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7 10:35
4) 능주파 (綾州派)
(1) 청양현감공천우파 (靑陽縣監公天佑派)
계보 : 자온(自溫)─종형(宗亨)─석중(碩重)─공필(公弼)─인걸(仁傑)-
천우(天佑)─홍원(弘源)─구(零)─정두(廷斗)─은징(殷徵)─치린(致麟)
주징(周徵)─치룡(致龍)
장원(長源)─건(健)─정확(廷碻)─상징(相徵)─백진(伯晋)
준(俊)─정기(廷機)─후징(後徵)─치덕(致德)
세거지 : ① 화순군 능주·이양·청풍면
② 고흥군 두원면
③ 장흥군 장평면 우산리
④ 강원도 서원면 오계리
청양현감공파는 위씨의 가장 큰집인 능주파(綾州派)이다. 16세 4형제 중 맏이인 자온(自溫)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자온은 아들 형제를 두었으나 장남 종원(宗元)은 21세에서 손이 끊긴다. 차남 종형(宗亨)은 18세 석중(碩重), 19세 공필(公弼), 20세 인걸(仁傑)을 거쳐 21세 천우(天佑·1573∼?)는 청양현감파로, 동생 천보(天保)는 유사공(儒士公)로 갈리게 된다.
천우는 선조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홍문박사(弘文博士)를 역임하고 사헌부 장령(掌令), 청양현감, 담양부사로 재임 중 임란(壬亂)을 맞아 의병장 김천일(金千鎰)장군과 창의하여 함양, 개령, 노량진해전에서 위훈을 세우니 이순신장군은 “위씨는 홍면비장군 위대기만 있는 줄 알았는데 백면비장 위천우가 있구나”하며 격찬했다는 인물이다. 그 공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포계됐다. 그런데 어떤 연유인지 모르나 능주파는 18세부터 능주에서 산다. 현감공의 증조(碩重), 조부(公弼)의 유택도 능주에 있다. 그러나 자신과 후손의 유택은 청풍(淸風)에 있다. 이는 능주에서 세거를 청풍으로 옮겼다는 증거다. 공의 큰아들 홍원(弘源)은 26세 치린(致麟) 때부터 고흥 두원(斗院)에서 살다가 29세(萬祚)는 보성 회천에서, 30세(晞桓)이후는 청풍과 장평내동에서 산다.
차남 장원(長源)계열은 27세(道允)대까지 청풍에서 거주한다. 그러다 28세(榮謨)는 장흥 유치, 29세(文桓)는 장평에서 살았다. 또 후손 중 일부는 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옥계리,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상리, 보성군 벌교읍 남상동, 화순군 이양면 등 여러 곳에 흩어져 살고 있다. 아마도 고향에서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외지로 떠난 것으로 보인다.
능주파가 고향을 등진 이후 위씨의 대종가는 사실상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 더구나 도문중은 물론 대종회 차원에서도 이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 대종가가 있는지 없는지 잊혀지면서 지파들 끼리 따로 노는 문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과연 방치할 일인지 의아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