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世居地 由來

1 시조공의 동래와 구거지

장흥 위씨는 중국에서 신라로 들어와서 이 땅에 정착한 성씨의 하나이다. 지금으로 보면 귀화(歸化)한 성씨이다. 한국의 성씨는 대개가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라고 한다. 그 이유는 중국이 대국이자 황제나라고 우리는 그 변방에 있는 속국처럼 생각했기에 때문에 자신의 뿌리를 중국에 두고 싶어 비롯된 현상일 수 있다.
시조께서 건너오신 때가 서기 638년이라고 하니 올해로 정확히 1367년이다. 100년 한 세기를 13번이나 넘기고 14번째를 바라보고 있으니 실로 장구한 세월이 흘러간 셈이다. 족보와 어른들은 선조들의 벼슬 등에 대해서는 잘 기록하고 있으며 비교적 소상히 가르쳐 주기에 후손들도 그런대로 알고 있다.
그러나 시조께서 입국해서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해서는 신통한 대답이 없다. 고작 입국(入國)했던 장소 정도가 전부이다. 물론 선조들께서도 뾰쪽한 수가 없다. 시조께서 오셔서 살았던 기록이 없으니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는 우리 위씨만이 아니고 성씨 일반의 공통된 현상이다. 그러므로 비록 기록이나 구전이 없다 하더라도 후손들이 알아봐야 할 과제에 속한다.

1) 시조의 입국기록


(1) 기묘대동보의 기록
1999년 발행한 대동보(己卯) 1권 1페이지 시조 휘 경(鏡)의 면주(面註)에는 “대당관서홍농인(大唐關西弘農人)으로 신라선덕여왕(新羅善德女王) 7년 무술(戊戌) 638년 즉 당정관(唐貞觀) 12년 출래본국(出來本國)하여 관(官)이 아찬(阿祚)에 이르고 여조충선왕(麗朝忠宣王) 때 회주군(懷州君)에  봉하니 회주는 지금의 장흥이다. 신라 선덕여왕이 도예지사(道藝之士)를 청함에 당태종(唐太宗)이 방(房)·위(魏)·홍(洪)·목(睦)·기(奇)·은(殷)·길(吉)·봉(奉) 8학사(學士)를 파견한다.


8학사가 출국시에 각기음일련구(各己吟一聯句)하니 수록우유시편하다. 순종(純宗) 1925년에 연하동(烟霞洞) 충렬공(忠烈公) 현실(玄室)에 설단하여 시조공 휘 경과 판사공 휘 충(撑) 두 분을 봉사하였으나 그 후 1975년(乙卯)에 장흥읍 평화리 다산등에 하산사우를 신축하여 시조공, 중시조공, 판사공 등 3현조를 모셨다. 그러다 1992년부터 시조공 휘 경을 주벽으로 모시고 4현조 즉 대각관 시중공 휘 창주(菖珠), 충렬공 휘 계정(繼廷), 판사공 휘 충(撑), 통선랑공 휘 덕룡(悳龍)을 배향하여 매년 5월 첫 일요일에 봉향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2) 면주(面註)에 들어있는 중요내용
① 시조공의 고향 : 대당관서 홍능인
② 동래연도 : 신라 선덕여왕 7년 638년(戊戌) 당정관 12년
③ 봉호(封號) : 회주군(懷州君)
④ 봉군연도 : 고려 충선왕(忠宣王)
⑤ 8학사 시 : 유시편 게재
⑥ 현실설단 : 1925년 연하동
⑦ 사우신축 : 1975년 평화 등의 내용이다.

2) 시조공의 동래(입국) 장소


(1) 당성사적보존회의 자료
8학사의 입국장소에 대해서는 특별한 이론이 없다. 남양 홍씨가 주도하고 있는 ‘당성사적보존회’는 고구려 27대 영류왕이 사신을 보내 당 태종에게 도예문학의 선비를 보내달라고 청함에 따라 홍(洪)·은(殷)·목(睦)·길(吉)·위(魏)·방(房)·기(奇)·봉(奉) 등 8학사를 파견했는데 이들이 처음 머문 곳이 바로 당성(唐城)이라는 것이다. 홍씨들은 이 때를 영류왕 22년 서기 639년으로 보고 있다.


당성은 지금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西新面) 상안리(尙安里) 해발 165m 구봉산(九峰山) 31번지. 이 성은 신라 문무왕(文武王)이 당나라에서 동래한 8학사를 위해 구봉산 기슭에 높이 10척에 연장 2465척의 성을 축조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성은 세월의 풍상을 견디지 못해 지금은 1m높이에 1,2㎞ 정도만 남았으나 최근에 당국이 복원했다.


정부는 이곳이 문화발상지라는 사실(史實)이 밝혀짐에 따라 1971년 4월 15일 사적 217호로 지정한데 이어 홍씨들은 이듬해인 1972년 2월 29일 문화재청으로부터 사단법인 ‘당성사적보존회’를 인가 받아 처음에는 8학사를 기리기 위해 8면비(八面碑)를 세우기로 했다. 그러나 위씨 이외 타 성씨의 호응이 없자 홍씨 위주의‘사적비’를 1988년 10월에 세웠다.


한편 홍씨들은 고구려가 망한 후 신라는 자신들의 시조 홍학사를 빈예(賓禮)로 우대했으며, 문무왕은 상륙지에 성을 쌓아 당성(唐城)이라 했고, 홍학사를 당성백(唐城伯)으로 봉하고 도호(道號)도 당동(唐東)이라 명명해서 일컬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다 최근에는 시조의 동래시기에 사실성이 희박하자 신라 문무왕 때로 수정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2) 삼국사기 지리지 (地理志)
현재 화성군을 고구려에서는 당성군(唐城郡)이라 했으며, 신라 35대 경덕왕은 당은성(唐恩郡)으로 개칭했다가 다시 당성군으로 불렀다. 그리고 지금 남양(南陽)을 당항성(唐項城) 또는 당성진(唐城鎭)이라고 부르고 있다.


 (3) 신증동국여지승람 (新增東國與地勝覽)
“세전(世傳)되기를 당(唐)에서 재공(才工) 8명이 고려에 와서 사람을 가르쳤는데 홍(洪)이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래서 이곳을 당성이라 했고, 고당성(古唐城)이 있다”라고 한 것으로 8학사가 당성을 통해서 입국했다는 것을 밝혀 준 것이다.  
 
3) 동래 이후 세거지 (世居地)


 (1) 은수동과 육교동
우리 보첩(譜牒)에는 은수동(銀樹洞)이란 기록이 있다. 8학사가 상륙한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상안리의 해안은 마치 화개(華蓋)다. 외협내활(外脅內闊)하여 물이 들어오는 포구는 한 개의 항(港)이지만 지항(枝港)이 많아서 밀물이나 썰물이 반쯤 찰 때는 한 나무에 수많은 가지가 있는 모습이라서 붙여진 이름이다.


은수동 아래 마을이 당관포(唐串浦)로 이곳을‘8학사박주지처(八學士泊舟之處)라 기록하고 있다. 구봉산성의 학대(學臺)는 8학사의 교민예락지소(敎民禮樂之所)요 은수동에는 은씨(殷氏)·홍씨(洪氏)가 살고, 그 아래 상림원(上林園)에는 방씨(房氏)·기씨(奇氏)가 살고, 육교동(六敎洞)에는 위씨(魏氏)·목씨(睦氏)가 살고, 북일동(北日洞)에는 길씨(吉氏)·봉씨(奉氏)가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보첩의 기록으로 보면 우리 시조께서 중국에서 배를 타고 고당성에 상륙하시어 육교동에서 살으셨다고 전하고 있다. 더구나 신라 또는 고구려 백성을 가르친 교민예락소가 이곳에 있다는 기록으로 보면 상당히 오랜 기간을 여기에서 머무르며, 무지몽매한 백성들을 가르친 교육시설이라고 볼 수 있다. 교육시설을 마련할 정도였다면 임시로 머물었을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2) 시조공의 경주 (慶州) 생활 ?
시조공이 당성으로 동래(東來)한 이후의 기록은 빈약하다. 지금까지 후세들에게 알려진 사실은 상륙지 주변에 있었던 육교동에서 목씨(睦氏)와 살았다는 사실과 신라 조정으로부터 아찬(阿祚) 벼슬을 받았다는 사실이 전부이다. 이 두 가지 사실로 미루어보면 두 가지 의문이 생긴다. 하나는 상륙지인 고당성 에서 평생을 지냈는가 아니면 경주(慶州)에서도 사셨는가를 확인할 수 없다.


이치로 따지면 시조공은 입국 즉시 경주로 가셨어야 마땅하다. 고당성은 교통의 요지라도 수도(首都) 경주에서 보면 변두리에 불과하다. 그런데 선진국에서 모셔온 도예지사를 그곳에 놔뒀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당시로서는 신라와 고구려는 후진국이고 당 나라는 대국이자 선진국이다. 그래서 선진국의 학자들을 초빙해서 무지한 백성을 계도(啓導)하자는 것이 신라 조정의 의도이다. 그러므로 시조공의 경주정착 생활은 필연적인 수순이다. 비록 고당성에 교육시설을 갖췄다 하더라도 그 기간은 길지 않았을 것이다. 8학사는 수도로 이동하여 일정 기간 백성을 가르칠 요원을 대상으로 지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관련된 기록이나 흔적이 하나도 남지 않아 그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조상들은 그 중시조까지 기록이 없는 298년을 일컬어 실계(失系)기간이라고 한다.


사실 시조공이 입국한 시기에는 성씨(姓氏)나 족보(族譜)가 없던 때다. 선진국인 중국에서는 왕가와 관료에 이어 일부 사족들이 성(姓)을 가지고 있었으나 일반화되지 않았다. 하물며 후진국인 신라와 고구려는 성씨란 생각지도 않았던 시절이다. 시대적 환경이 그럴 때에 남의 나라에 왔으니 무슨 기록이 남아있겠는가. 기록이 남아있지 않는 것이 어찌 보면 정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시조께서 경주에서 생활하셨다면 결혼하셨을 것이다. 또한 결혼을 하셨기에 우리 위씨가 지금까지 맥을 이어온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 경주에는 어떤 형태로든 후손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신라의 수도 경주에는 우리 위씨가 세거를 이루며 살았다는 흔적이 없으니 과연 시조공이 경주에서 살았는지 조차 의문이 나지 않을 수없다.  

4) 장흥 위씨의 장원봉 정착


(1) 중시조의 장원봉 입향 시기
시조공이 신라 조정의 도예지사로 동래한 후 장흥 위씨는 지금 장흥군 장흥읍 동동리 법원자리 일대에 세거를 이루며 산다. 그 시기는 보첩의 실계기간 298년을 빼면 서기 936년이다. 이 때 장흥은 백제의 오차현(烏次縣)을 거쳐 통일신라 오아현(烏兒縣)으로 부를 때다. 그러니까 고려로는 태조(太祖) 19년으로 후백제 신검군(神劍軍)을 괴멸시켜 멸망시킨 해에 해당된다.


장흥과 위씨와의 인연은 시조공의 봉군(封君)으로 비롯된다. 시조공은 신라왕의 요청에 의해 당 나라에서 파견된 도예지사로 신라에 와서 임무를 수행하다 귀국하지 않고 귀화한다. 공은 그 후 회주군(懷州君)이라는 봉호를 받는다. 회주는 지금의 장흥(長興)이라서 위씨의 본관(本貫)이 된 것이다. 만일 시조공께서 봉군을 받지 않았다면 우리의 본관은 달라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봉군의 시기와 본관과의 관계에는 이론이 있다. 신라는 봉군제도가 없다. 그러기에 시조공의 봉군은 신라에서 받은 게 아니고 장흥을 장흥부(長興府)에서 회조목(懷州牧)으로 승격시킨 고려 원종(元宗) 6년인 1265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때 고려조정에서 “우리 시조공에게 봉호를 추봉(追封)했다고 하지 않으면 봉군사실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계사(桂沙)의 주장이다.


그리고 봉군 이전의 본관도 의문점이다. 시조공이 신라에 동래한 것은 638년 선덕여왕 7년(戊戌)이라고 한다. 이 때부터 고려 조정으로부터 봉군을 추봉 받은 기간은 627년이 지난 후다. 그렇다면 그 기간동안은 장흥에 세거를 이루며 살았어도 장흥을 본관으로 쓰지 않았다는 얘기가 성립한다. 왜냐하면 우리 위씨는 시조공의 봉군에 따라 장흥의 고호(古號)인 회주를 본관으로 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러나 우리 위씨는 언제부터 장원봉 밑에서 살기 시작했을까. 이 또한 기록이 없으니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통일신라 말기(서기 900년 전후)부터 살았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중시조공(中始祖公)은 일단 이곳에서 태어나 고려 초기에 대각(大覺)하신 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보면 중시조공 이전부터 장원봉 밑에 보금자리를 잡았을 것이다. 장원봉이라는 전설이 생기기 전까지 이곳에서 태어난 대표적인 인물은 충렬공(忠烈公)이다. 중시조의 4세손인 그의 휘는 계정(繼廷)이며, 고려 문종(文宗) 때 등제하여 선종(宣宗), 숙종(肅宗), 예종(睿宗) 등 4조(朝)의 임금을 섬겼으며 관이 수태보문하시중태사(守太保門下侍中太師)에 이르렀다. 위씨 역사상 가장 높은 벼슬과 청백리로 시호는 충렬이며 왕의 묘정(廟庭)에 배향된 유일한 인물이다.  


 (2) 장원봉 밑에 거주한 증거
장흥 위씨는 어쨌거나 장원봉 밑에 보금자리를 잡고 살았다. 그 확실한 증거가 원개(元凱)·문개(文凱)·신개(信凱) 3형제의 장원과 급제로 인한 장원봉과 거말봉의 전설이다. 3형제의 아버지 6세 휘 소(紹)와 어머니 송씨(원방대부인) 사이에서 1226년· 1228년·1230년에 각각 태어났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머리가 매우 명석해서 과거를 목표로 부지런히 공부했다.


3형제는 과거에 차례로 응시한다. 맏이인 원개는 1242년(壬寅)에 약관 17세로 사원시에 합격하고, 2년 뒤인 1244년(甲辰)에 춘위예부시(春匪禮部試)에 장원급제한다. 둘째인 문개는 형이 합격한 이듬해인 1245년(乙巳)에 역시 장원급제하며, 막내도 뒤에 장원은 못하지만 급제하게 된다. 한 집에서 3형제가 어려운 과거에 잇따라 장원하니 고을이 떠들썩할 것은 당연하다.


주민들은 이 때부터 마을 뒷산의 두 봉우리에 이름은 붙였다. 한 명의 장원도 어려운데 세 명이 급제한 것은 뒷산의 영기에서 비롯된 결과라며 봉우리의 이름을 지은 것이다. 큰 봉우리는 장원봉(壯元峯)이라 하고 작은 봉우리는 거말봉(居末峯)이라 불렀다. 또한 마을도 승방동(勝榜洞)이라고 불렀다. 지금으로부터 750여년전에 마을 사람들이 위씨 형제의 장원급제를 기리며 부른 산봉우리와 마을의 이름을 고쳐 부른  것이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다. 이 전설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구전되고 있다면 조상들의 탯 자리가 분명하다. 성씨마다 더러 스스로 꾸민 전설과 얼토당토않은 이적(異蹟)이 있으나 우리 위씨만큼 확실하고 객관적인 전설은 별로 없다. 이런 전설로 미루어 보면 위씨들의 장원봉 밑 세거지는 한 때 고을을 움직일만한 영향력을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아마 고려시대 전반에 힘을 쓴 집안이었을 것이다.


 (3) 조선건국과 장원봉 퇴거
세상은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달도 차면 기울고, 밀물이 있으면 썰물이 있고, 좋을 때가 있으면 나쁠 때가 있는 법이다. 장원봉 밑에서 행세를 했던 위씨들도 이성계(李成桂) 일당이 고려정권을 뒤엎은 역성혁명을 일으키면서 가혹한 시련기를 맞게 된다. 바로 14세 합문판사(閤門判事) 휘 충(撑)께서 이성계 세력의 혁명기도(革命企圖)를 막으려다 실패했기 때문이다.


역성혁명의 성공으로 조선이 건국되자 고려정권의 충신들은 된서리를 맞게 됐다. 판사공과 친위혁명을 꾀하다 적발된 고관대작들은 극형에 처해졌다. 판사공은 곤장백대를 맞고 귀향조치를 당했다.(진도유배를 주장하는 견해도 있음) 고향에 왔지만 친위혁명의 주동자로 낙인찍힌 인물이라 미운 털이 박혀있었다. 이성계세력으로 바꿔진 지방관료들의 시선은 차가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장원봉 밑에서 생활하는데 별 지장은 없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악재가 나타났다. 1350년(庚寅)부터 왜인들이 완도 등 서남해안에 자주침입해서 농어민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심한 경우는 생명을 앗아가기도 했다. 고려조정에서는 이런 사태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그러자 왜인들은 대낮에도 육지까지 올라와 온갖 만행을 자행했다.


조정은 왜인들의 약탈행위를 피해 1379년(己未 폐왕 禑 5년) 방촌에 있던 장흥부의 치소를 지금 나주군 봉황면 철천리 철야현(鐵冶縣)으로 옮겼다. 그런 와중에 조선이 건국되자 새로 부임한 황보덕(皇甫德)부사를 맞아 피난 갔던 장흥사람들이 “철야와 같은 작은 고을에 의탁하는 것은 수치”라며 ‘치소이전’을 탄원했다. 황보부사는 주민들의 탄원을 받아들여 장흥부의 치소를 방촌이 아닌 지금 장흥읍 중령산 일대로 정한다. 이로써 방촌  치소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새 치소 건설사업은 바로 착수됐다. 황보부사는 안렴사(安廉使) 이원(李源)과 함께 이웃 고을에 통첩을 내려 장정 350명을 동원, 수령현(遂寧縣)의 죽령산 즉 장흥읍 연곡(淵谷)에 성을 쌓아 장흥부의 치소로 삼았다. 그 후 1413년(癸巳 ·태종 13년) 장흥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면서 성이 비좁아 이듬해인 1414년(甲午) 장원봉 밑 수령현의 옛 치소 자리로 다시 옮겨갔다.


장흥도호부의 치소가 수령현으로 들어오면서 위씨들은 본격적인 수난시대로 접어든다. 그렇지 않아도 고려조정을 위한 음모사건으로 얄미운 판사공과 그 가솔들에 대한 감시와 질시는 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매사를 간섭하지 않은 것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고도 부족해서 음으로 양으로 불이익을 주는 등 정권차원의 압박이 가해졌을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아마 더 이상 살 수 없게 만들었을 것이다. 새 나라인 조선의 지방관리들은 판사공 일가들을 들볶아 쫓아내야겠다는 목표를 세웠을 가능성도 있다. 아니면 판사공 가족들이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스스로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분위기를 만들었을 수 있다. 전후사정을 보면 강제퇴거를 당한 것이다. 이를 뒷받침할만한 ‘강제소개’라는 기록도 있다. 결국 위씨들은 통일신라 때부터 살아온 정든 고향을 떠나지 않으면 안 될 기막힌 처지에 놓였을 것이다.


 (4) 흔적 없는 장원봉의 모습
우리 조상들이 살았던 그 자리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을까. 사연을 아는 후손이면 궁금해 할 사안이다. 통선랑공이 마지막으로 살다 떠난 그 집터에는 오랫동안 현, 부사, 도호부, 군청 청사로 사용했다. 그러다 군청이 신시가지로 옮기고 현재는 광주지방법원 장흥지원과 법원이 들어서 있다.  
그러나 조상들이 살았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흔히 자신들의 입향조(入鄕祖)가 살았던 곳에는 유장비(遺庄碑)를 세워 기리면서도 정작 유서 깊은 조상들의 세거지에는 아무 표시가 없다. 선조의 흔적은 오직 장원봉과 승방동(勝榜洞)이라는 이름이 오늘까지 불리고 있다는 사실 뿐이다.  

5) 평화촌(平化村) 시대의 개막


(1) 평화촌을 이주처로 선택한 이유
판사공의 후예들은 장원봉에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떠나야 했다. 그 때 유족의 기둥은 아들 통선랑공(通善郞公) 덕룡(悳龍)이었을 것이다. 판사공은 아마 타계했을 가능성이 크다. 고문을 많이 받은 데다 지방관원들의 핍박이 오죽했겠는가. 그러니 일국의 시중까지 배출한 후손으로서 전통을 이어 가야할 통선랑공으로서는 이주처를 놓고 많은 고민 끝에 평화촌을 선택했을 것이다.


평화는 장원봉의 남쪽에 있다. 직선거리로는 채 10리가 되지 않을 위치다. 원래 평화촌은 고려시대(918∼1392) 억불산(億佛山) 봉수대를 관리하던 병정들이 거주하는 정화소(丁火所)의 소재지다. 그런데 고려 말 왜구토벌에 공을 세운 신경원(申敬源)이 조정으로부터 하사(下賜)받은 사전(賜田)이 있었다. 그의 손자 신원수(申元壽)가 정착하면서 평산인(平山人)의 화속지(化屬地)라 하여 마을 이름을 평화촌(平化村)이라 했다고 전해지고 있는 곳이다.


그러면 왜 이곳을 선택했을까.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신(申)씨들과 인척관계를 상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기록은 아무 것도 없다. 그 다음으로 고려할 수 있는 이유는 원거주지인 장원봉과 지근거리에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여기 정도면 조상들의 구거(舊居)를 건너다보면서 와신상담(臥薪嘗膽)을 할 수 있다고 생각에서 선택한 보금자리라고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이유는 경작지다. 삶의 수단이 농지에 있었던 당시로써는 소유한 경지를 한꺼번에 팔고 외딴 곳으로 가기란 어려웠다. 그러므로 경작지가 주로 평화촌쪽에 있어서 큰 무리 없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길이 곧 평화촌으로 옮기는 원인이 될 수 있었다. 다른 여러 이유 가운데 삶의 수단인 농경지가 보금자리 선택의 중요한 변수였을 것이다.


 (2) 평화촌으로 이어진 관의 핍박
통선랑공(通善郞公)은 우여곡절 끝에 장원봉에서 평화촌 다산등(茶山嶝)으로 거처를 옮겼을 것이다. 그 시기는 아무래도 장흥 도호부가 수령현 치소로 이전된 1414년(태종 14년 甲午) 전후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부터 장흥 위씨는 제2의 보금자리인 평화촌 시대를 열어갔을 것이다. 비록 도호부의 치소 소재지를 피해 왔지만 지방관료들의 감시와 핍박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 단적인 사례가 후손들이 출사(出仕)를 단념한 점이다. 통선랑공은 슬하에 자온(自溫)·자량(自良)·자공(自恭)·자검(自儉) 4형제를 둔다. 아마 아들은 장원봉 집에서 출생해 상당히 성장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리고 자온(自溫)은 종형(宗亨)·석중(碩重), 자량(自良)은 종복(宗復)·종로(宗魯) 두 아들에 종복은 유형(由亨)·유정(由貞), 종로는 용(庸)등 손자를, 자공(自恭)은 아들 종립(宗立)이 서(瑞)와 돈(頓) 등 손자를 두지만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물론 과거에 응시하지 않는 이유는 조정에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응시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지 않아서 스스로 포기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많은 후손들이 한사코 출사를 단념한 것은 당시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치 않았을 것이다. 이성계는 당초 친위혁명 음모자 후손에 대해 3대에 걸쳐 금고령을 내렸지만 얼마가지 않아 풀어줬으나 위씨들은 출사를 않은 집안의 전통을 고집한다.


판사공의 현손인 습독공 휘 유형은 조선이 건국한지 한 세기에 가깝거나 넘을 때의 인물이나 관을 의식하며 살았다. 그럼에도 그는 다산등에 산정(山亭)을 짓고 주변에 동백(冬栢)과 대를 심어 정자를 가리며 살았다. 건너편에 있는 치소에서 보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묘소 좌향(坐向)은 유향(酉向)으로 강진 화방산(華坊山)이 정봉이나 제대로 분간하기 어렵다. 묘소의 방향도 식별하기 어렵게 만든 것은 지방관료들의 핍박이 심해서 자기방어를 위한 방편들로 보인다.


습독공은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1454∼1492)과 영천자(靈川子) 신잠(申潛·1491∼1554)과 같은 인물들과 산정재에서 수작하며 지냈다. 그들과 각별한 사이였다면 학문이나 재력도 대단했을 것이다. 산에 재각을 짓고 당대의 선비들과 수작을 한 것은 보통사람들은 불가능하다. 더구나 관료들이 고깝게 여기는 처지에 반정부적 성향의 인물들과 가깝게 지냈으니 말이다. 그러나 지방관청의 곱지 않은 시선을 외면하고 그들과 교류한 것은 역으로 보면 힘이 있다는 얘기도 된다.


아쉬운 것은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것이다. 최소한 생졸년도 알 수 없으니 얼마나 딱한 노릇인가. 남효온과 신잠의 나이 차가 만 37세이니 습독공은 어느 정도의 나이였을까. 두 사람과 격의 없이 수작했다면 다 같이 어울릴 수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면 신잠보다는 많고 남효온 보다는 적었다고 추정된다. 그러면 추강과는 1480년대 전후, 영천자하고는 1521년대에 종유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추강이 장흥에 와서 습독공과 종유했던 시기는 그의 나이 30세쯤인 1480년 앞뒤의 시기이다. 그 때 습독공은 25세 전후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영천자는 1521년에 장흥에 귀양 왔으니 그의 나이 30세 때다. 그러므로 습독공은 환갑을 넘긴 노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30년 이상의 나이차가 있었을 것이다.


그 근거는 아들 휘 진현(晉賢)의 생년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셋째 아들인 강릉참봉공은 1482년생이다. 그 때는 조혼이라서 10대 후반에 장가를 들어 첫 아들인 진보(晉寶) 둘째 진수(晉秀) 등 아들의 나이를 감안하면 그런 추정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습독공의 졸년은 1530년대로 추정할 수 있다.


 (3) 평화촌의 유물과 유적
평화촌 위씨의 대표적인 상징물은 그래도 습독공의 산정재(山亭齋)이다. 그 산정이 지금까지 남아 있으면 얼마나 좋으련만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사라지고 없으니 아쉽기만 하다. 그래도 후손들은 선조들의 유적을 이으려고 애쓴 흔적이 있다. 남아있는 유적은 역시 산정재의 후신(後身)이라 할 수 있는 재각(齋閣)이다. 현재 하산사(霞山祠)와 백산재(栢山齋)가 그것이다.


이들 유적은 1936년(丙子) 백산재를 짓기 이전에는 허술한 재각인 다산재(茶山齋)가 있었다고 한다. 그 다산재가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기록이 없다. 재각의 위치도 습독공이 거처했던 그 곳은 아닐 듯싶다. 왜냐하면 습독공의 산정재(山亭齋)는 건너편 치소에서 보이지 않게 동백나무와 대나무로 주위를 막아 가렸다니 지금 다산등 산정 즉 습독공 묘소자리가 아닌 가 추정된다.


그러므로 다산재각이 있었던 곳은 치소의 반대편 언덕이다. 바로 현재의 위치이다. 아마 후손들이 습독공이 돌아가신 후 정자를 치소에서 보이지 않은 자리로 옮긴 것이 그 자리가 아닌가 생각된다. 거의 쓰러질 지경의 재각 자리에 백산재가 들어서고, 신실인 하산사도 마련되고, 1987년에는 시조공 사적비도 세웠다.    


다른 흔적은 유택(幽宅)이다. 보첩에는 세거를 옮긴 통선랑공을 비롯 아들과 손자인 16세 자온·자량·자공, 17세 종원(宗元)·종형(宗亨)·종복(宗復)·종로(宗魯), 18세 문명(文命)·석중(碩重)·용(庸) 등 조상들의 묘는 없다. 그러나 18세 습독공은 다산등에 있고, 동생 유정(由貞), 아들 원충(元忠), 손자 억문(億文)·억무(億武)·억장(億章), 손자 대용(大用) 등 임진왜란 때 참전한 행원파 의병장 대부분의 유택이 있는 것으로 기록됐다.


그러나 습독공의 묘를 제외하고는 아는 이가 많지 않다. 보첩의 면주(面註)에 기록되어 있는 묘소가 실전(失傳)된 것은 후손들의 책임이 크다. 일부는 후손이 절손(絶孫)되어 비롯된 현상일 수 있고, 후손이 있다하더라도 먹고살기 위해 타향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서 나온 결과일 수 있다. 적어도 10기(基) 이상이나 되는 선조들의 유택을 찾지 못한 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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