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4.28 12:36
존재우화(存齋寓話),
-질서 모범생 기러기와 협잡꾼 까마귀-
어느 가을날 존재선생은 계춘동 집 마당에서 천관산 쪽을 바라보다가 넓은 벌판 상공을 줄지어 나르는 기러기의 비행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기러기 편대가 열과 오를 맞추어 가지런하게 나는 모습이 마음에 쏙 들었다. 차례를 지켜 사뿐히 벌판에 내려앉는 착지도 어떤 새도 흉내 낼 수 없이 가뿐했다. 특히 모이를 먹을 때 서로 먼저 먹으려고 다투지 않고 순서를 기다리며 조급해 하지 않았다. 큰 소리도 내지 않는 모습에 감탄했다. 존재선생은 모범생 같이 질서를 잘 지키는 기러기를 새 중 으뜸으로 삼았다.
기러기는 가을에 우리나라에 날아와 겨울을 보내고 다시 북쪽으로 돌아가는 철새이다. 논밭이나 하천과 저수지, 바닷가나 갯벌 등지에서 먹이활동을 벌인다. 초식하는 새로 벼, 보리, 밀 등의 곡식과 풀을 먹는다. 기러기 안(雁)자를 사용하는 단어인 목안(木雁)은 전통결혼식을 치를 때 나무로 기러기의 형상을 만들어 나란히 놓아 사랑을 표현했다. 사이좋은 형제를 일컬어 안행(雁行)이라 불렀다. 그러고 보면 기러기는 까마득한 옛날부터 지극한 부부간의 사랑과 사람 간에 두터운 정의 대명사로 인식되었던 것은 분명하다.
까마귀 무리가 하늘을 비행할 때 퍼득퍼득 거리며 질서 없이 아무렇게나 난다. 모습이 뒤죽박죽이라 보는 사람의 정신을 쏙 빼 놓는다. 우는 소리도 온 천지를 진동시킬 만큼 시끄럽다. 까악까악 거리는 소리에 심장이 약한 사람은 지레 겁을 먹고 스트레스에 시달리기도 한다. 심지어 서로 먹으려고 싸움질까지 일삼았다. 혹시 짐승의 사체라도 발견하면 사정없이 마구 달려들어 아비규환으로 서로 안달이다. 사람들은 까마귀를 싫어해 질색하고 욕하며 내쫒기가 일쑤다. 존재선생은 까마귀를 질서 훼방꾼, 즉 협잡꾼의 상징으로 삼았다.
까마귀는 농사를 짓는 땅이나, 구릉, 하천가, 강가, 탁트인 지역에 주로 나타나며 잡식성이라 곡식이나 과일, 동물의 사체 등을 먹는다. 가끔 날개를 활짝 펴고 꼬리를 바짝 올려 머리를 상하로 흔든다. 땅에서 먹이활동을 하다가 갑자기 튀는 행동을 벌이기도 한다. 두 가지 모두 상대방을 위협하는 특이한 행동이다. 농작물에도 피해를 주어 농민들의 골치 덩어리다. 까마귀의 어지럽고 기괴한 행태는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까마귀의 검은 색깔도 혐오하는데 한몫하고 있다.
존재집 사물(事物)편 말미에 기러기와 까마귀 관련 글이 있다. 우화란 동물을 통해 인간의 생활상을 풍자하고 올바른 자세를 촉구하는 비유이다. 여기서 존재선생은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협잡꾼 까마귀와 질서 모범생 기러기를 대비시킨다. 백성들에게 까마귀보다 기러기와 같은 질서준수를 요구했다. 그러나 현실에서 사람들은 기러기를 닮지 왜 하필이면 마음이 검은 까마귀를 닮느냐고 질책한다. 무질서한 인간, 마음이 검은 인간이라고 한탄한다. 여기에 사람의 근본인 마음이 외부로 표출되는 일원적 철학이 담겨있다. 이기일원론의 또 다른 모습이다.
존재선생에게 있어 질서란 우주의 근본되는 원리이다. 해와 달, 네 계절 절기부터, 움직이고 숨 쉬는 사물과, 도구의 쓰임새나, 똥오줌을 누는 일까지 모두를 질서로 해석했다. 누에 실이 가늘지만 비단을 만들고, 거미줄이 미세하지만 공중에 걸린 거미줄에서 질서를 찾았다. 누에나 거미에게서 나오는 실이 약하고 보잘 것 없으나 질서가 있기에 근본목적에 철저히 부합한다는 결론이다. 존재선생의 입장에서 사회를 보면 까마귀처럼 무질서했다. 신분과 직업상 위계가 명확한 시대에서 평생 학문에 몰두한 터라 좀처럼 시끌벅쩍한 무질서한 세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으리라.
(벽천 위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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