)가 맡아 강학하였다. 다산재에서는 연암공(휘 영경)과 소석(광산人, 김노현)이 맡아 강학을 한 후 상은공(휘 숙량, 1887~1953, 판서공 11대손)과 원행공(휘 효량, 1897~1964, 안항공 11대손)을 거쳐 다초공(휘 복량, 1897~1979)이 1970초년까지 강학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인근 평촌리 유천재에서도 소석(김노현)이 강학을 시작하여 계양공(휘 혁기, 1866~1944, 안항공 8대손)을 거쳐 다초공(휘 복량)이 1958년까지 강학하였다. 양춘재는 춘헌공(휘 계반, 1848~1939)과 중와공(휘 홍량, 1881~1961, 청계공 11대손) 父子의 서재(書齋)로 이용되었다.
장흥위문 내 모든 사우는 창건(創建) 후 현재까지 일정한 세월이 흘렀다. 다산재, 경모재처럼 일부 사우에서는 유사시와 훗날 중수(重修)에 대비하여 편액의 복사본이라 할 수 있는 재현품을 활용한 사례도 보았다. 현재 각 사우·고택에 소장되어 있는 시운 편액 글에 대해 모든 사람이 쉽게 이해할 수 있게 국역(國譯)으로 번역하여 문집(文集) 간출(刊出) 등 체계적 관리가 있어야 한다. 또한 시대변화에 따라 대부분의 사우에는 사람이 기거하지 않고 관리인의 부재 등으로 부대 시설물이 제대로 관리되지 않으면서 부식되어 훼손이 진행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목조 건물은 화재, 좀 벌레(蟲)에 취약하여 이에 따른 보수와 관리 대책이 절실히 요구된다. 백산재와 장천재는 이미 가치 평가로 전라남도 지정 문화재로 등록되어 장흥위문의 자랑이요 소중한 재산(財産)이다. 이와 더불어 죽천사와 양춘재는 배향(配享)되신 7顯의 선조들은 고증된 훌륭한 업적이 있고, 중건한지 100년 안팎이 되었다. 또한 경호정은 예양강변에 위치해 풍광(風光)이 수려(秀麗)하여 주변 부춘정(富春亭) 등 여타 정자(亭子)와 버금되는 등 문화재(文化財)로 지정될만한 충분한 요건이 충족된다고 사료된다. 이에 따라 문중차원의 문화재 지정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 문화재 지정 등록을 통해 관리해야 선대의 소중한 유산을 제대로 보존(保存)이 가능하다.
끝으로 금번 장흥위문 내 사우·고택의 기초자료 수집 시 적극 협조해준 금봉(인환, 훈도), 성석(청계), 연당(두환, 운암), 향산(성렬, 판서), 혜강(철량, 판서), 단산(성배, 판서), 인재(신환, 안항), 취산(수환, 안항), 다존(성, 안항), 현동(괴봉), 혜암(환, 직장), 오림(상복, 영장), 율봉(성진, 영장), 원곡(상복, 부장), 정하(계전, 종사랑 흥인), 우량(종사랑 흥인), 승복(사월 덕원부사), 수권(관북 봉규 청송) 등 각 종중 관계 종친과 본향 방촌을 중심으로 기록되지 않고 구전(口傳)으로 내려오는 사실과 모든 사우‧고택의 전반에 대해 자문을 아끼지 않은 덕운(황량), 남전(정우), 원산(정철) 종친, 내용에 대해 교열(校閱)을 한 호산(신복), 편액 글씨 분석(分析)에 열정을 갖고 동참한 야운(이환) 등 모든 종친들께 깊이 감사드린다. -끝-
글.사진 : 씨족문화연구위원 栢江 위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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