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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관산파 (冠山派)

(1) 곡성현감파 (谷城縣監公派)

계보 : 자량(自良)─종복(宗復)─유형(由亨)─진보(晉寶)─인손(仁遜)

대성(大成)─후징(後徵)─인지(麟趾)─세두(世斗)─명만(命萬)─상환(相煥)
                                                                손(遜)─용(龍)─인립(仁立)
                                                                                           의립(義立)
쪾세거지 = ① 담양군 창평면 장화리
       
곡성현감공파는 관산파의 종가이다. 16세 자량·17세 종복·18세 유형·19세 진보·20세 인손(仁遜)의 외아들이 곧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곡성현감을 지낸 21세 대성(大成)이다. 공은 인조가 청 태종에게 항복한 후 인질로 심양에 가야할 세자의 수행원 선발을 놓고 무관일색으로 뽑자 무관들이 반발했다. 그 때 공은 잘 못된 일이기는 하나 문 무관이 싸워야 되느냐며 스스로 자원했다. 조정에서는 공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자 곡성현감을 제수했다.


현감파는 21세·22세까지 장흥 용산에 살다 23세 인지(麟趾)대에 멀리 경기도 양주군 철계교로 이거해 정착하나 24세(世斗)·25세(命萬)은 묘가 실전 됐다. 이는 그만큼 불안정한 생활을 했다는 결과도 된다. 이후 26세 4형제 중 장남 상환(相煥)계열과 차남 상필(相弼)계열은 곡성의 건지봉, 담양 남면 율전·창평 장화·전북 순창를 중심으로 비교적 안정적으로 세거지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쪾세거지 : ② 경기도 영월군 서면 신천리(新川)

26세 4남 의립(義立)계열은 29세(天輝·道祥)부터 강원도 영월군 남면과 서면에 정착한다. 이들은 27세부터 4대의 묘를 실전 할만큼 주거가 불안정했다. 그러나 28세 태유(泰裕)의 장남 천휘(天輝)와 차남 도상(道祥)이 강원도 영월군 남면 양연(楊淵)에 기거하고 이어 도상의 아들 구복(龜福)이 서면 신천에 보금자리를 잡으면서 일취월장 발전을 거듭했다.


그래서 한 때 60가구에 이를 만큼 일촌을 이루었다. 그러나 1936년(丙子)에 마을이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의 수해를 당하면서 뿔뿔이 헤어지기 시작해 지금은 고작 3가구만 남아있다. 더구나 흩어진 일가들이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고, 매년 음력 10월 1일 치러지는 남면 양연리 연장동 시제에도 참석한 후손이 없다. 일부의 친척은 서울 서대문구와 강원도 평창 그리고 충북 제천에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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