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약분투(踊躍奮鬪), 만사일생(萬死一生)의 각오로 영토를 지키자” 독립지사 덕암 위석규
덕암 위석규는 1878년 3월 2일 전라도 장흥도호부 고하면(현 전라남도 장흥군 관산읍) 방촌리에서 위윤조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5살 때 한문을 익히기 시작했는데, 하루에 수백 문자를 어렵지 않게 익힐 정도로 신동의 자질을 보여줬다고 한다.
1889년 송병선 문하에서 수학했는데, 송병선은 그를 특별히 총애하여 많은 학문과 범절을 손수 가르쳤다고 한다. 이후 1883년 금곡리 연산서재에 취학했고 1900년 홍의재 위봉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독립지사 덕암 위석규
1901년 그는 <성리대전(性理大全)>을 독파하고 미진한 부분은 가르침으로 독해했으며 1902년(임인년)에는 다시 <중용(中庸)>을 천 번에 가깝도록 독파하였고 여름 가을 사이에 강진의 생관에서 학업을 강마 수련하기도 하였다. 1904년부터 농사에 종사하여 낮에는 논밭을 갈고 집에서는 늙은 부모님을 봉양했다. 벼슬에 오르지 않아 봉록을 받지 못했기에 생활 형편이 그리 좋지 않았지만 그는 저녁 시간에 반드시 글을 읽고 외웠다고 한다.
1905년 민영환(독립운동가)이 을사조약 체결에 비감을 금치 못한 끝에 자결했다. 이 소식을 접한 위석규는 한양으로 상경하여 민영환의 영정에 조문한 뒤 귀향했다. 이후 1906년경, 그는 독립운동을 벌이기 위해 고향을 떠나면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짐승(倭)이 사람과 영토를 침탈하니 장차 모두 죽겠도다. 슬프다. 오국(吳國)이 도수(盜獸)들의 노략으로 국가가 존망지추(存亡之秋)에 다달아 백성이 진멸(盡滅)케 되었으니 우리들은 팔을 걷어 주먹을 쥐고 용약분투(踊躍奮鬪), 만사일생(萬死一生)의 각오로 영토를 지키자. 사람이 비록 사소한 일이라도 대의를 따르면 사람이요 사욕을 채운다면 금수(禽獸)다. 고금을 막론하고 국난을 당하여 국가사직을 붙잡을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의분강개(義憤慷慨) 일어서면 모두가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 후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킨 최익현(독립운동가)의 부대에 가담했지만 최익현이 순창에서 관군에게 체포되면서 무위에 그치자 연해주로 망명하여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점으로 삼아 만주, 러시아 하바로스크 등지에서 박태문, 강명운, 국사성 등과 함께 항일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13년 6월 1일 러시아 니콜리스크에서 병사했다. 그의 유해는 니콜리스크 한인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위석규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