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7 10:33
2 분파 (分派)와 이거 (移居)
사람은 종족보존의 욕구에 따라 자손이 생기기 마련이다. 장흥 위씨는 시조께서 신라에 귀화해서 1360년이 넘도록 이 땅에 살아왔다. 강산이 수10년 변했는데 그 많은 세월이 지났으니 상전벽해(桑田碧海)로 변했을 시간이다. 공교롭게도 위씨들은 시조께서 동래하신 638년부터 실계(失系) 300년을 포함해서 거의 800년에 가깝게 외줄로 이어져 분파가 없었다.
지구의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데 비하면 위씨들의 자손은 대(代)만 끊이지 않았을 뿐이다. 어째서 이런 현상이 벌어졌는지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985년 인구조사에서 전국의 위씨는 5729가구에 24259명으로 나타났다. 이는 해마다 17,8명이 태어난 셈이다. 함께 온 남양 홍씨는 무려 30만 명이나 불어난 데 비하면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 증가율이다.
어쨌거나 분파는 자손이 불었다는 증거다. 자손이 늘어나면 분파가 이루어진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다. 그러나 태생지를 떠나는 이거는 시대에 따라 여러 가지 변수가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이루어진다. 옛날의 이주형태는 주로 혼인이나 전쟁으로 인한 경우가 주된 원인이었다. 우리 조상들은 언제 무슨 연유로 고향을 떠났는지 알아보기로 하자.
1) 위씨의 상계분파 (上系分派)
장흥 위씨는 15세 통선랑공이 슬하에 네 아들을 낳으면서 비로소 분파가 시작된다. 이전까지 중시조·5세·7세·8세에 이르기까지 두 명 이상의 아들을 낳았으나 손이 없거나 승려로 출가해서 후손이 없었다. 그런데 16세에 4명의 아들이 태어나면서 그 기나긴 외줄 타기에 종지부를 찍고 분파가 이루어진다. 때는 1414년 장원봉 밑의 보금자리에서 평화촌으로 이동할 시기 전후였을 것이다.
이들의 출생시기와 장소는 기록이 전무하다. 아무래도 평화촌 입촌 전이라고 보아진다. 네 아들의 후손은 막내인 자검(自儉)의 후손만 고손자대(高孫子代)에서 손이 끊기고 꾸준히 이어 내려온다. 그러나 다른 집안에 비하면 역시 자손이 귀한 집안이라 지금도 거족이 못되고 희성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있다.
(1) 자온 (自溫)의 능주파 (綾州派)
통선랑공의 장자인 자온의 후손을 일컫는다. 장흥 위씨의 대종가(大宗家)이다. 자온은 슬하에 종원(宗元)과 종형(宗亨) 두 아들을 두지만 맏이는 고손자대에서 손이 끊긴다. 그러나 작은아들은 손자까지 독자로 내려오다 21세 고손자대에서 형제를 낳았다. 그 형제 중 장자 천우(天佑) 계열은 청양공파(靑陽公派)로, 동생 천보(天保) 계열은 유사공파(儒士公派)로 분파된다.
(2) 자량 (自良)의 관산파 (冠山派)와 행원파 (杏園派)
통선랑공의 둘째 아들이다. 장흥 위씨 중 자손을 가장 많이 둔 범관산파(凡冠山派)의 파조이다. 큰 아들 17세 종복(宗復)·18세 유형(由亨)·19세 진보(晉寶)·20세 인손(仁遜)·21세 대성(大成) 대에 곡성현감을 지내서 곡성현감공파(谷城縣監公派)가 된다. 자량의 증손 19세 진수(晉秀)의 네 아들 중 장남 경(鯨) 과 3남 태(亨)는 아들 대서 손이 끊긴다. 차남 곤(鯤)은 계부(晉賢)에게 양자가고, 3남 전(醴)의 두 아들 중 장남 덕원(德元)과 작은아들 덕린(德疑)은 양곡공(暘谷公) 덕원·덕린파로 불린다 진수의 막내아들 방(箚)의 아들 덕남(德男)은 훈도공파(訓導公派)가 된다.
유형의 막내아들 진현은 아들을 낳지 못해 넷째 형 진수의 차남(20세) 곤(鯤)을 입양해 대를 이었다. 입양한 아들은 5형제(21세)를 낳아 첫째는 덕홍(德弘)으로 판사공파(判司公派), 둘째는 덕의(德毅)로 청계공파(聽溪公派), 셋째는 덕관(德寬)으로 운암공파(雲巖公派), 넷째는 덕화(德和)로 판서공파(判書公派), 다섯째는 덕후(德厚)로 안항공파(顔巷公派)를 이룬다.
자량의 둘째 손자 유정(由貞)은 범행원파(凡杏園派) 파조다. 그의 장남(19세) 원충(元忠) 장손(20세) 억문(億文) 증손(21세) 대용(大用)과 대방(大方), 차손 억무(億武)의 소생 대의(大義)·대예(大禮), 계손 억장(億章)의 소생 대경(大經), 유정의 차남 원신(元信)·손자 문필(文弼)·증손 인행(仁行), 셋째 손자(文甫)의 아들 대기(大器)·대택(大澤)·대홍(大洪) 등이 계파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자량의 둘째 아들 종로(宗魯)는 종사랑공파(從仕郞公派) 또는 여천파(麗川派)가 된다. 아들 18세 용(庸)·19세 희징(希徵)·희강(希絳)·희무(希武) 등 손자들의 후손들이 여천파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니 범관산파는 곡성현감파, 양곡공 덕원·덕린파, 훈도공파, 관산파, 여천파 모두를 아우르는 장흥 위씨의 최대계파라고 볼 수 있다.
(3) 자공 (自恭)의 사월 (沙月) 및 관북파 (關北派)
사월파와 관북파는 자공의 후손들이다. 그의 아들 17세 종립(宗立)은 서(瑞)와 돈(頓) 두 아들을 두었다. 어느 때인지 확실치 않으나 둘째 손자를 데리고 국토의 최북단인 함경도로 가서 제2의 보금자리를 잡고 사니 그가 곧 관북 위씨의 개조다. 이에 따라 남쪽에 남아있는 큰손자 서(瑞)는 사월파가 되고, 둘째 손자 돈(頓)은 관북파를 이루게 된다. 관북파는 다시 석환(錫拮) 또는 극명파(克明派), 봉추파(鳳秋派), 봉문파(鳳汶派), 명덕파(明德派), 석진파(錫珍派), 석중파(錫重派), 석공파(錫恭派), 청송파(靑松派), 상성파(尙誠派), 상충파(尙忠派), 원상파(元相派), 정상파(定相派), 정삼파(鼎三派), 홍업파(弘業派), 홍파(饉派), 시민(時敏)·시헌(時憲)·시망(時望)·시언(時彦)파 등으로 분파된다.
2) 이주 (移住) 1세대 (世代)
(1) 자공의 용산(蓉山)이거
통선랑공이 평화로 이거한 후 셋째 아들 자공은 아마 용산으로 분가한 것으로 보인다. 기록은 없으나 그런 추측이 가능할 여러 증후들이 있다. 직계 후손 계사(桂沙)의 소론(장흥 위씨종보 제2호p.6)을 보면 “자공의 선고이신 통선랑공 덕룡께서 서기 1400년 전후 부주이신 충(撑)의 통한을 안고 장원봉 산하에서 평화로 이주하시고, 추리컨대 자공께서는 1420년대에 용산면 계산리(당시는 지명이 사월방(沙月坊)이었다고 추정됨)에 정착하셨던 것으로 여겨지니 1430년경에 아드님 17세 종립(宗立)께서 아들 즉 사월파조 18세 서(瑞) 및 관북파조 돈(頓)을 낳아 그들의 성장기였으며 1440년경에 자공배위 수원백씨가 타계하시자 용산면 상금리 뒷산 남은동 부흥봉하 간원(艮原) 등잔형국에 장하여… (중략)
세종(1418∼1450)께서 두만강을 국경으로 삼고자 김종서(金宗瑞)를 함경도 도절제사로 삼아 여진족을 몰아내고 1434년(세종 16년)부터 6진을 설치하기 시작하여 1449년 종성·은성·회령·경원·경흥·부령 등 설치를 완료하고 남방 각도에서 인민을 이주시켜 개척하니…(중략) 자공께서는 아들 종립과 장손 서를 고향 지키기, 조상 봉사자로 사월방에 남기시고 차손자 돈을 대동, 1440년대 말에서 50년대 초 사이에 웅지를 품으시고 북쪽 새로운 개척의 땅에 들어가신 사실이라고 추리해 보는 것이다.
이 말은 분가와 이주라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결국 자공께서는 평화에서 성장하여 백씨 할머니와 결혼한 후 지금 용산 사월방으로 이사해서 살았다는 얘기다. 그리고 그곳에서 두 명의 손자를 보시고 그들이 성장하였을 때 낯설고 물 설은 함경남도 신흥군 원평면(元平面) 우상동(右相洞)으로 두 번 째 이주를 단행하신다.
(2) 자공의 함흥정착 (咸興定着)
위씨가 고향 장흥을 떠난 것은 자공(自恭)이 역사상 처음일 것이다. 그는 장원봉 밑 옛집에서 태어나 감수성이 예민했을 어린 시절 판사공 할아버지의 역모사건으로 관의 핍박을 받으며 살았을 것이다. 벼슬길도 막혀 전망이 어두웠다. 그렇다고 경제여건도 넉넉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대(代)에서 식구가 많이 늘어나니 먹고살기도 버거웠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우선 관북보는 자공의 입복년대를 세종조(1419∼1450)라 적고 있다. 이에 대한 송당(松堂)의 견해를 보자(月明頌 4집 p.24). “관북지방은 먼 옛날부터 야인의 땅이라 해서 특별지역으로 관리해 왔다. 고려 문종 9년(1055)부터 도명(道名)을 붙이지 않은 채 동북면(東北面)이라 불렀다. 그 후 이름이 몇 번 바뀌었으나 ‘동북면’이란 이름이 조선 초엽까지 그대로 사용되었다. 그러다 태종(太宗) 16년(1416)에 비로소 함길도(咸吉道)라 개칭하여 세종조(世宗朝)로 이어진다.
세종은 북방정책을 강력히 추진한 성군(聖君)인데 세종 16년(1434)에 김종서(金宗瑞·1390∼1453)를 함길도 도절제사(都節制使)로 임명하여 6진(경성·온성·회령·경원·경홍·부령)을 개척케 한다. 이 국가사업은 대체로 세종 31년(1449)에 이르러 완성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 6진에 남방 각지의 민호(民戶)를 이주시켜 개척케 했으니 두만강 이남 지역이 비로소 조선영토로 확정된다.
(중략)이런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자공 입북년을 6진 개척을 시작한 세종 16년(1434)이라고 일단 추정한다. 근거는 첫째, 족보에 기록돼 있지만 자공 할아버지께서는 도학·문장에 뛰어나 세칭 남주(南州)의 관면(冠冕)이요, 북악(北岳)이라 숭앙받은 분으로 진취의 기상과 모험에 도전하는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였으므로 입북시기를 6진 개척의 중기나 말기로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들 종립(宗立)과 장손 서(瑞), 그리고 어쩌면 백씨 할머니까지도 장흥에 남겨둔 채 돈(頓)만을 대동하시고 생사를 초월한 듯 결연히 발정하신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둘째, 6진 개척 초에 입북하셨다고 봐야 선대와 후대의 계보(系譜)에서 연령상 무리가 없게 된다. 입북당시 할아버지의 나이를 50세 초반이라 봐도 그렇다. (중략) 여담이지만 자공 배위 수원백씨의 묘는 ‘등잔 형국’이라 한다. 그래서 일까 등잔 밑이 어두운 이치처럼 사월파는 손이 늘지 않은 반면 멀리 떠난 관북파는 손이 늘어서 기사보(己巳譜)가 나올 때만 해도 북방의 호족으로 성장해 후손이 12, 3세까지 뻗어가고 있었다.”며 이런 주장은 본능적 직관(直觀)이라고 밝히고 있다.
송당의 논리는 상당한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사실 미래가 불투명할 때 미지(未知)의 땅에 대한 동경은 인간의 보편적 성향이다. 그런 와중에서 조정 또한 좋은 조건을 주며 북주(北州)에 정착할 희망자를 접수한다면 도전해볼 수 있다. 더구나 장성한 손자까지 있었다면 적지 않은 나이를 잡수셨는데도 국토의 최남단에서 3천리나 먼 곳 함길도로 이민가신 것은 미국인의 서부개척에 버금가는 모험이자 용단이라 평가할 수 있다.
(3) 용 (庸)의 율촌 (栗村)정착
장흥 위씨 이주기록 가운데 두 번째는 18세 용을 들 수 있다. 그는 백부 종복(宗復)으로부터 글을 배워 진사시험에 합격했다는 사실은 이미 분파내용에서 밝힌 바 있다. 그는 평화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것으로 보인다. 보첩의 면주나 행장 등 여러 기록을 보면 다산등(茶山嶝) 산정에서 4촌인 유형·유정형과 남추강과 신영천 등과 더불어 수작하며 지낸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그런데 어느 때 여수를 가던 길에 순천의 율촌을 스쳐가고 있었다. 그는 마을의 배산임수에 매료됐다. 목적지인 여수를 다녀왔는지 모르지만 율촌에 삶의 보금자리를 잡게 된다. 이에 대해 1999년에 발행된 율촌면지(栗村面誌)는 “단종(端宗)시절(1460년 또는 1480년) 진사벼슬아치인 위용(魏庸)이 여수를 가다 산수가 수려해서 정착해 산수(山水)마을이 생겼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면지의 내용에 몇 가지 착오가 있다. 그의 율촌 정착시기를 단종대로 보고 있으나 단종의 재위기간은 1453년(癸酉)·1454년(甲戌)·1455년(乙亥) 등 3년이 못된다. 또 1460년(庚戌)은 세조(世祖)대이며, 1480년(庚子)은 성종(成宗)대이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아마 4촌 형제들과 교유(交遊) 그리고 임진왜란 때 손자항렬들의 활동 등을 보면 1480년대를 정착시기로 보아야할 것으로 보인다.
(4) 기타 이주조상은 없는가 ?
인생은 끊임없이 활동하기 때문에 보다 나은 보금자리를 찾은 것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옛날에는 농경지가 삶의 바탕이니 임자 없는 땅이나 값싼 땅을 찾아 헤맸을 것이다. 우리 조상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소개한 두 분 이외에 다른 분도 평화나 용산의 고향을 떠나 타향에 정착했을지 모른다. 다만 족보 등에 아무런 기록이 없어 후손들이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사실 역사에서 무명(無名)의 민초들에 대한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름 있는 고관대작보다 훨씬 많은 공적을 세우고도 출신이 비천해서 기록을 남기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다. 우리 위씨라고 해서 그런 현상에서 예외일 수는 없다. 그러나 어찌하랴. 기록이 없으니 억지로 거짓 기록을 지어낼 수는 없으니 딱한 노릇이다.
우리 족보에는 자공(自恭)은 사월방을 거쳐 관북으로 올라갔다는 사실은 기록되어 있으나 두 형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러나 평화에서 계속 살았다는 기록도 없다. 19세 증손자들의 삶의 무대를 보면 함께 한 곳에서 살았다는 근거가 빈약하다. 아마 그분들도 움직였을 가능성이 있다.
가령 진수(晉秀) 진현(晉賢) 형제는 장흥군 용산면 어산(語山)에서 살다 봉황동에서 살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이들이 자신들 대에 그곳에 이주했다는 말인가? 아무래도 그렇게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아마 휘 자공(自恭)이 사월방으로 이주할 무렵 누군가 그 윗대에서 이주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까 휘 진수(晉秀)의 묘와 제각인 운곡재(雲谷齋)가 용산면 운주리 봉황동에 지어진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므로 16세, 17세, 18세, 19세 4대 때의 위씨 거주형태는 평화(平化)·어산(語山)· 사월(沙月)·산수(山水)·함흥(咸興)·능주(綾州) 등지라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봐야 다음 세대의 거주공간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때문이다. 평화나 사월방 두 곳으로는 한계가 있다.
(5) 평화촌 200년의 성쇠 (盛衰)
이성계의 조선건국으로 직격탄을 맞은 위씨들은 평화촌으로 이주한 후 명목을 유지한다. 15세 통선랑, 16세 자온(自溫)·자량(自良)·자공(自恭)·자검(自儉) 4형제, 17세 종형(宗亨)·종복(宗復)·종립(宗立) 등 형제, 18세 석중(碩重)·유형(由亨)·유정(由貞)·용(庸)·서(瑞)·돈(頓) 등 형제 및 4촌 또는 6촌 형제, 19세와 20세 그리고 21세까지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15세 통선랑공이 장원봉에서 평화로 이거한 후 21세 괴봉공(魁峯公)까지 7대에 걸쳐 약 200여년 안팎정도로 짐작된다. 그 기간 중 18세 습독공 유형대에는 서울에서 귀양온 신잠과 남효온 등 당대의 저명인사들과 교유(交遊)한 사실에서 문세(門勢)를 반영하고 있다. 비록 벼슬한 인물은 없어도 한 고을의 유지로 행세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습독공시대를 정점으로 평화의 위씨는 시들어 간다. 종가인 진보(晉寶)계열은 능주로, 막내집안인 자공(自恭)계열은 사월방으로 이거 한다. 그리고 습독공의 아들 진수(晉秀)·진현(晉賢)은 용산(蓉山)으로 옮겨 살다 손자대에 다시 갈린다. 즉 진수의 셋째아들 전(醴)의 두 아들 덕원(德元)·덕린(德疑)은 지금 장동지역인 양곡(暘谷)으로, 진현에게 양자간 곤(鯤)은 관산으로 이거한다.
왜 제2의 보금자리인 평화촌을 떠나야 했는지 이유를 알 수 없다. 아무래도 늘어나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에는 농지가 부족해서 그런 것 아닌가 여겨진다. 다른 하나의 의문은 자공의 사월방 이거 시기다. 16세 4형제 중 이거기록은 그밖에 없다. 어쨌거나 평화를 가장 오랫동안 지켜온 것은 18세 유정 직계 즉 행원파로 보인다. 그 흔적은 고인들의 유택에서 확인되고 있다.
다만 집성촌이 와해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평화와 위씨 간의 관계는 꾸준히 이어온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다산등의 산정(山亭)과 일부 선조들의 묘소가 남아 있다는 것은 아무래도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한 결과가 아닌가. 18세기를 사셨던 선조들도 당시 재각이 어느 때 지어졌는지 그 내력을 모른다. 그래서 아쉬워한 사실이 백산재(栢山齋) 상량문에 담겨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