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7 00:01
1. 11. 12(陰 10. 1) 본향 회진 대리에 위치한 진사공(휘 곤), 판서공(휘 덕화) 묘전 제향에 참석했다. 이곳의 제향은 평화 하산사 5현대제, 연하동 충렬공 제향, 관산 장천재 평산신씨 제향과 더불어 장흥위문의 4대 제향으로 장천문중에서 주관하고 있다. 금번(乙未)에 관포(계천 안항, 93세)할아버님 등 21명의 종친들께서 참석하였다.
<당곡 진사공 묘전 제향 행사>
<호조 판서공 묘전 제향 행사>
▲ 진사공 제향 제관 분정
초헌관 : 계흠(안항 방촌), 아헌관 : 지환(양곡 용전), 종헌관 : 옥량(안항 서울), 축관 : 성록(판서 서울), 집례 : 공량(용전 판서)
▲ 판서공 제향 제관 분정
초헌관 : 종대(판서 광주), 아헌관 : 경량(청계 당동), 종헌관 : 채환(청계 방촌), 축관 : 모량 (청계 옥동), 집례 : 계춘(판서 초당)
- 산신位 제관 분정 초헌관 : 송량(청계 옥동), 아헌관 : 성배(판서 서울), 종헌관 : 등 (안항 평촌), 축관 : 백(안항 방촌)
제관을 각 분정하고 집례의 진행과 절차에 따라 제향을 드렸다..진사공 제향을 마치고 건너편 대리마을 뒤편에 위치한 판서공 묘소로 이동하여 집례의 진행으로 절차에 따라 제향을 드린 후 음복례 (점심식사)를 갖고 행사를 마쳤다.
※ 참석 종친 : 계천(안항), 성렬(판서), 계후(안항), 계흠(안항), 경량(청계), 공량(판서), 계춘(판서), 두환(운암), 지환(양곡), 송량(청계), 성태(청계), 채환(청계), 종대(판서), 모량(청계), 탁량(안항), 성배(판서), 옥량(안항), 성석(청계), 등(안항), 백(안항), 성록(판서)
※ 판서공(휘 덕화) : 1551∼1598, 진사공(휘 곤, 1515~1582)과 광주李氏 사이에서 사자(四子)로 태어났다. 1585(乙酉)년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선조(宣祖)를 의주(義州)까지 호종(扈從)하였으며, 언양현감(彦陽縣監)에 제수(除授)되어 부임, 혁혁한 전공(戰功)을 세웠다. 1596년 군자훈련원도정(軍資訓練院都正)으로 있을 때에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信) 장군의 체포 소식을 듣고 비분(悲憤)하여 병을 얻어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그 후 1598(戊戌) 公께서 타계하자 조정(朝廷)에서는 선조호종원종훈(宣祖扈從原從勳)과 아들 병조참판공(휘 정철)의 정사진무훈(靖社振武勳)및 청나라 회답별사(回答別使) 수행 등으로 1631(辛未)년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추증(追贈)했다. 죽천사(竹川祠)에 배향(配享)됐다.
<종친들과 만찬>
- 저녁 6시에 대덕 삭금에 위치한 종환 종친이 운영하는 "남촌횟집 " 에서 황량, 계후(장천문계장), 환(도문회장), 두환, 성태, 계춘(장흥종친회장), 근환, 성배, 옥량, 재현, 등, 백, 성록 등 13명 종친이 참여 저녁식사를 함께 하였다..이 자리는 옥량 재경청장년회장께서 마련하여 한자(漢字) 성씨 표기와 도문회와 대종회 통합 등 장흥위문 발전에 대한 사항을 폭 넓게 대화 하였다.
2. 11. 13(陰 10. 2) 아침 09:00경 우중(雨中) 제향에 참여 하려고 선암(옥량) 대부님을 대동하고 다산재로 향했다. 여러 제향에 매년 참여해왔지만 다산재 제향에 꼭 참여해보려고 마음 먹고 있던 중에 선암(옥량)께서 직계 선조 제향에 참여로 함께 동행했다. 다산재 제향은
<다산재 제향 행사>
- 상위(上位) : 23세 음통덕 랑공(휘 동식, 1640~1708), 음통덕랑공 (휘 동헌, 1645~1706), 24세 삼족당공(휘 세보, 1669~1707), 춘담공(휘 세린, 1673~ 1741), 25세 영이재공(휘 문덕, 1704~ 1784)등
- 중위(中位) : 26세 존재공(휘 백규, 1727~1798), 상암공(휘 백호, 1734 ~1810), 동산공(휘 백신, 1736~ 1820), 서계공(휘 백순, 1737~ 1815), 죽서재공 (휘 백헌, 1742~1783) 등
- 하위(下位) : 27세 송오공(휘 도립, 1748~1808), 양천공(휘 도급, 1754 ~1821), 호산공(휘 도운, 1759~1815), 휘 도전공(1759~1861), 수재공(휘 도흡 1760~1815), 죽오공(휘 도한, 1763~ 1830), 휘 도영공(1767~1840) 등 배(配) 포함 38位에 대해 안항공파 웅천(다산)종중에서 주관하여 제향한다.
관포(계천, 93세)할아버님등 17명의 종원 들이 참석하여 상위 초헌관에 계천 할아버님 등 제관을 분정하고 춘재(계흠) 어르신의 집례 진행으로 제례 절차에 의해 상위, 중위, 하위 선조에 대해 제향을 드렸다. 음복례(점심식사) 때 신위(神位)에 대해 상위(上位), 중위(中位), 하위(下位)를 단일위(單一位)로 변경과 축문의 한자(漢字)와 한글의 혼용 또는 한글로 변경 하는 문제, 직계 후손의 제향 참여 등 방안에 대해 대화가 있었다.
※ 참석 종원 : 계천, 계후, 계흠, 계일, 종환, 수환, 해량, 두량, 경량, 탁량, 옥량, 고량, 선환, 재현, 백, 성록, 성훈 등
※ 존재공(휘 백규) : 1727~1798, 영이재공(휘 문덕)과 평해吳氏 사이에서 장자(長子)로 태어났다. 자(字) 자화(子華), 호(號) 존재(存齋)‧계항(桂巷), 천문(天文)·지리·율력(律曆)·복서(卜筮)·산수 등에 통달하고 특히 역(易)에 정통하였다. 정조(正祖)때 공(公)이 68세 되던 해 호남 위유사(慰諭使)로 내려온 서영보(徐榮輔, 달성人, 1759~1816)의 천거로 사용(司勇)에 제수된 후 선공감부봉사(繕工監副奉事)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명(命)이 거듭되어 입궐하여 정조께 만언봉사(萬言封事)를 올리고 옥과현감(玉果縣監)을 제수 받아 1년4개월 재임하였다. 그 후 장원서별제(掌苑署別堤)와 경기전령(慶基殿令) 등에 임명되었으나 노병(老病)으로 취임하지 못하고 72세로 종(終)하였다. 묘소(墓所)는 관산읍 방촌리 다산등이다. 죽천사, 다산사(주벽), 곡성군 옥과 영귀서원(詠歸書院), 합천군 옥계서원(玉溪書院)에 배향(配享)됐다. 문집에 존재집(存齋集), 저서에 지제지(支提誌), 환영지(寰瀛誌), 정현신보(政弦新譜), 예설(禮說), 경서조대(經書條對), 경서차록(經書箚錄), 고금(古琴) 시소전기서설(詩疏傳記序說) 등 총 90여권의 저서(著書)를 남겼다.
판서공 13대손 栢江 성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