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1 16:35
<車軸時代 提案序>
위씨는 반도의 남단 장흥이 본관이다. 시조공은 선덕여왕의 청에 따라 당태종이 보낸 8명의 도예지사 가운데 한 분인 諱 鏡의 후예들이다. 638년에 동래했으니 2015년을 기준으로 1377년째에 이른다. 역사가 매우 길지만 씨족의 역사책이라 할 족보발행은 256년에 불과하다. 그 기묘초보는 출간 직후부터 의문이 있다는 지적을 받았다. 족보의 의문점을 지적한 주인공은 관북의 만암공(萬庵公)인데 그가 밝힌 의문점이 「보의설(譜疑說)」이다.
역사와 기록을 보는 관점은 두 시각이 있다. 하나는 공자의 시각이다. 그는 성인들의 저작인경서는 춘추필법이니 개변하지 말라고 했다. 다른 시각은 프리드리히 니체이다. 그는세계의 가치는 우리의 해석 속에 있다면서 부단한 재해석을 촉구하고 있다. 이들의 시각은 우리 족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한쪽은어른들이 만든 것을 훼손하지 말라라는 것이고, 다른 쪽은어른들의 작품이라도 잘못된 것은 고쳐야 한다는 것이다.
개변문제를 놓고 벌어진 다툼의 진의는 어디에 있을까. 좋은 의미에서는 어른들께서 어련히 알아보고서 만들어 놓았겠느냐는 믿음이다. 조상들의 능력을 존경하고 한 없이 신임하는 후손의 도리를 함축한다. 반대로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아무리 어른들이 해놓으셨다 하더라도 착오가 있을 수 있으니 잘못된 것은 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자는 공자의 시각이요, 후자의 시각은 니체의 시각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만고불변의 진리가 있을까. 이 또한 관점에 따라 다르다. 하나는 보통사람의 작품은 완성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그래서성인을 지향하고 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족보 또한 완전무결 할 수 없는 것은 자명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1759년 기묘보, 1842년 임인보, 1883년 계미보, 1916년 병자보, 1957년 정유보, 1972년 임자보, 1999년 기묘대동보 등 7차례나 발행했다. 이후 언제쯤 발행할지 예단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 동안 일곱 번의 수보는 적지 않다. 그런데 기묘초보 발행 후부터 문제가 된 보의론은 방치했다. 왜 그랬는가.어른들께서 만들어 놓은 것을 감히 손댈 수 없다라는 이유다. 맞을 수 있다. 그걸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만암공 이후 본격적으로 보의론에 대해 연구한 후손이 있었던가는 의문이다.述而不作이란 변명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 족보서문도 차례대로 싣지 못한 방임은 결코 온전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없다.
조상들을 존경하는 것은 잘못도 군말 말고 그대로 따르라는 것은 아니다. 엄연한 진실을 알고도서도 어른들이 해놓았으니 믿으라는 것은 넌센스다. 「술이부작」을 주장하는 실상은 “공부하지 않았다”는 책임회피의 수단으로 악용한 점을 피할 수 없다. 역대 족보에서 보의론이 시정되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런 현상의 단면이다. 족보에 손록(孫錄)만 추가해서 문중의 임무를 완수했다는 식이다. 가장 쉬운 방법으로 역할을 마친 것이다.
그 결과를 보자. 원감국사가 원나라 황제에게 보낸 청전표(請田表)와 고려 충렬왕에게 보낸 표문(表文)과 간암공(艮庵公)이 1734년 영조에게 올린 6조7실의 상소문도 지장록에 싣지 않았다. 특히 수우옹(守愚翁)이 지은<금당별곡(金塘別曲)>은 엉뚱하게 삼족당(三足堂)의 작품으로 실어 있다. 참으로 어쳐구니 없는 결과가 아니던가. 그 외에도 시정하고 정리해야 할 대목들이 수두룩하다. 가능하다면 하루라도 빨리 시정해야 할 사항들이다.
결국 장흥 위씨는 그 동안 「뿌리 공부」를 소홀히 했거나 안한 것이다. 그 단적인 예가 씨족 가운데 선조들의 작품이나 저술 특히 존재공을 실학자로 이해하면서도 선생의 실학 내용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종인이 과연 몇 명이나 되는가. 한마디로 너무 무관심했다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선생의 탄생 300주년이 가까워오지만 아직 후손 가운데 선생의 학문을 체계적으로 연구한 종인이 나왔는가. 부끄럽지만 현실임을 어찌 부인할 수 있는가.
흔히 우리들은 위대한 조상이 없다라고 탄식한다. 사실 고려와 조선시대 명문들은 높은 벼슬아치 조상들을 두고 있다. 그들에 비해 위씨 출신 고관대작은 고려시대 때 충렬공 정도에 그친다. 그러나 조상의 은덕을 벼슬의 높낮이로 평가하는 것이 왕도는 결코 아니다. 우리 조상들은 벼슬이 아니라 저슬(著述)로 벼슬 이상의 값진 유산을 남겼다. 단지 그 위대한 유산을 후손들이 갈고 닦지 못해 진흙속의 진주(眞珠)를 썩히고 있을 뿐인 것이다.
이제 이 시대를 함께 사는 종인들에게 말하고자 한다. 우리가 명벌이 되기 위해서 조상들의 주옥과 같은 저술과 작품들은 빛나게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러기 위해 그 길잡이로 몇몇 조상께서 남긴 저술들은 여기서 소개하고자 한다. 전국의 여러 종인들께서는 이들 작품들을 읽어서 작품이 지낸 의미를 연구하고 발전시켜 조상과 문중을 빛내게 해야 할 소명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위문의車軸시대』를 구가하자는 것이다.
2015년 6월 13일
<圓山 謹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